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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24화 (124/190)

124화. 발전

사람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아니, 기억이라는 걸 잃어버리기가 참 쉽다.

당장 내가 저번주에 어딜 갔다 왔는지, 당장 내가 어제 뭘 먹었는지, 당장 내가 오늘 아침에 탄 도로가 어디였는지.

해당 이벤트가 내 인생에 있어 0.1%라도 영향을 끼칠만큼의 큰일이라면 모를까, 그러려니 할 일이라면 정말 그러려니 잊어버린다.

작년 원하 챌린저스가 정규시즌에서 1위를 했던 것, 한국시리즈에서 석패를 했던 것,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프리미어12 대회에서 우승했던 것.

그래, 이 일들은 모두 그러려니하고 잊어버릴 일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려니 잊어버려야만 할 일들인가?

뻐엉-!

“스트라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따악-!

“아, 괜찮아 괜찮아, 굿볼이야!!”

“계속 들어가, 들어가!!”

새 술을 담아야 하는 건 맞다. 근데 새 부대를 어디서 구해. 몸뚱어리가 막 교체되는 것도 아닌데.

부대에 생긴 구멍을 꾸역꾸역 막는다. 막아서 새 술이 새지 않도록 애쓴다.

딱―

“볼 스탑! 던지지마!”

작년, 좋은 성적을 거두며 느낀 뽕은 모두 버린다.

작년, 안 좋은 성적을 거두며 느낀 보완점은 모두 수리한다.

그렇게,

따악-!

“투, 아니 쓰리!”

“바로 세컨 돌려!”

“빨리!”

KBO 2020시즌이 시작된다.

“아웃!”

베이스 바로 옆에서 강습타구를 막아낸 성훈이형이 3루를 찍은 뒤 바로 2루로, 이후 성문이가 바로 1루로 송구.

한성 위너스와의 시범경기. 1회 초 투구부터 아슬아슬하게 피안타를 맞아가던 혁준이는 수비의 도움으로 무려 트리플 플레이를 기록했다.

“호오오오!!”

“황혁준! 황혁준! 황혁준!”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역전의 용사들을 맞아 덕아웃은 더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장으로서의 엄격, 근엄, 그리고 진지를 지키기 위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돌아오는 용사들을 격려했다.

“야아아아악!!”

엄근진, 쉽네.

어느 정도 소요가 잦아들고 나서 맞이하게 된 1회 말 공격. 명진이는 찬찬히 볼 네 개를 고른 뒤 걸어나갔다.

2번타자, 강! 성! 현!

배트의 노브를 바닥에 쿵! 찍어 배트링을 제거한 성현이는 무표정하게 타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의 루틴을 취한 뒤 투구를 기다렸다.

명진이를 1루에 둔 투수는,

뻐엉-!

“스트랔-!”

초구를 성현이 몸쪽에 꽂아넣으며 카운트 하나를 벌었다. 타석에서 왼발을 뺀 채 등의 근육을 한 번 풀어준 성현이는,

따악-!

“갔…!”

바깥쪽 슬라이더를 제대로 밀어치긴 했지만 아쉽게도 우측 폴대를 살짝 벗어나버리고 말았다.

“아아….”

“아, 진짜 아깝네 저거.”

“1m?”

“1m도 안 될 걸. 한 30cm?”

운.

원하 챌린저스의 전력 분석원이었던 윤성 씨는 작년 시즌 초반의 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냥 운이 없던 거다. 투수가 모든 타구를 제어할 수는 없다. 한울 씨는 후반기에 날아오를 거다.

따악-!

결국 윤성 씨가 한 말은 맞아들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정말 윤성 씨가 한 말처럼 후반기 때의 나는 무적이었으니까.

근데요, 진짜 운이 오지도록 없는 건 저 놈이 아닐까요, 윤성 씨.

“투투!”

“여유 많다, 천천히, 천천히!”

2스트라이크를 선점 당하긴 했지만, 성현이는 커브를 제대로 후려갈겨서 정말 총알 같은 타구를 쳐냈다.

그게 ‘또’ 병살로 연결된 게 문제라서 그렇지.

“아아아, X발.”

성현이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지껄이며 덕아웃 안으로 들어왔다.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동료 선수들은 가벼운 격려의 말만 던지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다들 알아. 어떤 의미로 보면 ‘고작’ 시범경기인데. 여기서 홈런 100개를 치든, 삼진 100개를 당하는 아무 의미 없는 거, 다 알아.

“에휴….”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기분이.

기분.

작년 한국시리즈 후반부터 묘하게 운빨 스탯이 떨어진듯한 성현이의 기분과는 다르게,

따악-!

“어, 갔다!”

“갔어, 갔다!”

성현이보다 2년 늦게 FA를 신청할 예정인 동갑내기의 기분은 꽤나 좋아보였다.

“어우, 기성이 좋은데?”

“그러게요. 저 형이 저렇게 땡기는 사람이 아닌데.”

기성이의 타격 스타일은 음…딱 최근에 은퇴한 상수의 홍석진과 비슷한 면이 많다

좋은 선구안, 당길 때보다 밀어칠 때 더 잘 나오는 비거리 같은 면을 보면.

하지만 홍석진보다 약간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건 바로 적극성.

홍석진은 아니다, 싶으면 스트라이크여도 놔둔다. 기성이는 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면 웬만한 볼도 다 쳐낸다.

“웬일이여어!”

“남기남기!”

“기썽기썽!”

이번 시즌의 기성이는,

“어우, 해보자, 해서 해봤는데 되네?”

“야야, 뭐하냐!”

“아아, 맞다. 찰칵!”

“찰칵!”

확실히 한 단계 더 발전했네.

한 단계 발전한 건 기성이뿐만이 아니었다.

벌크업, 그리고 벌크업에 따른 스윙 궤도를 안정적으로 수정한 진형이도,

따악-!

“또 갔다!”

“나이쓰으!!”

올시즌에 대한 컨셉을 ‘안정’으로 꼽은 승주도,

딱-!

“돌아, 돌아, 계속 돌아아!!”

“쓰리까지 가!!”

기성이, 그리고 승주와 마찬가지로 FA가 예정되어있는 성훈이형도,

따악-!

“또 갔따아아악!!”

“달려어어!!”

모두 한 단계 발전한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짝짝짝-!

“가자가자!!”

덕분에 원하 챌린저스의 주장은 한결 마음을 놓은 채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 * *

퍼엉-!

“아이, 나이쓰 볼!”

시범경기가 아무리 의미가 없네, 본편은 정규시즌이네 어쩌네…….

근데 그건 우리 생각이고.

빵-!

“아, 오늘 커브 진짜 좋다!”

과연 원하 챌린저스의 팬들도 그렇게 똑같이 생각해줄까.

글쎄…….

뻥-!

“좋아좋아!”

등판해서 던진 80개의 공이 모두 몸쪽 직구인 선발투수.

3타석 연속으로 번트만 댄 3번타자.

얼핏 보면 말이 안 되는 타이밍에 시도한 딜레이드 스틸.

야구를 기록으로 이해하는 팬들은 이해한다.

그래, 해보고 싶은 거 지금 다 해봐야지. 제발 정규시즌에만 삽질하지 마라.

하지만 그냥 응원을 하는 팬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 한다. 아니, 애초에 이해할 생각도 없다.

그래도 경기인데, 이겨야지!

그들은 스프링 캠프 때 있는 몇 경기, 시범경기 8경기, 정규시즌 126경기, 한국시리즈 4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길 원한다.

해당 팀의 팬들이 원하는 건 응원하는 팀이 먼치킨을 찍는 거지, 성장 드라마를 보고 싶어하는 게 아니니까.

“한울이, 올라가자.”

“네에.”

뭐, 그걸 욕하고 싶은 게 아니다. 오히려 감사한 거지. 그만큼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현실적인 타협안이라는 게 있잖아. 막말로 5할 승률만 유지해도 좋다곤 못 할지언정 나쁘진 않은 건데.

띠링-!

[발전]

- 발전한 투구로 1이닝 3삼진을 잡아내세요 (0/3)

- 보상 - 전구종 +3

“흐음….”

상대방 덕아웃 위쪽에 떠있는 텍스트를 보며 마운드로 설설 뛰어갔다. 마운드에 도착한 뒤 플레이트를 밟자 신발이 어딘가 먹먹하게 느껴진다.

오전에 내린 봄비 때문에 땅이 약하게 질어있는 탓에 클리트 클리너에 스파이크를 팍팍 털어내고 피처 플레이트를 밟았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잠실구장의 피처 플레이트.

퍼엉-!

“스트랔-!”

좋게 생각하자.

퍼엉-!

“볼!”

7회 초에 등판한 내가 상대할 한성 위너스의 타순은 3, 4, 5, 클린업 트리오.

원래대로라면 이용호, 조태풍, 김홍주를 상대해야하지만 이용호가 떠나고, 또 시간도 지나며 타순에서 변화가 꽤 일어났다.

그 중 첫번째 변화, 3번타자 정성훈. 힘 하나는 진짜 좋아서 배팅 파워도 좋고, 어깨도 좋아서 송구도 좋은 편이긴 하지만,

부웅-!

“스윙-.”

그 놈의 정확성이 뭔지. 컨택도 그렇고 송구의 부정확성이 너무 떨어졌던 탓에 작년까지 7번에 지명타자를 치고 있었다.

뭐…이용호가 떠난 탓에 어쩔 수 없이 메꾸러 온 감이 있기야 하겠다만, 괜찮으려나.

일단 정성훈을 상대로 몸쪽 커브만큼은 패스다. 몸쪽 커브 던졌다가 홈런 맞았던 기억이 크게 떠오른다.

정성훈의 약점은 고질적인 바깥쪽 선구안. 두 번째 스트라이크를 잡았던 체인지업에 붕붕 휘두른 것도 그렇고, 아마 직구도 그렇겠지.

따악-!

…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띠링-!

[발전]

- 발전한 투구로 1이닝 3삼진을 잡아내세요 (0/3)

- 보상 - 전구종 +3

- 실패한 퀘스트입니다.

“아웃!”

중견수 진형이가 꽤 물러난 자리에서 머얼리 떨어진 명진이에게 송구했다. 명진이는 살살 뛰어와서 나에게 토스.

받은 공을 뽀드득 만지며 생각했다.

정성훈이 저런 타자가 아닌데. 뭐였지. 그냥 우연인가?

바깥쪽 공들에 대해 절대적인 약점을 갖고 있던 타자가, 바깥쪽 반 개가 빠지냐 마냐가 이슈가 될 공을 제대로 때려서 멀리까지 보내버렸다.

“그럴 수 있지.”

그래도 프론데. 프로타잔데. 언제까지고 저 공을 주구장창 지켜볼 수만은 없겠지.

고개를 털어내고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다음 타자는 한성 위너스에서 야구 혼자 한다고 평가 받는 4번타자 조태풍.

“읍!”

퍼엉-!

“스트랔-!”

공을 받아내고 뒤를 슬쩍 살펴봤다. 전광판에 찍히는 구속은 144km. 확실히 몸이 좀 덜 올라오긴 했네.

어차피 내 계획도 그렇고, 또 팀에서 나에 대해 생각하는 사용처도 그렇고, 벌써부터 힘을 뺄 필요는 없기에 딱히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그저,

“윽!”

따악-!

감만 잃지 말자.

“어으, 명진이 핸들링 좋네!”

잘 맞은 땅볼이 마지막에 튀어오르긴 했지만 명진이가 급하게 왼쪽 등을 뒤로 당기며 불규칙 바운드를 잡아냈다.

애초에 잘맞은 타구였으니 시간적인 여유도 많겠다,

빵!

“아웃!”

1루까지 던질 시간은 아주 널널하지.

짝짝짝!

“형님.”

“쌉소리할 거면 이따가 해라.”

“힝.”

명진이를 가볍게 물리친 뒤 한성 위너스 타순의 세 번째 변화를 맞이했다.

원래 6번 치고 있다가 한 단계 앞으로 올라온 채지훈.

“읍!”

뻐엉-!

“볼-.”

초구로 바깥쪽에다가 싱커를 던져봤지만 살짝 빠졌다는 판정을 받으며 볼부터 시작을 해버렸다.

아쉬움이 좀 느껴지기야 한다만 뭐,

빵!

“스트랔-!”

카운트야 언제든지 가져올 수 있으니까.

뒤편의 수비 위치들을 한 번 확인하고선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그리고 내쪽에서 출발하는 몸쪽 싱커 사인.

규학이가 고개를 끄덕인 뒤 채지훈의 몸쪽으로 붙어 앉았다.

“끄윽!”

띡!

평소보다 검지에 조금 더 걸렸다, 싶었는데 이게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 같다. 더욱 말려서 들어간 덕에 정타가 아닌 빗맞은 파울이 나왔으니까.

그리고 또 던져볼 공이 뭐가 있나…….

전반적인 구종들의 컨디션 체크를 위해 안 던져본 공을 계속 골라냈다. 그 중 선택된 건 슬라이더.

고개를 끄덕끄덕거리고,

“흣!”

바깥쪽 꽉 차는 구역으로 공을 던졌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에 배트가 따라나오기는 하지만 아마 닿지는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

배트 끄트머리에나마 닿은 공이 아주 높게 위로 부웅 떠올랐다.

“마, 마이!! 마아아악!!”

타구를 확인하자마자 명진이가 뒤에서 괴성을 지르며 내야수들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마운드와 2루 베이스 사이 그 어딘가에서 자리를 잡은 명진이는 타구에서 눈을 떼지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팡!

“아웃!”

진짜 오지게 높게도 떴네.

“나이스, 명진이 잘하네.”

“에헷, 형님! 찰칵!”

찰칵!

어이가 사라진 걸 느끼면서도 명진이와 합을 맞춰 세리머니를 진행했다. 이는 당연히,

“에에이, 진형이! 진형이, 찰칵!”

“예에에, 찰칵!”

첫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중견수도 포함된다.

“찰칵찰칵한 것치곤 기분이 썩 안 좋아보인다?”

“…보이냐?”

세리머니를 마치고 덕아웃에 앉아있자 훈이가 다가왔다. 내 옆에 슥 앉은 녀석은 뭐 관심법이라도 쓰는가보다.

“다 써있는데 뭐.”

“그냥. 별 건 아니고. 뭔가…난이도가 갑자기 올라간 거 같아서.”

“무슨 난이도?”

“올해 우리 우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쉽게. 작년보다는 쉽게.”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 그렇다고 그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야. 생각이야 하고는 있는데….”

“근데.”

절대 닿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 바깥쪽 공을 제대로 때린 정성훈. 헛스윙으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기어코 맞춰낸 채지훈.

“…난이도가 올라가긴 했어.”

몇 년 연속으로 꼴찌 자리를 도맡고 있는 한성 위너스에서조차 이런 사소한 발전이 보이는데, 상위팀들은 과연 어떨까.

“에이, 점수 더 내, 더 내자!”

팀의 주장은 조금 전 편하게 경기를 관람하던 것과는 다르게 팀의 발전이라는 한 가지 소망을 안고 경기를 관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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