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조화
‘야구’라는 단어를 수식할 수 있는 문구는 정말 많다.
야구는 인생과도 같다.
야구는 팀 게임이다.
야구는 타자놀음, 혹은 투수놀음이다.
다 맞는 말이다. 정말 다 맞는 말이다.
근데 여기다가 내가 멋대로 한 가지 문구를 추가한다고 하면 이런 내용도 하나 더 얹을 수 있을 것 같다.
야구는 조화로워야 한다.
조화…여러가지 의미의 조화가 있겠지.
타자라면 힘과 정확성의 조화.
투수라면 강속구와 제구, 덧붙여 변화구의 조화.
야수라면 첫 바운드와 스텝의 조화.
이걸 개인이 아닌 팀의 단위로 다시 설정해볼까.
야구 ‘팀’은 조화로워야 한다.
그럼 또 이런 게 가능하지.
투수진과 타선의 조화.
코칭 스태프와 선수단간의 조화.
코칭 스태프와 프론트간의 조화.
결국, 이 이야기들은 이런 이야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야구를 단순히 즐기는 게 아닌, 먹고 살기 위해 매달리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신경 쓸 게 많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를 해야 한다.
야구는 팀 게임이다, 야구는 사람이 하는 게임이다, 이 두 가지 논리가 융합되어 나오는,
“성원이랑 승진이 어딨지? 아, 잠깐만 와봐라.”
“예!”
“네, 감독님.”
신구(新舊)의 조화.
2020시즌 신인 두 친구가 감독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모습을 본 지호가 중얼거렸다.
“참 다행입니다. 저 두 친구가 생각보다 잘하지 않습니까.”
“잘하지. 진짜 다행이지. 어떠냐, 지호 너도 후배들 생기니까 좀 기분 묘하고 그러지 않아?”
“어…예. 아직 저도 제 살길을 다 못 찾았는데 아들 생긴 것 같은 느낌이….”
아들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어린놈의 짜식이, 고작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친구들 들어왔다고 아들 같네 어쩌네 하는 걸 보면 꽤나 가소롭다.
“잘해줘. 너랑 두 살 차이면 꽤 나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따지고 보면 너랑 동시대 애들이야.”
“예. 저는 후배들에게 부조리를 행하지 않겠습니다.”
“…….”
따봉!
“정말입니다.”
지호는 무표정하게 엄지를 내세우며 제 후배들에 대한 교육계획서를 내밀었다.
X발.
“근데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뭐가 어려워. 아들같이 느껴진다매. 그럼 진짜 아들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알려주면 돼.”
“그게 어려운 거 아니겠습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너, 너 처음 입단했을 때 생각하면 되지. 너 처음 들어왔을 때 네 선배들이 너한테 어떻게 알려줬는지.”
애초에 내가 후배들 가르칠 때도 그게 베이스가 됐었고.
“이게 머리로는 아는데…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자격지심 같기는 하지만, 제가 아직 그렇게 잘하는 선수가 아닌데 좀…내가 감히 누굴 가르칠 급이 되나 뭐 그런….”
“아. 그런 생각 들 수도 있지. 그치.”
그런 말을 하는 지호는 지금 평균자책점 5.87을 기록하고 있다. 빈말로도 잘한다고 칭찬해줄 수는 없는 성적.
아직 본인의 메리트, 그리고 본인의 컨셉을 확실히 잡지 못한 신인급의 투수가 이런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근데 성적 같은 걸 이유로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하지만 아직 시즌 시작한 지 한 달 조금을 넘겼을 뿐이다. 던진 이닝 또한 이제 고작 7.2이닝밖에 되지 않고.
시즌 후반 가서 지호는 평균자책점을 충분히 끌어내릴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적이 좋고 나쁘고랑 누구를 가르치네 마네랑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야.”
“그래도 어느 정도의 자격이라는 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거 필요 없어.”
누구를 가르칠 자격?
“야, 내가 지금 투구 이론 같은 거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잖아. 너, 포스춰가 무슨 뜻인지 알아?”
“어…대충 뜻만 알고 있습니다.”
“너 내재적 팔각도라는 말 들어봤어?”
“그건 처음 듣습니다.”
“ARP는? MER은?”
“그것도….”
“다이내믹 밸런스는?”
“처음 듣습니다.”
포스춰, 내재적 팔각도, ARP, MER, 다이내믹 밸런스.
모두 필요 이상의 투구 이론을 공부해야 볼 수 있고, 또 뜻을 알 수 있는 단어들이다.
“내가 이런 단어들을 왜 알고 있겠어. 공부했으니까. 공부를 왜 했겠어. 성적이 어지간히도 거지 같았으니까, 뭐라도 해보려고.”
…처절했지, 그땐.
“막상 그 이론들을 나한테 투영시키지 못했던 게 한으로 남아있긴 한데…그래도 그 공부들이 전혀 쓸모없진 않더라고. 내가 주변에 도움들을 꽤 줬거든.”
“그 이론들로 말입니까?”
“어. 원래는 코치님이 할 일이고 역할이 맞긴 한데….”
말 잘해야 된다. 단어 선택 잘못하면 코치님 뒷담까는 것과 같아진다.
“그…코치님도 사람이잖아. 코치님도 못 보시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거든. 그럼 뒤로 몰래 가서 얘기해주고 그랬지. 슬쩍.”
“김한울 선배님께서 그렇게 도움을 준 선수들은 효과를 봤습니까?”
“다는 아니고. 애초에 내가 강요를 하지는 않았거든. 막말로, 내가 혁준이한테 가서 너 지금 ARP가 안 좋으니까 어떻게 해, 했다가 안 좋아지면 진짜 전적으로 내 책임이잖아.”
“아…맞습니다.”
“흘리는 거지. 은근슬쩍.”
지금 던질 때 이러지 않아? 이러면 더 좋아질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물론 선택은 해당 선수의 몫이었다.
“물론…그런 면도 하나 있긴 하지. 지금까지 나랑 같이했던 사람들은 웬만하면 성격들이 다 좋아서. 간섭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했거든. 자기 걱정해준다고.”
“그것도 꽤나 중요할 것 같습니다.”
“중요하지. 내 딴엔 관심준다고 한 얘기인데 거기선 간섭하지 말라고 짜증 내버리면 의미 없잖아.”
“맞습니다.”
“앞서 한 얘기는 내 예시고. 지호 네가 당장 이론 공부해서, 쟤네들한테 가서 니네 폼이 어쩌고, 막 그러라는 소리가 아니야.”
“예.”
“그냥 선배답게. 게임 내적인 부분보다는 외적인 부분에서 도와줘. 애초에 거기까지만 해도 선배의 의무는 다한 거야.”
“예. 감사합니다.”
“만약에 말 안 듣는 놈들 있으면 얘기해. 다 조져버릴라니까.”
“예!”
이제 고작 3년차가 된 고졸 선수는 마음의 짐을 크게 덜어버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신구의 조화라는 것을 하나의 채점 목록으로 따질 수 있다면, 이 부분에서 원하 챌린저스는 0점짜리였다.
왜?
신구의 조화는 무슨, 구(舊)가 없잖아. 신(新)밖에 없는데 조화를 어디서 뭐랑 해.
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것들은 점점 낡은 것들로 변해가고, 또 그 아래에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이 들어온다.
이번 2020시즌은 정말, 이 신구의 조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승진이, 7회 나가보자.”
“예!”
2020시즌 원하 챌린저스에서 신(新)을 맡고 있는 2020시즌 신인 투수 이승진.
얘는 보면 참 애가 뭐랄까…….
“후우, 잘 부탁드립니다!”
“예예, 승진 씨 던져, 맘껏 던져요!”
“예!”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열정이 넘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야구에 대한 열정이라고 해야 하나, 집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참 아주 보기 좋다. 보고 있자면 현진이 순한 맛 같이 느껴지거든.
저는 야구가 너무 좋습니다. 너무 재밌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고, 더 잘하고 싶습니다. 이왕 야구선수가 되었으니, 정말 끝이라는 걸 한번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현진이가 했던 말은 시간이 지나며 그 말의 스크립트가 완벽히 보존되지는 못했지만,
퍼엉-!
“어우, 승진 씨 좋다, 좋아!!”
불펜 피칭 초구부터 저렇게 쌔려 박는 걸 보니 현진이의 일말이 보이는 것 같다.
저렇게 정열만 가지고 움직이다가 다치기 딱 좋아 보이는 것도 닮았네.
짝짝짝!
“야야, 승진이 살살해라. 다치겠다.”
“승진아 볼 좋으니까 천천히 해.”
하여 투수코치님을 위시한 선배 투수들은 박수와 함께 승진이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아, 예…!”
좋다. 애가 참.
선배들의 애정 섞인 꾸지람에 살짝 주눅이 든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그 주눅이라는 이유가 참 귀엽다.
잘하고 싶은데, 잘할 수 있는데, 보여주고 싶은데. 왜 리미트를 거는 거지. 내가 뭐 잘못했나?
절박함에서부터 비롯된 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까 그냥 막, 왜 고인물들이 뉴비만 보면 스읍, 하아- 뉴비냄새- 이러는지 알 것 같다.
짝짝짝!!
“승진이, 좋아좋아!!”
“승진 씨 직구 좋잖아, 직구 하나 더 보여줘!”
“예!”
아마 지금 당장에 이해는 못 하겠지. 그냥 이렇게 해라 얘기하니 알았다고 대답만 하는 아이와 같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승진아, 봐봐.”
“예, 코치님.”
“지금 포수가 저렇게 앉아있잖아.”
“예.”
“포수를 한 번 봐. 응? 포수의 오른발, 오른쪽 무릎, 오른쪽 어깨, 머리, 왼쪽 어깨, 그리고 미트. 이런 식으로 한 번 사악 훑어봐봐. 지금 봐봐.”
“예.”
“한 번 천천-히 훑어. 그러면 봐봐, 옆에 타자가 니 눈에 안 들어올 거야.”
“맞습니다.”
“그렇게 던져.”
“예!”
바로 코치님의 등장.
어깨에 힘을 좀 빼고 던지라느니, 100%가 아닌 80%로 던지라느니, 마음 편하게 던지라느니.
무의식의 영역에서 자체적으로 기어를 올리고 있는 선수들에겐 하등 쓸모없는 개소리일 뿐이다.
차라리 그런 것보단 지금처럼 옆에서 강제적으로 기어를 중립으로 뽑아버리는 게 더 낫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타이밍을 맞춰내던 코치님은 불펜 밖의 상황을 슬쩍 보시더니,
“승진이 라스트 두 개.”
“예! 직구 던지겠습니다!”
불펜에서의 강판을 예고했다. 앞으로 남은 투구는 두 개, 승진이의 표정을 슬쩍 보아하니…….
“…힘 진짜 많이 들어가네.”
퍼엉-!
“아이, 볼 좋으니까 살살해도 돼요!”
“네!”
아직 100%를 쏟아내지는 않은 듯 승진이는 한껏 여유가 가득한 표정으로 마지막 투구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견 못 할 정도로 우리 코치님은 호구가 아니다.
“승진이, 지금 올라가자.”
“예?”
“지금 올라가. 이닝이 좀 빨리 끝났네.”
“아…예.”
훼이크다, 이 자식아.
코치님과 선배님들 앞에서 내가 이 정도로 엄청나요! 를 시위할 마지막 기회가 허무하게 사라지자 승진이는 괜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괜찮아.
“플레이!”
네가 그런 의미로 시위해야 할 곳은 고작 불펜 같은 쪼가리가 아닌,
퍼엉-!
“스뚜라이이잌, 아웃!”
거기. 네가 지금 서 있는 거기, 마운드니까.
짝짝짝!!
“아, 승진이 좋아! 계속 가자가자!!”
“승진이 직구 좋다!”
“직구만 던져도 돼! 직구 가!”
볼빨 하나만큼은 진짜 역대급 포텐을 가졌다 평가받는 승진이는 장차 우리 팀에서 마무리를 기대하고 있다.
먼저 차세대 마무리를 찜해둔 지호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퍼엉-!
“스윙, 아웃!”
직구 하나만 가지고 저렇게 배트를 이끌어내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가 없는 거거든.
짝짝짝―
“어우…쟤 진짜 뭐지.”
“볼빨만 따지면 나보다도 좋은데?”
“에이, 그래도 선배는 못 따라가지.”
은구 선배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며 전광판을 한 번 확인했다. 방금 던진 직구의 구속은 149km.
구속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만 승진이의 직구를 판단했을 때 역대급 어쩌고 하는 건 정말 설레발인 게 맞긴 한데.
승진이의 직구는 구속,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퍼엉-!
“스윙, 아웃!”
힘.
우리가 계속 볼빨이 어쩌고 하는 현장 단어를 조금 더 직관적인 단어로 표현했을 때, 승진이는 직구만 가지고 1이닝을 책임질 수 있는 힘을 가진 투수다.
짝짝짝―
“어우, 승진이 볼 진짜 좋다.”
“감사합니다!”
“승진이 무리는 하지 말고. 바로 아이싱 하러 가.”
“예! 감사합니다!”
프로모션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신인 투수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덕아웃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