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플래그
9월 30일 월요일, 원래라면 경기 없이 편하게 집에서 발 뻗고 누워있을 시간.
삐이익-!
파울 타구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한산해야 할 잠실구장에선 많은 사람들이 정식적인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웃는 이는 지금 이 공간에 그 누구도 없었다.
불펜에서 몸을 푸는 규진이형도.
배팅 케이지에서 타격하는 성현이도.
모든 것을 지켜보는 감독님도.
심지어는 우리 팀과 데칼코마니처럼 행동하는 상대 팀도.
비장함.
모두가 제 얼굴에 단호한 결의를 내포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고 있었을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튜빙 운동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등 계속 멘탈을 달궈놓았다.
78승 1무 46패.
바로 오늘, 똑같은 승, 무, 패를 기록하던 두 팀은 분명하게 갈리게 된다. 설사 무승부가 나온다 하더라도 다른 잣대를 두고 결국 1위를 가르게 된다.
공동 1위.
상수 타이거즈의 1위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면 원하 챌린저스의 1위는 분명한 이변이라 칭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순위를 한 단계씩 끌어올리며 누구나가 강팀으로 꼽았지만, 상수라는 거대한 적폐의 대항마 자리까지 넘볼 거라고 그 누가 예상했을까.
17시즌 4위, 준플레이오프 탈락.
18시즌 3위, 플레이오프 탈락.
그리고 올해 19시즌, 최소 리그 2위를 정해둔 채 한국시리즈를 바로 밟는가 마는가를 싸우고 있다.
만약 져도 2위인데? 2위만 해도 작년보다 한 단계 오른 거잖아?
누군가가 지껄인 말에 동의를 하는 관계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할 수 있을 때, 넘볼 수 있을 때 넘봐야지. 당장 올해의 우리가 이런다고 해서 내년의 우리가 또 한 단계 오를 거라고 누가 보장해줄까.
“한국시리즈라….”
상상 속의 동물과도 같은 단어를 입 밖에 한움큼 흘렸다. 따뜻한 입김이 어느덧 쌀쌀해진 기온을 데웠다.
“커브.”
“커브!”
평소 같았으면 투구 중인 규진이형 앞에 앉아 실실 웃으며 농담을 던졌을 거다.
긴장을 풀어주겠다는 명분 하에 뱉은 쌉소리들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으니까.
“직구.”
“직구우!”
뻥!
“체인지업.”
“첸쟙!”
팡-!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 했다.
“커브.”
“카브!”
펑!
온갖 잡음이 뒤섞여 시끄러운 야구장, 그 안에서도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규진이형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비장함에서 비롯된 절개는 생각했던 것보다, 혹은 생각했던만큼 길게 이어졌다.
1회를 삼자범퇴로 지나고,
4회를 삼진 세 개로 마치고,
7회를 공 다섯 개로 끝내고,
“아, 나이스 피쳐!”
“오늘 볼 좋아, 좋아!”
덕아웃으로 돌아오며 본인을 반겨주는 이들과 손을 맞닿을 때까지도.
“후우…후….”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규진이형의 숨소리가 바로 옆자리에서 들렸다.
투구수는 92개. 피안타는 산발적인 단타만 세 개, 사사구는 하나도 없이.
어제의 혁준이처럼 크게 위기라는 것 자체를 생산하지 않았다. 예정이 틀리지 않다면 8회에도 한 번 더 모습을 드러내겠지.
툭툭―
규진이형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입을 다물고 있을 때 투수코치님이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셨다.
“네. 아…네.”
따로 나와달라는 손짓에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덕아웃쪽 난간에 붙었다.
“일단 너가 9회에 나가는 건 확정이야.”
“9회요.”
대화를 일시정지한 눈빛은 스코어 보드를 살폈다.
0 대 0.
고작 동점인 상황에서 마무리 투수를 올릴 수도 없고, 우리가 먼저 점수를 낸다고 해도 3연투를 해버린 클로저를 또 올리면 오히려 팀에게 손해가 될 거다.
그리고,
“규진이가 8회에도 올라‘는’ 갈 거야.”
“올라‘는’ 간다는 건….”
“8회 중간에라도 너가 올라갈 수도 있다고. 알고만 있어.”
흐름.
8회말에 터질 수도 있는 긴급상황을 일단 막은 투수라면 한 번 탄 기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다.
“네.”
“일단 지금부터 몸 풀고 있자.”
“네네.”
5번타자, 윤승주.
원하 챌린저스의 타자는 바로 어제와는 다르게 평탄한 어조의 소개를 받고 타석으로 향했다.
스트레칭을 하며 승주가 타석에서 하는 짓을 지켜봤다. 두 손모가지를 요란하게 옴짝거리거나 머리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를 못 했다.
승주가 리그에서 제일 잘치는, 혹은 제일 인기있는 슈퍼스타는 아니다.
펑-!
“스윙-.”
범위를 우리 팀으로 좁힌다고 해도 해당 카테고리에 딱히 해당이 되지는 않는다.
뻐엉-!
“스윙!”
클러치 히터.
하지만 ‘해줘야 할 때 해주는 타자’쪽으로 카테고리를 옮기면 8개구단의 모든 팬들이 하나 같이 이야기한다.
따악-!
원하의 윤승주 같은 클러치 히터는 없다고.
텅-!
“돌아, 돌아아아!!”
“2루까지 가!!”
우익수의 머리를 넘긴 라이너 타구는 담장을 직접 타격했다. 박명기가 좋은 펜스 플레이를 선보이며 2루로 빠르게 송구했지만,
“세잎!”
이미 승주는 키스톤을 점령한 뒤였다.
윤승주! 윤승주! 윤승주!
와아아악-!!
어제 1루측 관중석에서 원하의 풍선을 휘날리던 팬들은 정반대의 자리에서 승주의 이름을 연호했다.
해줘야 하는 순간.
클러치 히터가 활동해야 하는 순간은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있을 때만이 아니다.
동점의 중요한 순간, 선두타자로 나섰다면 가장 먼저 멀리까지 나가서 활로를 개척하는 것.
승주는 본인의 역할을 200% 달성한 뒤 대주자 기범이와 교체되었다.
키가 그리 크지 않고 체격 또한 호리호리한 편에 속하는 녀석이 팀원들의 과한 축하를 받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손에 장착된 투수 글러브를 제거했다.
이후 성훈이형은 두 번의 번트 기회를 날려먹은 뒤 삼진을 당해버렸고, 7번타자 성문이는,
딱―
평소 결대로 치던 타격 스타일을 버리고 오로지 기범이의 진루만을 목적으로 둔 당겨치기 타법을 구사했다.
“1, 1루로!”
“피쳐 뭐해!”
공을 잡은 1루수가 베이스를 밟기엔 살짝 멀기에 혹시나…싶었지만 빠르게 베이스 커버를 온 투수가 토스를 받으며 성문이는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와야했다.
8번타자, 문규학.
요새 유행한다는 뭐 그런 거 있잖아, 힘숨찐. 올시즌의 규학이에게 프레임 하나를 씌워보자면 저 단어를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리그의 모든 타자들의 타율이 ‘푼’ 단위가 내려앉은 상황에서, 오히려 ‘푼’ 단위의 상승을 일궈낸 타자가 몇몇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규학이.
타고투저 시즌인 작년 2할 4푼대를 기록하던 녀석이 올해 투고타저의 기류를 거칠게 반항하며 2할 8푼대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믿어도 되지 않을까.
전처럼 ‘대타 안 돼요?’ 같은 시선으로 감독님을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
“야.”
“엉.”
가만히 규학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규진이형이 어느새 수건을 걷어내고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기억하냐.”
“언제?”
“대구 내려갔을 때.”
“그때…왜?”
“니가 그랬잖아. 올해도 마지막 경기에 순위 정해질 것 같다고.”
“아…내가 그랬었나?”
대가리 나쁜 새끼.
규진이형은 실실거리며 뇌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부턴 그렇게 플래그 세우는 소리 아무렇게나 지껄이지 마라.”
“허허….”
불펜 난간에 매달려 주전포수의 안타를 기원하는 이가 한 명 늘었다. 작은 키로 난간 너머가 보일까, 하는 걱정에 옆을 내려다보니 꼿꼿하게 세워진 까치발이 보인다.
“형.”
“왜.”
“우유 많이 마시자.”
“웬 우유.”
“지금이라도 많이 마시면 키가 조금이라도 크지 않을까.”
“진짜, 니가 제일 나쁜 새끼야.”
“아, 극찬.”
상대 투수의 오른발이 들어올려지자 티키타카를 나누던 선후배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퍼엉-!
“…볼.”
들어왔나…싶어서 식겁했지만 심판이 약간의 고민 후 희소식을 전했다.
잠시 길어졌던 사인 교환이 끝난 후 투수는 다시 셋 포지션을 가져갔다. 3루에서 알짱거리는 기범이를 등 뒤에 둔 투수가 조심스럽게 오른발을 들었다.
투수의 왼손으로부터 이어진 하얀색 실선에 집중했다. 어디 한 군데 꺾이거나 휘지 않고 비행하는 궤도는 이내,
따악-!
와아아악-!!
반전된 궤도를 그리며 다시 투수를 스쳐 지나갔다. 중견수가 털레털레 걸어와 타구를 잡았을 무렵엔 이미 기범이가 홈플레이트를 밟고 난 후였다.
1 대 0.
가장 필요한 점수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등장했을 때의 쾌감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문규학! 문규학! 문규학!!
응원하는 관객들이 연호하는 목소리?
“쌰아아아!”
“나이쓰 배애앳!”
“규학아, 난 널 믿었다아아!!”
미친듯이 발광하는 덕아웃의 팀원들?
정답은 앞서 말한 모든 이들의 가슴 한편에서 면적을 늘려가는 이 두근거림이 아닐까.
고조.
홈팀을 등에 진 채 1루를 밟은 규학이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 또한 늦은 선취점을 만들어낸 타자를 향해 손가락으로 대답했다.
분위기를 탄 훈이가 2-0의 카운트에서 제대로 된 타격을 선보였지만 아쉽게도 3루수 직선타로 잡히며 8회초 공격이 마무리되었다.
“형.”
“플래그 하나만 더 세워도 될까.”
“…해봐.”
마운드로 다시 향하려는 규진이형을 잠시 불러세우고 웃었다.
“우리, 오늘 이길 거야. 이기고 1위하고, 1위해서 한국시리즈 직행할 거야.”
“…….”
규진이형은 계단에 왼발을 올린 채 나를 쳐다보더니,
“…미친새끼.”
극찬을 남기고 불펜을 떠났다.
플래그.
급하다면 8회말에라도 바로 등판할 수도 있다던 투수코치님의 말을 들은 건지, 규진이형은 여전하게 압도적인 모습을 이었다.
7번타자 신태범. 124km 커브, 149km 직구, 148km 직구, 133km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
8번타자 박명기. 150km 직구, 131km 체인지업, 126km 커브로 헛스윙 삼진.
9번타자 민종현. 154km, 153km, 156km, 직구 세 개로 헛스윙 삼진.
멋지게 이닝을 끝내고 돌아오는 투수를 향해 가장 빠르게 다가가서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를 했다.
“아, 형. 내가 멋지게 두두둥장해가지고 어? 한울아, 역시 니가 짱이야, 이런 소리나 들을려고 했는데.”
“미친놈인가, 진짜.”
격려를 받은 당사자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 하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원하의 마운드에서 내려온 투수는 아이싱을 위해 덕아웃 뒤로 향했고 상수의 마운드로 올라간 투수는 연습투구를 위해 본인의 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수도 진심이네.”
“그러게요.”
더 이상 점수를 뺏기면 안 된다는 집단의식이 주입된 마무리 투수는 팀이 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공을 던지고 있었다.
여기서 막고, 9회말에 최소 한 점이라도 내서 연장을 가든지, 아니면 9회말에 우리 팀이 끝내든지.
“어림도 없다.”
상대 덕아웃쪽에서 그리는 그림이 훤히 보였다.
펑-!
“아이, 형님 오늘 볼 진짜 좋다, 진짜 좋아!”
오늘 하루만 마무리 투수의 옷을 입을 내가 그런 그림을 허락할 리 없다. 내가 허락해도 우리 팀이 허락하지 않을 거다.
캔버스를 찢어버리든, 물감을 엎어버리든, 붓을 꺾어버리든.
아쉽게도, 9회초에 나선 세 명의 타자들 또한 각자의 장점을 살려 스케치를 방해하려 들었지만 아쉽게도 모두 실패했다.
명진이가 찢으려던 캔버스는 생각보다 질겼다.
성현이가 엎어버리려던 물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기성이가 꺾어버리려던 붓은 생각보다 올곧았다.
“한울이, 올라가자.”
“예.”
1 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등판하는 상황 자체는 나에게 아주 익숙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홀드가 아닌 세이브가 된다는 점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
“후우….”
불펜을 나서서 향하려는 도착지점은 당장 어제도 방문했던 장소. 하지만 출발지점은 어제와 정반대.
거기서 오는 인지부조화를 밟고 규학이를 노려봤다.
띠링-!
[행가레 투수]
- 1이닝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하세요 (0/1)
- 보상 - 전구종 +3
하얀색의 포수미트에 적혀있는 검은색의 텍스트를 확인했다.
“행가레….”
경기를 끝냈을 때 마운드에 서있는 투수.
1번타자, 고!! 동! 우욱!!
오늘, 행가레 투수가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