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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29화 (129/190)

129화. 땅볼

어떤 사람이든 지 간에 시간과 나이는 결국 상관관계에 놓이게 된다.

무섭지. 싫지. 두렵지. 걱정되지.

조금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해보자면 ‘죽음’이라는 소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고, 소소하게는 당장 내년엔 뭘 먹고 사는가로 걱정을 할 수도 있고.

이 이야기를 인생이라는 너무 긴 단어보다는 야구선수라는 비교적 짧은 단어에 대입해본다면 어떨까.

투수가 됐든 타자가 됐든. 결국 데뷔하고 시간이 지나며 언젠간 은퇴를 하게 된다.

은퇴.

내 신인 시절에 곧 은퇴를 결심했던 대선배께서 허심탄회하게 하셨던 이야기가 있다.

당장 내일 뭐 먹고 살지? 난 앞으로 뭘로 먹고 살지? 그런 걱정은 없어. 돈은 벌어 뒀으니까. 근데 현실적인 감각보다는 그냥…그냥 내가 나이를 먹었으니까 은퇴해야 한다는 거, 그게 인정하기가 싫더라.

내 나이가 벌써 서른둘.

리그에서 제일 잘나가는 불펜 투수 역할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벌써부터 은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게 여러 사람들에게 실례인 건 안다.

그래도 한 번쯤 생각해볼 법하잖아. 내가 은퇴를 할 때쯤엔 어떤 선수가 되어있고 싶다, 내가 은퇴를 한다면 어떻게 하고 싶다.

“야, 기다렸다. 요즘 애들은 빠-져가지고 말야. 야, 한국인들 빨리빨리 몰라?”

그런 의미에서, 나를 기다렸다며 꼰대 코스프레를 하는 임호택 선배는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내 마지막 모습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다.

“아아,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애들 빠-져가지고. 슨배임이 재깍재깍 퇴근하실 수 있게 딱 준비하고! 어? 딱 먼저 가십쇼, 마무리 저희가 하겠습니다, 하고! 저희 때는 그러지 않았습니까!”

“…야, 나는 그냥 해본 소린데 넌 되게 자연스럽다. 많이 해봤냐?”

에이. 이러지 마세요, 선배님.

멍청히 서 있자 임호택은 어헛헛헛! 호탕하게 한 번 웃더니 손가락으로 본인의 차를 슬쩍 가리켰다.

“오늘 일찍 끝났는데 밥이나 같이 먹을까 하거든. 혹시 괜찮아?”

갑자기?

“아…예.”

한 다리 두 다리만 건너면 지인들 천지라는 야구선수 판에서도 임호택은 나와 크게 연이 없던 사람이다.

팀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꽤 나고, 하다못해 국대나 올스타전 같은 데서도 본 적도 없고.

그냥 나보다 훨씬 선배님이구나, 이런 인식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것도 뜬금없는데 밥을 먹자고 한다는 건…….

“괜찮습니다.”

무슨 뜻이 있겠지.

착해빠졌으면 착해빠졌지, 나쁜 사람이 아닌 건 잘 알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은…너도 차 가져왔지?”

“아, 예.”

“넌 집이 어디냐?”

“저 잠실 근처죠.”

“그러면…그냥 이 근처에 먹자. 일단 내 차로 갔다가, 먹고 내가 여기 내려줄게.”

“예예. 괜찮습니다.”

그렇게 임호택 선배의 차를 얻어타고 문학구장 근처의 적당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애초에 크게 친하다는 생각을 못 하던 사람이라 그런가,

“여기 맛있다. 여기 가자.”

“아, 넵.”

임호택이 추천한 중식집으로 도착하기까지 걸린 10분 동안 차 안에선 이렇다 할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않았다기보단 못 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려나.

“어서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둘이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종업원분의 안내에 따라 적당한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물잔에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꼴꼴꼴, 물잔이 채워지는 동안 임호택 선배는 테이블 옆에서 튀어나온 수저통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좀 뜬금없지?”

“네? 아…네.”

내가 먼저 채운 물컵과 임호택 선배가 꺼낸 수저 한 세트가 깔끔하게 교환되었다.

내가 건넨 물을 시원하게 원샷을 때린 뒤, 선배는 직접 물통을 들고 본인의 물잔을 채우며 이야기했다.

“눈앞에 아저씨가 갑자기 뭔 소릴 하려고 이렇게 부르나, 무섭기도 하고.”

“허허….”

“근데 너도 아저씨인 거 알지?”

“굳이 그건 말씀 안 하셔도 되는데….”

“나만 죽을 순 없잖아.”

참 가식 없는 사람이구나.

덕분에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임호택 선배는 본인이 먹을 볶음밥과 내가 먹을 자장면, 그리고 탕수육 소 하나를 주문했다.

잠시 종업원의 방문으로 인해 정적이 오간 뒤 먼저 말문을 연 건 내 쪽이었다.

“그, 선배님.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아, 별 건 아니고. 사실 전부터 기회가 생기면 너랑 한번 얘기해보고 싶었는데 통 기회가 안 생겨가지고.”

“저랑요?”

“어어. 근데 오늘 마침 너 등판하기도 했고, 거기다가 오늘 경기도 빨리 끝나기도 했고.”

나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 이 선배님은.

으적으적, 먼저 나온 단무지를 씹으며 빤히 그를 쳐다봤다. 선배는 단무지 대신 생양파를 카득카득 씹어먹고 이야기했다.

“한울아.”

“예.”

“넌 던질 때 무슨 생각하고 던지냐?”

“생각이요?”

“어, 생각.”

“생각….”

던질 때 하는 생각?

“…막자? 막아야 한다? 지금 이 타자 안 내보내는 게 최우선이다? 그런 거 말고 다른 게 있나요?”

“아니아니. 그건 맞지. 맞는데, 음…타자를 내보내지 않는다고 할 때, 어떻게? 어떻게 안 내보낼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거야….”

문득, 포지션은 다르지만 성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감없이 이야기하자.

“…때린 데 또 때리면 겁나 아파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요.”

“어헛, 어헛헛헛!!”

딱히 드립 칠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닌데.

선배는 입을 가린 채 혼자서 빵 터졌다.

“맞지. 타자들 특징이 그러거든. 때린 데 계속 때리면 짜증부터 내거든. 그래서 막, 사리분별을 못 해.”

“아, 맞아요. 약간 빡쳐하는? 그런 거 있죠.”

타자가 빡친 게 보이면 상대하기가 편하다.

대신 그게 안 통해서 내가 빡치면 보통은 내가 지더라.

그리고 그런 타자들이 정말로 잘 치는 타자들이다.

투수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땅볼 때문에 그래.”

“땅볼이요?”

“넌 땅볼을 어떻게 생각해?”

“땅볼 뭐…다른 팀이면 모르겠지만 원하 투수니까…잘 써먹으면 어지간히 좋다 정도로 생각하죠.”

“맞지. 챌린저스 수비면 웬만한 건 다 잡아주니까.”

“오늘 성문이 수비 보셨잖아요? 그런 거죠.”

비스코의 수비도 결코 나쁜 편은 아니다. 리그에서 가장 강한 불펜을 가진 팀이라 불리고 싶다면 단순히 투수가 강하다는 걸로는 부족하니까.

“좋지. 좋은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야.”

“네?”

“한울이 너 참 잘던지 거든. 진짜 잘 던져.”

“아…감사합니다.”

“아니아니.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있었는데 오늘 던지는 거 보고 든 생각이 하나 있거든.”

“네….”

“굳이. 구우욷이 땅볼을 잡으려고 애쓰지는 마.”

“예?”

굳이 땅볼을 잡으려 하지 말라니. 굳이?

“오늘 던지는 거 보니까 땅볼에 약간 집착하는 거 같더라고. 아니야?”

“아…네. 사실 등판할 때마다 컨셉 같은 걸 정해두고 들어가거든요. 근데 오늘은 선배님 던지시는 걸 보고 들어가니까…땅볼로 컨셉을 잡은 거구요.”

퀘스트 때문에 땅볼 잡으려 했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하지.

“괜찮네. 그건 괜찮은데…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그렇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근데 다른 누구보다 땅볼을 잘 잡는 선배님이 그런 말씀 하시니까 되게 안 어울리는데요?”

“그건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

껄껄껄, 대사에 추가된 웃음소리에선 약간의 아련함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말을 좀 헷갈리게 했을 수도 있겠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할게.”

“네….”

“아직은. 아직은 네가 땅볼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지금 당장에 네가 그러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혹시나 싶어서 하는 소리고.”

“혹시 이유는….”

“내가 땅볼을 잡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팩트,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볼이 느리니까. 타자들을 내가 직접 잡을 수준은 안 되는 게 사실이니까.”

다행스럽게도 본인이 직접 팩트를 이야기한 덕에 팩트폭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근데 넌 되잖아?”

“되…죠?”

“아깝잖아. 너 같은 투수는 너 같은 투수들이 할 수 있는 투구를 하는 게 맞아.”

“음….”

“땅볼을 잡지 말란 소리는 아니야, 오해 말고. 땅볼, 뜬공, 이런 건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부산물 정도로만 생각해도 충분하다는 거야.”

“아아.”

“너 이번 시즌 성적 되게 좋은 거 알지?”

“예. 좋죠.”

웬만하면 겸손을 표하는 게 맞겠지만,

“보자…어이구야, 13이닝 동안 탈삼진은 25개. 볼넷은 하나도 없고 피안타는 두 개. 평균자책점은 0이고.”

이런 상황에서 겸손은 오히려 기만이다.

“허허…작년이랑 다르게 올 시즌은 출발이 꽤나 좋네요.”

“그거 있었잖아. 시즌 첫 4게임에서 4이닝인가? 그동안에 삼진 12개로 스트레이트 아웃.”

“아, 그쵸.”

“어떻든?”

“좋죠.”

“기분이?”

“네. 엄청 좋죠.”

“그런 널 보는 팀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와, 우리 팀에 진짜 좋은 불펜 투수 하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대사 자체는 맞기는 한데….”

흠.

임호택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야기했다.

“차마 이 나이 먹고 쪽팔려서 연기 같은 건 못 하겠고,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존재가 되는 거야. 네 팀한테도, 상대팀한테도.”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인가?

“넌 삼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좋죠. 우리가 타자를 압도했다는 증거로써 가장 강력하잖아요.”

“맞지. 그럼 땅볼은?”

땅볼은 절대 나쁘지 않다. 아니, 아주 좋다. 투수의 입장에서 어떤 형식이든, 아웃 카운트라는 것 자체가 나쁠 리가 없다.

하지만 땅볼보다 먼저 나온 예시가 삼진이라서 그런가,

“어…나쁘진 않긴 한데. 어….”

아무래도 조금은 미적지근하게 느껴진다.

“삼진에 집착하라는 것도 아니고, 땅볼을 잡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야. 1사에 주자 1루인데, 삼진 잡고 한 타자 더 상대하는 것보단 병살로 이닝 끝내는 게 훨씬 이득이잖아.”

“당연하죠.”

“그런 거야. 하지만, 미래라면 모를까 지금의 너는 웬만하면 그런 투수로 남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인 거지.”

“아….”

이제서야, 이 대선배님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알겠다.

하지만 거기서 연장되는 의문점 하나.

“…근데 저기, 선배님.”

“어?”

“그, 불만이 있는 건 절대 아니구요. 그냥 궁금해서,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왜 굳이 이런 얘기를 해주냐고?”

“…네.”

그는 대답의 시간을 미소를 이용해 뒤로 유예시켰다.

“너도 기억할지는 모르겠다만, 너 보면 참 나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전철을 밟는다.

이 단어를 나와 임호택 선배 사이에 대입시켜도 가용성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150km를 넘나드는 불같은 강속구로 상위 라운드에서 지명을 받았지만, 고질적인 제구 문제로 20대 후반까지 빛을 보지 못했던 투수.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제구에 대한 감을 익혀가던 그는 정신을 차려보니 리그를 군림하는 에이스가 되어있었다.

150km 중반대의 직구와 좋은 변화구, 또 좋은 제구와 강심장을 갖춘 에이스.

하지만 그 에이스도 사람이기에 시간이 지나며 나이를 먹고, 나이를 먹어가며 피지컬에 대한 부분도 많이 상실했다.

그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 트렌드에 본인의 모든 걸 투신했다.

그 결과가,

“나처럼 던지는 건, 네가 더 늙고 해도 돼.”

지금의 임호택이다.

리그의 절대적인 에이스감이라 하긴 무리가 있지만, 한 팀의 에이스감으로선 조금의 부족함도, 부끄러움도 없는 투수.

“그래도, 우승은 우리 비스코니까. 크게 걱정은 하지 말고.”

예?

“에이, 선배님 잘 나가다가 이상한 말씀 하시네.”

“뭐가 이상한 말이야.”

“우승은 당연히 원하죠. 어우원 모르세요?”

“아, 좋은 말 좀 해줬더니 기어오르네? 니네 선배들은 그렇게 가르치든?”

“예.”

“그럼 어쩔 수 없고.”

선배님은 껄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가 사야지, 아닙니다 좋은 말씀 들었는데 후배가 대접해야죠, 뭐 그런 잠시의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누가 계산하는 게 중요하던가.

다시 문학구장으로 돌아가는 길.

식당으로 이동했을 때 차 안을 채우던 적막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구장 주차장으로 향하는 10분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그럼 나중에 연락하고. 다음엔 네가 밥 사고.”

“예. 맛있는 거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아. 이래서 현진이가 나한테 그렇게 인사를 하는 건가.

“그래, 들어가라.”

“예, 내일 뵙겠습니다.”

“아씨, 부담스럽게 뭐하냐.”

“선배님에 대한 존경과 동경과 애정과 헌신과….”

“지랄하지 말고.”

“옙.”

선배님의 차를 향해 90도로 꺾은 허리가 다시 원래의 각도로 돌아왔다.

“내일 보자.”

“예! 들어가세요.”

정말로, 저렇게 나이 먹어야지.

부웅 떠나는 임호택의 차를 보며 내 인생관에 또 다른 한 줄이 추가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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