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동점
집중력.
넓은 각도로 퍼져나가는 것도 좋다. 그게 어렵다면 한 군데만 집중적으로 조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선택.
당장 눈 앞에 직면한 상황에서 어떤 집중력에 투자할지는 결국 그 사람만의 선택지다.
뻥-!
“스츄라아앜-!”
혁준이가 선택한 것은 타자.
혹시 본인의 공을 치고 누군가가 나가든, 아니면 본인의 실수로 누군가를 내보내든, 혁준이는 앞만 봤다.
주자가 1루에서, 혹은 2루에서 무슨 지랄을 하든 신경쓰지 않고 타자에만 집중했다.
“스윙, 아웃-.”
그 결과, 7이닝 동안 허용한 안타는 하나. 볼넷도 하나. 그 중 한 번은 병살까지 잡아내며 위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
물끄러미, 이닝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혁준이를 쳐다봤다. 본인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티가 역력했다.
고개를 조금만 옆으로 돌리니 고생한 선발투수를 맞아주는 팀원들이 보였다.
시끄럽게 박수치는 승주.
혁준이의 등을 툭 때리고 먼저 들어가는 규학이.
미친놈처럼 만세를 부르며 들어오는 명진이.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운 원하 챌린저스다.
“직구.”
“아이!”
그곳에서 시선을 회수하고 건영이의 검은색 포수미트를 노려봤다. 우타자의 바깥쪽 낮은곳.
투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구를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투수 본인도 모른다.
그저,
퍼엉!
“아이, 굿볼!”
보내니까 가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 그러면 다음 공도, 또 그 다음 공도 보내는대로 가줄테니까.
“하! 커브!”
손목을 아래로 까딱거린 뒤 던진 커브. 타자의 눈높이까지 부웅- 떴다가,
빵!
떨어지는 게 아닌, 무릎 높이를 향해 꺾여들어간다.
“씽카!”
흔히들 말하는 투심 그립에서 약간 더 깊게 잡는 싱커.
팍!
“어우, 이거 잡기도 힘든데, 못 쳐, 못 쳐!”
속도의 증가폭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좌우의 변화가 대단히 심해졌다. 포수가 잡는 것조차 버거워할 정도.
“쓰라이다악!”
현진이에게서 배웠던 슬라이더와, 언젠가 특이점이 와서 파고 들었던 슬라이더를 융합하는 데에 결국 성공했다.
빵!
종적인 변화 무시 못 할 수치지만, 횡적인 변화가 더더욱이 놀라운 슬라이더.
변화구들의 스탯을 따지자면 이제 겨우 70대인데, 이게 80을 넘고 90을 넘어 100에 다다르면 대체 어떤 변화를 보이는 걸까.
퍼엉-!
근데 웃긴 건 또 타자들은 이런 걸 쳐낸단말이지. 어떻게든 본인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움을 걸어온단 말이야.
그런 상황이 도래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 혹은 내가 해야할 것은 정해져있다.
“한울이, 올라가자.”
“네.”
살아남기 위해서 아둥바둥 뛰어다니는 거지.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와아아악-!!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그런 미래의 내가 생각나는 것처럼 뛰어 마운드로 향했다. 퉁퉁, 로진을 만지작거리며 전광판을 노려봤다.
2 대 0. 5번타자 하해진부터.
내가 이 8회를 막을 수 있는 명분은 딱 2점.
띠링-!
[동점 적시타]
-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변화구 +2
…아니, 무실점으로 막자.
전광판 위에 뜬 퀘스트를 등진 채 규학이를 노려봤다. 마음껏 던지라는 듯, 커다랗게 앉아 미트를 보여주고 있다.
까슬까슬해진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지자 부담없이 직구를 던질 수 있었다.
뻐엉-!
반구를 받기 전 전광판을 흘끔.
146km.
그리 큰 힘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꽤나 빠른 구속이 찍혔다. 이거, 진짜 조만간 150km 찍는 거 아닌가 몰라.
130km도 버거워하던 내가 150km를 떠올리니 묘한 곳에서 동기부여가 됐다.
퍼엉-!
빨리 이기고,
빵!
스탯 쌓아서,
“플레이!”
150km 넘기자.
“후우….”
우타석에 들어선 하해진은 박해진과 이름 뿐만 아니라 타격을 준비하는 대기자세까지 비슷했다.
크게 흔들림이 없는 자세, 오른쪽 귀 옆에 둔 그립, 무심하게 타자를 쳐다보는 눈빛.
하지만 두 타자의 본질적으로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아니, 두 가지라고 해야하나?
하나는 타격 능력.
퍼엉-!
“스윙-.”
그리고 하나는 분위기.
리그를 씹어먹는 축에 속하는 지금의 나는 아직도 박해진이 무섭다. 던졌다 하면 홈런, 그 굴레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퍼엉-!
“스츄라-잌!”
하지만 그 굴레를 벗어낸다고 해도 ‘절대적인’ 이미지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편하게 박해진을 걸러낼 수 없도록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타자라고 해도,
국대급에서 6번, 내지는 7번타자 언저리에서 충분히 한 다리 걸칠 수 있다 해도,
퍼엉-!
“스윙, 아웃-.”
그래봐야 박해진의 발톱만큼도 못 따라간다.
147km, 145km, 148km.
직구 세 개로 간단히 하해진을 돌려보낸 뒤 헌철이가 같은 자리에 섰다. 묘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헌철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뭐, 임마.
싱긋 웃어주고 초구, 슬라이더를 던졌다.
빵!
“스츄라-잌!”
몸쪽으로 향하는 공에 타자가 움찔! 거리며 피했지만 궤도가 플레이트 방향으로 빠르게 선회하며 콜을 받아냈다.
꽤나 놀랐는지 내가 아닌 규학이를 향해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거지. 이거지, 이거지.”
통쾌함 비슷한 게 느껴졌다.
내가 던지던 슬라이더가 진짜 맞냐, 가슴이 웅장해지네.
타자가 슬라이더에 애매한 반응을 보이자 문득 던져보고 싶은 로케이션이 생각났다.
생각은 빠르게, 행동은 더더욱 빠르게.
생각에 대한 계산을 마치자 행동에 대한 계산을 시작하지도 않고,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왼쪽 팔꿈치를 쿡 찔렀다.
고개를 끄덕거린 규학이도 손가락을 비슷하게 만들며 결재서류에 사인을 해주었다.
내가 던져보고 싶은 건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슬라이더. 하지만 그 위치는 흔히들 생각하는 위치와는 다르다.
“…읍!”
릴리스가 되자마자의 움직임을 쭈욱 이어보자면 스트라이크 가운데 언저리에 꽂힐 궤도.
아, 아니네?
일단 출발을 해버린 배트는 빠르게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을 보고 얼른 되돌아가려고 했다.
틱!
근데 그게 되면 사람이니.
배트의 끄트머리에 맞은 공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천천히 되돌아왔다. 일정한 바운드로 굴러오는 공을 살짝 오른쪽으로 빠져서 구경하다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글러브로 낚아챘다.
“1루로오-.”
“천천히 천천히, 형 여유 많아!”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은 마운드의 바로 앞. 슬쩍 타자를 살펴보니 이를 악 물고 1루를 향해 뛰고 있다.
달려가서 언더 토스를 하는 것보다는,
빠앙-!
“아웃-.”
가볍게 스냅 스로로 던지는 게 훨씬 편하다.
“투투, 투아웃이요오!”
“아이, 투아웃!”
기성이는 콜을 듣자마자 베이스에서 발을 떼어내고 내야수들 중 유일한 본인의 동갑내기에게 공을 던졌다.
공을 받은 명진이는 글러브에서 빠르게 공을 빼낸 뒤 성문이에게 휙 토스, 성문이는 다시 가장 멀리 있는 성훈이형에게 던지고.
“투아웃.”
“예이!”
성훈이형이 중지와 약지로만 잡은 공을 보이며 투아웃임을 다시 한 번 어필했다. 그에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 라운딩된 공을 받는다.
야구공을 글러브 안에 넣어두고 허리를 숙여 로진백을 집어들었다. 유일하게 살색으로 돌아온 검지의 안쪽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시 색칠하며 다음 타자를 기다렸다.
7번타자, 신태범.
무감정한 장내 아나운서의 알림. 내일이 되면 또 다른 아나운서가 커다란 목소리로 본인의 팀을 응원하겠지.
전반적인 밸런스들이 좋은 지금, 규학이는 초구부터 좌타자 바깥쪽에 걸치는 싱커를 요구했다.
최대한 적은 투구수로 이닝을 끝내고 내일 경기까지 대비하고자하는 마음가짐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좋지, 빨리 끝내고 들어가자!
뻥-!
“…볼!”
아이.
규학이의 미트가 정말 빛처럼 빠르게 움찔거렸지만 구심의 눈에 보인 모양이다. 약간의 고민 후 허리를 펴는 모습을 보니 아쉬움이 느껴졌다.
되돌아온 공을 살살 만지작거리며 어떡하면 빠르게 끝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바깥쪽 커브? 바깥쪽 직구? 바깥쪽에 슬라이더?
빨리 끝내고 싶어하면서 자꾸 에둘러 가는 게 마음에 영 들지 않았다. 그런 기운을 담아 검지 손가락으로 글러브를 가리켰다.
“후!”
잠깐의 심호흡 후, 일련의 과정을 거쳐 손 끝에서 공이 떠났다. 그 모양, 그리고 그 회전은 직구의 그림과 같았다.
목표점은 몸쪽 낮은 곳.
퍼엉-!
구위가 좋으면 굳이 꽉 찬 공이 아니어도 꽉 찬 것처럼 느껴진다. 비슷한 의미로, 꽉 찬 공이라면 빠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거기에 리그 최상위급의 프레이밍까지 곁들여진다면 타자에겐 더더욱이 깊어보이는 직구가 완성된다.
“스츄라잌-!”
깊게 보였는지, 신태범이 발을 빼고 심판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크게 소득은 보지 못 하고 다시 타석으로 들어온다.
초구를 볼로 시작했지만 2구째에 제대로 기선을 잡아버리며 주도권을 가져왔다. 여기서부터는 시쳇말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가 쉬워진다.
딱히 내쪽에서 의도를 표현하지 않아도 규학이가 알아서 몸쪽 싱커 사인을 보내줬다.
그치, 그거지.
일전에 내 은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었다.
“…끕!”
한울아, 몸쪽에 스트라이크는 굳이 필요없다.
파악-!
깊게 파고들던 공이 빠르게 되돌아가는 모습에 놀란 신태범이 급하게 배트를 내보냈지만, 그래봐야 배트 모가지에 겨우 맞출 뿐이다.
안쪽을 제대로 박살낸 야구공은 헌철이의 타석 때보다 느린 속도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장애물이 하나 있다면,
“형, 배트!”
타구와 진행 방향을 함께 하는 배트의 대가리.
피할까?
정말 짧은 순간에 든 생각을 빨리 치웠다. 내가 처리하지 못 하면 결국 내야안타가 된다.
만약 내가 처리하지 못 하게 되면 이 경기를 마무리하게 될 신경석 선배는 최소 9번부터 상대해야한다.
“아냐, 마이!”
팀 플레이?
대충 두 발자국 정도 옆으로 피신한 뒤 먼저 잔해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자 부스러기들과 함께 굴러오는 야구공이 보였다.
빨리!
아직 스핀이 남아있는 타구였지만 맨손으로 꽉 쥐어버리니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송구를 위한 스텝은 공을 잡으며 옆에 둔 왼발로 충분하다.
“흡!”
한쪽 무릎을 꿇은 것과 비슷한 자세, 게다가 매개체가 땅바닥에 있다보니 거의 사이드암과 같은 팔각도가 형성되었다.
때문에 세워진 회전축은 날아가는 공이 내 기준 약간 오른쪽으로 말려들어가도록 조정했다.
빵!
“아웃!”
기성이가 훌쩍 왼발을 뻗어내며 간단하게 쓰리아웃.
띠링-!
[동점 적시타]
-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변화구 +2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81
커브 – 74+2=76
슬라 - 71+2=73
스플 - 70+2=72
체인 - 72+2=74
싱커 - 73+2=75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세 개의 빨간불을 완성한 기성이는 본인의 뒷편으로 향하는 게 아닌 곧장 내쪽으로 달려왔다.
“형, 손가락은? 긁히진 않았어?”
“멀쩡해, 봐봐.”
하얀색으로 떡칠된 손가락이기에 핏물이 보인다면 더더욱이 강조가 되어야 한다.
그런 것 하나 없이 말끔한 손가락을 보이자 주변에 모인 팀원들이 모두 안심한다.
“형, 좀 사려.”
“놀랬다, 한울아.”
“에이.”
팀원들의 걱정을 잔뜩 받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하이파이브를 하며 불펜을 흘끔 보니 경석 선배가 마무리를 위해 몸을 풀고 있다.
덕아웃에 돌아왔을 때도, 우리 팀의 공격이 세 타자로 끝났을 때도, 우리 팀의 마무리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을 때도 경석 선배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슨배, 내가 슨배 때문에 허슬 플레이까지 했어. 그러니까 세 타자로 좀 막아줘요, 나 간 떨리게 하지 말고.
앞 부분은 각자 다르겠지만 뒷 부분에 대해선 원하 챌린저스와 관련된 모든이가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경석 선배가 볼을 던지면 아쉬워하고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기뻐하며 아웃 카운트를 뺏어내면 환호를 내뱉는다.
“선배 가즈아앗!!”
“경석이, 아 나볼나볼!!”
이 짓을 세 번. 정확하게 세 번 반복하고 나니 원하 챌린저스는 다시 한 번 상수 타이거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와아아악-!!
신경석! 신경석! 신경석!
호오오-!
리그 공동 1위. 그리고 정규시즌 남아있는 게임은 해당 상대와의 1게임.
“아씨, 겁나 부담스럽네.”
“내일 형 무너지면 진짜 역적된다. 조심하십셔.”
“X벌.”
규진이형이 등판할 내일 경기가 끝나면 우리는 정규시즌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내 주변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