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행가레
“후우….”
한숨보다 진한 감정이 담긴 심호흡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9회 말 2아웃. 한 점차인 상황에서 주자 하나를 두고 박해진과의 승부.
당연히 거를까에 대한 생각도 했다. 내 승부욕 따위를 칩으로 걸기엔 걸린 판돈이 너무 크다.
그럼에도 내가 감히 올인을 부를 수 있는 힌트는 상대방이 쥐고 있는 카드의 앞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감.
누군가는 무리수라 표현할 거고 혹자는 고집이라 평할 것이며 헤이터들은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하겠지.
내가 이번 타석에 승부를 걸 수 있는 ‘감’은 다른 곳도 아닌 박해진의 눈빛에서 읽어낸 힌트다.
경계심.
박해진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확실히 달라졌다. 내가 아웃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과도한 경계심의 수위가 보였다.
신중하게, 아주 신중하게 구종을 골랐다.
볼부터 시작해도 된다. 아쉬운 건 쳐서 점수를 내고 싶은 박해진이지, 굳이 박해진과 승부를 할 필요가 없는 내가 아니다.
그럴듯한 사인 하나를 고른 뒤 1루주자의 용태를 살폈다. 인지하지 못 했지만 홍석진 대신 다른 대주자가 들어가있다.
“후….”
스트레치를 잡은 뒤 주자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럼에도 눈동자는 주자가 아닌 타자를 향해있다.
부디, 모자 챙에 내 눈가가 가려졌길 바랄 뿐이다.
“읍!”
커브.
오늘 한 번도 던진 적이 없던 커브를 던지기 위해선 직구를 던질 때보다 더욱 강하게 때려던져야 했다.
거진 타자의 어깨 높이까지 부웅 떴던 공이 수우욱, 바깥쪽 지점으로 빨려들어간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아니, 들어가지 않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빵-!
재빠르게 하얀색 포수미트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구심이 입이 열리기까지의 그 찰나가 아주 길게 느껴졌다.
“…스타-잌!”
잡아주네.
대사를 보아하니 구심은 상수 쪽의 덕아웃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그 현장을 나는 보지 못 했다. 박해진을 똑똑히 쳐다보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으니까.
볼이라고 판단한 건지, 아니면 초구는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던 건지.
타이밍을 잰다기보단 오히려 배트를 빼는 모양새를 만들었던 박해진과 눈이 마주쳤다.
“…….”
“…….”
말없이 반구를 받은 뒤 플레이트를 밟았다. 잠시 박해진으로부터 시선을 비켜내고 규학이에게 집중했다.
다소 실험적인 사인들이 나왔다.
바깥쪽에 커브를 한 번 더 던져보자는 둥, 커브를 바운드시켜보자는 둥, 체인지업을 존에 넣어보자는 둥.
그 중에서 와, 이건 진짜 또라이다 같이 느껴졌던 장면에 책갈피를 꽂았다.
규학이 얘도 점점 나 닮아서 미쳐가나봐.
흘러나오려는 실소를 감추려는 게 정말 힘들었다.
직구의 그립을 잡은 뒤 셋 포지션을 잡았다. 주자를 흘끗 쳐다보긴 했지만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뛰고 싶으면 뛰라지.
내가 말도 안 되는 폭투를 던지거나 폼이 과도하게 크지만 않으면 절대 뛰지 않을 거다.
뛰면 오히려 손해니까.
덕분에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두고 존 한가운데를 향해 직구를 던질 수가 있었다.
“…끄악!”
퍼엉-!
“스타-잌, 투!”
149km.
정말 조금의 과장 없이 스트라이크 존의 정 가운데로 꽂힌 직구의 구속이었다.
반구를 기다리는 내 왼쪽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게 느껴졌다. 그 표정을 굳이 정리하지 않고 박해진과 눈을 마주쳤다.
“…….”
“…….”
꼬우면 치시든가.
이따가 덕아웃 들어가면 규학이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한가운데에다 직구 요구하는 미친 포수가 어딨냐고.
말이 그렇다는 거고, 이 2구는 나에게 있어 어마어마한 한 가지 힌트가 되었다. 그 힌트를 동아줄 삼아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지금의 박해진’은 ‘지금의 김한울’의 구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거다. 간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박해진의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뭐 그런 거.
조금 더 복잡한 이유를 들어보자면,
“끄읍!”
딱-!
“파울!”
가장 최근 상대했을 때보다 월등하게 성장해버린 나 때문이 아닐까.
바깥쪽 하나 정도 빠진 직구에 파울이 나온 것을 보며 확신했다.
이길 수 있다.
“후우…욱!”
촤악-!
“세잎!”
잠시 견제도 잊지 않고.
바깥쪽 커브 루킹, 가운데 직구 루킹, 바깥쪽 볼 직구에 파울.
압도.
이번 타석에 던진 공을 나열하고나니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박해진을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침착하자, 한울아. 해탈아, 일해라.”
사인을 골라내기 위해 저은 고개는 머릿속을 침범하려는 오만을 털어내는 동작과도 같았다.
오늘 스플리터 좋은데, 한 번 도전해봐도 좋지 않을까.
스플리터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고 셋 모션을 잡았다. 왼쪽 허벅지 위쪽에 순간적인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오른다리가 빠르게 굽어지며 추진력을 얻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남은 건,
“윽!”
한계점까지 유지한 공을 뽑아내는 것.
투닥-!
“볼!”
일단 존에 안 들어간 건 인정하지만 만족은 하지 못 한 규학이가 빠르게 1루심을 가리켰다.
와아아아-!!
“아…까비.”
하지만 여기서 원하가 아닌 상수의 편을 들어버리며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아, 머리 아프네.”
육성으로 작금의 상황이 풀이되었다. 정말 미친 척하고 한가운데에다 직구 하나 더 던져볼까,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아.”
근데 규학이는 그것과 비슷한 사인을 내며 그 멘탈 강하다는 내가 얼빠진 소릴 내도록 만들었다.
진짜 슬슬 미쳐가나봐.
흐뭇하게 웃으며 셋 포지션을 잡았다. 만족감이 가득 찬 자유족의 무릎은 직전의 투구들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왔다.
주자?
“뛴다아악!”
뛸라면 뛰든지.
나에겐 훨씬 중요한 존재가 있고 어려운 상대가 있다. 주자 따위에게 나눠줄 신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으…끅!”
꽤나 높은 구역을 향해 직구가 날아갔다. 높긴 한데, 스트라이크로 판정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곳.
잘못되면 정말 X되는 수가 있기에 죽어라 이를 악 물고 강하게 던졌다.
직선에 가까운 비행을 하는 야구공, 그리고 그 뒤를 받치던 포수미트 사이 갈색의 나무배트가 마치 포토샵의 누끼로 딴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딱-!
타격된 공은 높은 위치로 솟구쳐 올랐다. 타구를 확인한 박해진은 천천히 1루를 향해 뛰어갔다.
와아아악-!!
타구를 눈에 담은 나 또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이!”
높이 떠올랐던 공이 정확하게 내게 되돌아오고 있었으니까.
탁―
“아웃!”
머리 쪽으로 떨어지는 타구를 낚아챘다.
띠링-!
[행가레 투수]
- 1이닝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하세요 (1/1)
- 보상 - 전구종 +3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81+3=84
커브 – 76+3=79
슬라 - 73+3=76
스플 - 72+3=75
체인 - 74+3=77
싱커 - 75+3=78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시야를 가리던 글러브를 아래로 내리자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달려드는 규학이가 보인다.
“우와아아가아가!!!”
“대따아아악!!!!”
“헣어어엉…!!”
또라이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주호.
기쁨을 주체하지 못 하고 글러브를 멀리 던져버리는 기성이.
감정에 북받친 얼굴을 글러브로 가린 채 쓰러져 흐느끼는 명진이.
개판.
감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긴 나날 동안 거머쥐지 못 했던 정규시즌 1위의 자리에 오르자 펼쳐진 군상극을 보며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이겼다아아아!!”
나를 향해 달려드는 규학이를 품에 안고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나가자! 싸우자! 승리의 챌린저스! 원하의! 승리를! 위하여어어!!
혼자의 힘으로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감정에 휘말린 명진이를 말리겠답시고 다가갔다가 동화되어버린 팀원이 꽤 보였다.
1년 동안 팬 여러분과 함께 도전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꼴사납게 눈물 자국 가득한 친구들이 플래카드를 붙잡고 팬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 친구들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니꼽게 보이기는 했다.
“야, 웃어!”
“혀어어엉….”
“웃으라고.”
“어헝헝헝….”
190cm에 가까운 거대한 피지컬로 눈물콧물 질질 짜는 혁준이의 면상을 밀어냈다.
이후 우승 세레머니가 진행됐다. 비록 오늘의 경기가 상수 타이거즈의 홈으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여기 잠실구장은 우리 원하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상수 타이거즈측에 양해를 구한 뒤 관객석의 절반을 채운 원하의 팬들을 향해 선수단 전원이 모였다.
모두 유니폼이 아닌, 원하의 마크가 프린팅된 우승 티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장 먼저 감독님께서 정규시즌 우승 트로피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나도 기분 좋아서 헤헤헤 웃고 있자니 나를 불러내셨다.
아, 나 주장이었지.
그에 털레털레 뛰어가서 감독님과 함께 우승컵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찰칵찰칵―
기자들 앞에서 사진도 좀 찍혀주고, 그리고 좀 멀겠지만 팬들이 사진 찍을 시간도 벌어주고.
이후 진행되는 것은 인터뷰.
“마지막까지 멋진 승부를 펼쳐준, 에…그리고 지금 저희 팬 분들께 이렇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양해해주신 상수 타이거즈 여러분들께 우선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감독님은 우선 상대팀에 대한 예우를 보이셨다.
“최근 몇 년간 원하는 강팀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참 과분하게도, 덕분에 저도 계약 계속 연장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원하 감독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흐뭇하게 박수를 치고 있자니 마이크가 내 앞으로 들이밀어진다. 멍청하게 감독님을 쳐다보고 있자니,
너도 한 마디 해.
라고 입 모양으로 이야기한다.
“…….”
멋쩍게 마이크를 받아들고 단상 앞에 섰다.
욜럽 이저 와아알칻!! 폴딩 이저 할- 팥!!
헛헛하게 웃고 있자니 팬들은 내 등장곡을 목 놓아 부르짖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내 뒤에서도 같은 노래가 묵직하게 들렸다.
이건 또 뭐여, 하며 뒤를 돌아보니 우리 선수들 또한 내 등장곡을 부르고 있다.
“어….”
딱히 할 말이 없는데.
“시즌 초에 제가 많이 안 좋았거든요. 만약에 제가 초반부터 좋았다면 비교적 편하게 1위를 확정지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뭔 소린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해서 한국시리즈에서 뵙겠습니다.”
와아악-!!
한국시리즈.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진의를 아는 이는 그 누구도 없을 거다. 말한 나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딱 한 단어에 모두가 열광하고 있었다. 선수들은 다들 감정이 진정됐지만 아직까지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 해 울음을 다시 터뜨리는 팬들도 보였다.
“내가 말했지. 플래그 세운다고.”
“미친새끼.”
다시 선수들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마침 옆에 있던 규진이형을 향해 이야기하니 피식 웃는다.
“이렇게 된 거 한국시리즈도 플래그 좀 세워봐.”
“흠.”
고민하는 척, 생각에 잠긴 척.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쿡 누른 채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했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고 지껄였다.
“우리 한국시리즈 우승함.”
“진짜냐?”
“내가 관심법으로 봤음.”
“미친새끼.”
극찬을 받고 기뻐하는 텐션의 높이가 평소보다도 훨씬 높아져있었다.
정규시즌 1위.
무거운 한 단어로 페넌트레이스를 마친 원하 챌린저스는 당장부터 시작될 약 한 달간의 공백을 계산해야했다.
뽕-!
“야아아악!!”
“예에에에에!!”
“호오오오옹!!!”
아, 샴페인 샤워 좀 먼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