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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22화 (122/190)

122화. 식단

원하 챌린저스 내부에서 셀카 세리머니는 아주 그냥 뭐, 살벌한 속도를 자랑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굳이 야구 내적인 부분뿐만이 아닌 외적인 부분에서도 셀카 시늉을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이란…….

“…약빨이 너무 셌나.”

개판이네.

식당에서 맛있는 메뉴가 나오면 좋다고 셀카.

요구르트 챙겨줬다면 고맙다고 셀카.

화장실에서 쾌변했다고 셀카 한 번 더.

미친놈들인가.

그래도 덕분이라고 해야할지, 스프링 캠프의 분위기는 아주 해맑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으…속 쓰려라, 밥 먹으러 가자!”

“예!”

살짝 속에서 쓰린 기운이 느껴지자 위장이 있을 법한 곳을 살살 쓸었다. 이러니 좀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기적어기적, 원하 챌린저스 선수단에서 투수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선수들은 담소를 나누며 식당으로 향했다.

“형형.”

“왜.”

그런 와중 내 옆에 달라붙는 혁준이.

그 전에도 친하기는 했지만, 프리미어12라는 커다란 대회를 함께 다녀온 뒤 더욱 친해진 느낌이 든다.

“오늘 뭐 나올까요.”

“모르지. 그냥…아, 제육 먹고 싶다.”

“제육이요?”

“어. 그냥 갑자기 땡긴다.”

아무래도 해외에 나와있다보니 딱 먹고 싶은 음식을 딱 먹고 싶을 때 먹지 못 하는 건 너무나도 아쉽다.

특히나 그 음식이 한국인의 마음을 울리는 한식이라고 하면 더더욱.

김치찌개, 수제비, 제육볶음, 잡채, 미역국 등등…….

그 중 특히 제육볶음을 강하게 생각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식당 내부는 고추장의 매콤한 향에 구석구석 점령당한 상태였다.

“와, 제육이다!”

“오!”

앞에서 누군가가 외친 소리에 두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제육!

그런 와중…….

“…뭐하고 있어요?”

식판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우리를 찍는 쪼물딱이, 은서 씨. 그래,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까 이왕 PD님이라고 칭해주자.

“뭐하긴요, 선수 여러분들 찍고 있죠.”

“아니, 그니까 왜.”

“컨텐츠죠? 선수 여러분들은 밥 먹을 때 뭘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이런 거 팬 분들이 궁금해 한대요?”

“그럼요. 팬 분들이 남겨주신 아이디어인데요.”

“정말 탁월한 안목을 가진 분들이시군요.”

덜그럭―

은서 씨는 잠깐 치워두고, 식기세척기로 씻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따땃함이 남아있는 식판 하나를 집어들…….

“…먼저 먹어라.”

“예?”

“먼저 먹어.”

“형은요?”

“괜찮아, 난 혁준이 네가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걸. 하하.”

“…….”

여기 계신 모든 이들에게, 폭압과 부조리를 약속하겠습니다.

작년 스프링캠프 때, 내가 주장으로 발탁되며 내뱉었던 취임사는 암암리에 팬들의 귀에까지 전달됐다는 모양이다.

실제로 그런 적은 없지만, 그런 이유로 팬들 사이에서 나는 요리킹 조리킹 부조리킹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아니 별명을 지어도 왜 그딴…….

하여, 이미지 관리의 필요성을 느낀 나는 식판을 다시 내려두고 내 뒤에 있던 혁준이를 앞으로 밀었다.

혁준이도 눈치를 챘는지, 은서 씨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슬쩍 보고서는,

“지호야.”

“예, 선배님.”

“먼저 먹어.”

“예?”

“먼저 먹어.”

“아, 괜찮습니다. 선배님 먼저 드십쇼.”

“괜찮아, 먼저 먹어.”

“전 진짜 괜찮….”

“내가 안 괜찮으니까, 빨리 와.”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었는지, 지호는 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앞으로 나섰다.

음, 역시. 역시 지호는 새삼 표정이 참 많은 아이야.

“은구 선배, 먼저 드십셔어.”

“한울이 넌?”

“전 괜찮습니다. 나중에 먹어도 괜찮습니다.”

“어, 어어…혁준이는?”

“저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나와 혁준이는 우리 뒤로 줄 섰던 모든 이들을 앞으로 보낸 뒤 맨 마지막이 되어서야 식판을 들었다.

“후우…이 정도면 이미지 꽤 괜찮아졌겠지.”

“그럼요. 양보의 미덕인가, 그거 우리가 만든 거잖아요.”

“맞지맞지, 그거 특허 우리한테 있지, 맞지.”

이히히히히.

주접과 꼴값을 번갈아가며 찍먹한 나와 혁준이는 미친놈들처럼 웃으며 식판에 음식들을 담기 시작했다.

밥, 김치, 미역무침, 상추, 그리고 제육볶음 차례가 되었을 때,

“형형! 찰칵!”

“…….”

그만해, 미친놈아.

내가 받아주지 않자 녀석은 금방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국그릇을 들어올렸다.

앞서 받아둔 반찬들과 국그릇까지 세팅하면 식사 준비 완료.

“어으, 먹자.”

“맛있게 드세요오.”

젓가락을 들고 우선 제육볶음을 크게 집어먹었다.

“아…진짜, 이런 거 처음인 거 같아.”

“어떤 거요?”

“캠프 왔는데, 내가 먹고 싶었던 게 딱 맞춰 나오는 거.”

“아, 진짜요?”

“하루였나 이틀인가 텀 두고 나온 적이 있긴 한데,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진짜.”

덕분에 안 그래도 겁나게 맛있는 제육볶음이 오늘따라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하아…더 먹고 싶긴 한데….”

“더 드시면 되죠.”

“살쪄. 아으….”

배가 부르긴 하지만 괜히 더 집어먹고 싶은 느낌. 그러나 시즌을 생각하며 고개를 젓고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완료했다면 따라오는 휴식 시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낸 뒤, 오후 훈련을 위해 다시 그라운드로 향했다.

오늘 훈련은 셔틀런 훈련. 20m 정도 되는 거리를 전력이 아닌, 설설 뛰며 왕복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훈련이다.

“아이고야….”

근데 그걸 계속 해. 그냥 계속 해. 쭉 해. 뒤질 것 같을 때까지 해.

살살 뛰다가 정지선에 닿으면 멈추고, 그 자리에서 유턴했다가 출발신호에 맞춰 다시 출발하고.

삑-!

차라리 내가 셔틀런 1조면 빨리 뛰고 빨리 뒤지는 게 나을 수도 있을텐데, 하필 2조.

셔틀런 1조가 뛰는 모습을 보며 오늘도 심장이 뒤지겠구나, 하며 곡소리가 우선적으로 나올 때,

“형형.”

“왜.”

참 질문이 많은 우리 황혁준 학생이 또 질문을 던져왔다.

“올해가 그 마지막 해 아니예요?”

“뭔 마지막?”

“형 그때 왜, 3년 안에 우승한다고 했던 거.”

“아…그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삐익-!

출발신호에 맞춰 설설 뛰기 시작하는 선수들이 정지선에 다다르자 속도를 줄였다. 그리곤 곧바로 몸을 돌려 방금 출발선이었던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삐익-!

다시 신호에 맞춰 선수들이 출발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5초.

1조의 선수들이 편도로 한 번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만에 혁준이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일단 빠진 사람 없고. 원래 멤버 그대로 다 있고. 물론 그 원래 있던 멤버들이 제정신이냐 아니냐가 제일 중요하기는 한데….”

삑-!

“작년 한국시리즈가 각자 나름의 동기부여가 됐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7차전에서만 두 개의 병살타를 때렸던 성현이.

불펜에서 큰 역할을 해주지 못 했던 지호.

애매한 사용법 탓에 아예 출전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던 병천이.

물론 좋은 성적을 냈던 선수들도 있지만, 이 선수들보다는 정규시즌이나 한국시리즈 때 부진을 겪었던 선수들이 더욱 크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겠지.

삐익-!

“자, 1조 끝. 2조 와라!”

그 명단엔 작년 정규시즌 초반, 아주 삽질을 거대하게 했던 나 역시도 포함된다.

때문에,

“으아아아악!!”

이를 악 물고,

삐익-!

“하아아아악!!”

뛰고 또 뛰었다. 정말 뒤지기 직전까지.

* * *

다음날 점심.

“밥 먹으러 가자!”

“예에에!”

전날처럼 속으로 먹고 싶은 것을 생각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먹고 싶다, 강렬하게 먹고 싶다! 라고 생각한 음식은 바로 갈비찜.

아, 민영 씨 보고싶네.

문득 갈비찜을 생각하니 갈비찜을 만들어줬던 민영 씨가 떠올라 시무룩해졌지만, 에이, 한국 가자마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형형.”

“왜.”

“오늘은 뭐 나올 거 같아요?”

“내가 어떻게 알어어.”

“그냥 찍어봐요.”

“…….”

여친 없는 놈 앞에서 여자친구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갈비찌이임!!”

그 마음을 담아 새로운 단어를 외쳤다.

근데 이 염원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걸까,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간장의 감칠맛 가득한 향이 식당 안에 퍼져있었다.

“오, 갈비찜이래요.”

“오오!”

민영 씨가 진짜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갈비찜이 진짜 먹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저 멀리,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갈비찜이 보이자 자동적으로 오른손이 식판으로 향했…….

“…아니지.”

덜그럭―

…다가, 다시 내려두었다.

“동균아, 너 먼저 먹어.”

“예?”

“먼저 먹어, 난 괜찮아.”

“예, 예….”

동균이는 선의가 가득한 협박을 받아들여주었다. 이것은 결코, 또 식판 앞에 서있는 은서 씨 때문은 아니다.

이것은 그래, 순수한 호의. 선배가 후배를 위하는 순수함 마음씨.

“선배님, 먼저 드십쇼.”

“아냐아냐, 한울이 먼저 먹어.”

“괜찮습니다, 선배님 먼저 드십쇼.”

“아니, 괜찮….”

“먼저 드십쇼.”

“…고, 고마워.”

그 다음 차례인 경석 선배도 내 앞으로 보냈다.

그래, 이것 또한 순수한 호의. 후배가 선배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씨 그 자체다.

정체 모를 단체에게 특허 받은 ‘양보의 미덕’을 한껏 보인 후, 은서 씨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향해 웃어보였다.

“보셨습니까, 여러분. 원하 챌린저스는 선후배간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는….”

요리킹!

“차,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클-린한….”

조리킹!

“…그런 구단을 모티브로 삼고 있….”

부조리킹!

“…….”

풉.

은서 씨는 카메라 뒤에서 입을 가린 채 나를 비웃고 있었다.

“…PD님은 밥 안 먹어요?”

“전 다 찍고 먹으려구요.”

“아, 그래? 그럼 뭐…먹는 거 구경하세요.”

“와! 역시!”

“역시 뭐!”

따봉!

은서 씨는 말 대신 행동으로 답변했다.

“…됐고, 나나 저런 애들 말고, 그 누구야. 신인 친구들 좀 많이 찍어줘요.”

“에?”

“애들 어머니랑 아버지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어린 아들을 이런 먼 곳까지 보내셨는데. 야, 승진이랑 성원이 어딨냐?”

“아, 여기 있습니다!”

우리 두 후배님들께 식사 순서도 양보할 겸, 호명된 2020시즌 신인 투수들은 갑작스런 호출에 딱딱한 몸짓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둘이 일단 이쪽으로 와.”

“예!”

“네!”

신인 선수들은 자로 잰듯한 걸음으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낡을대로 낡은 선배들을 보기만해도 입에 푸근한 웃음을 짓게 하는 우리 원린이들.

아마 나한테 이런 상황이 떨어졌다면 금방이라도 눈시울이 붉어졌을 것 같은데, 우리 두 친구들은 씩씩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간단한 영상편지를 보냈다.

짝짝짝―

두 신인들에게 박수를 보낸 뒤,

“먼저 밥 먹어.”

“서, 선배님께선….”

“괜찮아, 먼저 먹어.”

또 다시 양보를 시전했다.

그렇게 뒷사람 보내고, 또 뒷사람 보낸 뒤 화장실 갔다오느라 합류가 제일 늦은 혁준이가 나타났다.

“형, 저도 양보해주실 거죠?”

“…….”

나는 말없이 식판을 집어들었다.

“…형?”

“혁준아.”

“예.”

“갈비찜이 얼마 안 남았대.”

“아, 형.”

“인생은 실전이란다.”

말이 그렇단 거고.

아직까지도 푸짐하게 남은 갈비찜을 듬뿍 식판에 퍼담아도 냄비 안의 갈비찜을 줄어들 생각을 하질 않았다.

“맛저엄-.”

“맛있게 드세영.”

오물오물, 밥을 먹고 있자니 나에게 양보 당했던 선수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먼저들 일어나기 시작했다.

식판을 정리한 뒤 나를 스쳐지나가는 선배님들과,

“한울이 맛있게 먹어~.”

“예, 쉬세용.”

후배님들은,

“선배님, 식사 맛있게 하십쇼.”

“어어, 쉬고 있어.”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넨 뒤 식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혁준이와 담소를 나누다보니 이내 식당 앞에서 소란스러운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건 뭔 소린가, 하면서 입구쪽을 보니 야수조가 훈련을 마치고 왔나보다.

“어, 왜 니네 둘만 먹고 있냐.”

“어쩌다보니까.”

우리 둘만 먹고 있는 모양이 좀 안타까워보였나, 기범이는 식판쪽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나와 혁준이가 있는 식탁을 한 번 들렀다가 식사 줄로 향했다.

근데…….

“기범이형! 먼저 드세요!”

“어?”

“먼저 드세요!”

“먼저 드십쇼!”

“김기범 선배님 먼저 드시지 말입니다!”

…….

“강성현 선배님, 먼저 드십쇼!”

“성현아, 먼저 먹어라!”

…쟤네는 또 왜 저래.

“형형.”

“…왜.”

“우리 있잖아요.”

“우리가 누군데.”

“원하요.”

“…어, 원하. 원하 왜.”

옆에 떠다놨던 물을 한 모금 마신 혁준이는 개판이 나있는 야수조의 식사줄을 보며 이야기했다.

“참 좋은 팀인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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