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06화 (106/190)

106화. 도전장

한국시리즈.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야구팀이 어느 팀인가를 가려내는 증명의 자리에 우리 원하 챌린저스가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도전장을 내밀었다?

정규시즌 1위팀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 틀린 표현이라 할 수는 있지만 기세, 혹은 흐름이라는 단어 따위를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안녕하십니까. 2019시즌 KBO리그, 한국시리즈 미디어 데이를 진행하게 될 권명훈 캐스터입니다. 반갑습니다.”

분명 도전자는 저쪽이고 챔피언은 이쪽인데, 모두의 시선은 우리가 아닌 저쪽을 향하고 있었다.

“먼저 페넌트레이스 1위팀이죠, 원하 챌린저스의 이한주 감독님께 인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네. 안녕하십니까, 원하 챌린저스 감독 이한주입니다.”

“김한울 선수와 강성현 선수도 인사 한 말씀씩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오오.”

“안녕하세요.”

인사 끝.

“자, 2017시즌엔 4위, 2018시즌엔 3위로 리그를 마감하셨는데 올해는 1위의 자리까지 오르셨어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부분도 있지만 꼭 운이라는 요소 뿐 아니라 저희 선수들이 정말 많이 고생했습니다.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주장 완장을 차고 첫 시즌을 1위로 마감한 김한울 선수도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요.”

“아…네. 올해는 제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도 좋은 결과를 받았어요. 다른 선수들이 정말 잘해준 것 같습니다.”

“FA 계약 후 첫 시즌인 강성현 선수 또한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항상 팬 분들께서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한 해의 소감에 대한 원하 측 인사의 답변은 모두 각자의 성격이 잘 묻어난 답변들이었다.

“김석주 감독님께선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요. 정말 오랜만에 플레이오프를 경험하셨는데요.”

“사실 저는 제가 매너리즘에 빠질 거라곤 생각을 못 했거든요. 근데 원하 챌린저스 덕분에 정신을 확실히 차린 느낌입니다.”

“박동일 선수는 시즌 초반을 참가하지 못 해 아쉬움이 컸을 것 같습니다.”

“아쉽죠. 제가 초반부터 몸상태가 멀쩡했다면…아무래도 지금 앉아있는 자리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박해진 선수는 이번 시즌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즌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팀적으로도 그렇구요.”

상수 멤버들의 답변을 듣고의 생각은…….

“미친….”

당연한 거구나. 진짜 당연하게 느끼고 있구나.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려움 같은 게 느껴져 아무도 듣지 못 하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권명훈 캐스터가 뭐라뭐라 이야기하는 사이 눈길을 슬쩍 상수쪽으로 옮겼다.

저쪽 감독님과 저쪽 1선발은 본인들끼리 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저쪽 4번타자는…….

“…….”

“…….”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 변화 없이 나를 쳐다보며 골똘히 잠겨 있는 생각은 과연 어떤 모양이며 어떤 색깔을 하고 있을까.

이번 시즌을 준비하며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것들.

또 그것들이 제대로 맞아들었는지.

상대 팀 선수 중 누구를 가장 경계하는지.

본인의 팀 선수 중 누가 한 건 터뜨려줄지.

몇 대 몇으로 본인의 팀이 이길 것 같은지.

이번 시리즈에서 본인의 성적은 어느 정도가 될 것 같은지.

이후 여러 질문들이 흘러나왔고 또 우리는 그에 착실히 대답했다.

그러다가 문득 느꼈다.

“그럼 제가 드릴 질문은 벌써 이게 마지막 질문이네요. 상대팀에게 본인의 팀에 대해서 간략하게 어필하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왜 지고 들어가지?

“일단 정규시즌 1위 축하드리고…어쩌다가 저희가 자리를 뺏기긴 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선 다를 겁니다.”

왜 시작도 안 했는데 기에 눌려있지?

“한국시리즈는 많이 어색하실텐데, 저희가 잘 알려드리겠습니다.”

왜 우리가 도전자를 자처해야하지?

“고생하셨습니다. 저희는 저희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왜?

“원하 챌린저스 분들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응?”

감독님께서 마이크를 집어들으셨을 때, 내가 마이크에 목소리가 잡히지 않게 작게 이야기했다.

“아…그래.”

양해를 잠시 구하자 우선 순위가 내쪽으로 넘어왔다. 그 모습이 흥미롭게 느껴졌는지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저희 원하 챌린저스는 정규시즌 1위팀입니다. 운이 좋았건 실력이건, 저희가 1위팀입니다. 한국시리즈가 처음이건 어쩌건, 저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후의 말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마인드를 바꿔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전한다는 마음가짐 따위로 임하지 않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상수 타이거즈 측의 사람들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도전장 받아들이겠습니다.”

박해진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찰칵-, 찰칵찰칵―

마이크를 내려놓자 플래시 세례가 더욱 거세졌다. 감독님은 나를 보고 실실 웃음을 지으셨고 성현이는 내 말을 듣고 무언가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감독님은 1위팀의 품격을 다시 쓰겠다는 말씀을, 성현이는 팬 분들께 미리 사과해두라고 이야기를 했다.

어후, 성현이가 더 센데.

이후 한국시리즈에 대한 티저 영상을 다 같이 시청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여러가지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으며,

“그럼 이상, 2019 KBO리그 대망의 한국시리즈 미디어 데이를 종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식적인 전야제가 마감되었다.

“형.”

“왜.”

상대편 감독님과 악수를 하며 덕담을 나누는 우리 감독님의 모습을 눈에 담던 도중 성현이가 날 불렀다.

“말 잘했네.”

“무슨 말.”

“도전하는 마음으로 안 하겠다, 뭐 그랬잖아.”

“그랬지.”

“좋네.”

턱을 오른쪽 아래로 살짝 당기자 시야의 곁다리에 성현이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아까 무슨 생각했냐.”

“언제.”

“내가 그 말하고나서. 뭐 생각하는 거 같더만.”

“그냥. 내가 왜 지고 들어가고 있었나, 싶은 생각.”

“이쯤 되면 다른 애들도 알아 들었겠지.”

“그러지 않을까.”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뵙죠.

인사가 끝난 감독님이 돌아오실 때쯤 나와 성현이는 회장의 뒷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시리즈라….”

허.

17시즌 미디어 데이 때 지껄인 소리보다 1년 빠르게 당도했다. 굳이 3년을 맞추자고 우승을 내년으로 미룰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한울아.”

“예, 감독님.”

“말 잘했다.”

“예…뭐. 그런 거죠.”

어깨를 툭툭 치고 본인의 차로 향하시는 감독님의 등판을 보자 한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

“왜?”

“아까, 원래는 무슨 말씀 하려고 하셨어요?”

“아까면? 너가 마이크 달라 하기 전에?”

“예.”

질문사항을 받은 감독님은 빠르게 답변을 내놓지 않고 그저 흐뭇하게 웃고만 있었다.

“아마, 한울이 너가 조금 직전에 생각했던 거랑 비슷한 말일 거다.”

“그럼 지금은요?”

“니가 생각하는 거랑 같은 생각이지.”

흐흐.

감독님의 대답을 들은 주둥이가 지멋대로 호선을 그렸다.

“몸 조심하고. 내일 보자.”

“네. 내일 뵙겠습니다.”

숙여졌던 허리의 각도가 180도로 되돌아왔을 땐 감독님의 자차가 하얀색의 네모칸을 비집고 나왔을 때였다.

칙, 치익- 후우…….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어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근처의 흡연구역을 발견한 발걸음은 홀린 듯이 그쪽으로 향했다.

건물 구석에 위치한 흡연구역엔 아무도 없었지만 조악한 조명 불빛 하나가 쓸쓸하게 재떨이를 비추고 있었다.

“후우….”

입에서 고작 10c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뜨거운 불이 타들어가고 있어도 무서움은 커녕, 나에게 편안함을 전달해주었다.

사실 얼마 전 진지하게 고찰을 해본 적이 있다.

야구라는 건 나에게 있어 단순한 밥벌이에 지나지 않았다.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나가 좋은 밥을 먹기 위한 매개체. 야구에 대한 나의 동기부여는 분명 그쪽에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그런 생각을 고쳐먹게 된 게. 아니, 고쳐먹었다기보다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라는 게 생긴 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잇, 깜짝이야, X팔!”

쪼그려 앉아있던 다리가 순식간에 펴졌다. 벌렁거림을 주체하지 못 하는 심장의 명분은 담배가 아닌,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어어. 아냐, 괜찮아.”

뜬금없이 나타나 듣기 좋은 목소리를 흘린 박해진에게 있었다.

“…아, 놀래라.”

“괜찮으셨던 거 아닙니까?”

“아니, 놀란 건 맞는데, 그, 저기. 아이고야….”

후우…….

필터에 다다른 불꽃을 시야에 담아내자 떨리던 심장과 손발이 진정되었다.

“너도 담배 피우냐?”

“아닙니다. 집에 가려던 참인데 선배님께서 보이시길래 와봤습니다.”

“아…그래.”

커피 찌꺼기로 만든 재떨이에 꽁초를 푹 찍어넣었다. 하나만 피우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괜한 분위기가 잡히자 조금 더 피우고 싶어졌다.

“…아. 괜찮냐?”

“예. 괜찮습니다. 편히 피우십쇼.”

“미안.”

박해진에게 양해를 구한 뒤 새로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사그라들었던 불빛이 다시 점등되며 초라한 조명에 힘을 보탰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왔어. 딱히 할 말이라도 있어?”

“개인적으로 뵙는 건 오랜만이라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냥….”

“…….”

녀석은 답지 않게 시원히 이야기를 하지 못 했다. 가만히 시선을 녀석에게 고정하며 기다렸다.

담배연기가 녀석쪽으로 가지 않도록 주둥이만 옆으로 비껴내 뿜는 내 면상이 떠올라 웃음이 나올 것 같을 때,

“아까 그건 어떤 말씀이셨습니까?”

“뭐?”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에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하셨지 않습니까.”

“아…그거.”

말을 하다가 중간에 끊고 잠시 박해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무표정은 마치 벽과 같이 느껴져 속마음을 이야기하기 적당해보였다.

“너는 무슨 생각으로 야구하냐.”

“저야….”

질문을 던졌는데 오히려 역으로 질문이 날아올 건 생각을 못 한 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얼굴이 꽤나 생경했다.

“재밌습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다고 느낄 뿐입니다.”

“재미라….”

“선배님께선 야구가 재미 없으십니까?”

“옛날까진 재미없었어. 아무것도 모르고 야구만 할 줄 알던 내가 유일하게 붙어먹을 수 있는 돈벌이라고 생각했지.”

“그게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알아. 내가 그때의 생각을 후회한다, 그딴 소리가 하고 싶은 건 아니야. 그냥….”

후우…….

“단순한 돈벌이라고 생각했던 게 잘 굴러가니까, 이젠 이긴다는 걸 계속 이어가고 싶어지더라.”

푹―

“그냥 이제는 우선 순위가 바뀐 것 같다고.”

“어떤 우선 순위입니까?”

“돈을 벌기 위해 좋은 성적을 내서 이기자. 이게 아니라, 좋은 성적을 내고 또 이기면 돈은 알아서 따라오겠지. 이렇게.”

얘가 과연 이해를 할까.

“사람이 참 간사하지. 성적이 안 나올 땐 돈 벌고 싶어서 매달리던 놈이, 성적 좀 나온다고 이렇게 뻗대는 게.”

“사람은 원래 간사한 동물 아닙니까.”

“니가 그런 소릴 할 줄은 몰랐다, 야.”

피식, 웃으며 담뱃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슬슬 진짜 집에 갈 때가 되자 박해진을 지나쳐 흡연구역을 빠져나왔다.

“저도 사람입니다. 저도 성적이 안 나올 땐 짜증도 나고 화도 납니다.”

“그런 걸 한 번도 못 봐서.”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게 할 뿐입니다.”

하긴. 얘도 사람인데.

“야.”

“예.”

“너, 기억하지. 나만 만나면 계속 홈런쳤던 거.”

“예.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올해는 세 번 만나서 세 번 다 졌잖아.”

“맞습니다.”

“빡쳤냐?”

조금은 도발적인 기운이 가득한 질문에 녀석은 묘하게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선배님. 왜, 그 말 아십니까.”

“뭔 말.”

“제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멋진 표정으로 개드립을 친 국가대표 4번타자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본인의 차량으로 향했다.

“…미친새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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