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반복
1년이라는 단위를 어떤 형식으로 채우든, 결국 돌아보면 반복이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학생 때는 단순히 학생으로서의 1년을 반복한다. 그러다 사회인이 되면 사회인으로서의 1년을 또 반복하지.
그 반복이라는 게 무엇을 반복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야구선수들의 반복은 결국 야구다.
야구.
단순하게, 던지고 치고 받고 던지고 받는 것을 되풀이하는 스포츠. 하지만 그 속에 심오함이란 심오함은 다 때려넣은 스포츠.
이 단순하면서도 오묘한 스포츠는 절대로 혼자서 플레이할 수가 없기에, 당연히 팀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고작 필수 인원인 9명으로 1년이라는 긴 시간을 끌고 갈 수는 없기에 ‘한 팀’의 구성원은 꽤나 많아진다.
1년이 지날 때마다 누군가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또 다른 누군가가 채워나가겠지만 골자는 같다.
“자, 모두 모였나?”
이기자.
개인이라면 그냥 잘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겠지만, ‘팀’ 이라는 존재의 구성원이 된 이상 그런 건 부차적인 목표로 차치된다.
이겨서 우승하자.
지금 미야자키 캠프, 대강당에 모인 약 80명의 인원들이 모두 한 손가락씩 얹고 있는 목표라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짝!
“다들 작년에도 고생 많았다. 모두 힘을 써 준 덕분에,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어.”
박수로 관심을 한 몸에 집중시킨 감독님이 우선 칭찬으로 훈화 말씀을 시작했다.
“이게 참, 감독 입장에서 어려운 문제인데 말야. 직전 시즌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면 오히려 큰 걱정이 안 돼. 왜냐면 다들 독기만 남거든.”
독기.
성적이 곧 연봉인 프로선수 입장에서 어떤 의미로 보면 가장 천부적인 재능.
강당에서 꽤나 앞쪽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우리 팀원들의 얼굴들을 한 번 훑어보기 위해선 목을 쭉 빼고 뒤로 돌려야 했다.
“근데 직전 성적이 좋으면 오히려 걱정되는 부분이 추가로 생겨. 이 아이들이 과연, 아직까지도 작년의 뽕이 취해있지는 않을까. 한울이 어딨지?”
“예!”
“작년에 우리가 정규시즌 1위 했잖아.”
“맞습니다.”
“좋드나?”
“예. 좋았습니다.”
“그걸로 끝이야?”
“아닙니다.”
“그러면?”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어째서?”
“…작년 초반 제가 팀에 큰 보탬이 되지 못 한 것도 있고, 또 시즌을 1위로 끝냈지만 결국 한국시리즈를 졌으니까요.”
“오케이.”
이 짧은 대화로 다른 팀원들은 어떤 힌트를 얻었을까.
“우리 주장, 한울이 시즌 성적만 보자면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야. 초반에 삽질을 워낙에 거하게 해가지고.”
굳이 언급 안 해주셔도 되는데…….
“하지만 시즌 중반 넘어가면서부터 한울이는 그 어느 팀의 필승조도 부럽지 않은 불펜의 절대적인 에이스였어. 다들 인정하지?”
예!
“후반기에 살짝 힘에 부쳤을 때, 이게 되나 싶었을 때 되도록 한 건 한울이 덕이야. 이건 분명히 맞는 말이야. 감독이라는 자리에서 보자면 그래. 거기다가 주장이었잖아? 더 힘들었을 거야.”
탁!
야구장의 평면도가 그려진 화이트 보드를 보드마카의 끄트머리로 때리자 선수단의 집중도가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감독님은 보드마카의 뚜껑을 따고 내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그런데도 한울이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했어. 성현이 어딨어?”
“예!”
이번에는 성현이.
“성현이는? 작년 야수조 조장이었지?”
“맞습니다.”
“성현이 작년 성적은 어땠어? 페넌트레이스 성적만 보자면.”
“꽤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FA 계약 첫 해, 성현이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돈값 이상의 행보를 보여주며 역시 강성현,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도록 했다.
“그래서, 좋았어?”
“아닙니다.”
“왜?”
“한국시리즈 때 제가 너무 못 했습니다.”
“한국시리즈 때 너 타율 기억해?”
“…1할 6푼인가 합니다.”
“그게 불만족스러워?”
“예.”
특히나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7차전. 성현이는 한 경기에서만 병살타는 2개를 쳐버렸다.
물론 병살타라는 게 잘맞은 타구를 생산하지 못 하거나 상대의 호수비가 없다면 나올 수가 없긴 하다.
하지만 ‘병살타’ 라는 단어에서 오는 이미지, 그리고 결과값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런 이면은 깡그리 무시된다.
“그래서, 성현이는 이번 시즌 목표가 뭐야?”
“한국시리즈 때 타율 10할이 목표입니다.”
“오케이.”
하나의 시리즈 한정이기는 하지만, 타율 10할.
다른 사람이 그런 소릴 지껄였다면 코웃음을 받았겠지만, 이를 잘근잘근 씹으며 대답하는 성현이의 모습을 보고 비웃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규진이. 그리고 명진이.”
“예.”
“넹!”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이 불리자 조금 전과는 다르게 내 맘이 살짝 누그러졌다.
규진이형은 내가, 명진이는 성현이가.
각자 제일 친한 선수가 어르고 달래고 붙잡아서 원소속팀과 어떻게든 다시 계약을 하고,
“둘은 FA 계약하고 이번 시즌이 첫 시즌이지?”
“예, 맞습니다.”
“넹!”
다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규진이형은 4년 보장 금액 51억. 명진이는 4년 옵션 포함 42억.
규진이형이 슬쩍 흘려준 바로는 보장 금액만 따지자면 원하가 제시한 금액이 제일 낮았다고 한다.
4년 보장으로 60억을 부른 팀도 있다고 했으니까. 어마어마한 차이는 인정해야지.
“계약하고 첫 해인데, 누울 거야?”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한 번만 누워봐도 되나요?”
하하하하!
미친새끼.
여전한 쌉소리를 멈추지 않는 명진이 덕에 잠시 대강당 내부가 웃음꽃으로 가득 찼다.
“그래, 명진이는 뭐, 이따가 여기 복도에서 한 번 누워봐라.”
“와아!”
왜지. 왜 진짜 좋아하는 거지.
“다들, 작년 뽕에 취하지 말고. 아직 우리가 닿을 곳이 남은 거 알잖아.”
예!
“이번에는 거기까지 닿자고.”
예!!
“오케이, 해산.”
* * *
작년 승주가 이야기했던 ‘컨셉’은 개인도 마찬가지지만 팀 또한 정할 필요가 있다.
뭐, 수비의 원하라든지, 불펜의 비스코라든지, 그런 컨셉이 아닌,
“초반부터 달리시려구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
“형은 그래도 후반기가 더 중요한데.”
“그것도 중요는 하지.”
초반부터 달릴 거냐, 아니면 후반기 반등을 노릴 거냐.
그래, 컨셉이라기보다는 ‘작전’ 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적합하려나.
각각 장단이 있는 건 당연하다.
초반부터 달리면 어찌어찌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한 번 고꾸라지면 후반기 와르르 무너질 거고.
후반기를 노린답시고 전반기에 사리다가 시즌 내내 사리기만 할 수도 있는 거고.
“적당하게 2등 내지는 3등 정도? 유지하다가 뒤에서 뒤집는 게 좋지 않겠어?”
하여 이번 시즌 내 개인적인 생각은, 적당한 상위권을 유지하다가 막판에 확 뒤집어버리는 것.
2등, 혹은 3등이라는 수치 또한 절대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 없는 호성적이지만,
따악-!
따악-!
저렇게 이를 악 물고 배트를 휘두르는 성현이나,
딱!
“투투!”
“바로 릴레이!”
유격수 자리에서 저렇게 날아다니는 명진이나,
빵―
“볼 세컨!”
뻐엉!
“야야, 이건 자연태그다, 잡았다!”
홈에서 2루까지 대포를 쏘는 규학이를 보고있자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번 시즌엔 진짜, 진짜 그 새끼 뚝배기 날려버린다.”
1위, 혹은 우승으로 가기 위한 길목에서 반드시 만날 상수로 트레이드된 이용호를 떠올리면서 이를 갈고 있는 규진이형까지.
“나도 도와드림.”
“어떻게?”
“때린 데 또 때리면 알아서 뒤지지 않을까?”
“콜.”
스프링 캠프가 진행될 수록 주전 선수들의 실력은 그대로, 백업 멤버들의 실력은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 강하게 느껴졌다.
선순환.
백업 멤버는 주전 멤버의 자리를 뺏으려고 발악한다. 주전 멤버들은 그런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한다.
이쯤되면 나, 혹은 팀원 모두가 바라는 건 단순해진다.
“동균아, 살살해. 지금 너 100%잖아. 지금부터 그럴 필요 없다니까? 아직 시즌까지 남았어.”
“예!”
“너 이제 프로 몇 년차야, 4년차잖아. 이제는 니가 직접 계산할 줄도 알아야 돼. 지금이 언제니까, 언제까지 뭘 위해선 얼마만큼만 해야된다.”
“예!”
“지금은 80%도 급한 거야. 50%면 돼.”
“예!”
어느 정도 짬이 찬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지만, 아직 신인급이나 자리를 잡지 못 한 이들의 입장은 아무래도 다르겠지.
팀이고 우승이고 나발이고, 나부터 자리 좀 잡아보자.
이러다가 탈이 나면 본인만 손해라는 건 그 누구보다 본인들이 제일 잘알고 있겠지만 이것 또한 돌고 돌아,
퍼엉-!
“아이, 동균이 좋아아!”
손해를 입는 건 본인 뿐 아니라 본인과 같은 포지션에 있는 사람, 더 나아가선 본인이 속한 팀 모두에게 손해가 된다.
그게 팀이라는 거다. 아직 거기까진 모르겠지.
“몸은 잘 만들어왔어?”
“100%는 아니고. 한 50% 정도만.”
“괜찮겠어?”
“계약하자마자 감독님이랑 직접 만나서 얘기 좀 했거든. 아마 나뿐만은 아닌 거 같던데. 혁준이도 그렇고, 준혁이도 그렇고.”
“형은 무슨 얘길 했는데?”
“이번 시즌 어떡할 거냐, 뭐 개인적인 작전 같은 거 생각한 거 있냐.”
“음…작전이라. 형은?”
“후반기는 너무 늦는 것 같고. 내가 볼 땐…중간도 좀 늦어. 대충 초중반 때.”
“그때부터 치고 나가겠다?”
“그치.”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확실한 인지를 하고 있는 고참급들은 다르다. 각자 개인적인 시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뒤, 그에 맞춰 행동하게 된다.
이번 시즌은 팀이 어떻게 흘러갈 것 같으니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지.
규진이형은 내가 2020시즌 원하 챌린저스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3조, 마운드 올라와라!”
투수 3조의 차례가 되자 마운드에 올라섰다. 내 공을 받아줄 포수는 마침 주호.
“아이, 형님 가자아아악!”
그렇지 않은 때가 없긴 하지만, 특히나 이 시기의 포수들은 화이팅이 아주 그냥 흘러 넘친다.
퍼엉-!
“쌰아아악! 좋아아!!”
다소 편협되어있는 불펜 안이 우르르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보고 잘 모르는 사람은 그냥 시끄럽다,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냐 손가락질 하겠지만,
빵-!
“아아아, 굿볼이야악!!”
이 의식은 투수의 자신감을 제련함과 동시에,
뻐엉-!
“어우, 이거 진짜 못 쳐요오!”
본인들이 본인들에게 거는 최면과도 같다.
퍼엉-!
“나이쓰 보올-!!”
할 수 있다. 이번 시즌의 난, 진짜 X나 멋진 포수다, 라고.
투닥-!
“형형, 좀 더, 그냥 확 내리 끌어버려도 될 거 같아요!”
“아, 오케!”
그런 와중에도 투수에게 건네줄 수 있는 조언이 있다면 아끼지 않고 모두 퍼준다.
덕분에,
빵-!
“굿 뽀올-!!”
한 번 땅바닥에 처박혔던 커브가 제정신을 차리고 주호의 미트에 꽂혔다.
“한울아.”
“예?”
“프리미어12 갔다 와서 뭐 좀 보이는 게 있던?”
“아….”
공을 던지고 있자니, 옆에서 참관하던 감독님이 와서 한 마디 질문을 던지셨다. 덕분에 생긴 잠시 여유 동안 모자를 고쳐쓰며 생각했다.
“보이는 거라기보단…그냥 대회까지 끝나고 느낀 거 하나가 있긴 해요.”
“뭔데?”
“그냥….”
따악-!
따악-!
쓰리, 볼 쓰리이!
아이, 나이쓰!!
말끝을 늘이고 뻥 뚫린 불펜의 천장 너머를 잠시 응시했다. 타자들이 만들어내는 잘맞은 타구음, 그리고 야수들이 수비 위치를 지정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내가 멍청히 외부를 쳐다보고 있자 감독님도 흘끗,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나를 쳐다봤다.
“진짜로, 진짜 마지막에. 정말 마지막에 세리머니하니까 되게 좋더라구요.”
선수단 전원이 마운드로 뛰쳐나와 엄지 손가락을 머리 위로 들고 뛰놀던 한 순간이 떠올랐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제패하고, 진정으로 모든 팀들의 최정상에 섰다는 확정을 받았던 순간.
“세리머니?”
“네. 그냥, 올시즌 끝나고, 우리도 그런 거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말 그대로 뜬금없는 쌉소리지만, 감독님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바로 이해하신 것 같다.
서로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고 있자니 문득, 89년생 네 명이서 나눴던 이야기가 한 가지 생각났다.
“아, 맞다. 감독님. 그래서 말인데요, 작년 말에 저희 동기들끼리 세리머니 하나 생각해둔 게 있었거든요.”
“뭔데?”
“아 그게…이거거든요.”
천천히, 셀카 세리머니를 감독님에게 전파했다. 설명을 들은 감독님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셨다.
“…애들한테는 니가 알아서 설명해.”
“옙!”
특명을 등에 업은 나는 불펜 피칭을 마친 뒤부터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선수들에게 셀카 세리머니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고작 하루.
“에이이!”
“아이, 찰칵!”
단 하루만에 선수단 내부에선 셀카 세리머니가 유행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