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17화 (117/190)

117화. 따봉

투수는 나. 그리고 규학이.

원하 챌린저스에서 다년간 호흡을 맞춰오며 국가대표 자리에까지 올라선 배터리는,

뻐엉-!

“하잌-!”

타자의 고개를 다시 한 번 갸웃거리게 만들 수 있다.

분명 나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나와 한 번 상대를 해봤음에도 타자는 이전보다 더 큰 확신을 가지지 못 하고 있었다.

약하게 웃으며 규학이의 다음 사인을 기다렸다. 규학이는 낮게, 존에서 체감상 하나 정도 떨어지는 커브를 요구하고 있었다.

커브, 좋지.

“읍!”

굽혀진 손가락들 중, 유일하게 펴있는 검지 손가락이 정확하게 가리켰다.

빵-!

“하이잌-!”

안 친 걸까, 못 친 걸까.

낮은 곳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커브를 본 타자는 타석에서 벗어나 배트를 휘적거렸다.

그 움직임에는 감춰보려고 애를 쓰기는 한다만, 감춰지지 않는 불편한 같은 게 분명히 보였다.

일단은 네가 어떤 투수인지 지켜보겠다, 지켜보고 그 보고서를 다음 타자와 우리 덕아웃에 전달하겠다.

그런 의도는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0-2라는 최악의 카운트에 몰린다는 맹점은 어쩌고?

아니면 뭐,

뻐엉-!

“볼!”

그것마저 각오하고 실행한 걸 수도 있고.

좋은 카운트를 잡은 후, 바로 승부를 들어가기 위해 몸쪽을 파고 들어봤지만 살짝 깊었다는 판정을 받아버렸다.

규학이도 별 미련없이 공을 돌려주는 걸 보니 확실히 볼인 모양.

그래도,

“읍!”

한 번 깊숙하게 찔러본 덕에 나온 타자의 반응으로 다음 공을 쉽게 정할 수 있었다.

딱―

여전히 나에 대한 타이밍을 맞추지 못 하고 있다는 점. 이는 바깥쪽의 싱커가 빗맞으며 3루쪽으로 굴러가는 것으로 대변할 수 있다.

“빠르게, 좀만 빠르게!”

“퍼스트, 퍼스트!”

적당한 속도로 굴러오는 타구를 잡은 3루수 하해진은 상대 타자의 주력을 생각하며 한 동작 빠르게 움직였다.

거의 잡자마자 던진듯한 모양새, 한 박자 빠른 송구는 제 아무리 발이 빠른 타자주자라고 해도,

빵!

“아웃!”

쉽게 아웃을 잡아낼 수 있다.

짝짝짝!

글러브 손등으로 박수를 힘껏 치며 좋은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내야수들의 라운딩은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던 하해진의 손에서 끝이 났다. 눈빛으로 서로의 화이팅을 확인한 뒤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후우….”

그리고 등장하는 3번타자, 이마나카 신고.

그리 썩 이미지가 좋지 않은 일본 선수단들 중 나에겐 꽤 괜찮은 이미지를 가진 선수였다.

때문에 그를 맞이한 내 얼굴의 미소는 순수한 즐거움을 표현했다.

재밌겠다.

내 미소를 타자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저 독기 어린 미소의 뜻은 그런 거 아닐까.

너, 오늘은 진짜 뒤졌다.

존과 코스, 속도에 대한 약점이 거의 없으면서도 발까지 매우 빠른 타자를 상대로 규학이는 어떤 리드를 할까.

초구는 무난하게 싱커. 바깥쪽에서 도망가는쪽으로.

조심스러운 접근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원하는만큼의 투구를 위해, 딱 원하는만큼의 집중을 갈아넣었다.

원하는만큼의 투구라는 건,

“읍!”

겁나 정확하게. 따라서 원하는만큼의 집중이라는 것 또한,

뻐엉-!

겁나 많이.

“…볼!”

바깥쪽에 걸치게 잡아주지 않으려나, 생각했지만 심판은 꽤나 장고 끝에 볼을 판정했다.

홈플레이트 거의 끝까지 마중나간 배트를 힘겹게 억누른 이마나카 신고가 규학이를 향해 짧은 단어들을 이야기했다.

입 모양을 보자니 슈-토? 그러는 거 같은데, 슈트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

생각도 안 하고 있던 곳에서 갑자기 외국인이 말을 걸어오자 규학이가 좀 당황했는지 어벙벙거리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 어벙벙한 바로 다음 리드에서도 흔적이 보였다. 상대 타자가 그런 면까지 노리고 물어본 건 아니겠다만,

가운데에 스플리터, 이번엔 최대한 걸치게.

영 사인을 정하지 못 하는 포수가 안타까워 결국 내쪽에서 사인을 보냈다.

하얀색 검지와 중지의 움직임을 확인한 포수가 빠르게 사인으로 교환하여 반송했다.

글러브의 움직임이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그립을 바꾼 뒤 양손을 머리 뒤로 넘겼다.

그리고,

“으윽!”

송진가루 덕분에 너무 끼지도, 너무 빠지지도 않은 곳에서 공이 빠져나갔다.

스트라이크 존의 한가운데로 향하는 직구처럼 위장한 스플리터는 막상 타자의 배트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

배트로부터 숨기 위해, 공은 가파르게 아래로 낙하했다.

부웅-!

“스위잉-.”

아마, 공이 가벼운 물질이라면 저 배트의 풍압에 의해 궤도가 변경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살벌한 스윙.

제 스윙을 감당하지 못 하고 흘러내린 헬멧을 다시 고쳐쓴 타자는 다시 배트를 돌리며 나에 대한 집중을 이어갔다.

“싱커…스플리터….”

어제 이 타자를 어떻게 잡았더라.

바깥쪽 직구 루킹, 높은 직구 볼, 바깥쪽 체인지업 스윙, 몸쪽 슬라이더에 잘맞은 1루 땅볼.

어제의 내용을 복기한 뒤 직구 그립을 잡았다. 던질 곳은,

“으읍!”

어제의 초구와 같은 곳.

딱-!

“파울-!”

정확하게, 바깥쪽 애매한 구역에 직구를 던졌다. 어제 초구로 흘려보낸 뒤 나에 대한 경계심을 한 단계 끌어올렸던 구역.

직구 계열에 대한 타이밍은 얼추 맞는 것 같고, 그렇다고 커브를 던지자니 맞을 것 같고.

“…체인지업인가.”

어제 체인지업에 화답했던 거창한 헛스윙을 떠올렸다. 흐음, 살짝 생각을 해 본 뒤, 지금의 카운트에서 하나쯤은 신중하게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지, 약지, 소지, 세 개의 손가락이 모자챙을 툭 친 뒤 왼쪽 팔을 주욱 쓸어내렸다. 사인을 확인한 규학이는 엄지와 검지로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이게 되려나, 싶으면서도 일단 마음을 먹었으니까 던져봐야겠,

“끅!”

…지!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손가락 사이에 살짝 낑기듯 걸친 공은 직구와 거의 같은 회전으로 바깥쪽 존으로 향해갔다.

아마 저대로 놔둔다면 더더욱 빠져나가 볼이 될 계획이지만,

부웅-!!

타자는 헛스윙을 하고 트레이드마크처럼 흘러내린 헬멧을 다시 고쳐썼다. 그리곤,

“스윙, 아웃!”

집에 가야지 뭐.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양새는 무엇이 잘못되었나는 곰곰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이마나카 신고를 스쳐지나가며 뭐라뭐라 한 소리 하는 4번타자, 에노키다 히데키.

뭐? 한국 투수들 수준이 낮아?

그런 망언을 지껄인 타자가 등장하자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진짜 뚝배기 날리고 싶다!”

어차피 아무도 못 들을 거, 들어도 무슨 뜻인지도 모를 거, 심지어는 중계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을 거, 시원하게 한 번 소리를 지르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한껏 가벼워진 맘으로 규학이를 보고 있자니, 나를 노려보고 있는 에노키다 히데키가 시야의 한자락에 걸친다.

타석에 들어섰다면 투수에 집중을 하는 건 좋지만, 저렇게까지 볼살이 푸들푸들 떨릴 정도로 과몰입하는 건 썩 좋지 않을텐데.

규학이는 지금 타자가 가지고 있는 흥분을 제대로 읽어낸 모양이다.

빵―

“하이잌-!”

커브를 던져놓고 전광판을 확인하니 112km. 이만하면 꽤나 좋은 도발이 되었다 생각해서 다시 타자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고, 무서워라.”

성능 꽤나 확실하다.

타자의 기세에 눌린 두려움이 웃음, 혹은 미소라는 감정으로 덧씌워져 밖으로 표출되었다.

그래, 반어법이다, 새꺄.

한 번 봐주셨다고 공언하셨던 만큼, 초구 커브도 분명 봐주셨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다음 공도 한 번 봐주시지 않을까.

그런 마음, 혹은 그런 부탁을 가지고 몸쪽으로 싱커를 던져넣었다. 이전 타자, 이마나카 신고에게 던졌던 초구와 똑같은 구역.

딱, 팍!

볼로 판정받을 수 있는 구역이지만 에노키다는 굳이 그걸 건드렸다. 그리고 그 타구에 본인의 발을 맞고 말았다.

보호대도 차지 않았기에 타구에 의한 충격은 아마 그대로 본인의 발에 전달이 됐겠지.

아유, 꼬셔라.

때문에 아주 잠시 중단된 틈에 우리 덕아웃으로 눈을 돌렸다. 도쿄돔 구장 내에서 유일하게 환호하는 인원들 중,

따봉.

현진이는 약소하게 엄지를 선보이며 비루한 환호를 보내왔다.

자, 타구에 의한 충격으로 앞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 타자를 상대한다면 뭐다? 빠른 직구지.

제대로 지지대 역할을 해주지 못 하는 앞발을 가지고 가장 빠르게 반응해야하는 공을 쳐내는 건 어려우니까.

하지만 마음은 직구가 아닌, 다른 구종을 부르짖고 있었다.

새끼 손가락, 하나.

아마 홈플레이트 뒤에 앉아있는 포수가 헌철이라면 두 눈을 땡그랗게 만들었겠지만, 이미 내가 어떤 놈인지를 알고 있는 규학이는 그러려니하며 내 사인을 받아들였다.

속으로만 씨익 웃으려고 했는데, 이 웃음이 밖으로 보였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윽!”

곧게 펴진 검지 손가락 하나만큼은 타자에게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웅―

지금 상황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공과 구질면으로나 구속면으로나, 가장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공을 던지자 타자는 아주 좋아 죽으려고 했다.

“스윙, 아웃-!”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커브볼.

직구와는 정반대로 아주 느린 공은 또 그만큼 기다려야 하기에, 기다리는 동안 방금 전의 충격이 다시 새록새록 올라왔나보다.

헛스윙도 헛스윙인데, 아주 그냥 제자리에서 나자빠지듯 꼴사나운 헛스윙.

띠링-!

[따봉!]

-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전구종 +1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86+1=87

커브 – 82+1=83

슬라 - 81+1=82

스플 - 80+1=81

체인 - 82+1=83

싱커 - 81+1=82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호오오오오-!”

“아이, 한울이 좋아아아!”

“따봉, 따보오옹-!”

그 꼴사나운 모습을 함께 직관했던 팀원들과 함께 우리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나보다 늦게 덕아웃에 도착한 팀원들을 하나하나 기다리며 감정을 나눴다.

그 중,

따봉.

박해진은 좀 전의 현진이처럼 무뚝뚝하게 엄지 하나를 선사하고 나를 스쳐지나갔다.

저 놈도 정상은 아니구나, 싶은 생각을 마친 뒤 덕아웃에 앉았다. 아마 마무리는 다른 투수한테 시키겠지.

멀고 먼 중견수 자리에서 빠르게 뛰어와 얼른 타격장비를 마치고 그라운드로 나가려는 우석이가 보였다.

“우석아, 따봉!”

가만히 있을 수가 없기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손의 엄지를 들어보였다.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우리 덕아웃 내부를 통타했다.

“따봉, 따봉 받아라아!”

“우석이형 따봉이요!”

이 흐름은 타석에 나가야 하는 당사자조차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덕아웃을 나서기 직전,

“따봉!”

우석이는 우리에게 걱정말라는 듯 엄지를 한 번 내려보였다. 따봉이 따봉을 낳고, 따봉이 쌍따봉을 낳는 선순환 속에,

“따보오옹-!!”

“최따봉, 가자악!”

따악-!

“와아아악!!”

“달려, 달려!!”

우석이는 초구부터 참지 않고 우중간쪽의 얕은 2루타를 기록했다. 2루를 밟고 약소하게 덕아웃으로 따봉을 보내는 모습을 보자니 꽤나 귀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따봉을 계승한 우리 대한민국의 깡패, 강성현.

따악-!

“깡패가 도쿄돔에 따봉을 풀었다악!!”

“따봉을 풀었다아아!!”

쇼맨십.

성현이는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타구를 천천히 구경하며 1루를 향했다. 막 1루 베이스를 밟을 무렵,

“따보옹-!!”

“강성현! 강성현! 강성현!”

도쿄돔이 조용-해지자 성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우리 덕아웃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따봉!”

따봉을 풀지 않았다. 베이스를 도는 내내, 3루 덕아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성현이는 다음타자에까지 따봉을 계승시켰다.

따봉.

따봉의 물결은 당분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김기윤이 단타를 치고 나가서도, 그 다음으로 나선 박해진이,

따악-!!

“박해진! 박해진! 박해진!”

“해지나아아!”

“따봉 받으십셔어어!”

도쿄돔을 도서관 수준이 아니라 거의 방음부스로 만들어버렸을 때도.

9회 초 공격에만 대거 7득점.

한 점차라는 다소 불안한 리드는 순식간에 무려 8점의 리드라는 어마무시한 수치로 뻥튀기되었다.

그 때문인지, 9회 말 수비에선 다소 긴장감이 떨어진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딱―

우리가 아닌, 일본 타자들쪽에서.

“마이, 마아아!”

“레프트, 레프트가!”

“좀 더 앞에!”

선두타자로 나선 5번타자는 마무리를 위해 나선 이송인의 초구를 어설프게 건드려 좌익수 앞쪽으로 띄워보내버렸다.

“아웃-.”

우리는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았고, 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을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했다.

틱-!

6번타자를 상대하는 모습에서 그런 약조가 아주 잘 드러났다.

배트 끝에 맞고 애매한 속도로 굴러가는 타구를 확인한 박해진은 제 오른발을 떼면서 동시에 외쳤다.

“송인이 들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송인은 이미 진작에 1루를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한 뒤.

“1루, 바로 던져!”

이송인은 박해진이 토스한 공을 받으며 동시에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어제 내가 등판했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지만,

“아웃!”

이번만큼은 그 누가봐도 아웃임이 확실했다.

9회 말 2아웃. 양팀이 서로 다른 의미로 긴장하는 가운데, 우리 덕아웃에선 동원 가능한만큼의 따봉들을 일발 장전하고 있었다.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고, 직구로 파울을 만든 다음,

뻐엉-!

“하아아아앜-!!”

다시 한 번 직구로 삼진을 잡아낸 이송인은 글러브를 제자리에서 벗어던지며 환호했다.

규학이도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마운드로 내달렸다. 우리 덕아웃도 참을 수 없기에, 곧장 양손에 엄지를 장착하고 마운드로 뛰어갔다.

따봉-!

“야아아악!”

“호오오오-!!”

기쁨이라는 단어를 괴성이라는 존재로 치환한 채, 우리는 한동안 마운드 주변을 빙빙 둘러가며 따봉을 노나가졌다.

“따보오옹-!!”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