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순항
승리. 승리. 또 승리. 어쩌다가 한 번 지기는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바로 또 승리. 그리고 또 승리.
원하 챌린저스의 최근 성적표가 그러했다. 그리고, 상수 타이거즈 또한 신기하리만치 우리와 같은 성적표를 받아들고 있었다.
쌍둥이냐?
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같은 날 승리를 기록하고 같은 날 패배를 당한다.
어느 덧 시즌의 남은 경기는 세 경기. 그리고 1위 팀과의 게임 차는 1경기.
1위로 시즌을 끝내고 말고는 단순 이미지, 혹은 기분의 영역이 아니다. 한국시리즈 직행이라는 거대한 현물을 손에 쥘 수 있냐 없냐의 큰 차이다.
“동균이 가즈아아!!”
동균이는 슬슬 팀의 5선발로써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였다. 엄청 잘던진다….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소리는 해 줄 수 있는 정도.
오늘 이기고, 내일 이긴 다음에 내일 모레도 이기자. 그러면 1위로 정규시즌을 끝낼 거야. 그럴 거야.
1회초 수비를 위해 마운드로 나서는 동균이의 등짝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순간적으로 오른 혈압 때문에 목 뒤가 뻐근해지자 털썩, 의자에 앉았다.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타격 후 3루수 땅볼 아웃.
볼, 볼, 볼, 스트라이크, 볼, 볼넷.
초구 타격 중견수 플라이.
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삼진으로 이닝 종료.
멋지게 1회를 마친 동균이가 불펜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짝! 짝! 짝! 박수를 치며 직접 불펜의 문을 열어주었다.
“되게 간절해보인다?”
“간절한 거 보다는 음….”
동균이의 어깨를 슥슥 풀어주고 있을 때 옆에 슬그머니 다가온 규진이형이 이야기했다.
“아깝잖아.”
“1위가?”
“경기 차가 차라리 많이 나면 모르겠다. 그냥 편하게 선수들 체력 안배하면서 플레이오프 준비했겠지. 근데….”
1회말 공격.
매서운 눈빛으로 상대 투수를 노려보는 명진이가 보였다.
넥스트 써클에선 성현이가 배트 링을 끼고 연습 스윙을 하고 있었다.
헌희가 덕아웃에서 타격 장비를 모두 차고 박수치고 있었다.
“형. 시즌 2위로 마감하고 플레이오프 직행을 했어. 그 뒤로 한국시리즈고 나발이고, 그것 자체만 보면 좋은 성적이라고 생각해?”
“좋지. 리그 2위가 호구로 보이냐.”
“그치. 진짜 잘한 거지. 근데, 1위를 하냐마냐로 투닥거리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 2위로 결정이 났어. 그건 어떻게 생각해.”
“그것도 잘한 거잖아.”
“잘한 거지. 진짜 고생한 거 맞지.”
아아…선배님…아, 아파요…….
아, 쏘리.
무의식적으로 동균이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에 힘이 과다하게 들어가버렸다. 결국 동균이를 지나 규진이형 옆자리에 앉았다.
“근데 허무함이라는 게 들지 않겠어?”
“음….”
“나는 우리 팀 애들이…그런 과정을 거쳐서 리그 2위로 끝이 났을 때. 그 허무함을 안고서도 플레이오프에서 이길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거든.”
따악-!
돌아! 돌아악!!
세컨!! 바로 가!!
“목적의식까지 허무하게 사라질까봐 그래. 한국시리즈 가서 4대떡으로 발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시리즈 직행하는 게 우선이라고 봐.”
“오…니가 그런 생각도 하냐.”
“날 어떤 놈으로 생각하는 거야.”
“태어난 김에 사는 놈.”
“아니이.”
“선배님,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명진이의 2루타를 필두로 성현이는 무려 12개의 공을 던지게 한 뒤 볼넷으로 1루를 밟았다.
그리고 성훈이형 대신 3루수 3번으로 선발 출장한 우리 꿀단지 헌희.
초구에 높은 직구 버리고, 2구에 낮은 직구에 타이밍 한 번 맞춘 뒤,
따악-!
“가따!!! 가써어어억!!”
“호오오오오!!!
드넓은 잠실구장의 중앙 펜스를 훌쩍 넘겨버리는 쓰리런. 맞자마자 ‘아, 이건 갔다’라는 걸 구장 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루를 향하며 우리 팀 덕아웃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꿀단지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타선은 득점를 내고, 투수는 실점을 막는다.
이 간단한 알고리즘은 생각보다 어렵다.
못 내면 어떡하지?
못 막으면 어떡하지?
무의식 속에 깔려있는 복선들이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건 생각보다 쉬우니까.
하지만 야구는 팀 게임.
내가 치지 못 하더라도, 내가 맞더라도 앞에서 이끌어주고 뒤에서 받쳐주는 팀 메이트가 있다.
따악-!
동균이가 던진 실투를 김욱이 놓치지 않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주자를 묶기 위해 1루 가까이 위치하던 기성이는 도저히 쫓지 못 할 타구.
“볼 쓰리이!”
“노컷, 바로 돌려!!”
1, 2루간을 꿰뚫고 빠르게 굴러가는 공을 잡은 성현이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3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우익수들 중 가장 강한 어깨를 지닌 성현이의 송구답게 정말 무서운 기세로 날아갔다. 저걸 받아야 하는 헌희가 무서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촤악-!
에이 맞고 좀 아프고 말지!
헌희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이를 악물고 송구를 어떻게든 받아냈다. 자연 태그된 글러브를 확인한 3루심은,
“아웃-!”
허공에 라이트 훅을 날리며 이닝의 종료를 알렸다.
“예에에에, 점수 내자, 내자아!”
“동균이 나이수 보올-.”
마치 2019시즌의 원하 챌린저스처럼, 오늘 경기 또한 순항하고 있었다.
동균이가 무려 8이닝 동안 2실점으로 막은 것도,
타선에서 알뜰하게 5점을 뽑아낸 것도,
경석 선배가 9회를 깔끔히 막아낸 것도.
모든 것이 기물 하나 없이 순항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와…이게 결국 이렇게까지 오네.”
우리가 오늘 이긴 것처럼 상수 타이거즈 또한 같은 날 승리를 거두었다.
“형형.”
“왜.”
“걱정 마십셔어, 제가 이길 겁니다.”
복잡한 내 얼굴 표정을 읽은 혁준이가 다가오며 까불기 시작했다. 으힛, 으힛 같은 소릴 내며 다가오는데 징그럽다.
“지면 끝이야. 진짜로.”
“이겨야죠.”
77승 1무 46패. 그리고 78승 1무 45패.
내일 진다면 앞서의 가정들은 모두 휴지통에 처박히게 된다.
“그래서 형도 컨디션 조절 해 온 거잖아요?”
“그치….”
감독님은 선발진을 약간씩 조정해오며 1선발과 2선발을 이 타이밍에 쓸 수 있도록 했다.
더불어 불펜진에서도 나를 최대한 아끼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대비까지 모두 마쳤다.
타선도 이런 상황을 알기에 아싸리 초장부터 점수를 빠방하게 내어 불펜진을 푹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스탯.”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81
커브 – 74
슬라 - 71
스플 - 70
체인 - 72
싱커 - 73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아마 이 시기를 위해서 시스템도 나에게 퀘스트를 퍼주었던 걸까.
한 달 동안 열심히 퀘스트를 수행하며 큰 폭의 상향을 받았다. 이제는 이 스탯들을 가지고 역전을 할 차례.
“1등 할 수 있어요.”
참을 수 없이 가볍게만 느껴지던 혁준이가 목소리를 깔고 이야기를 했지만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1위하면 치킨이나 먹자.”
“오예.”
양념치킨을 부르짖은 1선발과 함께 천천히 구장에서 빠져나왔다.
* *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원하 챌린저스와 상수 타이거즈의 시즌 17차전이 거행될 잠실구장입니다.”
MBS의 간판 캐스터 권명훈.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만큼 그는 더욱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로 시작을 알렸다.
“오늘 경기는 최수현 해설위원, 그리고 김형철 해설위원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노리고 짠 대진표는 아니겠지만, 꽤나 재미있는 형국이 되었어요.”
권명훈 캐스터가 먼저 제 오른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커다란 키에 꽤나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최수현 해설위원이었다.
“맞습니다. 현재 원하 챌린저스와 상수 타이거즈, 최근 한 달 동안 승패를 기록했던 모양이 신기하게도 맞아 떨어지며 1경기 차이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요, 빠르면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 정규시즌 1위가 결정될 예정입니다.”
“양팀 모두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체력 안배를 확실히 해두는 모습이 보였는데요.”
이번엔 제 왼편에 있는 김형철 해설위원. 작은 눈을 안경으로 감춘 김형철 해설이 마이크를 들어올렸다.
“선발투수진을 조금씩 조정하며 이번 2연전을 메인으로 두겠다, 하는 모습을 양팀 모두가 보였죠. 불펜진에서도 꽤나 많은 조정이 있었구요. 말 그대로 두 팀 모두 총력전입니다.”
“두 분 말씀대로입니다. 상수 타이거즈가 오늘 승리를 거둔다면 그대로 시즌 1위를 확정지을 수 있고, 원하 챌린저스가 승리를 거둔다면 기회를 한 번 더 얻게 됩니다. 해당 경기는 잠시 후, 여러분들께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광고 후.
“상수 타이거즈의 1회초 공격부터 오늘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먼저 상수 타이거즈의 배팅 라인업입니다. 중견수 고동욱, 2루수 강대현, 지명타자 홍석진, 1루수 박해진, 3루수 하해진, 포수 신헌철, 유격수 신태범, 우익수 박명기, 좌익수 민종현의 타순입니다.”
“강하죠.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리그에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선수들이 매우 강합니다. 언제라도 한 점 이상을 낼 수 있고, 또 언제라도 한 점 이상을 막아낼 수 있는 수비진입니다.”
“중점적으로 봐야 할 타자가 있다면 어느 타자일까요.”
상수의 선수들이 나열된 가운데, 위에서 세 번째 이름에 빨간색의 네모 칸이 덧씌워졌다.
빨간 네모의 존재를 확인한 김형철 해설이 먼저 한 마디 거들었다.
“홍석진 선수죠. 확실히 노쇠했다는 감이 들어요. 파워도 많이 떨어졌고 반응도 많이 떨어졌는데, 특히 올해 스트라이크 존이 넓어지는 악재까지 겹쳐버렸죠. 이 중요한 시리즈에서 확실한 반전이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원하 챌린저스의 수비진입니다. 유훈, 박진형, 강성현의 외야, 이성훈, 이명진, 전성문, 남기성의 내야와 황혁준, 문규학의 배터리입니다.”
“여전히 강력한 수비력을 상징하는 원하입니다. 전 수비력 하나만큼은 상수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봅니다.”
“최수현 해설께서 보시는, 수비쪽에서 더욱 강조되는 선수가 있을까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1루수 진영에 빨간색의 네모가 덧씌워졌다.
“수비 하나만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 남기성 선수죠. 올 시즌 투고타저의 직격탄을 맞지 않은, 몇 안 되는 타자지만 수비에서는 여전히 썩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상수 측에서도 분명 남기성 선수 쪽을 많이 노릴 거예요.”
각 팀에 대한 소개가 끝난 뒤 화면은 마운드를 비추고 있었다. 마운드 위에서 힘차게 공을 뿌리는 황혁준이 덕아웃을 향해 로진백을 들어보였다.
“원하 챌린저스의 선발, 황혁준 선수입니다. 2019시즌 17승을 거두었고 179이닝 동안 평균자책점은 2.81. 탈삼진은 194개를 기록했고 볼넷은 98개입니다.”
“이제는 정말 완성형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요. 구속, 제구, 변화구, 구위, 그리고 체력이나 이닝 이팅 능력도 아주 좋구요.”
황혁준이 연습투구를 마칠 무렵, 구심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동욱을 불러들였다.
타석으로 들어오며 심판, 그리고 포수에게 간단한 인사를 마친 고동욱이 배트를 휘적거리며 루틴을 시작했다.
플레이!
주심이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황혁준은 포수가 아닌 그보다 훨씬 위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
몇 초 후, 심호흡을 마치고 나선 눈빛이 바뀌었다. 그 모습은 항상 멍청하게 으헤헤, 하며 웃던 댕혁준이 아닌,
“황혁준 투수의 강점을 하나 꼽자면 어떤 면이 있을까요.”
뻥!
“자신감이죠.”
원하 챌린저스의 1선발, 황제 혁준의 모습이었다.
“초구부터 몸쪽 꽉 차게 패스트볼로 카운트를 잡습니다. 고동욱 선수가 구위에 많이 놀란 것 같은데요.”
“초구부터 몸쪽에 156km짜리가 들어오면, 저 같아도 놀랄 것 같은데요?”
몸쪽 직구 루킹, 몸쪽 직구 파울,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스윙! 삼진. 공 세 개로 간단하게 첫번째 카운트를 잡습니다!”
“오늘 황혁준 투수 좋은데요?”
“진짜 이를 갈고 나온 것 같아요.”
다음으로 등장하는 타자는 강대현. 고동욱과는 반대편 타석에 들어서 처음으로 구경하게 된 공은,
“114km, 이번엔 초구부터 커브를 던졌어요. 바깥쪽, 멀리 떨어지며 카운트 하나를 구경합니다.”
직구와 비교를 하자면 무려 40km 이상 차이가 나는 커브.
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던 타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움찔거리는 것 정도였다.
바깥쪽 커브 루킹, 몸쪽 직구 헛스윙, 떨어지는 슬라이더와 바깥쪽 직구를 하나씩 지겨본 뒤,
“높은 직구, 헛스윙 삼진! 오늘의 황혁준 선수는 대단히 무서운 공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이 패스트볼로 헛스윙 삼진. 비교적 손쉽게 2아웃.
“김형철 해설위원께서 오늘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신 홍석진 타자의 타석인데요.”
“개인적으로 홍석진 타자의 대처가 궁금해지네요.”
“대처요?”
“신체능력적인 측면에선 확실히 홍석진 타자의 열세가 아무래도 맞으니까요.”
“초구, 바깥쪽에 직구를 던지며 황혁준 투수가 카운트 하나를 먼저 선점합니다. 말씀 이어주시죠.”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분명 김석주 감독도 알고 있을 거예요. 과연 알면서도 홍석진 타자의 3번 타순을 고집하는 이유가….”
따악-!
“2구째, 결대로 밀어쳤는데요. 높이 뜬 타구는 좌익수, 유훈이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쓰리 아웃.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운명의 2연전.
1회초 수비부터 원하 챌린저스는 뒷바람을 맞으며 순항할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