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강행군
답답함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구장을 빠져나왔다.
어둑어둑한 구장하며, 사람 하나 없는 길거리하며, 모든 것이 딱 나를 위한 것 같았다.
밤 12시, 다들 밝은 얼굴로 모여있는 가로등들 사이 혼자 쓸쓸하게 낯빛이 어두운 친구 하나가 보였다.
내 표정이랑 비슷하게 느껴져 같이 있자면 착잡한 마음이 날아갈까, 유일하게 불 꺼진 가로등 아래로 향했다.
“후우….”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도 딱히 들지는 않았다. 그냥 허리와 목에 힘을 빼고 깜깜한 밤의 하늘을 멍청히 쳐다봤다.
“하아….”
쌀쌀한 가을밤은 벌써부터 입김에 색감을 부여했다.
집에 가기 싫다.
아싸리 4 대 0으로 깔끔하게 끝났으면 이렇게까지 아쉬움이 크지는 않았을텐데.
집에 가서 쉬자, 푹 자고 내일을 다시 시작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고생하셨습니다.”
“…….”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박해진이 서있었다.
“…넌 왜 집에 안 가고 아직도 여기 있냐.”
“저도 기분이 좀 싱숭생숭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우승 해놓고 뭔 싱숭생숭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묻는 말에 소리 없이 긍정을 표했다.
“…….”
“…….”
조용히.
둘은 가만히 앉아 밤하늘을 같이 바라봤다.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이랑 이렇게 있으면 괜한 말이라도 꺼낼텐데, 녀석도 나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야.”
“예.”
떠오른 무언가는 내가 의식하기도 전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잘하더라. 상수.”
“감사합니다.”
“우리도 잘했는데. 아쉽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선의 시작은 허무함이 아닐까.
길고 긴 레이스의 결승점 바로 앞, 1등이다아! 소리치며 좋아하다 역전 당한 느낌.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시즌이 끝나면 참 허무합니다.”
“허무하지. 막막하기도 하고.”
“내년 시즌은 어떻게 준비하실 계획입니까?”
“내년? 똑같지. 좀 쉬었다가 몸 좀 만들고, 시즌 들어가면…계속 던지고. 포스트시즌 올라가게 되면 죽어라 던지는 거고.”
말을 끝낸 뒤 옆을 흘끔 쳐다봤다. 구부정한 내 자세와는 다르게 반듯한 정자세로 앉은 녀석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재미없는 자세에 금방 녀석과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도 똑같습니다. 똑같이 조금 쉬었다가, 몸 만들고 시즌 들어갈 뿐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야구가 재밌댔지.”
“예.”
미디어데이가 끝나고 이 녀석과 나누었던 대화의 편린이 잠시 흘러갔다.
“…왜?”
“예?”
“왜 재밌냐고.”
“그냥…던지고 받고 치고, 그게 재밌지 않습니까.”
“흐음….”
묘한 콧소리로 적당한 반응을 보였다.
“선배님께선 어떠십니까.”
“나? 그 왜…그때 대답 안 해줬어?”
“옛날까진 재미가 없다 하셨다가…다음 이야기가 조금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어지간히 의식의 흐름 탔나보네.”
내가 던졌을 말에 내가 제일 어이가 없어 실실 웃었다.
“…재밌어. 요즘 들어서. 조금.”
“더 무서워지겠군요.”
“뭐가.”
“원하 챌린저스말입니다. 그리고 선배님도.”
“귀신도 안 무서워할 것 같은 놈이….”
“귀신은 저도 무섭습니다.”
“귀신이 무섭냐, 사람이 무섭지.”
아아, 이 무슨 의식의 흐름이란 말인가.
“들어가십니까.”
이제는 진짜 집에 가야지, 싶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지. 지금이 몇 신데, 하아암….”
양팔을 머리 위로 들고 쭈우욱 당기자 몸 구석구석에서 노곤함이 몰려왔다.
“넌 안 들어가?”
“저도 곧 들어갈 생각입니다.”
“얼른 들어가아. 피곤하게.”
갈라진 목소리를 내며 뒤를 슬쩍 보자 녀석은 어딘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현진이가 나를 볼 때의 표정.
“…왜?”
“이현진 선배가 한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걔 얘기가 왜 나와? 야야, 걔가 하는 말 듣지 마. 아니, 내 얘기 하는 거 걸러들어. 이상하게 나한테 뽕이 차가지고.”
충분히 주의할 점을 일러줬음에도 녀석은 미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나에 대해 뭔 소릴 했는지는 몰라도 뻔하지.”
걸어가면서 느끼는 이 한기는 쌀쌀함으로부터 비롯된 건 아닐 거다.
“이현진 선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선배님께선 야구계를 주름잡으실 분이다, 선배님께선 대단하신 분이다, 그딴 소리 했겠지.”
“그것 말고도 있긴 합니다만….”
“아 제발. 제발 좀 하지 말라 그래.”
내 차 근처에 도착하자 손을 휘휘 저어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의 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들어가.”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아…맞네.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구나.”
쿵―
가볍게 운전석 문을 닫은 뒤 창문을 내렸다. 아까부터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녀석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조심히 들어가고. 우승 축하한다.”
“예. 내일 뵙겠습니다.”
방금까지 기어봉을 만졌던 손을 몇 번 더 허공에 흔든 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흘끔, 하고 쳐다본 백미러엔 아직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해진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 * *
드르르르르륵―
캐리어의 조막만한 바퀴가 아스팔트에 갈려나가는 소릴 듣고 있으면 어딘가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이고야….”
한국시리즈의 석패를 아쉬워할 틈도 없이, 곧장 나는 고척구장으로 향해야 했다.
국가대표.
왼쪽 가슴에 태극기 하나 달고 경기 뛰는 게 물리적으로 큰 차이는 없겠지만, 뭐랄까…….
“와! 저기,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돼요?”
“네? 아, 네네.”
어! 김한울이다!
누군데?
야구선수!
오…….
정신적인 면이라고 해야하나…….
“오늘 경기 힘내세요!”
“예…감사합니다.”
아니면 부담감이라고 해야하나.
“후우…잘해야지.”
‘결과를 무조건 내야한다’라는 압박감은 한국시리즈 때보다 몇 단계 위에 있었다.
띵―
[한울 씨 파이팅!]
[토끼가 ‘화이팅’ 패널을 흔드는 이모티콘]
고척구장에 도착하니 무슨 알림처럼 민영 씨의 문자가 도착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답장을 남기자,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한국시리즈도 고생하셨습니다.”
자기네 홈구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진이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저기. 미안한데, 현진아.”
“예, 선배님.”
“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잘못했으니까.”
“예, 선배님.”
“…제발 그렇게 인사하지마.”
“노력하겠습니다.”
“…….”
벌써부터 골이 아파오는 기분을 느끼며 현진이를 따라갔다. 주우욱 따라가면서 익숙한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이 교차됐다.
“여어, 한울이.”
“하루만에 또 뵙네요, 감독님.”
“고생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한 상수 타이거즈의 김석주 감독님. 이번 프리미어12 대회에서도 감독직을 맡게 되셨다.
“한울이, 계약이 이제 얼마나 남았지?”
“저…이제 딱 2년 남았죠.”
“2년? 좋아, 딱 기다리고 있어.”
“에이, 또 살벌한 말씀을 하시네요.”
간단한 인사치레 후 고척 경기장의 전경을 둘러봤다.
집합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미리 움직이는 선수들도 보였고, 집합 시간보다 살짝 늦어 헐레벌떡 뛰어오는 선수도 보였다.
“경기 감각은 그래도 좋겠네.”
“아무래도 그렇죠? 당장 어제까지 경기 뛰었으니까요.”
“대신 좀 지쳐있을테고.”
“아무래도…그렇죠.”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내 상태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좋다고 나댔다가 얻어맞는 게 더 손해다. 나나, 팀이나.
“평가전부터 굳이 무리는 안 시킬테니까. 분위기만 일단 보고 있어.”
“옙.”
평가전.
국가대표가 초행길인 선수도 있고,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선수들도 있을 터.
시즌을 일찍 끝낸 선수들은 상무라든지, 아니면 포스트시즌에 탈락한 팀과의 연습경기로 감각을 끌어올려둔 상태였다.
초행길인 사람은 나도 포함되기에…아무래도 미리 와서 합을 맞춰봤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쩝.”
혼자 붕 떠있는 것 같은 느낌에 멀뚱히 서있자,
“이야, 김한울이가 여길 다 오고 말이야.”
우석이가 다가왔다.
“생각보다 국대 유니폼도 꽤 어울린다?”
“그럼요. 누구랑 다르게 키가 되니까요.”
“X발놈이.”
“미안하다,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했구나.”
절로 코 밑을 스윽 훑게되는 분위기. 허리에 뒷짐을 지고 흐-뭇하게 웃으며 약간의 담소를 나눴다.
이번 대회 참가한 선수들의 목록을 그라운드에서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티배팅 치고 있는 안병국.
펑고 받고 있는 조태풍.
불펜에서 공을 던지는 현진이.
그 공을 받아주는 헌철이.
기타 등등.
“어떠냐?”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
“그래도 국대 경험은 있잖아. 그때 생각해.”
“고등학교 때 얘긴데 의미가 있냐.”
“그 느낌만이라도 있으면 꽤 도움이 되니까.”
뻘하게 웃으며 각자 훈련하는 모습들을 지켜봤다. 그라운드의 구석을 흘끔 살피니 MBS의 중계진들이 오프닝 영상을 따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푸에르토리코의 선수들.
“…신기하네.”
여러모로 신기한 구석들을 느끼며 가방에서 튜빙 밴드를 꺼냈다. 오늘 등판을 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관리를 빼먹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오늘 야구 가방에서 글러브를 빼는 일은 없었다. 경기 시작 전에도, 경기 중에도, 경기 후에도.
4 대 0.
타선에선 최재원이 쓰리런포 하나를 때린데에 이어 김기윤이 적시타 하나를 보탰다.
컨디션 점검 차원에서 현진이, 임재혁 등 선발투수들이 나눠서 던지고, 이송인, 이강민 등이 또 쪼개 던져서 잘 막아내고.
수비야 뭐…….
“어때?”
“되게 맘이 편하던데요?”
경기 후반 대타와 대수비로 나선 규학이에게 물어보았다.
“확실히 정예는 정예더라구요. 이래서 국대, 국대 하는구나 싶었죠.”
고명현의 강습타구 처리라든가, 남동근의 다이빙 캐치라든가, 한창민의 좋은 송구라든가.
“기죽진 마라, 너도 저 사람들이랑 같은 급이니까 여깄는 거지.”
“뭐….”
대단한 사람들 앞에서 어딘가 위축되어 보이는 녀석에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겨우 한 마디로 괜찮은 건지 녀석은 밝게 웃어보였다.
경기 종료 후, 간단한 미팅을 마무리한 뒤 다음 날도 똑같이 푸에르토리코와 평가전을 가졌다.
두 번째 평가전은 한국시리즈 참가로 인해 지쳤던 선수들이 하루 쉬고 선발 명단에 이름을 대거 올렸다.
박해진이라든가, 성현이라든가, 혁준이라든가,
뻐엉-!
“스트라잌, 아웃!”
나라든가.
“후우….”
실전이라기보다는 연습경기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가, 딱히 긴장이나 압박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연습경기,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의미를 두지 않고 1이닝을 깔끔하게 막은 뒤 새 팀원들의 환대를 받았다.
“아오, 이러니까 내가 니 볼을 못 치지.”
“에이, 작년인가 저한테 홈런 때리셔놓곤.”
“그 다음에 하나도 못 치지 않았나.”
“타격 연습 좀 하셔야겠습니다, 슨배임.”
“아이, 진짜.”
2루수 김기윤의 립서비스를 받으니 기분이 훅 좋아진다. 와, 내가 진짜 이 사람들이랑 동급이라는 게 막상 경기에 등판하고 나서야 느껴졌다.
뭐랄까, 국가대표팀이라고 해서 그렇게 막 엄청나구나, 대단하구나, 그런 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력적인 부분 말고, 인간적인 부분이.
“용환아, 이거 이번에 받은 거냐?”
“아, 네네.”
“오, 이거 좋은데.”
“형도 거기 얘기해보세요. 우연히 알게 됐는데 괜찮더라구요.”
“뭔데뭔데?”
“글러브. 만져봐봐.”
“어…난 별로.”
동성의 유격수 최용환, KP의 2루수 김기윤, 비스코의 우익수 한창민.
어느 팀을 가도 쉽게 주전자리를 잡을 수 있는 선수들이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고, 또 그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은 결국 다 똑같았다.
“저기, 김한울 선배님.”
새 팀동료들의 잡담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앳된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엉?”
“안녕하십니까, 저…임재혁이라고 합니다.”
“어어, 알지알지.”
누군가, 하니 재작년 준플레이오프 때 KP의 1선발로 만났던 임재혁이다.
앳된 목소리만큼이나 앳된 얼굴로 쭈뼛쭈뼛거리는 임재혁의 손은 야구공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혹시 체인지업…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연히 되지. 일로 와봐.”
손짓하니 임재혁은 머뭇머뭇 하면서도 다가와 공을 건넸다. 그러자,
“야야, 나도.”
“선배님은 저보다 체인지업 좋잖아요. 그냥 그거 계속 던지세요.”
“내 거 포크볼 알려줄게.”
“오, 콜.”
상수의 박동일이 추가되고,
“저기, 저 슬라이더 좀 알려주실 분 안 계십니까.”
“야, 현진아. 송인이가 슬라이더 좀 알려달래.”
“슬라이더 말입니까?”
성운의 이송인과 현진이까지 합류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대략 여섯 명 정도의 투수들이 원형으로 모여 각자의 노하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혼돈과 화합 사이 그 어딘가.
여섯 명의 투수가 각자의 손에 야구공을 쥔 채 팔을 흐느적거리는 꼴을 누군가가 봤다면 꽤나 웃겼을 모양이지만,
“이렇게?”
“아니아니, 밀어야죠. 스핀 주면 안 되니까. 그렇지그렇지, 재혁이 잘하네.”
“이건 아닌 거 같고, 이거 맞아?”
“저는 꺾지 않고 던지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 힘이 들어가야돼. 여기, 벌린 데에.”
“어우, 이건 좀 아픈데.”
“지금 너가 여기에 힘 주고 있으니까 아프지.”
며칠 뒤 내 국가대표 데뷔를 함께 할 팀원들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