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단추
프로야구에 데뷔하고 열 세 번째로 맞이하는 개막전.
굳이 따지고 보자면 개막전은 페넌트레이스 126경기 중 고작 한 경기에 지나지 않는다.
평소와 똑같은 집합.
평소와 똑같은 워밍업.
평소와 똑같은 국민의례.
하지만 개막전이라는 세 글자에 따라 붙어오는 상징성까지도 ‘고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까.
이번 달의 첫 단추.
올 시즌의 첫 단추.
더욱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포스트시즌의 첫 단추.
비스코 러너즈를 홈으로 불러들여 개시하게 된 2020시즌의 첫 경기는 순조롭게, 아주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었다.
타선을 일찌감치 큰 점수를 벌리며 상대방의 의욕을 꺾어두었다.
혁준이는 그런 상대 타자들을 쉽게쉽게 잡아내며 9이닝까지 끌어갔다.
혁준이가 혼자 한 경기를 책임져주며 불펜진은 편-안하게 쉬었다.
세 가지의 박자가 아주 잘 맞아떨어진 결과는 당연히 승리로 이어진다.
8 대 0.
혁준이의 개막전 완봉승을 기둥 삼아 원하 챌린저스는 2020시즌 개막전을 아주 쉽게 따냈다.
첫 단추.
한 시리즈, 한 주, 한 달도 아닌 1년의 첫 경기부터 좋은 흐름을 타게 되어 얻는 이득은 분명히 타팀보다 크다.
고작 한 경기.
시작부터 이기고 시작하면 좋잖아! 같은 팬들의 마음이 아닌, 현장에서 직접적인 근무를 하는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올해는 다르다.
딱!
“에에이, 나이스!”
“찰칵이요!”
“찰칵찰칵!”
단순히 시즌 초반부터 좋은 팀 성적을 기록하는 부분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 다르냐?
따악-!
자세가 다르다.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와아아악-!!
윤승주! 윤승주! 윤승주!
일주일을 다시 돌아 토요일 경기. 7회 말 1점차 상황에서 승주는 주자를 1루에 두고 클러치 홈런으로 경기의 흐름을 다시 가져왔다.
“이야아악!!”
“승주 멋있다아악!!”
토요일에 개막을 하고 정확히 일주일을 완료했던 어제까지 6경기. 원하 챌린저스는 이 기간 5승 1패를 기록했다.
스캠 시작부터 감독님은 그렇게 이야기하셨었지. 너희들이 작년 좋은 성적의 뽕에 차있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좋은 성적?
맞지, 좋은 성적이지. 무려 정규시즌 1위에 한국시리즈도 준우승인데.
하지만 막상 선수들의 생각은 약간 비틀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막상 선수들은 작년의 기록을 좋은 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쉬움. 혹은 독기.
극단적인 표현으로 용두사미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아든 선수들은 뽕에 차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더 악 물었지.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한울이, 올라가자.”
“예!”
나는 다른 동료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작년 시즌 초반의 그 부진. 만약 그 부진이 없었다면 마지막의 결과 또한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우….”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야만없이지, 라는 생각을 하며 전광판을 확인했다.
3경기 3이닝 0피안타 0볼넷 0사구 9삼진, 평균자책점 0.
이렇게 초반부터 좋아버리면 후반기에 퍼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니, 들지 않는다.
왜긴.
뻐엉-!
“하이잌-!”
147km.
별로 힘 같은 거 안 들이고 있으니까 그렇지. 내 기준에선 페이스 조절을 위해 살살 던지고 있다고 해도,
부웅―
“스윙-.”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
암만 있는 힘껏 모든 것에 임해도 결과가 좋지 않았던 작년 시작과는 결부터가 다르다.
“읍!”
퍼엉-!
“스윙, 스윙-!”
몸쪽 낮은 직구를 던져보려고 했지만 손에서 빠져 거의 타자의 어깨 높이까지 날아가버렸다.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해버린 타자의 배트 또한 무의식적으로 홈플레이트를 넘어가버렸다.
조희진이 한숨을 푹 쉬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번 승부는 꽤나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운.
그래, 올해는 시즌의 시작부터 운이라는 요소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그 뒤로 타석에 들어선 고명현 또한 공 다섯 개로, 또 그 다음으로 나타난 남동근 또한 공 네 개로.
8회 초를 다시 한 번 삼진 세 개로 마무리하며 시즌 4이닝 동안 삼진 12개라는 엄청난 기록을 달성했다.
띠링-!
[클러치]
-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스플리터 +2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87
커브 – 83
슬라 - 82
스플 - 81+2=83
체인 - 83
싱커 - 82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였다는 알림창을 대충 확인하고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터벅터벅, 우리집으로 돌아가니 팀원들은 벌써부터 셀카 한 장을 찍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 셀카용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야야야, 찰칵!”
바로 나.
찰칵!
세리머니를 완료하자마자 선수들은 다시 박수를 짝짝짝 쳐대며 8회 말 공격을 응원했다.
언제 어느 상황이든 우리 팀원들이 응원을 멈추지 않을 거란 건 알지만, 겨우 한 점차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팀원들은 더더욱이 크게 박수치고 소리친다.
그 덕에,
따악-!!
“돌아, 성현이 계속 돌아!!”
“기성이 너도 들어와아아!!”
원하 챌린저스의 승리는 이제 아주 당연한 기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날씨 좋다.
덕아웃 의자에 앉아 청명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파란 하늘하며, 간간히 떠있는 구름하며, 시원하게 부는 봄바람하며.
으득으득
입 안에서 나뒹굴던 사탕의 잔해를 씹어삼키고 있을 때,
“아, 한울 씨.”
“엉?”
오랜만에 듣는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네요.”
“아, 오랜만이예요, 윤성 씨.”
원하 챌린저스의 전력 분석원인 연윤성.
거대한 풍채하며, 그 풍채를 울림통 삼아 굵직굵직 울리는 목소리하며, 어떤 의미론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애초에 이 사람도 워낙 착한 사람이기도 하고.
“웬일이예요?”
“어우, 머리 아파가지고 좀 놀러나왔어요. 아, 이거 드실래요?”
“오, 감사.”
윤성 씨는 손에 들고 있던 똑같은 캔커피 세 개 중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아마 편의점에서 산 2+1이 아닐까…싶다.
치익―
“머리 아플 일이 있어요?”
“우리는 팀이 잘나가도 머리가 아프고, 쪽박쳐도 머리가 아파요.”
“쪽박치면 머리 아픈 거야 알겠는데…아, 잘나가면 왜, 왜 잘나가는지도 알아야 해서요?”
“역시.”
고개를 끄덕끄덕, 윤성 씨는 웃는 낯으로 울림이 강한 목소리를 뿜어냈다.
머리가 아프다곤 하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아보인다. 머리가 아프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저런 여유를 보아하니…….
“그래서 얼추 실마리 같은 건 잡아가는가 보네요?”
“실마리라…이걸 실마리로 표현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크흠흠.
“왜 작년에 기억해요? 아마 지금때보다 조금 더 뒤의 일이었긴 했는데.”
“당연히 기억하죠. 윤성 씨가 했던 얘기들 토씨 하나하나 다 기억하는데.”
“운 어쩌고 했던 것도 기억하시겠네.”
“그럼요. 지금도 운이예요?”
“음….”
윤성 씨는 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약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답을 망설이기보다는 어떻게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까를 고민하는 모양새.
“운 반. 실력 반.”
“반반무마니?”
“예?”
“아, 아뇨.”
주댕이야,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작년 한울 씨의 경우는 100%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운의 영향이 컸다고.”
“뭐…결과적으로는 윤성 씨 이야기가 맞았죠. 윤성 씨 말마따나, 후반기 때 날아오르긴 했으니까.”
“그쵸?”
아직 절반이 넘게 남아있는 내 캔과는 다르게 벌써 홀짝해진 윤성 씨의 캔은 깔끔하게 분리수거 통에 골인했다.
치익―
그리고는 나머지 캔 하나를 또 땄다.
“근데 올해는 확실히 다른 면들이 보여요.”
“저요?”
“한울 씨뿐 아니라, 원하 선수들 전반적으로 다.”
“오오오…?”
팀의 전력을 큼지막하게 카테고리별로 나눌 수 있는 네 가지 단어가 있다. 투수, 수비, 타격, 주루.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다만, 나는 각각 30, 20, 40, 10 정도로 본다.
이 중 가장 먼저 언급될 부분은 팀에서 30%의 전력을 차지하고 있는 투수.
“일단 투수진은 전반적으로 제구가 많이 좋아졌어요.”
“다?”
“네, 다. 대표적으로 큰 성장을 보인 게 바로 서태웅 선수랑 최은구 선수.”
“음….”
챌린저스 투수들 중 제구라는 카테고리를 개설한다면 최하위권에 랭크될 선수 둘.
확실히 이 둘이 나섰을 때 수비 시간이 많이 짧아지긴 했지. 애초에 구위 자체야 좋은 투수들이니까, 기본적인 제구만 받쳐준다면 꽤나 날아오를 투수들이다.
“이 두 선수 말고도 전반적으로 많이 정교해지기도 했고. 투구 분포도 보면 이게 확실히 더 보이긴 하는데, 아이고 내가 태블릿을 안 가져왔네.”
나중에 한 번 전력분석실 놀러와요, 재밌는 거 보여줄게.
윤성 씨는 한 마디를 덧붙이며 또 하나의 커피 캔을 찌그러뜨렸다.
“우리 수비야 애초에 리그 탑이었고. 또 근데 그대로 잘 유지하고 있으니 패스. 주루…는 글쎄. 주루는 그냥 유지. 근데 리그 탑은 아닐지언정 리그 상위권은 유지하고 있으니까.”
투수, 수비, 주루, 이 세 가지를 평가했다면 남은 것은 하나,
“그럼 타격은요?”
바로 타격.
“많이 발전했어요.”
“근데 우리 애들이 뭐 더 발전할 게 있던가요?”
“발전이라는 걸 사양할 선수는 그 누구도 없어요. 막말로 저기 맞은 편에 박해진 선수도 발전해야할 부분이 없는 건 아닌데.”
“그야…뭐. 그렇죠.”
하긴. 10할 치면서 매타석 홈런 치는 선수가 아닌 이상 발전에 목 메다는 건 당연하지.
“원하 타선에서 기본적으로 잘쳤던 선수들은 사실 이미 리그에서 탑 티어란 말이예요.”
“성현이라든가, 아니면 기성이라든가?”
“굳이 추가를 하자면…문규학 선수도?”
“규학이요?”
“절대적인 수치만 보자면 의아해할 수는 있는데, 포수라는 프레임 씌워놓고 보자면요. 그거 알아요? 지금 문규학 선수가 포수들 중에 타격 WAR 1위인 거?”
“…와우.”
순수하게 놀랐다.
그냥 규학이가 타석에 있을 때 예전보다는 좀 편하게 본다는 생각 정도는 했는데, 그 정도로 발전을 했다니.
“그리고 문규학 선수가 올해부터 좋아진 것도 아니거든. 작년부터 좋았잖아요? 그래서 남기성 선수랑 강성현 선수랑 묶이는 거고.”
“아…분류가 원래부터 잘치는 애들이었으니까.”
“그렇지.”
“그럼 얘네들 말고…또 뭐, 누구요?”
“말고 나머지 다. 다 타격 지표가 좋아졌으니까요.”
이 세 사람 빼면 남는 게 명진이, 진형이, 승주, 성훈이형, 성문이, 훈이.
“아, 다들 성적이 꽤나 좋긴 하죠.”
“아니, 성적 말고.”
“예?”
“한울 씨, 우리는 선수들이나 코치분들처럼 막, 어? 타격 이론이 어떻고 투구 이론이 어떻고, 그런 것까지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해요.”
“에? 저번에 나랑 술먹었을 때 잘알더만.”
좀 지난 이야기긴 하지만, 윤성 씨와 같이 술 마시다가 내 구속 상승에 대한 이슈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땐 진짜 놀랐지. 스캡 로딩이 어쩌고, L자 드라이브가 어쩌고 C자 드라이브가 어쩌고, 토랜딩, 힐랜딩이 어쩌고.
“기본만 아는 거지, 기본만. 타자들 브레이스 오프가 뭐고 배럴 쓴다는 게 뭐고, 투수들 드랍 앤 드라이브가 뭐고 포스춰 유지가 뭐고. 뭔지만 아는 거지.”
“아….”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우리는 선수들이 뭘 어떻게 했는지까지는 몰라요. 다만, 우리는 결과값을 보잖아요, 결과값을.”
“결과값이라는 게 단순한 성적만은 아닐텐데요?”
“당연하죠. 투수들 익스텐션이 어떻게 되고 회전수가 어떤지, 타자들 배럴 타구 비율이 어떻고 컨택 비율이 어떤지. 그걸 얘기하는 거죠. 그런 것들을 봤을 때.”
윤성 씨는 잠시 말을 끊고 씨익 웃었다.
“올해 원하는 제가 한껏 기대를 잡아도 될 것 같던데요?”
나보다 훨씬 큰 덩치를 가진 아조씨가 잔망스럽게 웃는 모습은 꽤나 볼만했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면 한울 씨가 해야할 역할은 알죠?”
“내 역할이라….”
윤성 씨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결국 올시즌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번 시즌은 시작한 지 보름 정도 밖에 안 됐고.
보름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반 년이 되며 이 이야기는 어떤 방향으로 틀어질지 그 아무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지금 그대로, 지금 이대로를 유지하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을 방향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할 건 뻔하죠.”
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금 그대로, 지금 이대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모든 이들을 도와주는 것.
“잘 해봅시다.”
“아이, 그럼요.”
짝!
원하 챌린저스의 주장과 원하 챌린저스의 제 1 전력분석원은 손을 마주친 뒤 다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