97화. 변화구
자, 이제부터 어떡한다.
시야 왼편에 타자가 등장할 때까지 플레이트의 살짝 뒷편에 서서 로진을 만지작거렸다.
변화구로만, 심지어는 땅볼이나 뜬공이 아닌 삼진으로만.
생각보다 어려운 조건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스트락!”
재밌겠다.
최근 직구와 구위가 많이 올라온 것을 이용해 은근슬쩍 파워피처로의 변신을 꾀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내 본질 자체는 그쪽보다 피네스 피처에 훨씬 가깝다.
리그 최상급의 제구와 다양한 변화구로 느린 구속을 감추는 투수.
피네스 피처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은 과연 뭘까?
한 가지 변화구를 여러 단계에 나눠던질 수 있는 감각?
cm 단위를 오가며 정확하게 던질 수 있는 커맨드?
빠지면 큰 거 맞을 걸 알면서도 던지는 담대함?
아니,
“스윙-.”
수싸움을 위한 머리.
0-2. 몸쪽 싱커와 바깥쪽 커브 이후 어떤 변화구를 던져야 삼진을 잡을 수 있을까.
바깥쪽 체인지업 말고, 떨어지는 스플리터 말고, 바깥쪽 싱커 말고.
원하는 사인이 나오지 않자 결국 내 쪽에서 사인을 보내야 했다. 검지와 중지를 펴고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쭉 훑어내렸다.
규학이가 타자를 흘끔 쳐다보더니 가장 멀리 위치한 손가락 두 개를 점멸시켰다.
고개를 끄덕이자 타자쪽으로 붙어 위치를 잡는 규학이. 몸쪽 낮은 위치에 하얀색 미트를 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왼발을 한 발 뒤로 뺐다. 약간의 허리 반동 후 물린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 비스무리한 게 새어나왔다.
“끄…흑!”
직구를 던지면 안 되는 상황에서, 직구와 같은 암 액션으로 던진 공은 타자의 몸쪽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투닥-!
“낫, 낫!”
저 앞까지만.
인식할 수 있는 지점을 벗어나 변화를 일으킨 슬라이더는 충분히 타자의 헛스윙을 뺏어낼 수 있다.
생각보다 변화가 심했는지 규학이가 거의 날다 싶이 블로킹을 해서 바운드를 막아냈다.
제 앞에 떨어진 공을 재빨리 주워서 타자를 태그한 뒤,
“아웃-.”
띠링-!
[투수는 변화구! 변화구는 실전!]
- 1이닝 동안 변화구들만 투구하여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무실점하세요 (1/3)
- 보상 – 변화구 + 5
확실히 아웃 콜을 받아내고 나서야 기성이 쪽으로 공을 던졌다.
타자들이 라운딩할 동안 플레이트 뒤로 가 로진을 주워들곤 주물럭거렸다. 클리트 클리너에서 스파이크를 팍팍 털어내며 공을 라운딩이 끝난 공을 주워들었다.
다시 되돌아온 공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실밥이 좀 풀어진 부분이 보여 구심에게 공을 흔들어보이자 포켓에서 새 공을 꺼내 던져주었다.
헌 공은 볼보이 쪽으로 휙 던져버리고 다시 플레이트 위에 섰다.
4번타자 이원웅. 레그 킥이 두드러짐에도 큰 거 한 방 위주보다는 정확한 갭 히팅이 돋보이는 타자.
살아남기 위해 공부했던 타격, 그리고 타자들에 대한 정보들은 분명한 정보가 되고 충분한 명분이 된다.
중심.
허리를 살짝 넘는 레그 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체를 무너뜨린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지 않을까.
직전 타자가 스트라이크 하나와 연속 볼 두 개에 헛스윙을 당했다면 초구부터 강하게 노려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빼야지.
자꾸 존 안을 요구하는 규학이에게 정반대의 의견을 제시했다. 새끼 손가락 하나면 충분한 전달이 될 거야.
“읍!”
손가락 사이에 공을 끼우고 강하게 던지다보면 필연적으로 검지와 중지의 끝이 땅바닥을 향하게 된다.
그래, 손톱으로 땅바닥의 흙을 퍼내듯이 때려내면,
투닥-!
“스윙, 스윙!”
규학이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 나가는 스플리터 완성. 근데 이제 헛스윙을 곁들인.
주자도 없고, 낫아웃 상황도 아니기에 개의치않고 구심에게 글러브를 보여들었다.
받은 공을 뽀득뽀득 닦아내고 하얀색의 손가락으로 모자를 슥슥 고쳐썼다. 한결 상쾌해진 머리를 움직이면 사인을 받을 준비가 완성되어있다.
초구에 바운드 스플리터로 헛스윙 카운트를 잡아내니 높은 쪽에다가 직구를 던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타자의 어깨선에다가 최대한 빠르게 직구를 던지면 분명 한 번 더 헛스윙이 나올텐데.
아…안 돼.
유혹을 털어내고자 흔들었던 고개을 사인을 거부하기 위한 모션으로 인식한 규학이가 곧바로 다음 사인을 냈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번 정도 고개를 흔들어대고 바로 딱 마음에 드는 사인이 나왔다.
커브.
빠른 직구와 정반대의 성격을 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떤 의미로 보면 직구와 가장 비슷한 성격을 가진 구종이다.
이번엔 몸쪽 낮게.
“읍!”
가장 빠른 공이 필요한 시기에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일단 출발 지점만 놓고 보자면 직구와 가장 비슷하게 보이니까.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스타트를 건 타자는 이렇게,
부웅―
헛스윙이 나올테니까.
“스윙-.”
걸렸으면 갔을지도 모르는 스윙과는 정반대로 살짝 힘이 빠지는 콜과 함께 공이 되돌아왔다.
134km 스플리터, 111km 커브.
애매한 분포도 사이에서 타자는 무얼 노리고 있을까.
높은 직구 말고, 몸쪽 직구 말고, 바깥쪽 슬라이더 말고.
세 개를 연달아 거부한 뒤 던진 스플리터와 체인지업은 아쉽게도 연속으로 볼 판정을 받았다.
머리가 좀 아픈데.
뽀득뽀득, 공을 닦아내는 내 얼굴에 불편함이 묻어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 불편함이 타자에게 전달되길 기원하며 타자를 계속 노려봤다.
다음으로 규학이가 요구한 공은 싱커.
내가 던지는 공 중 직구를 제외한다면 가장 낙폭이 적고, 또 가장 빠른 싱커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싱커라…….
불확실성으로 인해 느릿하게 끄덕여진 고개를 본 타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두 손가락 전반에 걸쳐지는 실밥의 촉감을 느꼈다. 다만 땅볼을 노릴 때처럼 깊게 잡는 게 아닌, 얕게 잡으며 구속에 대한 편의를 조금 더 챙겼다.
이걸 타자가 알 수는 없을 테지…….
“윽!”
…만!
딱-!
배트의 윗 부분에 맞은 타구가 지면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자 내 뒷목에도 순간적인 힘이 들어갔다.
규학이가 재빨리 마스크를 벗고 떨어질 타구를 대비했지만 스핀이 약했는지 그대로 백보드 뒤로 넘어가버렸다.
직구였다면 그대로 뻗어서 헛스윙이 됐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면서도 파울로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투포수 모두 갖고 있는 공이 사라졌기에 심판에게서 한 번 더 공을 받았다. 뽀득뽀득, 또 공을 닦으며 불편함을 감추려 애썼다.
첫 타자를 세 개로 잡을 때만해도 쉽게 풀릴 줄 알았는데, 두 번째 타자부터 벌써 이렇게 막히다니.
이번 타석에서 이원웅을 상대하며 던져왔던 공들을 쭉 나열했다. 그러자 발견한 한 가지.
“아.”
순간적인 깨달음은 엄지쪽 세 개의 손가락이 글러브를 가리도록 만들었다. 규학이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비슷한 손 모양으로 사인을 보내주었다.
앞서 던진 5개의 공이 모두 상하의 차이만 가지고 있으니까, 좌우의 변화를 건드려본다면 한 번쯤 속아나오지 않을까.
“으…윽!”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보다 옆으로 휘게하려는 마음씨는 현진이에게 배웠던 요령에서 조금 벗어나게 했다.
틱, 빵!
포수가 공을 잡자마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심판에게 포수미트의 안쪽을 보여주었다.
띠링-!
[투수는 변화구! 변화구는 실전!]
- 1이닝 동안 변화구들만 투구하여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무실점하세요 (2/3)
- 보상 – 변화구 + 5
확인한 구심은 오른손으로 왼팔뚝을 슥슥 문지르더니 아웃 콜을 냈고, 타자는 그걸 보며 아쉬워했다.
“…오.”
내 정면의 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투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정보 한 가지가 있었다.
내가 던지던 슬라이더는 각이 큰 편이지만 예리함은 없고 속도도 느리다.
현진이에게 배웠던 슬라이더는 각이 작은 대신 날카롭게 꺾이며 구속도 빠르다.
“…방금 어떻게 한 거지?”
하이브리드.
하지만 방금 던진 슬라이더는 두 가지 슬라이더의 장점만을 쏙 빼먹은 듯한 변화를 보였다.
작지 않은 각이지만 예리하며, 속도도 나쁘지 않은.
“한울이, 뭐하냐.”
“네? 아….”
멍청히 고개를 숙인 채 오른손을 쳐다보고 있자니 망상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낸 사람을 쳐다보니 라운딩이 끝난 공을 던져 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성훈이형에게서 공을 받자마자 글러브에서 공을 바로 빼냈다. 실밥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방금 전의 감각을 깨우쳐보려했다.
“이건가…아닌데, 이건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5번타자 배준호가 나타났다. 멍청하게 중얼거리던 모습이 미안해 손바닥으로 미안하다는 표시를 하고 플레이트를 밟았다.
초구로 던져보고 싶은 건 바로 방금 전과 같은 슬라이더. 따라서 규학이의 사인이 나오기도 전에 내가 먼저 손가락을 움직였다.
똑같이. 방금 전과 완전히 똑같이.
그립, 움직임, 암 액션, 팔로우 스로까지 모든 것을 직전과 똑같이 해보려 최대한 노력했다.
“아.”
X발.
하지만 애매하게 풀려버린 슬라이더는 쳐주세요~ 애원하며 존의 정중앙을 향해 날아갔다.
딱-!
그럼 뭐, 여지없이 처맞는 거지.
해왔던 것,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어설프게 시도한 대가는 꽤나 가슴이 아팠다.
“파울-.”
그게 폴대 옆으로 비껴나가서 다행이지, 아마 그대로 홈런이었다면 정말 멘탈이 깨지지 않았을까.
“후우….”
해왔던 것. 할 수 있는 것.
잠시나마 몸에 배었던 거만함을 한숨에 실어 보내자 집중력이 돌아왔다. 몸쪽 아래로 떨어뜨려 파울 타구를 한 번 더 유도한 것이 아주 좋은 예.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되니 규학이도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슬슬 시도하는 사인에서 직구의 비중이 0에 가까워졌다.
한 번 더.
한 번 더 슬라이더를 던질 예정이다. 방금 전과 같은 객기는 부리지 않고 지금까지 던져왔던, 좋은 결과를 안겨주었던 슬라이더를.
“끄읍!”
약간의 비틀림만으로 일궈낸 변화는 직전의 생각없이 던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알차고, 또 알뜰하던 예전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하는 궤도로,
부웅―
뻥!
“스윙, 아웃!”
다시 한 번 내게 삼진을 안겨다주었다.
띠링-!
[투수는 변화구! 변화구는 실전!]
- 1이닝 동안 변화구들만 투구하여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무실점하세요 (3/3)
- 보상 – 변화구 + 5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71
커브 – 64+5=69
슬라 - 58+5=63
스플 - 58+5=63
체인 - 60+5=65
싱커 - 60+5=65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후우!”
어려운 걸 어떻게든 해냈다는 성취감과 더욱 더 화려해진 스탯에 대한 만족감이 후련함으로 연성되었다.
“어이, 나이스볼-.”
“나볼나볼!”
“점수 가즈아아앗!”
긴장과 맥이 탁 풀리고나자 헛헛하게 웃으며 덕아웃에 앉았다.
“형.”
그 꼬라지가 마음에 영 들지 않을 1인.
“왜.”
“뭐, 오늘 어디 아팠어요?”
규학이가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아선 걱정스러운 말투를 들려주었다.
“아니, 멀쩡하지. 아프긴.”
“아니면 뭐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변화구 때문에 그러지?”
“네.”
“아 그거 그냥….”
막상 대답을 하려니 적당한 변명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대신 눈 앞에 보이는 아무런 단어들을 연쇄적으로 뱉어냈다.
“요즘에 등판할 때마다 하나씩 퀘스트를 내거든.”
“무슨 퀘스트요?”
“내가 나한테 제약을 거는 거지. 변화구만 던지자, 주호가 포수라면 주호의 사인대로 던져보자, 뭐…삼진 세 개를 꼭 잡자. 이런 거.”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본 내용은 의외로 괜찮게 느껴졌으나,
“굳이요?”
이 퀘스트와 동고동락해야 하는 입장에선 썩 달갑지만은 않겠지.
“강해지려고.”
“…뭘 강해져요?”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우리가 강해지려면 당장에 이겼다, 이거 하나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고. 왜 이겼는지, 어떻게 이겼는지. 그런 것도 중요하잖아.”
“그렇죠.”
“나 자신을 분석해가는 거야. 이렇게 내가 나한테 제약을 걸면, 내가 왜 이겼는지, 왜 졌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해서.”
“아아….”
왜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 거니.
정말 되는대로 지껄인 내용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는지,
“그럼 저도 그런 식으로 해봐야겠네요.”
“엉?”
리그 포수들 중 타율 1위를 기록하는 원하의 주전 포수는 이상한 다짐을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