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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11화 (111/190)

111화. 마지막 이닝

형, 오늘 내가 왜 밥 사는 건지 알아?

한국시리즈 7차전의 선발투수로 예고되었던 규진이형은 꽤나 어리석은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딱―

“쓰리 밟아!”

“바로 퍼스트!”

모르긴. 잘 아는구만.

아웃 카운트를 하나밖에 올리지 못 한 상황에서 강습 타구를 낚아챈 성훈이형은 벌떡 일어나 3루를 밟았다.

그 후 베이스의 안쪽을 스타팅 블록 삼아 1루쪽으로 한 걸음 내밀었다.

“아우웃!”

내일 경기 부디 잘부탁드립니다, 라는 의도가 다분했던 식사 대접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5회에 들어 주자를 두 명이나 내보내는 위기를 맞았지만 5-3 더블 플레이로 깔끔하게 위기를 탈출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어제 먹은 소고기가 일을 잘하나보네.”

“이런 걸 바랐으면 나만이 아니라 팀원들 전체한테 다 쐈어야지, 인마.”

“선생님, 제 지갑을 대체 얼마짜리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피식, 하고 웃은 규진이형은 원하 챌린저스의 춘추자켓을 입었다.

1번타자, 이! 명! 진!!

“…한 점이 안 나네.”

“그러게.”

오늘 원하의 타격은 전반적으로 답답함이 느껴진다. 어제처럼 아예 한 명도 나가지를 못 하면 크게 기대도 하지 않을텐데,

따악―

와아아아-!!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고도 한 명도 부르지 못 하고 있다. 심지어 4회에는 무사 1, 2루 찬스를 말아먹기까지.

“야아아악!!”

“성현이 이어가자, 이어가!!”

침착되어있는 분위기를 살려보기 위해 명진이가 덕아웃을 가리키며 포효한다.

딱-!

할 수 있다고, 본인을 얼른 집에 돌려보내달라는 외침을 들은 성현이는 초구부터 거침없이 휘둘렀다.

“아….”

4-6-3 병살 타구.

이후 나선 기성이가 톡 갖다 맞춘 타구가 좌익수 앞에 떨어지자 괜히 더 속이 쓰렸다.

“…마지막이네.”

“뭐가.”

“다음 이닝이. 올해 마지막 이닝일 거 같은데 말야.”

“아….”

클리닝 타임이 껴있는 탓에 아직도 자켓을 벗지 않아 규진이형의 몸매는 어딘가 부해보였다.

마지막.

“그 마지막이라는 게 올해의 마지막이라는 뜻이겠지.”

“그거지. 뭐 다른 거 있어?”

“원하에서의 마지막이 아니길 부디 빌어요, 형님.”

“…….”

간절한 부탁에도 악독한 형님은 묘한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건영 씨!”

“아, 네!”

은구 선배가 불펜 안으로 들어와 건영이를 부르는 걸 보니 6회 초가 선발투수의 마지막 이닝이라는 건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퍼엉-!

뻥-!

규진이형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은구선배가 연습투구하는 걸 지켜봤다.

“너 공 많이 빨라졌더라.”

“아…그렇지.”

“X발.”

“갑자기?”

“넌 키 크고 제구 좋은 거 말곤 없었는데 구속까지 빨라지면 어쩌자고.”

“좋은 거지.”

“난 그렇다고 키가 크는 것도 아니잖아.”

음…….

“미안.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해.”

“나쁜 새끼.”

나 왜 욕먹은 거지.

규진이형이 욕설을 한 번 시원하게 내뱉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켓을 벗어 본인이 앉았던 자리에 툭 던졌다.

오른손으로 글러브의 엄지 손가락 부분을 집어들고 불펜을 나서려는 규진이형은 키가 2m 정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형. 멋지게 들어와.”

“키 작아서 폼 안 나.”

“아….”

키라는 게 중요는 하지. 아니, 매우 중요하지.

펑-!

“쓰라이앜-!”

근데 규진이형을 보고 있자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더라.

딱-!

“아웃-.”

타자 두 명을 손쉽게 처리하는 모양을 보자니 6회 초까지는 일단 쉽게 넘어가겠거니 생각했다.

“후우…직구!”

“직구우!”

문득 선발투수와 호흡을 나란히 하고 있는 불펜투수쪽으로 시선이 갔다.

퍼엉-!

겨우 불펜에서 몸을 푸는 정도인데도 살벌함이 느껴진다. 은구 선배 또한 이를 갈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를 버려?

고작 2년 전 이맘때, 우리와 상대하고 있는 팀의 소속으로 우승 반지를 손에 얻었던 사람은 묘한 구석에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직구!”

“에이!”

뻐엉-!

저거 괜찮나.

복수심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과몰입이라 해야할지.

리그 최강의 팀은 최은구라는 선수가 굳이 없어도 잘 굴러가는 팀이었다. 따라서 굳이 좋은 계약서를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잦은 헌신으로 우승에 대해 분명한 일조를 해왔던 불펜투수는 해당 면접에서 아쉬움만을 느꼈다.

“선배.”

“응?”

“힘 빼요, 힘 빼.”

“아….”

보다못한 내가 한 마디 거든다. 선배한테 훈수질하는 걸 보고 누군가는 뭐라할 수도 있지만, 주장인데 어때.

“…고마워.”

“이깁시다아.”

“이겨야지.”

어느새 6회 초가 끝나고 규진이형이 돌아오고 있었다. 정말로 본인의 마지막이 끝났다는 판단이 섰는지 곧장 덕아웃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승주부터 시작한 6회 말은 다소 아쉽게 세 명으로 마무리가 되고…….

“슨배 힘쇼오!!”

“이기고 올게.”

“예아아아!”

은구 선배가 마운드로 나섰다.

“한울아.”

“예?”

“8회 나간다.”

“아, 네.”

내가 마지막으로 시선에 담을 수 있는 건 154km짜리 직구를 던지는 은구 선배의 모습이었다.

“건영아, 조금만 더 수고해줘.”

“네에!”

힘들지도 않은가.

건영이는 해맑게 웃으며 다시 마스크를 쓰고 홈플레이트 뒤에 앉았다.

몇 번 정도 공을 던져댔을까.

“…뭐야?”

좋지 않은 의미로 차분하던 덕아웃의 분위기가 구장 전체로 확장된 것을 느꼈다.

확인을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아이고야.”

점등되어 있는 빨간불은 단 한 개. 그러나 투수를 위협하는 주자는 세 명.

은구 선배는 얼마 전까지 본인의 공을 받으며 함께 기뻐하고, 또 함께 슬퍼했던 상수 타이거즈의 포수와 마주하고 있었다.

투수와 포수가 아닌, 투수와 타자로. 적군으로.

“뭔데 또 이게 이렇게 되냐.”

“그러게.”

아이싱을 마친 규진이형은 덕아웃이 아닌 불펜으로 들어와 내 옆에 섰다.

같이 살던 안방마님이 아닌 같이 사는 안방마님의 말에 따라 은구 선배는 이를 악 물었다.

띡-!

“파울-!”

심판이 제 머리 뒤로 넘어가는 야구공을 보고 양손을 들어보였다.

타자는 배트를 만지작거리며 다음 투구에 대한 준비를 했다.

포수는 그런 타자를 보며 다음 계획을 수립했다.

투수는 그런 포수의 사인에 따라 와인드업을 잡았다.

각자가 각자만의 사유를 가지고 행한 일의 결과라는 게,

딱-!

양측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갈 수는 없다.

“컷, 컷! 써드 컷!”

좌익수가 던진 공이 홈까지 도달하지 못 하고 3루수 선에서 정리가 되었다.

2 대 0.

본인이 만들어놓은 망작에 대한 분풀이일까, 아니면 이 망작을 만든 게 본인의 전처여서 였을까.

은구 선배는 감독님이 마운드에 방문할 때까지 본인의 분한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 했다.

“…한울아, 조금만 빨리 나가자.”

“네.”

그 결과는 강판.

안타를 맞았다, 실점을 했다, 그로 인한 분노를 감추지 못 했다는 질책성이 아닌, 그로 인해 앞으로가 어려워 보인다는 투자성의 강판.

쓸쓸하게 돌아오는 은구 선배를 스쳐지나갔다. 멍청이처럼 힘내라는 둥, 선배는 잘했다는 둥, 개소리를 지껄이지는 않았다.

그저 은구 선배가 내려왔던 길을 올라 플레이트를 밟았다. 1루, 그리고 2루를 밟고 서있는 주자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심판을 노려봤다.

“플레이!”

연습투구가 끝나자 7번타자가 등장했다. 타자가 루틴을 진행하는 동안 어깨를 붕붕 돌리며 몸상태를 살폈다.

“좋네. 좋아.”

꽤나 많은 출근 도장을 찍었음에도 몸 상태는 아주 좋았다. 쌩쌩 돌아가는 어깨는 분명,

뻥-!

“스트라이잌-!”

최소한, 오늘까지는 아주 좋을 거야.

몸쪽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싱커를 본 좌타자는 움찔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고작 그거에 쫄아서 한 걸음 물러난 타자라면,

뻥-!

“스트라이잌-!”

바깥쪽 정확하게 꽂히는 슬라이더는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 하겠지.

손쉽게 카운트 두 개를 취득하고 잠시 공을 만지작거렸다. 짝다리를 짚고 있자니 시야의 왼쪽 곁다리에 1루주자가 보였다.

“보자….”

전광판을 보며 다음 이닝들에 대한 간략한 계산을 마쳤다. 야근이 아닌 조기 출근에 따른 컨디션 조절이 필요했다.

“…오케.”

마음을 정한 뒤 하얀색 검지 손가락으로 모자챙을 툭 쳤다. 규학이는 그걸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쪽 멀리 자리를 잡았다.

퍼엉-!

“볼-.”

149km의 직구. 공 두 개 정도는 빠진 구역은 선구안이 썩 좋지 않은 타자라 해도 쉽게 골라낼 수 있는 공이다.

야, 그럼 이건 어떠냐.

다음으로 이어진 내 동작은 바깥쪽에 싱커를 던질 것이라는 예고와 같았다.

“끅!”

마치 바깥쪽 꽉차는 직구처럼 보이지만,

딱―

종국에는 직전 공과 거의 비슷한 위치로 도착이 예정되어있던 공.

“쓰리! 쓰리 밟아!”

조금 전 5회 초 병살을 뺏어냈을 때처럼, 성훈이형은 백핸드로 타구를 잡아내고 베이스를 밟았다.

마운드 앞에 가만히 서서 또 조금 전처럼 1루로 송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착!

“아웃!”

병살 타구의 마무리를 두 번이나 겪은 기성이는 흥에 겨웠는지 맛깔나게 송구를 낚아챘다.

끄덕끄덕.

1차적인 위기를 마치고 불펜으로 돌아가 바로 자켓을 걸쳤다.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 탓에 자켓을 입어도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부디, 이 한기가 우리 타선에까지 영향이 가지 않는다면 좋을텐데.

8번타자, 문!! 규!! 하악!!

덕아웃에 돌아오자마자 포수장비를 풀고, 또 타격장비를 장착한 규학이는 본인에 대한 소개 멘트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2점.

여기서 홈런을 하나 얻어맞아도 1점의 여유가 생기는 상수는 필승조를 곧장 투입했다.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기엔 어딘가, 속에서 부글거리는 묘한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건영아, 캐치만 좀 하자.”

“네네!”

간단하게나마 캐치볼이라도 좀 하고 있어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아 빨간색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공 하나 던지고,

따악-!

공 던지는 거 구경하고.

딱―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자니,

“명지니지니 좋아아아!!”

“나이쓰으!”

규학이를 홈으로 불러들인 명진이가 1루를 밟고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고 있었다.

그러나,

딱―

바로 다음 타자로 나선 성현이는 3구째, 빠른 타구를 유격수쪽으로 보내버렸다.

“세컨! 바로 퍼스트!”

강습 타구를 막아낸 유격수가 2루로 토스, 그리고 여유 가득히 1루로 송구하며 그대로 이닝 종료.

텅-!

“X발!”

오늘 혼자서만 병살타 두 개.

성현이는 헬멧에 본인이 느끼고 있는 답답함과 분노를 가득 담아 땅바닥에 내던졌다.

떼굴떼굴, 굴러다니는 남색의 헬멧을 보며 다시 마운드로 향했다. 몇 번의 연습투구 이후 또 다시 만나는 8번타자,

빵-!

“쓰위잉, 아웃!”

9번타자,

빵―

“스트라이잌, 아우웃!”

그리고 1번타자.

퍼엉-!

“쓰윙, 아우웃-!”

모두 삼진을 뽑아내고 털레털레 우리 집으로 향했다. 불펜쪽에 시선을 주니 경석 선배가 몸을 풀고 있었다.

여기까지구나.

방금 전의 이닝이 올해의 마지막 이닝이라는 촉이 강하게 왔다. 글러브를 벗어 난간에 걸어놓고, 춘추자켓이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덕아웃 의자에 앉아 클린업 트리오의 불빠따쇼를 구경했다.

불꽃같은 기성이의 삼진 아웃.

진형이의 하얗게 불태운 중견수 플라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승주의 1루수 땅볼.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경기의 흐름 가운데 경석 선배가 마운드에 섰다.

강대현에게 2루수 땅볼을, 홍석진에게 좌중간 2루타를, 박해진에게는 삼진을, 마지막으로 하해진에게 3루수 플라이를 쳐내며 이닝 종료.

6번타자, 이!! 성!! 후운!!

“성훈이 가자아!!”

“아, 굿아이 굿아이!!”

덕아웃에 난간을 붙잡고 소리쳤다. 0-2 카운트에서 제발 그대로 돌아오지 않길 바라던 마음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7번타자, 전!! 성!! 문!!

“성문이, 빠이…커흑!”

혹사당한 성대가 칼칼함을 느끼고 사레들린 것처럼 기침까지 뿜어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8번타자, 문!! 규!! 학!!

따악-!

“규학이 나이쓰!!”

“안 끝났어, 계속 가!!”

“때려, 훈이형 날려버려억!!”

규학이가 또 한 번 안타를 치고 나갔다. 비록 2아웃 이후라고는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내용이었다.

“할 쑤 이써어어!!”

“안 끝났어, 안 끝났다고!”

“가자아아악!!”

저러다가 피를 토하지 않을까, 미친듯이 소리치는 성현이의 눈가가 물기 때문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렇게 잡다가 난간이 찌그러지지 않을까, 손에 힘을 가득 담은 태웅이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저 사람이 저런 면도 있구나, 항상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성훈이형이 감정을 이기지 못 하는 모습은 10년 동안 부대끼며 처음 본 것 같다.

9번타자, 유!! 후운!!

“훈아아아!!”

“빠따 화이티잉-!”

원하 챌린저스의 모두, 지금의 타자가 이번 시즌의 마지막 타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아니, 마지막 타자가 되어도 좋다.

따악-!!

이대로 담장을 넘겨버린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의미의 마지막 타자로 남을테니까.

와아악-!!

민종현! 민종현! 민종현!

하지만 함성을 뿜어낸 건 3루측의 응원석이었고 연호를 받는 건 잘맞은 타구를 때린 타자가 아닌, 그 타구를 담장 앞에서 점프 캐치로 잡아낸 좌익수였다.

본인의 글러브 안에 야구공이 얌전히 잠든 모습을 보고, 또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상대편을 보고 속이 쓰리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짝짝짝!

“나가자, 나가자!”

아무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덕아웃을 빠져나왔다.

2루 베이스를 가운데 두고 원형으로 모여 기뻐하는 상수 타이거즈 멤버들을 등지고 섰다.

눈 앞에서 승리를 놓쳤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1루측 응원석에선 우리를 향해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X발.”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우승이 이제는 지겹게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들에게도 박수를 보냈다.

“가자.”

착잡함이 담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본 뒤 다시 덕아웃쪽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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