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27화 (127/190)

127화. 팀 수준

야구가 아무리 팀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개인이 한 게임을 지배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선발등판해 8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선발투수.

2사 만루 한 점차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때리는 타자.

무사 만루 상황에 등판해 KKK로 이닝을 끝낸 불펜투수.

물론 그 지배라는 단어가 무조건 좋은쪽으로만 향하는 건 아니다.

2사 만루 상황에서 알을 까버리는 2루수.

무사 1, 2루 찬스에서 초구부터 5-4 병살을 쳐버리는 타자.

등판하자마자 볼넷 세 개부터 시작하는 투수.

참 무섭지.

우리 팀 선수가 상대 팀을 지배해야하는데, 우리 팀을 지배해! 근데, 그래서 게임에서 져!

그래서 해당 선수에 대한 여론은 아주 당연히 불타오른다. 저게 프로냐부터 시작해서 2군 내려라 어째라, 심하면 그냥 방출시켜버려라, 이런 말까지.

원하 챌린저스의 4선발…이라기보다 그냥 네 번째 선발투수에 해당하는 우리 태웅이가 대표적으로 그런 선수다.

키도 크고 팔도 길고, 공이 엄청 빠른 편은 아니지만 구위 자체는 꽤 좋은 편인데 그 놈의 제구가 문제지, 제구가.

잘던지는 날은 혁준이가 부럽지 않은 투구 내용을 선보인다. 못던지는 날은 옛 원하의 불펜투수 부럽지 않은 투구 내용을 싸지른다.

그런 태웅이가,

퍼엉-!

“아이, 굿볼! 태웅이 좋다!”

달라졌다. 확실히 달라졌다.

“여기! 태웅이 여기 돼?!”

규학이는 우타자의 몸쪽 구역에 앉아 미트를 보이고 있었다. 태웅이는 오른다리를 훅 들어올린 다음,

퍼엉-!

“나이쓰으!”

규학이가 원하는 곳으로 정확하게 직구를 던졌다.

그래, 투수의 기본이 되는 직구. 하지만 직구 제구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게 바로 변화구 제구다.

“태웅이, 여기다가 체인지업 던져보자!”

그걸 아는 규학이는 이번엔 우타자의 바깥쪽으로 가서 앉았다. 미트를 들이댄 곳은 바깥쪽에 꽉 차는 구역.

정확하게 규학이가 원하는 곳으로 던져냈다면 체인지업은 정말 그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탁!

“어우, 이거 무조건 스윙 나왔다, 좋다!”

스윽- 하고 가라앉게 된다.

꽉 차는 곳에서 바깥으로 떨어진다면 당연히 볼이 되겠지만, 규학이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투수의 기를 살려냈다.

왜?

“어우, 태웅이 체인지업 언제 이렇게 연습했냐.”

“아, 감사합니다.”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을 구위를 보였으니까.

백업이 아닌 주전들의 무게를 따졌을 때, 원하 챌린저스는 아무래도 투수보다는 타자 위주로 돌아가는 팀이었다.

좋은 투수래봐야 혁준이, 규진이형, 나, 경석 선배 정도. 괜찮은 투수까지 포함시키자면 준혁이랑 은구 선배랑 지호도 추가가 가능하려나.

반면 타선과 수비진은 화려하다. 1루수를 제외한 모든 수비진들의 수비는 리그 최고 수준이었고, 타선 또한 리그 상위권에 포진될 수 있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격차라는 것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이르러선,

뻐엉-!

“하아아잌-!”

거의 역전되었다 이를 수 있다.

“태웅이 나이스, 고생했다.”

“옙, 감사합니다!”

타자들이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투수들이 역전한 것이 아니다. 투수들이 잘해서 상대적으로 타자들보다 우위에 선 것이다.

바꿔말해, 팀의 오버롤 자체가 급상승해버렸다는 뜻.

때문에 최근 원하 챌린저스의 경기 흐름은 어느 정도 고착화가 되어있다.

투수들이 일단 점수를 주지를 않는다. 근데 타선은 빵빵 터진다. 그래서,

“성원이, 성원이 어딨지?”

“네! 여기 있습니다!”

“8회 나갈 거야, 준비하고 있어.”

“예!”

프라이머리 셋업 역할을 맡고 있는 내 등판 횟수가 적어진 게 사실.

야이, 나도 등판 좀 하자.

“흐음….”

“넌 후반기랑 포스트시즌을 대비한 비밀 병기라니까.”

“아니….”

경석 선배의 따뜻한 위로를 들어도 글쎄, 크게 와닿는 위로는 아니다.

쩝.

팀이 이겨서 좋긴 한데, 그리고 신인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건 더 좋긴 한데.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불펜에 처박혀 있는 신세는 당사자 입장에선 그리 썩 환영할만한 건 아니었다.

때문에,

“아, 성원이 나이스. 잘하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닝을 멋지게 마치고 돌아온 1년차 신인을 맞아주는 내 얼굴 표정은 한 군데 정도가 비어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어, 태웅이 어제 고생했다.”

평범하게 구장에 출근을 하니 태웅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해왔다.

근데 인사하는 표정이 참,

“얼굴 되게 좋아보인다, 야.”

“예. 좋습니다.”

보기 좋다.

4선발이라기보다는 네 번째 선발투수에 가까웠던 태웅이는 이제 팀의 입장에서 분명한 계산이 서는 투수로 성장했다.

그에 대한 아주 좋은 예가 바로 어제.

태웅이는 어제 7이닝 동안 겨우 1실점만 허용하며 팀 승리의 교두보 역할을 착실히 수행해냈다.

시즌 시작하고 아직 채 한 달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태웅이는 벌써부터 시즌 3승째를 만들어냈다.

대충 인사를 주고 받은 뒤, 태웅이의 옆에 서서 로커룸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까 얘랑 이렇게 막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네.

“스캠 때 뭐 했어?”

괜한 어색함 같은 게 느껴져 생각나는 소리를 툭, 던졌다.

“딱히 한 건 없는데….”

“흐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그런 선수들 있어.”

“아, 진짭니까?”

당연히 있지.

“뭐 평소에 노력을 엄청했다, 덜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하던대로 했는데 갑자기 팍 뜨는 선수들.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아, 넵. 감사합니다.”

“근데 태웅아.”

“예.”

“어….”

이 얘기를 해줘도 되려나.

“…하나 좀, 걱정되는 게 있긴 하거든. 지금 너한테.”

“예? 예. 괜찮습니다.”

“너가…왜 지금 좋아진 건지는 너도 지금 잘 모르겠다는 거잖아.”

“맞습니다.”

“그러면 음….”

이걸 어떻게 이야길 해줘야 이해가 쉬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머리 안에서 떠다니는 단어들을 나열하기로 했다.

“물론 그런 때가 오지 않는 게 제일 좋기야 할텐데, 사람이라는 게 어떤 일이 생길 줄 모르는 거잖아. 그치?”

“맞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거든. 네가 이대로 쭉, 계속 좋기만 한다면 좋겠지. 근데 언젠가 갑자기 팍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

“아…맞습니다.”

“네가 좋아진 이유를 모르는만큼, 그때는 네가 나빠진 이유를 찾기도 힘들 거야.”

“아.”

사실 이 정도만 이야기해줘도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모두 전달한 셈이지만, 여기서 끝내면 안 된다.

여기서 끝내면 그건 그냥 선배의 꼬장, 혹은 잘나가는 선수에 대한 시기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해결책까지 제시해주어야 제대로 된 선배의 모습이고 주장의 의무를 다한다 할 수 있겠지.

“음…전력분석실 같은 곳 자주 들락거리면 좋아.”

“전력분석실입니까?”

“거기선 네가 모르는 네 약점도 알고 있거든. 어차피 어제 선발이었으니까 오늘 통으로 쉬잖아.”

“맞습니다.”

“이따가 한 번 가봐. 거기 윤성 씨라고 있는데, 사람 착해서 조언 많이 해 줄 거야. 갈 때 커피 같은 거나 좀 사가고.”

“아, 네. 감사합니다.”

그 외 태웅이가 갖추면 좋은 멘탈과 관련된 조언도 간단하게 해주었다.

실질적으로 잘나가는 선수가 된 첫 해기 때문에, 이 녀석이 무너졌을 때 느낄 멘탈의 격차가 조금 걱정됐거든.

적당한 조언을 마치자 로커룸 앞에 딱 도착했다.

가방을 턱, 내려두고 필요한 장비만 챙긴 뒤 바로 덕아웃으로 빠져나왔다. 태웅이는 내게 들은 조언대로 곧장 전력분석실쪽으로 향했다.

태웅이의 등짝에서 시선을 떼어낸 뒤 그라운드의 전경을 훑어봤다.

타격훈련 중인 기범이.

민첩성 훈련 중인 주호.

러닝을 뛰고 있는 동균이.

팀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표현하긴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 원하 챌린저스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주는 친구들을 보고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자니,

“김한울 선수, 오늘 기분이 좋아보이네요!”

“…….”

어느새 쪼물딱이가 나타났다.

“아. 아 왜 얼굴 그렇게 하는데요.”

“은서 씨 때문에요.”

“내가 또 왜!”

“그냥, 그냥 은서 씨만 보면 내가 이렇게 돼.”

어디 드라마 같은 데서 써도 크게 무리가 없을 대사를 지금 이 상황에 쓰자니,

“와, 극혐.”

이런 반응이 나온다.

“그래서,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시는데요.”

“좋아보여요?”

“네! 그래서 오늘은 오랜만에 김한울 선수 특집이예요!”

“그래서, 라는 단어가 그런 데 쓰라고 있는 단어가 아닐텐데.”

“뭐 어때요.”

틱틱 던져대도 회복 탄력성이 꽤나 좋은 건지, 은서 씨는 다시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근데 내 특집 몇 번 했잖아요?”

“그렇기야 한데…다른 선수들이 안 중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김한울 선수 비중이 좀 크잖아요? 그래서 약간 월간 김한울 같은 느낌으로.”

월간 김한울…….

“작명 센스 진짜 좋네요.”

“그쵸! 이거 꽤나 고민했거든요.”

좋댄다.

아예 판을 깔아주니 은서 씨는 좋다고 나를 덕아웃 한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얼떨결에 자리에 앉아 멍청…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시즌이 시작한 지 한 달 정도가 되었는데요, 이 한 달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좋죠. 일단 상수를 한 게임차로 따돌리고 있는 것만 봐도 좋잖아요.”

“음…작년 시즌의 원하도 시작이 꽤나 좋았거든요.”

“그쵸?”

“작년과의 차이점이 있다면요?”

“차이점이라…일단 나?”

“김한울 선수?”

“그…부진하지가 않잖아요…?”

삽질이라는 아주 시기적절한 단어를 죽인 채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꽤나 어색한 말이 나왔다.

“그러네요?”

“그것도 그렇고…글쎄, 이건 나만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시즌 전반적으로 수준이 많이 올라간 것 같아요.”

“투수? 아니면 타자?”

“다. 투수든 타자든, 다.”

“호오….”

“사실 시즌 시작하고 일주일인가, 보름인가 지나서 생각을 해봤었거든요. 그땐 막연하게 출발이 좋다 정도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벌써 한 달이잖아요.”

“네, 그래서요?”

다음 대답을 요구하는 은서 씨의 질문에 흐뭇하게 웃었다.

“올해 또한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요. 정규시즌 성적.”

이쯤이면 멋진 대답이 됐겠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청자의 반응은 좀 시큰둥했다.

“음, 페넌트레이스도 페넌트레이스지만요. 포스트시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좀 그러려니 좀 해주지 좀.

“어…글쎄, 우리가 한국시리즈라는 커다란 무대에 적응을 못 했다거나, 아니면 부담감에 못 이겼다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보통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렇기야 한데, 그냥 내가 느낀 점이니까.”

“그런 게 없다곤 못 하겠지만, 다른 요소가 더 컸다?”

“아냐, 내가 볼 때 그런 건 없었어. 없어. 우리가 패기는 진짜 좋았거든요. 아냐, 내가 봤을 땐 그냥 진짜, 진짜 순수하게 실력 문제였어요.”

“실력이요?”

가장 나오기 힘든 대답이면서도 가장 듣기 싫어할 대답을 툭 던져버리니 은서 씨는 꽤나 김이 빠져버린 모양이다.

“순수하게 상수가 잘했어요. 진짜 잘했어. 우리 원하가 못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상수가 잘했어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으음…그래도….”

“팩트인 걸 어떡해요.”

“그래도 나름 인터뷰인데 이거 진짜 이대로 내보내도 돼요?”

그냥 웬만한 기자들이었다면 이쯤에서 감사합니다, 하고 쌩 가버렸겠지만 여기 은서 씨는 온전한 내 편이다.

“돼요. 대신에 이 말로 끝낼 건 아니니까.”

“그럼요?”

따라서 내가 던진 말에 대한 부연설명을 할 기회는 충분하다.

“말했잖아요, 작년엔 상수가 우리보다 잘해서 우리가 진 거라고. 근데 내가 그것보다 앞에서 뭐라고 했어요?”

은서 씨는 인터뷰어의 본분도 잠시 잊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이 꽤나 안타까워 내가 먼저 운을 띄워줘야했다.

“우리 팀 수준이 어쩌고 했잖아.”

“아.”

이쯤이면 알아들었겠지, 싶어서 나는 다시 해맑게 웃을 수 있었다.

“올해는 우리가 상수보다 잘할 거예요. 믿어도 좋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