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슬라이더
슬라이더.
직구와 최대한 비슷한 속도로 날아가며 각이 그리 크지 않지만 가장 예리한 각도를 갖춘 변화구.
항간에는 홈 플레이트의 60cm 앞에서부터 움직임을 보인다, 라는 썰이 돌기는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규학아. 전에 기억하냐?”
“언제요?”
“그 왜…이원웅한테 삼진 잡았을 때 던졌던 슬라이더 있잖아.”
슬라이더의 메인 컨셉은 ‘날카로움’이다. 각이 엄청 클 필요는 없다. 속도가 어마무시하게 빠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날카롭게’ 꺾여야 한다. 이것 하나만 챙길 수 있다면 어디서 가서 슬라이더 좀 던진다는 소릴 듣기 충분하다.
“네. 기억하죠.”
“좀 달랐지?”
“음….”
자체적으로 봉인이라는 결단을 내릴 정도로 형편 없던 슬라이더가 현진이에게 요령을 전수 받은 뒤부턴 그나마 1인분을 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한 걸음 더, 조금 더 발전할 실마리가 보인다.
“옆…으로 좀 많이 움직이긴 하던데요? 평소보다.”
“그치?”
“전 형이 잘못 던진 건 줄 알았는데.”
“잘못 던진 건 맞아.”
“아, 나중에 그렇게 안 던지려구요?”
“아니, 그렇게 던지려고. 그때 감이 잘 기억이 안 나네.”
“에?”
눈을 땡그랗게 만든 규학이가 미트를 벗었다.
“굳이요? 슬라이더 옆으로 던져서 좋을 게 있어요?”
“아래로 떨어뜨리는 게 좋기야 한데, 그건 다른 변화구들 없는 투수들 얘기고.”
같은 변화구를 던진다 하더라도, 횡적인 변화보다는 종적인 변화를 가진 공의 쓰임새가 더 좋다.
좌우로 찢어진 눈이 왼쪽, 오른쪽으로 붙어있어 좌우보다는 상하의 움직임에 훨씬 취약하기 때문이다.
“커브도 있고 스플리터도 있으니까. 구우우욷이 슬라이더까지 종으로 떨굴 필요는 적지 않을까, 싶은 거지.”
하지만 그 점을 명분으로 하기엔 이미 내가 가진 구종들 중 종의 움직임을 가진 변화구가 몇 개 있다.
12시 방향에서 6시 방향으로 떨어지는 커브. 그냥 대놓고 수직 낙하를 목적으로 하는 스플리터.
체인지업도 여기에 낄 수는 있지만 오른쪽의 움직임이 확연히 보이기에 제외고, 싱커는 대놓고 그쪽으로 향한다.
“그렇다고 예전 슬라이더를 버리겠다는 것도 아니니까. 던질 수 있는 변화구가 많아서 나쁠 건 없잖아?”
여기서 나는 왼쪽으로 향하는 변화구의 위력을 알게 된 것이다.
“…사인 정하느라 또 머리 아프겠네요.”
“잘난 형을 둔 잘못이라 생각하거라.”
규학이가 머리 아파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러니까 캐치볼 좀. 간단하게면 돼.”
“예…뭐.”
오늘 선발인 준혁이의 세션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다. 이 자투리 시간을 유용하게 쓰고자 했다.
잠시 옆에 두었던 포수미트를 다시 왼손에 낀 규학이가 적당한 거리로 멀어졌다. 가볍게 직구부터 몇 개 던지며 어깨를 살짝 풀기 시작.
빵!
뻥!
기분 좋은 포구음이 울려퍼지는 대구구장. 느긋하게 캐치볼을 하는 동안 빠르게 박동하던 심장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멘탈의 온도가 식어가는 것은 어제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어떤 그립을 잡았는지, 어떻게 던졌는지, 천천히 생각하며,
“슬라이더!”
어제의 슬라이더를 흉내내보았다.
빵!
“어때?”
“아직요. 그냥 원래 꺼 같아요.”
“다시!”
뻥!
빵!
펑!
표적판이 아닌 사람을 향해 공을 던지는 이점은 딱 하나, 내가 던진 공에 대한 피드백을 바로바로 받을 수 있다는 것.
“어때?”
“아직요?”
“아씨.”
기대에 미치지 못 하는 의견을 받아듣고는 잠시 캐치볼이 중단되었다. 릴리스 포인트 언저리에 손뭉치를 두고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며 그림을 그려갔다.
이렇게던가?
뻥!
“오, 지금 좋다!”
“어떻게 꺾이는데?”
“이렇게, 이쪽으로요.”
규학이는 아직 내게 던지지 않은 공으로 본인이 구경했던 궤적을 그렸다. 그 움직임은 분명 횡의 변화가 추가된 모습이었다.
아주 미세한 각도의 조정.
긴 거리를 비행하는 길목에서 조금의 틀어짐이라도 발생하면 끝에선 아주 개판이 나게 된다.
그 개판을 이용하자.
빵!
“됐다, 이 정도면 됐어.”
“팔꿈치는요? 아프진 않아요?”
“뭐…딱히 대미지는 없는 거 같은데. 그렇게 꺾어서 던지는 것도 아니니까.”
슬라이더를 던지기 위한 손목의 틀어짐, 혹은 꺾임은 팔꿈치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알려져왔다.
그럼에도 투수들이 슬라이더를 포기하지 못 한 이유는, 이 모든 대미지를 감수하면서도 던질 위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팔꿈치의 수명을 바쳐 던지는 슬라이더는 투수들에게 헛스윙이든 루킹이든, 어떻게든 카운트라는 대가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하며 팔꿈치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슬라이더가 개발됐고, 이는 투수들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는 셈이 되었다.
규학이는 고생스럽게도, 나와의 캐치를 마치고 바로 불펜으로 들어가 준혁이의 세션을 도왔다.
준혁이의 피칭을 한 번, 그리고 전광판을 한 번.
적당한 인터벌을 가져가며 순위 경쟁에 대한 구도를 잡았다.
“상수도 어제 이겼더라.”
“흠….”
옆에 앉아있던 규진이형이 한 마디 거들었다.
짜증.
따라잡을 것 같이 보이면서도 잡히지가 않는다. 슬슬 남은 기회도 20경기 후반까지 떨어졌다.
“…아, 나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어.”
“왜.”
“우리 재작년이었나. 시즌 마지막 경기에 4위 결정지었던 때 있었잖아.”
“올해도 그럴 것 같다고?”
“불안하다.”
“플래그 세우지마라.”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 규진이형을 보면 나는 꼬순 얼굴을 만들어야 하는데.
강하게 머리를 때리는 불안감에 나 또한 규진이형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 * *
지옥의 원정 1주차. 가야에게선 3승을 전부 뺏어냈고 KP로부턴 2승 1패라는 위닝 시리즈를 얻어갔다.
그리고 지옥의 원정 2주차. 한성에게선 마찬가지로 2승 1패, 주말에 처들어간 성운에게도 2승 1패.
“좀 살살 하지. 우리도 급한데, 임마.”
“니네가 급하냐? 우리가 급하지.”
일요일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뒤 우석이와 잠시 잡담을 나눌 기회가 생겼다.
4위 싸움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 3위 동성을 맹렬히 쫓아가는 성운에게 2승 1패라는 성적이 꽤나 아쉽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왜 안 잡히냐.”
2주라는 긴 기간 동안 원하 챌린저스가 거둔 성적은 9승 3패. 6할 초반의 승률에 7할 5푼이라는 성적을 더하면 분명 1위의 선을 넘어야 하는데에…….
“세지. 상수.”
“하아…니네가 좀 잡지 그랬냐. 뭐야, 니네가 잘못했네.”
“지랄하지 말고.”
게임 차는 그대로 1경기 차.
대체 상수 여기는 뭘 먹고 야구하길래 이렇게까지 강한 걸까.
“좀 잡아봐.”
“어지간히 잡고 싶다, 우리도.”
비어버린 커피 캔을 찌그러뜨린 뒤 캔 분리수거 통에 휙 던졌다.
텅- 땡그랑―
“니가 그러고도 투수냐?”
“코너웍, 새꺄, 코너웍.”
“또 헛소리 하네.”
“오늘 코너웍에 또 삼진 드셨죠, 선생님?”
“…….”
자리에서 일어나 땅바닥에 내팽겨쳐진 캔을 다시 주워들었다. 플라스틱 통이 출렁거릴 정도로 강한 덩크슛을 때려박은 뒤 자리에 앉았다.
“너 슬라이더 바꿨냐?”
“어떻디?”
오늘 우석이가 나한테 삼진을 당하는 마지막 과정은 바깥쪽 멀리서부터 들어오는 백도어 슬라이더였다.
휘는 게 아니라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들어오는 걸 보고 짓는 그 멍청한 표정이란 진짜,
“괜찮던데.”
통쾌하기 그지 없다.
“근데 그걸로는 좀 부족하지.”
“알아.”
“아니. 니 성적이고 뭐시기고 말고.”
“그럼 뭐가?”
“해진이.”
박해진의 이름이 뜬금없이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이가 갈렸다.
“니 개인적인 목표 까먹은 건 아니지?”
“절대 안 까먹지. 그걸 어떻게 잊어.”
“그걸 어떻게 잊냐니, 무슨 노래 가사인 줄.”
“작사가의 재능이 보이냐?”
“은퇴하실?”
“쏘리.”
친구들끼리의 티키타카는 두 사람 모두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다.
“안 힘드냐.”
“뭐가.”
“몸.”
“…아프지.”
“나이 먹어가면서 구속도 더 올라가고 있으니까. 넌 더 아프겠다.”
“…….”
뭐라 대답을 해야 할 타이밍에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슬쩍 향했다.
“다 그런 거지.”
“그치. 다 그런 거지.”
“밑도 끝도 없이 감성적인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요즘에 이런 생각이 좀 생겨서. 4년 기간만 채우고 은퇴할까, 싶은 생각.”
“왜.”
“아파.”
“어디가.”
“다.”
본인이 친 타구에 맞고 부러졌던 발목.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며 부러졌던 갈비뼈. 그 외 기타 등등.
나와 똑같이 12년째 같은 판에서 구른 친구의 몸도 슬슬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내년되면 또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 다른 선배님들처럼 최저 연봉 받을테니 받아만 주십쇼, 할 수도 있고. 너는?”
“한국시리즈 우승 한 번은 하고 은퇴해야지 않겠냐.”
“죽을 때까지 야구선수 하려고?”
“미친놈인가.”
끌끌거리며 처웃는 뒷통수를 후려 갈기고 싶었지만 힘겹게 참아냈다.
“아, 규진이형 결혼다는 얘긴 들었지?”
“들었지.”
슬슬 잡담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갈 시간. 자리에서 일어나 구식 정보를 흘렸다.
“너는?”
“나야 뭐….”
흐흐.
“나도 해야지.”
빨리 올라가서 민영 씨 보고 싶다.
“썸만 2년 타다가 만났는데, 의외로 결혼은 빨리 할 수도 있겠다?”
“딱히 얘기를 해 본 건 아닌데 어…생각으로는 내년 말에 하고 싶다.”
“괜찮네.”
녀석은 내가 버스로 향하는 곳까지 따라오며 배웅해주었다.
“그래서 너는?”
“나 뭐.”
“너는 뭐 따로 소식 없냐고.”
“글쎄다.”
MBS의 간판 아나운서 구현정 아나운서의 열렬한 팬은 멋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도 진전이 없진 않으니까. 조만간 한 번 만나서 밥 먹기로 했어.”
“잘해봐라, 너도.”
짝!
15년지기 친구는 서로의 손을 한 번 맞잡고 헤어졌다.
“뭔 얘기를 그렇게 길게 해?”
“이런저런 얘기들 하는 거지,”
창가쪽에 앉아서 우석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자니 규진이형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나처럼 창 밖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더 이상 우석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규진이형은 버릇처럼 제이패드를 꺼내들었다.
익숙하게 열어서 타닥타닥, 여러 창들을 열어놓고 노트에 이것저것 적기 시작했다.
“벌써 시즌 끝나가네.”
“우리 몇 게임 남았지, 20게임?”
“19게임.”
정상적인 흐름이었다면 16경기로 끝이 나겠지만, 우천 순연 등으로 인해 뒤로 밀려난 경기까지 포함해야 했다.
타다닥, 탁!
키패드를 후련하게 두드려 몇 개의 창을 동시에 띄운 규진이형이 제이패드를 들이밀었다.
“봐봐.”
규진이형이 보여준 건 우리 원하의 남은 대진표와 상수 타이거즈의 대진표.
“내가 전에 그 얘기 했지. 플래그 세우지 말라고.”
“어…그랬나?”
“대구에서 니가 그랬잖아. 상수랑 마지막 게임에서 어쩌고 저쩌고.”
“아, 그랬지.”
“너, 진짜 어디 가서 함부로 떠들지 마라. 뒤진다.”
“…….”
모든 경기들이 순위 싸움 중인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맨 뒤의 2경기는 앞선 17경기보다 중요도가 훨씬 높아보였다.
유지.
일단 17게임 동안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지금의 승률, 그리고 지금의 승차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도 멋있잖아.”
“뭐가.”
“마지막에 웃는 게.”
“변태냐?”
“그런 듯.”
“미친새끼.”
그리고 마지막 두 경기에서 모조리 승리를 거두며 멋있게 마무리하는 것.
서울로 올라가는 두 시간, 모두가 잠들었지만 나와 규진이형은 소곤소곤 떠들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