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셀카
시즌도 끝났고, 포스트시즌도 끝났고, 프리미어12 대회도 끝났고, 기타 개인 행사들도 이제 없고.
이젠 천천히 쉬면서 내년 초에 있을 스프링 캠프에 맞춰 몸을 만드는 것이 내 임무가 되었다.
“읏…읏! 으으으!”
한가함이 가득한 늦은 오후. 작은방에서 옷걸이에 걸어놓은 튜빙 밴드들을 당기며 최소한의 관리를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마지막 한 세트!
어깨 근육이 쪼개질 것 같지만 멈출 수 없다. 멈춰선 안 된다.
팡-!
“다학….”
오늘 할당량을 모두 채우자마자 손에서 힘을 그냥 축 빼버렸다. 그러자 고무 성질 가득한 밴드가 옷걸이에 부딪혀 흩날렸다.
“어으…어깨야.”
뻐근한 어깨를 툭툭툭 쳐주고 작은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아…규진이형은 잘 놀고 있나보네.”
고작 한 시간 반 동안 운동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연락이 와있었다.
우선 규진이형.
나보다 먼저 결혼했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신혼여행 가서 찍은 사진들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괜한 부러움에 속이 쓰려 사진들을 휙휙 넘겼다.
규진이형 다음은 승주.
[야 저녁 ㄱ?]
저녁이라…….
[ㄱㄱ]
좋지.
[뭐 먹?]
괜찮다는 답장을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왔다. 뭘 먹으면 좋을까…싶어서 고민을 좀 하다가,
[고기 ㄱㄱ]
고기를 골랐다. 고기 좋지, 고기.
[ㅇㅋ]
[훈이도 올 거]
[기범이랑]
어쩜,
원하 챌린저스 내 89년생 네 명이 정모를 하게 생겼다.
이후 시간과 장소를 대략적으로 잡은 뒤 다음 연락을 살폈다. 민영 씨로부터 날아온 안부 문자였다.
[한울 씨 한울 씨]
[이번주 만나면 여기 가볼까요?]
[링크 - RUN 방탈출 카페]
방탈출 카페라…이건 또 뭐야.
[네네, 좋죠.]
일단 답장을 보내놓고 민영 씨가 보내준 링크를 확인해봤다. 방탈출 카페가 대충 이런 데구나…확인하자 핸드폰 상단에 새 문자가 도착했다.
[네! 그럼 예약 잡아둘게요!]
이후 민영 씨와는 잡다한 담소를 나눴다. 그러다 회의가 있어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잠시 동안 통신두절.
그리고 다음으로 확인한 문자의 발신인은 우석이였다.
[이거 봤냐?]
[링크 - [단독] 한성 이용…]
뒷말이 짤리긴 했지만,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용호. 아주 그냥 개새끼.
하지만 이 놈이 뭐 어떻게 됐는지까지는 나오지 않았기에 우석이가 보내준 링크를 확인해봐야했다.
툭, 손가락을 한 번 옮기니 인터넷 창으로 곧바로 연결.
[단독] 한성 이용호 <-> 상수 김신우 1 대 1 단독 트레이드 타결
“…아니 왜?”
이해가 되지 않는 트레이드 내용에 빠르게 아래 기사 본문을 확인했다.
홍석진의 은퇴로 지명타자 자리가 비어버린 상수는 좋은 타자 한 명을 원했다.
19시즌, 이용호는 급격한 성적의 반등을 이뤄냈다.
근데 이용호의 수비는 여전히 쓰레기다.
한성은 타선, 수비보다 불펜진의 보강이 더 시급하다 판단했다.
그렇게 된 결과가 이것.
“이게 뭔….”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 기사 본문의 마지막 내용을 읽어보았다. 트레이드된 두 선수의 올시즌 성적이 첨부된 구역.
한성으로 떠난 김신우는 스킵하고, 2019시즌 이용호는 .324/.391/.487 슬래시 성적에 24홈런 89타점의 성적을 올렸다.
“이 새끼는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백업, 2군 취급을 받다 서른 중반 초입에 다다라서 타격 포텐을 터뜨린 타자의 이야기는 분명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몹쓸 짓을 어지간히도 하고 다녔던 새끼라면. 과연 그래도 마냥 기쁘게 축하해줄 수 있을까.
[상수는 이용호 얘기 모르냐?]
[우석 - 모를 리가 있나]
[우석 - 이용호 얘기는 일반 사람들도 알음알음으로 아는데]
[근데 무슨 생각으로?]
[우석 - 내가 어떻게 알아]
흐음…….
규진이형이 상수를 상대로 더더욱 불타오를 계기가 하나 생겼구만.
이 얘기를 규진이형한테 전해줄까 말까 고민을 좀 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우석이가 전해줬든, 아니면 직접 알게 되든 언젠간 알게 되겠지.
그보단 슬슬 외출 준비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적당히 씻고 옷 입고, 또 시계 한 번 확인해주니 출발 시간에 딱 맞는다.
안내를 시작합니다, 부터 시작된 네이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건대쪽 적당한 식당에 도착.
내가 제일 늦은 건 아닌지 자리에 혼자 딸랑 앉아있는 승주가 보였다.
“여어.”
“어, 왔냐.”
“애들은?”
“금방 온대.”
“금방? 그럼 시켜놓자. 사장님!”
적당히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애들이 도착하겠지, 싶어 삼겹살 4인분을 먼저 주문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승주는 한 가지를 추가주문했다.
“술 먹을 거야?”
“아…니, 난 차 가져와서.”
“사장님, 소주 하나랑 잔 두 개만요.”
이 술쟁이 새끼.
“뭐하고 지냈냐?”
“누가 들으면 한 몇 달 못 본 사람들인 줄 알겠네.”
“그냥 다 그렇게 얘기 트고 하는 거지.”
쌉소리에 승주는 피식 웃더니 밑반찬으로 나온 콩나물을 집어먹으며 이야기했다.
“그냥 내년 컨셉 좀 생각했지.”
“뭔 컨셉?”
“나도 내년 끝나면 FA 잖아. 조절 잘 해야될테니까, 어떤 식으로 잡을지에 대한 컨셉.”
“아…맞네. 생각은 잘 정리되든?”
“안 그래도 그 얘기 좀 할까 했는데.”
“엉.”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될 거 같더라.”
결말이 허무한 영화를 보면 느끼는 기분이 대충 이런 기분이 아닐까.
거창했던 전반부와 비교했을 때 심플하기 그지없는 결론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있잖아. 괜히 뭐 해보겠답시고 나대다가 쪽나는 애들. 그 꼴 나는 것보다는 그냥 지금 유지만 해도 되지 않냐?”
“그렇.,.지.”
“X발, 막말로 내가 다른 팀 가면 받아나 주겠냐. 지명 밖에 못 들어가는데.”
“외야도 어렵냐? 아직?”
“그냥 심심풀이 삼아서 캐치볼까진 하겠는데, 막상 필딩은 안 되겠더라. 너무 오래 쉰 것도 있고.”
교통사고로 인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손목으로 사실 여기까지 버텨온 것만해도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근데 그건 개인적인 이야기고, 팀의 입장으로 보자면 승주 같은 선수를 어떻게 분류할까.
수비는 아예 불가능, 컨택이나 파워가 월등한 것도 아닌 타자. 득점권 타율, 클러치 능력이 최상위권이라 평가 받긴 하지만 어차피 무형의 가치다.
“홍석진 선배님이 1년만 더 버텨줬으면 뭐, 타이밍 맞아서 내가 상수라도 갔을 수도 있긴 한데. 오늘 보니까 한성에 이용호 선배님이 상수 갔다매?”
“…그 새끼한테 선배님이라는 단어가 가당키나 하냐?”
“왜? 아.”
아무래도 내가 있던 양안고와는 좀 먼 지역구에 있던 녀석이라 그런가, 승주는 이용호에 대해 건너건너 들은 정도 밖에 모른다.
“에에에에!”
“호오오오!”
아주 조금, 심각한 분위기가 내려앉기 직전 기범이와 훈이가 등장해 다시 분위기를 띄웠다.
등장하면서부터 저런 생지랄이라니.
“야아아악!”
“와아아악!”
이건 못 참지.
항상 야구장에서만 보던 89년생 네 명은 사석에서 만났을 때도 똑같은 분위기를 소지했다.
“예에에에, 모였으니까 일단 마셔어!”
“예에에-.”
작은 삼겹살집에서 화기애애하게 한 잔씩 노나마시는 모습이라니.
“예에에에!”
나도 빠질 수 없지.
애초에 술 약속이 아니라 밥 약속이었던 탓에 차를 가져와 술을 마시지는 못 한다. 때문에 소주잔엔 소주가 아닌 사이다가 그득하게 들어있긴 했지만,
“크으….”
애초에 술자리라는 게 분위기에 취하는 거지.
“뭔 얘기하고 있었어?”
“그냥. 내년 얘기.”
“아아, 우리 꼬맹이 승주, 내년에도 잘 되게 해주십쇼오.”
“미친새끼야.”
갑작스런 훈이의 공격으로 고등학교 동기의 투닥거림이 시작됐다.
“너도 차 가져왔지?”
“어어. 우린 사이다나 마시자.”
“그래.”
술을 안 먹는 기범이랑 둘이서 사이다를 홀짝거리며 삼겹살이 익어가는 걸 구경했다.
“고생 많았다, 야. 몸은 괜찮고?”
“몸? 괜찮지. 한국시리즈 땐 좀 던진 편이긴 했는데 프리미어12 땐 딱히. 얼마 안 던졌으니까. 아, 봤냐?”
“뭘?”
“프리미어12.”
“봤지.”
“어떻디?”
척!
기범이는 대답 대신 따봉을 선사했다.
아, 따봉 오랜만이네.
“야야야, 있잖아.”
“왜?”
“뭐?”
따봉을 척! 해놓고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직까지도 투닥거리고 있는 두 동기를 향해 기범이가 손가락질했다.
“우리도 내년 꺼 세리머니 같은 거 정해두자.”
“뭔 세리머니?”
“프리미어12 때 따봉 했잖아. 우리도 그런 거 하나 만들자고.”
“그게 한국시리즈를 가야 쓰든 말든하지.”
“꼭 한국시리즈에서만 쓰냐? 시즌 때도 쓰면 되는 거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각없이 막 정할 수가 없다. 1년 내내 덕아웃 내를 도배할 움직임이니까.
“흐음….”
89년생 네 명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고민의 깊이가 꽤나 깊은지, 치익- 익어가는 삼겹살을 눈 앞에 두고도 움직이는 젓가락이 하나도 없었다.
“따봉이 제일 무난하긴 한데, 이미 써가지고 또 쓰기가 좀 그러네.”
“그치.”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는 때에,
띵―
“아, 잠깐만.”
민영 씨로부터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아…오늘 회의 너무 늘어졌어요]
[이제 퇴근해요ㅜㅜ]
일반적인 퇴근시간보다 몇 시간이나 늦었는데, 이제서야 퇴근한다니.
오히려 더 큰 안타까움을 느낀 나는,
찰칵―
눈 앞의 삼겹살을 사진찍어 민영 씨에게 전달했다.
[와…한울 씨 진짜 나빴다.]
[진짜]
[진짜]
[진짜 나빴다]
[ㅜㅜㅜㅜㅜㅜ]
으히히.
“누군데?”
“여자친구.”
“나쁜 새끼.”
“넌 진짜 개새끼야.”
엘렐렐레렐레, 으쯔라구여어.
그런 표정으로 승주와 훈이의 애정을 반사했다.
“괜찮아. 쟤네가 이상한 거야, 한울아.”
그런 와중에 여자친구가 있는 기범이는 꺄르륵 웃으며 내쪽으로 붙었다.
띵―
그 꼴이 또 웃겨서 실실대고 있자니 문자가 한 통 더 날아왔다.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구요]
[토끼가 ‘화이팅’ 패널을 들고 흔드는 이모티콘]
술은 안 먹고 있다, 밥만 먹고 바로 갈 거다, 집에 가면 연락하겠다.
그런 답장을 보내고 잠시 기다리자,
띵―
다시 도착하는 답변 문자.
별 생각없이 민영 씨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니,
[일찍 들어가세요]
[집 도착하면 문자 하시구요!]
[볼에 V를 붙인 뒤 찍은 셀카]
“…….”
밑도 끝도 없이 심장을 파괴하는 사진 한 장에 덜컥 굳어버렸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머지 세 놈들은 여친이 있네 없네 가지고 지들끼리 2라운드를 시작하고 있었다.
일단 민영 씨한테 답장 먼저 보내고…….
“야야.”
“뭐, 배신자 새끼야.”
“여자친구 있는 새끼는 닥치고 있어.”
민영 씨의 셀카 사진을 보고 떠오른 생각 하나를 알리기 위해 일단 싸움을 중재했다. 그 과정에서 승주와 훈이가 애정 가득한 단어를 뱉었지만 쉽게 흘려보냈다.
“우리 내년에 세리머니 있잖아.”
“뭐.”
“사진? 셀카? 셀카 세리머니 어떠냐.”
“어떤 미친놈이 경기장에 핸드폰을 들고 와.”
“아니, 봐봐.”
나에게 집중되어있는 관심을 느끼며 핸드폰으로 카메라 어플을 켰다. 슥, 한 번 손가락을 움직여 셀카 모드로 전환한 뒤 팔을 쭉 뻗었다.
“아, 뭔데.”
“야야, 브이 해라.”
“나이 처먹고 뭐하는 짓인데.”
“미쳤냐?”
말은 그러면서도, 서른 한 살 아조시들은 깜찍하게도 각자의 볼따구에 손가락으로 만든 V를 붙이고 있었다.
“찍는다.”
찰칵―
일단 이 사진은 저장.
“세리머니, 이걸로 하자고.”
“아, 폰 말고? 자세만?”
“그치. 봐봐라, 야. 만약에 내가 타잔데, 내가 적시타를 쳤어. 그럼 내가 1루에 있을 거 아냐. 그리고 니네가 덕아웃이야. 그럼 내가 너네를 등지고 이 자세를 하는 거야.”
방금 셀카를 찍었던 자세에서 핸드폰만 제거하니 꽤나 그럴듯한 세리머니 자세가 완성된다.
“괜찮은데?”
“호오….”
반응도 나쁘지 않다.
“일단 스캠 때 한 번 다른 사람들한테도 얘기해보자.”
“오케오케.”
“정했으니까 짠! 잔 들어어!”
이 윤승주 술쟁이 새끼.
피식 웃곤 사이다가 가득 든 잔을 한 번 더 들었다.
짠―
그렇게. 원하 챌린저스의 2020년 세리머니가 작은 삼겹살집에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