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업보
절대 져선 안 되는 상대가 있고, 또 절대 질 수 없는 상대가 있으며 절대 질 수가 없는 상대가 있다.
셋 다 그게 그거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자면 세 경우 모두 약간씩 어감이 다르다. 사용처 또한 마찬가지로 각자 다르고.
하지만 ‘일본’이라는 이 나라는 신기하게도 위의 세 경우가 모두 포함되는 경우였다.
단순히 패배했다는 것만해도 어마어마한 욕을 얻어먹는데, 거기다 결승 홈런을 때린 상대 4번 타자의 도발성 가득한 인터뷰까지 첨가 된다면.
“야, 있잖아.”
“넹?”
“오늘 이기면…아니지, 4번 그 새끼는 무조건 잡아라. 뚝배기 맞추는 한이 있더라도, 내보내지는 마라.”
한국인들의 사기는 더더욱이 배가된다.
오늘 선발인 혁준이는 내 협박성 짙은 부탁에 따봉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인터뷰하는 거죠. 아, 일본의 4번 타자인지 뭔지가 삽질해준 덕에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흐흐.
나랑 같이 지낸 세월이 꽤 되는 녀석이다보니 아무래도 나를 꽤나 닮아가는 것 같다.
어쩜, 내가 원하는 멘트만 이렇게 쏙쏙 골라올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제 경기가 끝난 후의 에노…뭐시기의 인터뷰는 팀 코리아 일원들의 귓가에도 도착했다.
거기에…….
- 이시타니 아츠시, ‘결승전이 기대되지 않는다.’
오늘, 결승적 직전 추가로 업데이트 된 일본측 선발 투수의 인터뷰.
인터뷰 내용을 간단히 해보자면 한국의 수준이 너무 낮아 일본의 승리가 뻔하기에 결승전이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지랄.
업보 하나 추가요.
그에 팀 코리아 일원들이 열이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렇게 받게 된 스팀이 또 다른 의미의 사기 진작이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
“야들아. 니네 이래놓고 집에 갈 수 있나?”
경기 시작 전,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장인 김기윤은 팀원들을 한데 모아놓고 간단한 연설을 시작했다.
어찌보면 꼰대니, 뭐 훈화 말씀이니, 누가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김기윤의 말을 듣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니네, 점마들 저리 지랄하는데, 이래놓고 집에 갈 수 있나!”
아닙니다!
“어제 봤지? 에노…뭐꼬?”
“에노키다 히데키?”
“그래, 금마. 금마랑 이시타니 아츠 뭐시기. 그 새끼도 지랄했대. 니들 이래놓고 집에 갈 수 있나!”
아닙니다!
“혁준이, 니는 대가리 날려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마라. 뒤에 형들이 다 알아서 해준다.”
“예!”
“빠따들도. 니들 제대로 보여줘라.”
“예!”
“가자!”
가자!
짧고 굵은 한 마디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부양시켰다.
대한민국의 공격으로 시작된 2019 프리미어12 대망의 결승전. 그 시작을 알리는 건 KBO의 1번타자 최우석.
우석이를 상대할 일본의 투수는 경기 시작도 전부터 주둥이로 업보를 한움큼 쌓아올린 이시타니 아츠시.
150km 초반대에 형성되는 직구와 다양한 변화구, 그리고 제구가 꽤나 좋은, 현재 일본 최고의 선발투수랜다. 참고로 좌완.
내가 우석이와 친해진 지 거진 15년이 됐지만, 저렇게까지 집중하는 모습은 정말로 처음 본 것 같다.
집중력.
어떤 이유가 되었건, 상승한 사기는 분명한 효과를 드러낸다.
퍼엉-!
“볼!”
그 효과는 여러군데에 나타난다. 눈의 결정력이든, 아니면 몸의 움직임이든.
뻥-!
“볼-.”
그것도 아니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100의 모두를 증명해보일 수 있는,
따악-!
“달려어어억!!”
“가라 우석몬!!”
결과가 되었든.
3-1, 우석이는 굳이 거기서 더 고르지 않고 존 구석에 들어오는 공을 결대로 밀어쳐서 좌익수 앞에 안타를 치고 나갔다.
1루를 밟은 우석이가 멀리 있는 우리를 향해 양손 엄지를 들어보였다.
“최우석! 최우석! 최우석!”
“따보오옹-!”
“따봉!!”
그에 우리도 양손 엄지로 화답했다. 이번 결승전에 돌입하기 앞서, 대힌민국 국가대표팀이 새롭게 만들어낸 세리머니였다.
언제였더라, 미국전이었던가? 박해진이 나한테 선사했던 따봉을 생각해낸 내가 팀원들에게 제의했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안타를 치거나 점수를 내거나, 아니면 호수비가 나왔을 때 엄지를 보여줄 것.
새로 생긴 우리팀만의 암묵적인 룰은 아주 좋게좋게 반영되고 있었다.
성현이가 번트로 우석이를 진루시켰을 때도, 김기윤이 잡히긴 했지만 잘맞은 타구를 만들어냈을 때도,
따악-!
“갔다아아악!!!”
“박해진! 박해진! 박해진!”
“따보옹-!!”
박해진이 도쿄돔을 도서관으로 만들어버렸을 때도.
따봉은 어김없이 도쿄돔 내 한국인들 사이에서 불 같이 번져가고 있었다.
“멋진 새끼야아악!!”
“따봉 두 개 받아라아악!!”
“해진이 좋아아!”
덕아웃에 도저히 앉아있을 자신이 없던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있었다. 선행주자였던 우석이의 에스코트를 따라 덕아웃에 들어온 박해진을 향해 양손으로 따봉을 보였다.
따봉!
그러자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두 개의 엄지 손가락.
2019년 11월 17일 저녁, 일본의 도쿄돔 구장. 그 중에서도 3루측 덕아웃은 선수들의 따봉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이 세리머니가 일본팀에게 좀 도발이 된 건가,
따악―
“세컨! 컷, 컷트!!”
규학이가 2번타자의 타구에 대한 방향을 조정했다. 다만 그 시점이 내야를 빠져나갈 때가 아닌, 내야로 들어오는 시점이었다는 게 약간의 문제.
오늘 한국팀의 선발이는 혁준이의 1회 말 투구를 보며 간단하게 설명을 해보자면, 혁준이는 잘하고 있었다.
응, 잘했지.
따악-!
와아악-!!
“아이고.”
상대방이 더 잘해서 그렇지.
땅바닥에 내려찍히기 직전까지 내려가는 슬라이더를 잡아당겨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꼴을 보고 참지 못 한 덕아웃의 한국인들은,
“괜찮아, 괜찮아!”
“혁준이, 따봉 받아라악!!”
“따보오오오옹-!!”
힘을 내라고 따봉을 선사한다.
홈런을 친 뒤 배트를 저 멀리 날려버리는 홈런타자의 배트 플립이든, 3루 베이스를 밟을 무렵 도발적인 시선으로 우릴 쳐다보든,
“혁준이 가자악!!”
“따봉, 따보옹-!!”
알 게 뭐야.
한국인들은 어린 일본인을 무시했다. 그의 실력, 모습 같은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큿소!
그냥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하는 것.
평소 내가 가지고 임하던 것의 범위를 개인이 아닌 팀으로 단정지은 것은 아주 좋은 효과를 발휘했다.
쓰리런을 맞고 난 뒤 다음 두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처리한 혁준이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아보였다.
“아, 점수 내줘요!”
“따봉, 따봉!”
“따보옹-!”
이쯤되면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따봉이 유행을 탄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따악-!
“따보옹-!!”
뭐 어때. 우리 잘났다는 의사 표현만 제대로 해내면 됐지.
2회 초 선두타자로 나선 하해진이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나긴 했지만, 다음 타자인 규학이가 또 다시 안타를 쳐낸 뒤 멀리서부터 따봉을 보내왔다.
비록 다음 타자들이 비교적 간단히 물러나며 점수를 더 내지는 못 했지만, 따봉을 주고 받는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혁준이가 삼진을 잡아낼 때도, 하해진이 호수비를 보여줄 때도, 남동근이 평범한 좌익수 플라이를 잡아낼 때도.
첫 공격과 수비 때의 화끈함은 어디로 갔는지, 이후 양팀 타선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조용히, 조용히. 5회 말 수비가 끝날 때까지도.
이 조용함이라는 건 마치 폭탄을 터뜨리기 전 나지막하게 내뱉는 카운트다운 같아서,
따악-!!
“가자아악!!”
“따봉, 따봉! 따보옹-!!”
또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따봉의 물결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보였다.
6회 초 공격, 박해진은 이시타니 아츠시가 쌓아올렸던 업보를 다시 한 번 청산했다.
“해진아, 따봉 받아라!”
“따봉입니다.”
덕아웃에 돌아온 박해진을 향해 쌍따봉을 선사하자 녀석 또한 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쌍따봉으로 대답했다.
미친놈인가봐.
4 대 3, 박해진의 투런포로 한 점을 다시 역전한 채 6회 말이 시작되었다. 마운드에는 여전히 혁준이.
우리의 6회 초처럼 2번타자부터 시작한 6회 말 수비라면, 필시 그 놈이 또 나오렷다.
“가자가자, 혁준이 가자아아!”
“보여줘! 혁준이 보여줘어!!”
어제와 똑같이 2번타자 타이틀을 달고 나온 타카야마 마사요시는 혁준이로부터 공 8개를 던지게 한 뒤 덕아웃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다음으로 나온 3번타자 이마나카 신고, 어찌보면 가장 일본 타선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타자지만 혁준이에겐 썩 힘을 못 쓰는 모양새였다.
직전 두 번의 타석과 마찬가지로 이번 타석 또한 삼구 삼진으로 깔끔히 물러나버렸다.
그 후 만나게 된 에노키다 히데키.
“맘 같으면 진짜 뚝배기 함 때려줬으면 좋겠는데.”
“진짜.”
“형 이따 만나면 해보실래요?”
“미쳤냐?”
국가대표팀에 합류해서 좀 친해진 비스코의 안치현과 담소를 나누며 4번타자의 대결을 지켜봤다.
뻐엉-!
“하아잌-!”
인성이든 국적이든을 떼어놓고 실력, 성적면만 본다면 에노키다 히데키는 이번 대회 내내 정말 최고의 타자다.
대회 기간, 6경기 동안 24타석에 나서 13안타 홈런도 5개. 어제 나한테 먹었던 삼진이 대회 기간 중 첫 번째 삼진일 정도.
인정할 건 인정 해야지.
녀석은 일본 뿐 아니라, 아마 세계구급으로 잘치는 타자에 꼽힐 거다.
하지만 본인이 본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한다고 하지.
퍼엉-!
“스위잉-!”
볼은 하나도 없이 스트라이크 두 개를 먼저 처먹은 카운트.
이게 참, 야구 이전에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일이라 이런 마음을 먹으면 안 되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아, 진짜 뚝배기 날려줬으면 좋겠다.”
“진짜.”
옆에서 안치현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팡-!
“볼!”
3구째는 커브였던 모양이다. 옆에서 볼 때 높이는 맞았는데 볼 판정을 받은 걸 보니 옆으로 좀 빠졌나보다.
그리고 4구째,
퍼엉-!
“볼-!”
빠른 반응을 요구하도록 몸쪽 깊숙하게 꽂히는 직구를 던졌다. 이에 깜짝 놀란 타자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여기까진 그러려니 한다. 그러려니 하는데…….
“…뭐야?”
이후 에노키다 히데키가 혁준이에게 배트를 손가락 삼아 삿대질을 하며 뭐라뭐라하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 에에에!!
그에 우리팀에서 주장을 맡고 있으면서 가장 불 같은 성격을 가진 김기윤이 곧장 덕아웃을 뛰쳐나왔다.
나도 가만 놔둘 수 없기에 바로 따라가서 김기윤을 말렸다.
“아니, 저 돼지시끼가 뭐라노! 미칬나!”
“아, 형님, 저 친구가 족발이 처먹고 싶은가보죠, 아니면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됐든. 왜 자기 안 맞춰서 살 야들야들하게 안 해주냐고 화내는 거예요.”
내가 생각해도 말 같지도 않은 개드립인데, 듣는 사람을 어땠을까.
생각없이 던진 소리에 빵 터졌는지, 김기윤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일단, 다행히 벤치클리어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미국인 심판 또한, 본인이 보기엔 타자쪽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는지 타자쪽에만 경고 비스무리한 걸 주며 상황 끝.
“플레이”
잠시 중단되었던 2-2의 카운트가 재개되었다.
우리 시선에선 투수와 타자, 모두 등짝 밖에 보이지 않지만 확연한 차이가 보였다.
투수인 혁준이는 차분하게 규학이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
타자인 에노키다 히데키는 지 혼자 뭘 꼴받았는지, 씨익씨익거리며 혁준이의 투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
“이겼네.”
저런 멘탈로 어떻게 일본 리그를 폭격했다는 건지,
퍼엉-!
“스윙, 아웃!”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 따봉, 따봉!”
혁준이는 6이닝 동안 3실점으로 잘 막고 본인의 임무를 마치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무수한 따봉은 덤.
뭐랄까, 분위기라고 해야하나, 멘탈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요소가 우세한 건 일단 우리팀 쪽인 것 같아서 쭉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흐음….”
7회 초 공격은 세 명으로 끝. 이후 7회 말 수비를 위해 비스코의 김송주가 마운드를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톡톡―
“한울아.”
“네? 네네.”
“8회 좀 부탁하자.”
“네.”
화이팅 대신 따봉을 나눠받고 있자니, 투수 코치님께서 다가와 8회에 대한 출전 대기 명령을 내리셨다.
단번에 고개를 끄덕거린 뒤 불펜으로 내려갔다.
먼저 스트레칭으로 가동범위를 쭉쭉 늘려줬다. 마음 같아선 한 한 시간 있다가 나가고 싶었다.
우리 수비는 5분, 우리 공격은 55분, 뭐 이렇게 해서 한 시간.
“직구!”
“에이!”
퍼엉-!
“커브요!”
“커브!”
빵-!
“아, 굿볼이야, 굿볼이야!”
“에이, 싱커요!”
“씽카아!”
퍼엉-!
애초에 한 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던져놔서 그런가,
“한울아, 한 5분 정도 후에 올라갈 거 같다.”
“5분이요? 네네.”
갑자기 던져진 5분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으으…아, 직구!”
“하이!”
따라서 공을 많이 던지기보다는 멘탈에 대한 정비를 우선적으로 실시하며 연습피칭을 이어갔다.
“한울아, 라스트!”
“예, 직구 하나 더!”
“어이!”
퍼엉-!
“가자!”
“네!”
워밍업 종료.
정말 올해 마지막 투구가 될 가능성이 높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했다. 제대로 박살내겠다는 소리지.
“으으으윽, 하아….”
마운드에 도착한 뒤 어깨쪽을 쭈욱 늘려주자니 이상한 신음소리 비슷한 게 나왔다.
홈플레이트 뒤 규학이가 자리하고, 직구를 던지겠다는 사인을 보낸 뒤,
퍼엉-!
“아이, 좋아, 굿볼이야!”
직구부터 연습투구를 시작했다. 전반적인 구종들을 던져보며 느낀 점,
“어우…좋은데, 오늘.”
안 그래도 좋았는데 상대방의 쓸데없는 도발로 인해 컨디션이 두 단계는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기분.
띠링-!
[따봉!]
-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전구종 +1
퀘스트의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들어 흐뭇, 하게 웃고 있자니 이번 8회 말 수비 선두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나 익숙한 얼굴에 전광판을 들여다보니,
2번타자, 타카야마 마사요시.
또 한 번 2번타자부터 시작하는 이닝.
그렇다면…….
이번엔 고개를 돌려 1루측 덕아웃을 봤다. 타격 장비를 찬 채 이쪽을 노려다보는 타자 하나가 보였다.
“흐흐.”
올해 마지막 이닝이 꽤나 재밌어질 것을 예감한 채,
“플레이!”
8회 말 수비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