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기싸움
9회말, 상수 타이거즈에게 할당된 아웃 카운트는 세 개.
몸의 정면은 홈플레이트를 보고 있지만 눈동자는 왼쪽을 향하고 있었다.
넥스트 써클에서 나를 노려보는 강대현.
덕아웃에서 무심하게 나를 쳐다보는 홍석진.
그 옆에 타격 장비를 하나씩 장착하는 박해진.
플레이!
“무섭네.”
상수의 라인업을 보고 있자면 KP 스타즈의 타력보다도 살벌함이 느껴진다.
살기.
그런 무형의 기운을 느끼면서도 나는 웃음을 지었다.
빵-!
“스타-잌!”
규학이의 말대로 바깥쪽에 싱커를 하나 꽂아넣으며 카운트를 시작했다. 움찔거리는 모습도 없는 걸 보니 섣부르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느껴졌다.
섣부르게? 어딜 감히.
딱 두 번째 사인에서 원하던 사인을 받아냈다. 간지럽게 살살 긁어준다면 헤으응, 하면서 따라나올 거다.
엄지 손가락 위로 검지 손가락을 살짝 덮어내리기만 하면 편하게 체인지업 그립으로의 변신이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나도 꽤나 담대해졌어. 이딴 똥볼을 이렇게,
“읍!”
맘 편하게 밀어던지기도 하고 말야.
고동욱이 좋아한다는 위치는 가운데에서 살짝 바깥쪽. 정확하게 그곳을 향해 날아가는 공을 보는 타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블러핑인가? 진짜인가?
타자의 입장에선 차라리 헛스윙이 여러모로 이득일 때가 있다.
띡-!
바로 지금 같은 순간.
본인에 대한 믿음이 빈약한 스윙으로 공을 맞춰봐야 내야 땅볼 밖에 더 나올까.
툭 갖다 댄 타구는 설설설 굴러서 성훈이형 쪽으로 향했다.
“써드 대시!”
“바로 쏴아!!”
주변에서 뭐라고 소리를 치든 성훈이형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다.
타구의 몇 m 앞에서 보폭을 줄여야 하는지.
오른발 앞에서 잡을지, 왼발 옆에서 잡을지.
글러브로 잡을지, 맨손으로 잡을지.
약 2m 정도 앞에서 잔발로 걸음을 줄인 성훈이형은 타구가 본인의 왼발 옆을 지나는 순간 빠르게 맨손으로 잡아챘다.
딱 한 걸음, 땅에 닿은 왼발이 떨어지고 떨어져있던 오른발이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던질 자세가 만들어진다.
제대로 허리를 펴지도 않은 언더핸드에 가까운 자세.
낮은 궤도를 그리던 송구는 1루수의 바로 앞에 처박히고 말았지만,
타닥-!
송구에서 눈을 한시도 떼지 않았던 기성이가 왼팔로 땅바닥을 확 긁어버렸다.
“아웃!”
멋진 스쿱!
“이여어! 남기성,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이런 것도 해야 먹고 살지.”
우헤헤, 그런 표정으로 기성이는 명진이쪽으로 공을 돌렸다. 내야수들의 라운딩을 구경하며 로진을 보충하길 잠시,
2번타자, 강!! 대!! 현!!
2번타자님의 등장에 몸을 돌려야 했다.
생각해보니까 강대현도 상대한 경험이 꽤나 많은 것 같다. 동시에 신기한 점은 ‘그 날’ 이전에도 나에 대한 상대성은 꽤나 좋지 않았다는 것.
“흐음.”
호구 잡았네.
멘탈이 좋은 투수의 알고리즘은 아주 단순하게 굴러간다.
잘치는 타자를 보면 이렇게 생각한다. 그럼 이번에는 못 치겠지.
못치는 타자를 보면 또 이렇게 생각한다. 그럼 이번에도 못 치겠지.
꾸준히 좋은 경험을 선사해주는 강대현을 바라보며 나 또한 후자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나도 멘탈 좋은 투수라 어디 가서 자랑해도 되겠지.
뻐엉-!
“스타-잌!”
근심걱정없이 초구부터 들입다 몸쪽으로 던진 직구는 스트라이크 콜을 받아냈다.
전광판을 흘끔, 구속을 확인했던 시선이 그대로 규학이의 손가락으로 향한다.
바깥쪽 슬라이더, 오케이.
빵-!
“볼!”
강대현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구심이 한 글자짜리 콜을 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끝날 때까지 방심하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우우우우-!!
본인을 가리키는 규학이를 향해 1루심은 오른손을 말아쥐는 것으로 대답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파악한 강대현이 1루심을 노려보았지만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자, 카운트도 0-2인데 뭘 던지면 좋을까. 개인적으로는 어이없는 볼 하나 던져보고 싶은데.
몸쪽에서 바운드되는 스플리터.
오늘따라 규학이의 콜링이 아주 맘에 든다. 내가 원하는 공을 아주 딱딱 짚어준다.
웃는 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가락 사이에 공을 끼워넣었다.
글러브의 미동도 없이 모습이 바뀌는 이 진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투닥-!
“스윙, 스윙!”
블로킹의 준비를 깔끔하게 마친 규학이 뿐.
원하던 대로 땅바닥에 메다꽂아주니 강대현은 좋다고 헛스윙을 해주었다. 바운드된 것을 확인하고 1루로 뛰어보지만,
“아웃.”
1루까지 갈 것도 없이 얼른 공을 주워담은 규학이가 강대현을 터치하며 두 번째 빨간불을 점등시켰다.
3번타자, 홍! 석! 진!!
새 공을 받고 로진으로 칠을 하면서 다음으로 등장하는 타자를 쳐다봤다.
무심함.
올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예고한 타자는 앞으로 몇 번의 타석을 맡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정규시즌으로 범위를 좁힌다면 지금 이 타석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
만약 내가 마지막 마운드에 등판한다고 하면 저렇게 평점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홍석진의 용의를 살핀 규학이는 몸쪽 직구를 요구했다. 확실한 약점으로 꼽히는 피지컬에 압도하자는 의미겠지.
“…끅!”
퍼엉-!
“스타-잌!”
던지면서도 시야에 똑똑히 보였다. 아까 고동욱처럼 아무런 동작도 없이 직구를 지켜보던 모습.
하지만 둘의 차이점이라면, 고동욱은 섣부르게 들이대지 않겠다는 표현이고 홍석진은,
따악-!
그냥 본인이 원하지 않는 공이라서 걸러낸 거고.
“파울!”
몸쪽 직구 이후 바깥쪽으로 싱커를 던져봤는데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잘맞은 공이었지만 파울이 되며 다시 한 번 극단적인 카운트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몸쪽 직구 루킹, 바깥쪽 싱커에 좌익 선상을 살짝 벗어나는 파울. 그리고…다음은 어떡한다?
규학이는 바깥쪽의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빠른쪽으로 타이밍을 맞춰놨으니, 비슷하게 보이지만 훨씬 느린 공으로 뺏어보자는 의견.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한 뒤 다시 한 번 엄지 위로 검지가 덮어씌워졌다.
“읏!”
일종의 페이크 동작.
나는 있는 힘껏 던진다! 를 표현하기 위해 고개까지 휙 내돌리며 던진 체인지업은,
“볼-.”
간단하게 파훼당해버렸다. 반구를 받고 입술을 살살 물며 생각했다. 그냥 꽂아버릴까.
몸쪽에 하이패스트볼.
하지만 포수는 거의 브러시 볼이나 다름없는 공을 요구하고 있었다. 굳이 의미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오늘 규학이쪽의 감이 좋았기에 따라보기로 했다.
“끄윽!”
아까가 페이크 동작이라면 지금은 리얼.
퍼엉-!
정말로 고개가 휙 돌아갈 정도로 세게 직구를 던졌다. 때문에 잠시 벗어난 시야를 빠르게 타자쪽으로 옮겼다.
“볼.”
그리고 실망했다.
홍석진은 고개를 약간 뒤로 빼는 것으로 간단하게 볼 하나를 추가해버린 것이다.
예상 외의 결과가 나왔지만 베테랑 포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다음의 사인을 보냈다.
초구와 같은 공.
아까 홍석진이 걸러낸 공이라면 여기서 끊어낼 수 있을 거라는 의도로 보였다. 오케이.
“후우….”
1-2의 카운트. 아직도 배터리가 유리한 카운트지만 여기서 삐끗하게 되면 직후의 흐름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넣어야 한다. 설사 안타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넣어야 한다.
잠깐. 아주 잠깐.
심호흡을 위해 어두워졌던 시야가 환해졌다. 그 안에서도 모든 것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있지만 단 하나,
“윽!”
규학이의 하얀색 미트만큼은 선명하다.
딱-!
“파울-.”
노림수?
파울이 되기는 했지만 전혀 애매한 스윙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맞은 타구라 기성이의 옆을 지나치는 파울이 되었다.
쎄한데.
묘한 감각을 느낀 다섯 개의 손가락이 글러브에서 어깨까지 주욱 계단을 탔다.
조금 전 강대현에게 스플리터를 던져보고 알았다.
오늘은 스플리터가 먹히는 날이다. 강대현과의 상성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스플리터 자체가 좋은 날이다.
“흡!”
평소보다 좁게 잡아낸 그립 사이에서 튀어나간 공은 조금 더 직구와 비슷한 궤도를 그려낸다.
파앙-!
아래쪽 라인에서 하나 반 정도가 빠진 볼. 새삼스럽게 스플리터에 대한 날이라는 점을 느꼈다.
하지만,
“…볼!”
홍석진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골라냈다. 포수미트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그래서, 다음은?’
그렇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돌겠네.”
돌아온 공을 받고 마운드로 돌아가는 길, 속마음이 우러나버린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또 그 와중에 상대편 사람들에게 입 모양을 보이지 않으려고 전광판으로 몸을 돌린 건 내 의지였다.
커브? 지금 타이밍에 커브는 의미 없어.
체인지업? 안 통할 거야.
직구? 직구는 맞을 거 같다.
싱커? 싱커면…….
“괜찮네.”
바깥쪽의 싱커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반응과 적당한 결과를 충분히 내줄 거란 판단이 시킨 행동이었다.
“윽!”
딱-!
“파울!”
다시 한 번 좌익수 선상으로 향하는 파울. 확실히 반응을 보인다. 바깥쪽에서 놀아야 하나.
딱!
“파울!”
이후 바깥쪽으로 던진 직구는 약간 빗맞은 파울. 끈적거림이 부족한가, 싶어 로진을 주물럭거렸다.
하얀색의 화장기가 충분해지자 팍! 소리 나게 땅바닥으로 내던지고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홍석진에게 던졌던 공들을 복기해보자.
직구, 싱커, 체인지업, 직구, 직구, 스플리터, 싱커, 직구.
그리고 이번 9구째. 홍석진을 상대로 던져보지 않았던 변화구를 던질 예정이다.
“성문아! 기성이도!”
던지기 전, 플레이트에서 발을 뺀 뒤 내 왼쪽 내야수들의 위치를 간단하게 조정했다.
손가락질 몇 번으로 위치가 조정되자 내쪽에서 사인을 보낸 구종을 던졌다.
“흣!”
슬라이더.
몸쪽에서 파고드는 슬라이더라면 헛스윙은 아니더라도 당긴 타구를 왼쪽 내야수들이 걷어낼 거라는 계산이었다.
뻥!
“보올-.”
X발!
움직임이 있었지만 스윙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정도.
미련이 남은 규학이가 성훈이형의 옆을 가리켰지만 3루심은 양손을 좌우로 넓게 펼쳐보일 뿐이었다.
그 동작이 마치 상수 타이거즈에 대한 포용심 같이 느껴져 기분이 순간 하강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기분. 지금 이 승부가 재밌다느니, 흥분된다느니 같은 변태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장의 이 감각은 마치,
야구 조까치 하네!
이쪽에 가깝다.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볼배합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어떤 공이 좋을까.
규학이의 사인을 여러번 골라내며 잠시 생각하던 검지 손가락과 중지 손가락이 어깨와 팔꿈치를 한 번 왕복했다.
“후우….”
바깥쪽의 높은 곳으로 직구를 던져보자. 존 안에는…….
“악!”
들어가게!
뻐엉-!
딱,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간 직구는 규학이의 미트에 잡힌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볼!”
볼 판정을 받아버린다.
저게 볼이라고?
심봉사가 울고 갈 판정을 봐 버리니 그가 뜨지 못 했던 만큼 내 눈알이 더욱이 커져버렸다.
“타임, 타임이요!”
“타임-!”
아니…….
어딘가 일이 커져버리기 직전, 규학이가 요령 좋게 타임으로 흐름을 끊고 마운드 쪽으로 뛰어왔다.
때문에 항의의 마음이 담긴 발걸음이 자리에 멈춰버리게 되었다.
“야, 볼이야?”
“좀…애매하긴 했는데요. 홍석진이 잘 골라냈어요.”
“들어간 거 아니었어?”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반의 반 개 빠졌다고.”
“…….”
“이제 박해진이예요.”
지나간 일은 어쩔 수가 없다. 당장에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에 눈을 두자.
규학이가 한 이야기는 평소 내가 염불처럼 외우고 다녔던 대사를 함축시킨 대사였다.
“아예 걸러버릴까요?”
“아니, 그냥….”
“네.”
“감 대로 가보자.”
“…감이요?”
“어. 어차피 막으면 끝나잖아.”
“그렇죠.”
“대주자 나가도 안 뛸 거란 말야. 박해진만 잡으면 끝나. 어떻게든, 어떻게든 잡아보자.”
“잡을 수 있겠어요?”
결과에 대한 스포일러를 요구하는 희한한 포수의 마음은 내 마음과 같았다.
타석 옆에 서서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는 박해진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쳐다보는 박해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글러브로 가려진 입 때문에 더더욱 강조되는 눈빛 때문에 씹어발겨진 발음으로 이야기했다.
“잡을 거야.”
“믿을게요.”
툭―
포수미트로 내 가슴께를 툭 친 규학이가 홈플레이트로 뛰어돌아갔다. 그런 중에도 박해진과의 기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4번타자, 바악!! 해애!! 지인!!
와아아악-!!
기싸움?
아니, 이제는 진짜 싸움에서 이길 차례다. 가장 최근의 두 타석으로 범위를 좁혀보자면 상대 타율은 0.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어떻게든 잡아낼 거다. 잡아내서,
“플레이!”
한국시리즈로 먼저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