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확정
원하 챌린저스, 상수 타이거즈, 성운 호크스, 동성 호넷츠.
2019시즌 상위 네 개의 팀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예선의 무대를 1위로 마친 우리 팀은 이제 본선 중의 본선에서 숫자 1의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아쉽게도 이 증명은 원하 챌린저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닌, 누군가 상대를 해주어야 할 짝꿍이 필요하다.
누가 될까.
중반기에 들어 힘이 좀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강팀인 동성?
중반부터 급속도로 치고 올라와 2년 연속 준플레이프 땅을 밟게 될 성운?
고작 2위지만 웬만한 1등보다 무서움이 느껴지는 상수?
“재밌네.”
완성된 순위표를 보고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재밌게도 세 팀 모두 나, 혹은 원하 챌린저스와 인연이 깊다.
어느 팀이 올라온다 해도 우승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을 거다. 동시에 누구와 싸운다 해도 꿀잼을 보장할 수 있을 거다.
- 재밌냐?
“재밌지. 넌 안 재밌냐?”
- 아, 대가리 아파.
전화기를 넘어 들려오는 우석이의 목소리에 깔깔깔 웃었다.
“그래도 준플 홈부터 시작하니까 다행이지.”
- 동성이잖아, 그래도. 어지간히 센데.
“동성 아니면. 상수 아니면 우린데?”
- 아 거지 같네.
강팀, 강팀, 강팀.
쓸데없이 일정한 박자감이 우석이에겐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가는 모양이었다.
“올라올 수 있을 거 같냐?”
- 모르지. 해봐야지…아이고…….
“올라와봐. 현진이 좀 꺾어놔봐.”
- 뭘 꺾어, 꺾긴. 야,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현진이랑 통화했거든.
“언제?”
- 동성이 매직넘버 지웠을 때.
“아아, 어.”
- 그 새끼 뭐라는 줄 아냐?
김한울 선배님께 배웠던 모든 것을, 최우석 선배님께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이 지랄을 한다고! 이 개새끼가!
“크학, 아학학학!!”
현진이의 딱딱한 말투와 목소리가 뇌내에서 자동적으로 재생되었다.
- 그러더니 또 뒤로 뭐라는 줄 알아?
“또, 으흑, 또 뭐랬, 뭐랬는데….”
그렇게 저희가 한국시리즈로 올라가서, 김한울 선배님께도 제가 배웠던 모든 것을 검사 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이 지랄을 한다니까!!
“하으, 흑, 흐윽, 아학학학!!”
오후 3시, 정규시즌을 1위로 마친 팀의 주장은 배꼽을 붙잡은 채 집안이 떠나가라 웃고 있었다.
1차적인 시즌을 끝내자 마음이 더없이 편안했다. 지금 당장 똥줄타는 건 내가 아니라 일주일 뒤에 준플 시작할 우석이니까.
그런 우석이를 놀리는 맛이 쏠쏠했다. 더구나 얘네가 가장 먼저 맞이 할 투수가 국가대표 1선발이라니.
“어윽….”
먼 곳으로 넘어가려던 숨을 다시 붙잡고 정신을 차렸다.
“후…그래서. 예상치로는 어디까지 올라올 것 같냐.”
- 예상치 그런 게 어딨어. 끝까지 가야지.
“한국시리즈?”
- 뭔 소리야. 한국시리즈 우승이 끝이지.
“개소리 한다.”
- 뒤질래, 진짜?
“저희가 우승할 건데여, 아쉽겠네에에에여. 우석 씨, 아쉽겠어어어어여.”
- ….
아, 재밌다.
- …그래서. 여자친구 분이랑은 잘 만나냐.
“어. 잘 만나지.”
- 좋겠다?
“좋아 뒤지겠다.”
흐흐.
한울 씨! 하고 소리치며 달려드는 민영 씨의 얼굴이 생각나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 이런 새끼가 뭐가 좋다고 여자들이 달라붙는 거지, 대체.
“마, 이 형님이 그 마성의 남자 그런 거 아이가.”
- 진짜 미친 새낀가.
“꼬우면…아시죠?”
- X새끼.
“너는 어떤데. 현정 씨랑 어때?”
- 그냥…그냥 그런데.
“왜. 얼마 전에 같이 밥 먹는다 어쩐다 하더만.”
- 몰라 아…….
차였나…싶어 다음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 일단 모가지 딱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간다.
“그려. 서울 올라오면 전화 해. 오랜만에 또 얼굴이나 보자. 명규랑 해서.”
- 규진이형한테도 얘기 해놔.
“엉야, 고생해라.”
- 너도.
뚝―
오랜만에 평화로운 오후.
전화를 끊어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유지되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와…진짜.”
딱히 할 짓이 없어지자 한 때 웅장해졌던 가슴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책갈피 표시 해두었던 페이지로 접속했다.
* * *
[오피셜] ‘프리미어12’ 야구대표팀 최종 엔트리 발표
프리미어12 대회에 출전할 한국 야구대표팀의 최종 선수 명단이 공개됐다.
이번 대회에도 감독을 연임하게 된 상수 타이거즈의 김석주 감독은 10월 2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게 될 28명의 선수 명단을 발표했다.
대표팀을 살펴보자면 투수 13명, 포수 2명, 내야수 7명, 외야수 6명으로 구성되었다.
투수진에선 이현진(동성)과 황혁준(원하)를 비롯한 국가대표급 에이스들 이외에 김한울(원하), 이송인(성운), 임재혁(KP) 등의 초행 선수들도 포함됐다.
포수진엔 신헌철(상수)과 문규학(원하) 등 젊은 포수 두 명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 특히 문규학의 경우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배팅 오더의 경우는 박해진(상수), 강성현(원하), 최우석(성운)을 필두로 전반적인 선수층이 새로워진 느낌이다. 특히 은퇴가 예고 된 홍석진(상수)의 공백을 어떻게 메꾸는가가 관건으로 꼽힌다.
야구를 사랑하는 12개의 나라가 출전할 프리미어12는 오는 11월 2일 개막이 예정되어있다.
…중략.
쿠바, 캐나다, 호주와 함께 C조에 속한 대한민국은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조별리그를 진행하게 된다.
…중략.
4년 전 초대 프리미어12 대회에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 *
겹경사.
“축하드려요!”
“아이고…민영 씨가 응원해주신 덕이예요. 진짜루.”
“와아…진짜 꿈만 같아요.”
정규시즌을 1위로 마무리 짓고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국가대표 승선.
60명 정도로 걸러냈던 1차 명단에서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수치 안에 살아남은 것이다.
“근데 조금 뭐랄까…의외네요.”
“어떤 게요?”
“민영 씨라면 제가 국대 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응원하는 팀의 핵심적인 선수가 팀 외적인 부분에서 고생하는 걸 좋아하는 팬은 없다. 특히나 그 고생이 팀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경기라면 더더욱.
스캠의 연습경기, 시즌 시작하기 전 시범경기, 이벤트 그 자체인 올스타전.
심지어는 앞서와 다르게 국위선양이라는 별개의 이름표를 붙일 수 있는 국가대표 경기까지도.
“그래도 국가대표는 다르죠.”
엣헴!
그런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민영 씨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물론…혹시라도 한울 씨가 그 대회에서 부상을 당한다든지, 아니면 무리해서 다음 시즌에 영향이 간다면 많이 슬플 거예요.”
“음….”
전혀 없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야기지.
“그래도 이번엔 뭔가…좀 느낌이 다르네요.”
“에?”
입으로 샐러드를 옮기던 오른팔이 공중에서 그대로 멈췄다.
“어…뭐라 그래야되지? 제일 응원하는 선수가 쩌리였을 때 국가대표는 생각도 안 하잖아요.”
쩌리…….
“근데 그 선수가 갑자기 성장을 하고, 또 좋은 성적을 내고. 그렇게 국가대표라는 자리까지 오르고. 마음이 너무 벅차오를 것 같지 않나요?”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원래 당사자는 잘 모를 거예요.”
실제로 이번 국가대표 멤버들 중 나에 대한 갑론을박이 가장 많다.
투고타저에서 4점대 찍은 불펜이라니 말이 되냐, 좋아진 이후로는 31이닝 동안 0.87밖에 안 된다, 등등등.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후반기 페이스는 어마어마했지.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졌던 고개가 수줍은 목소리에 원래의 각도를 찾았다.
“남자친구가 국가대표 선수라고 하니까…뭔가 되게 신기해요.”
“…….”
미친.
부끄러움에 발그레 달아오른 볼을 옆으로 숨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아팠다.
그리고…뭐?
“저기…민영 씨.”
“네, 네?”
“방금 뭐라고…하셨어요?”
“어…뭔가 되게 신기하다구….”
“아니, 그 앞에.”
“국가대표…?”
“그 앞에.”
“…남자친구가….”
“…….”
“…….”
크흡.
댐을 무너뜨린 듯 흘러넘치려는 감정을 억눌렀다. 여자친구한테 추한 모습 보이기가 싫었다.
점잖은 모습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므찐 남자친구처럼 보이려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뭐하시는 거예요?”
“적당히 쉬다가…한국시리즈 좀 전에 가서 또 훈련하고 한국시리즈 하고…아, 빡세네, 생각해보니까.”
실질적으로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프리미어12 대회가 시작된다.
진짜…그대로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니까 다행이지. 괜히 해외 나가네 마네 하고 있었으면 멘탈 터졌을지도.
“힘내요, 한울 씨. 한울 씨는 잘할 거예요.”
“…….”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자니 민영 씨가 옆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이런 말이라니.
꽈악―
“하, 한울 씨….”
“아.”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참아내기 위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버렸다.
사귄 지 약 한 달.
일정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 했다고 하지만 빈도 자체는 어차피 이전과 비슷했다.
그리고 해당하는 문제는 민영 씨와 사전에 충분히 협의가 된 사항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가,
“한울 씨, 저거!”
“아, 네!”
내 손을 잡아 당기는 민영 씨의 손길엔 평소에 자주 보지 못 하는만큼의 애틋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닭꼬치를 발견하고 해맑게 뛰어가는 민영 씨의 보폭을 맞췄다.
“어…한울 씨는 어떤 걸로 드실래요?”
“저는….”
민영 씨 옆에 꼭 붙어서 메뉴판을 한 번 살폈다. 다섯 단계의 매운 맛 중에서 중간 맛을 골랐다.
“소금구이 하나랑 매콤한 걸루 하나씩 주세요!”
치이익―
불판 위로 올라가는 두 개의 닭꼬치가 상당히 위험한 효과음을 냈지만 커플을 그곳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각자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내 왼손엔 매콤한 맛. 민영 씨 오른손엔 소금구이. 닭꼬치를 들지 않은 손엔 각자의 손이.
야들야들한 닭다리 살을 한 입 넣고 씹자니 고소하면서도 알맞게 매콤한 맛이 식욕을 돋군다.
“닭꼬치 오랜만에 먹네.”
“음….”
뜨거워서 허어어어 하고 입김을 뿜는 모습을 민영 씨가 맹…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원하는 눈빛.
“…드셔 보실래요?”
“어…괜찮아요?”
“저야 괜찮은데. 민영 씨는 괜찮으시겠어요?”
“으음….”
매운 것을 전혀 먹지 못 하는 민영 씨지만, 또 동시에 의지의 한국인이기도 했다.
한국인이라면 매운 맛.
민영 씨는 운명처럼 이끌리는 따끔한 맛을 향해 입을 가져다댔다.
“어때요?”
“어…생각보다 안 매운 거 같….”
“…….”
“…….”
“…민영 씨?”
“…….”
일시 정지가 아닌 그냥 정지.
한 박자 뒤에서 후려갈기는 통증에 민영 씨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흐으!”
밀려있던 과제를 빠르게 처리하는 대학생처럼, 민영 씨는 잠시 공백이 생긴 감각의 처리를 벼락치기로 실행했다.
그 결과가,
“으, 으으!”
이 모양.
“거봐, 맵다니까.”
“흐으, 매, 매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다 슬슬 서늘함이 느껴지는 날씨 탓에 손님이 많이 줄은 구슬 아이스크림 집의 매상을 올려주기로 결정했다.
“빨리, 빨리 이거 드세요.”
“코마허요!”
예?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로 감사를 표한 민영 씨는 구슬들을 한 숟가락 퍼서 입 안에 밀어넣었다.
“…으으.”
그 동작을 몇 번 정도.
“괜찮아요?”
“네에….”
따끔함이 남아있는 혓바닥을 공중에 메롱, 내민 채 손부채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짜…….
“…….”
“…한울 씨?”
어지간히 귀여워 오른손이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민영 씨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
정신을 차리고 빨리 손을 거뒀다. 상당 부분 남아있는 멋쩍음을 잔여 연료로 삼아 움찔거리던 손가락이 나에게 돌아오려고 했지만,
“괜찮아요.”
“아….”
민영 씨가 붙잡은 손길에 곧바로 진정이 되었다.
“저 원래 누가 머리 만지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한울 씨가 쓰다듬어주니까 되게 좋아요. 더 쓰다듬어주세요.”
“…….”
“헤헤….”
스윽…스윽…….
그렇게 계속, 따뜻했던 닭꼬치가 차갑게 식어버릴 때까지 민영 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