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선배
프로야구 1군.
와, 야구선수들에겐 말만 들어도 가슴을 벌렁거리게 만드는 단어가 틀림없다.
여기에 ‘주전’, 혹은 ‘선발 엔트리’라는 단어를 뒤에 붙여보면 어떨까.
프로야구 1군 주전. 프로야구 1군 선발 엔트리.
안 그래도 벌렁거리던 가슴이 이제는 그냥 미어터지려고 한다.
왜?
야구선수들은 왜, 왜 저 단어들을 보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걸 느낄까.
우리나라에서 펼쳐지는 모든 야구 경기 중 최고의 무대라는 점 때문에?
거기서 알 한 번 제대로 박으면 큰돈 좀 만질 수 있어서?
사실상 야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유일한 무대기 때문에?
뭐, 다 맞는 말이긴 하지.
근데 여기에 한 가지 단어를 추가해본다면, 바로 희소성 때문이 아닐까.
대략적으로 어림잡을 때 팀당 가질 수 있는 주전 선수들은 대략 15명 정도.
모든 야구선수들은 이 ‘15명’ 안에 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정말 처절하게 연습하고, 훈련하고, 목숨을 내건다.
갖고 있는 재능만 가지고 이 자리에 선 사람도 있겠지만, 그 재능에 노력까지 더한 선수가 훨씬 많을 거다.
“저기, 김한울 선배님.”
“엉?”
“혹시 커브…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커브? 되지, 왜 안 돼. 왜왜, 뭐가 문젠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2020시즌 신인인 이승진, 이 친구는 재능과 노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선수라 판단할 수 있다.
150km 언저리에서 계속 논다는 구속도 좋지만, 구속보다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점이 바로 구위.
대포알? 얘 직구가 더 셀 거 같은데?
그런 천부적인 재능에 더불어,
“커브가 생각보다 그…안 꺾이는 것 같습니다. 변화가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더 좋은 투구, 더 멋진 투구를 위해 노력하는 재능까지.
“커브의 속도보다는 궤적이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싶습니다.”
승진이는 당당하게 본인이 원하는 바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어제 커브 던져봤어?”
“아닙니다.”
“그럼 어제 뭐 던졌어?”
“어제는 직구만 던졌습니다.”
어제 승진이는 KP 스타즈의 강타선을 상대하며 1이닝 동안 11개의 공을 던졌다. 덧붙여 뽑아낸 삼진이 세 개.
단순히 1이닝 삼자범퇴다, 근데 그게 다 탈삼진이다, 이런 걸 떠나 승진이가 던진 모든 공이 죄다 직구였다는 점이 참 인상적이다.
이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승진이의 직구가 정말 오지게 좋구나…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엔,
“왜 커브 안 던져보고.”
“아직까지 실전에서 던지기가 좀 무섭습니다.”
그나마 하나 딸랑 있는 변화구인 커브가 어지간히도 형편없다는 점으로 해석될 여지 또한 충분하다.
“하긴. 지금이야 직구가 어지간히 좋으니까 직구만 던져도 되긴 한데…변화구도 필요는 하….”
“한울아.”
“예, 예?”
“8회 나간다.”
“아, 예!”
아, 차라리 잘됐다.
“잘됐네. 나 몸 좀 풀고 이따가 던질 때 너 여기, 여기 앞에서 봐봐. 보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괜찮으니까 얘기하고.”
“예, 감사합니다!”
자유롭게 관람을 허락하자 승진이는 머리를 꾸벅 숙인 뒤 피처 플레이트의 오른쪽에 위치했다.
특등석에서 까마득한 선배가 몸을 푸는 것을 하나하나 지켜보는 눈빛은 뭐랄까, 저 고인물한테 내가 뭘 빼먹을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네. 잘하네. 뉴비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스트레칭을 완료하고 건영이와 캐치볼까지 완료하자 플레이트를 스파이크로 슥슥 닦아냈다.
“커브.”
“까브!”
상황도 상황이겠다, 초구는 커브.
“커브!”
“아이!”
또 커브.
“커브 간다!”
“헤이!”
한 번 더 커브.
세 개의 커브를 연달아 던진 뒤 승진이를 슬쩍 봤다.
“좀 알겠냐?”
“어…잘 모르겠습니다.”
“승진이 너가 힘이 참 좋잖아. 힘도 좋고 메카닉도 참 좋고, 다 좋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아니고. 근데 그러다 보니까 커브도 좀 힘으로 던지려는 경향 같은 게 보이거든.”
“아….”
“단순하게 생각하면 돼. 건영아, 커브!”
“에이!”
내가 잡는 그립을 한 번 보여준 뒤 네 번째 커브를 던졌다.
꽤나 큰 낙폭이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게 아닌 꺾여 들어가는 분명한 ‘변화’를 보였다.
“꺾으려고 하지마. 막, 이렇게 막, 손목을 이렇게 해가지고 회전을 막, 막, 이렇게 막,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예.”
“그냥 자연스럽게. 커브 한 번 더!”
“어이!”
다섯 번째 커브 또한 직전의 커브들과 거의 같은 궤도를 그린 뒤 건영이의 미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총 다섯 번의 커브를 던진 뒤 승진이를 슬쩍 봤다. 다부지게 생긴 얼굴로 헤…하는 표정을 하는 걸 보니 꽤나 웃기다.
“그리고 있잖아.”
“예, 예!”
“커브는 던지는 것 자체보다는 던지는 타이밍이 중요하거든?”
“타이밍 말씀이십니까? 릴리스 타이밍입니까?”
“아니. 어느 타자의 몇 구째에 던질 거냐, 그 타이밍.”
“아….”
“근데 이건 좀 공식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라서 말로 표현하기가 그렇….”
“한울이 올라가자!”
“…기 때문에 보여줄게.”
“예!”
터벅터벅, 불펜의 열린 문을 통과하자 시선에 담기는 마운드. 피처 플레이트 앞에 떵그라니 놓여있는 공을 집어 들어 묻어있는 흙을 슥슥 털어냈다.
“커브라….”
최근에 불펜에서 싱커만 주구장창 던지다가, 또 인게임 피칭에서도 싱커만 주구장창 던졌던 기억이 났다.
묘하게 그때랑 흐름이 비슷하거든.
누군가와 연관되어 특정 구종에 꽂히고, 불펜에서 그 구종만 던지다가 마운드에 등판하니,
띠링-!
[느림의 미학]
- 커브를 6개 이상 던지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0/6)
- 보상 - 커브 +2
해당 구종과 관련된 퀘스트까지 받아들기까지 하고.
커브의 크고 아름다운 궤적에서 본딴 건지, 오늘의 텍스트는 저어기 높은 전광판 위에 떠 있었다.
덕분에 내가 상대할 타순도 재차 확인할 수가 있었고.
“류승훈…김기윤…김성수….”
KP 스타즈의 2, 3, 4번타자.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겠는데?”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만큼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KP 스타즈의 타순이라면, 오히려 살살 꼬드기는 투구가 더 잘 먹힐 수도 있겠다.
다시 몸을 돌려 규학이를 쳐다봤다.
연습 투구 때 가장 많이 던지는, 혹은 가장 첫 번째로 던지는 구종을 오늘 투구의 컨셉으로 정하자.
언젠가부터 나와 규학이 사이에서 암묵적인 룰이 되어있는 부분을 인지하며,
“읏!”
커브를 던졌다.
빵!
“아, 좋다!”
눈짓으로 몰래 시그널을 보내니 규학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아들었겠지.
“플레이!”
2번타자 류승훈이 타석으로 나타나며 8회 말 수비가 시작되었다. 그에 맞아 규학이가 가장 먼저 꺼내든 카드는,
“읍!”
퍼엉-!
몸쪽에 깊다란 직구 하나. 근데 많이 높은.
“볼!”
좌우보다는 상하의 기준에서 빠졌다는 판정을 받으며 볼을 하나 받았다.
커브 사인 잔뜩 보냈는데 웬 직구? 라는 생각보다는, 커브 진짜 어지간히 받고 싶어서 큰 그림 그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끅!”
퍼엉-!
“볼-.”
다음으로 던진 직구는 바깥쪽에 정확하게 들어갔지만 높이는 직전의 투구와 거의 비슷했다.
당연히 볼 판정을 받아내며 카운트는 2-0.
이쯤이 되면 오랫동안 참아왔던 무언가를 터뜨릴 때가 됐다. 그 무언가라는 게,
“악!”
빵!
“하아잌-!”
150km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던 직구보다 무려 40km 정도 느린 커브라는 점.
띠링-!
[느림의 미학]
- 커브를 6개 이상 던지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1/6)
- 보상 - 커브 +2
일단 퀘스트 카운트도 하나 챙기고.
급격한 속도 차에 당황했는지 류승훈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려있다.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고 판단한 규학이는 또 하나의 커브를 요구했다.
“끄악!”
짝―
바로 존 아래로 떨어지는 커브.
“스위잉-.”
커브는 이게 좋아. 볼에서 시작해 볼로 끝날 수 있는 유일한 구종이거든.
띠링-!
[느림의 미학]
- 커브를 6개 이상 던지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2/6)
- 보상 - 커브 +2
직구 두 개로 볼, 커브 두 개로 스트라이크를 잡은 상태에서 커브를 하나 더 던지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규학이는 초구와 같은 공을 요구했다.
속도, 그리고 낙폭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닐까.
“윽!”
퍼엉-!
“스윙-!”
110km 언저리의 느린 공 두 개를 연속으로 본 뒤, 150km 정도의 빠른 하이패스트볼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타자는 얼마 없다.
차라리 안 치면 모를까.
규학이가 기성이 쪽으로 공을 휙 던질 동안 나는 마운드의 뒷편에서 로진을 탈탈탈 털며 계획을 차츰 수정해갔다.
퀘스트 완료를 위해 앞으로 던져야 할 커브는 총 네 개.
“…아싸리….”
아싸리 김기윤한테 커브만 던진다면 어떨까.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생각이 난 대로 사인을 내보냈다. 이런 건 앞뒤 생각 안 하고 지를 때가 더 잘 먹히니까.
검지 손가락으로 모자챙을 툭 친 뒤 글러브를 가리켰다. 규학이가 고개를 끄덕거린 뒤 커브 사인을 냈다.
내 쪽에서도 컨펌 사인을 한 번 보낸 뒤 글러브 안에서 그립이 이리저리 휘감긴다.
“읍!”
던질 곳은 바깥쪽.
넣으려고 했는데 살짝 빠졌나, 싶었지만,
따악―
“형님, 여유 많아요!”
“천천히, 스텝 제대로 밟고-!”
김기윤은 내 계획을 초전부터 박살을 내버렸다.
띠링-!
[느림의 미학]
- 커브를 6개 이상 던지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3/6)
- 보상 - 커브 +2
아, 잠깐만.
타구가 빠르기도 했고, 성훈이형이 쉽게 잡아냈기에 간단하게 아웃을 예감한 김기윤이 털털 뛰는 걸 보니 무언가 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좀 위험한데.”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해 더 던져야 할 커브는 세 개. 하지만 남은 타자는 한 명.
다음 타자로 나선 김성수가 또 초구부터 쳐버리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말 같지도 않은 볼을 던지는 건 거의 승부조작급 썰과 다름없고.
“…아, 몰라. 해봐야지.”
이렇게 된다면 새로이 수정되는 조건이 두 가지가 있다.
타자 입장에서 배트를 내보낼 생각조차 못 할 공을 던질 것. 근데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전혀 말도 안 되는 공이 아닐 것.
이 조건에 부합하는 몇 가지 구역이 있긴 하다. 그곳들을 노리자.
“읍!”
가장 대표적으로 이 조건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뻥-!
“하아잌-!”
띠링-!
[느림의 미학]
- 커브를 6개 이상 던지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4/6)
- 보상 - 커브 +2
높은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느린 커브.
일단 공의 출발지점 자체가 매우 높기에 타자는 기본적으로 한 번 움찔거린다.
거기서 공이 오긴 하는 데 매우 느리다. 때문에 공의 이동을 더욱 정확히 볼 수 있다.
어…높은데…?
한 번 잃은 타이밍은 그 어중간한 간극을 메꾸지 못한다.
계속 이런 공만 던질 수는 없지만 가끔씩이나마 요긴하게 써먹을 수가 있다. 지금이 바로 써먹어 줘야 할 상황이고.
그리고 그다음으로 확률이 높은 곳은 몸쪽 낮은 곳.
“읍!”
따악-!
하지만 너무 깊어서 볼로 판정을 받아야 할 구역.
“파울, 파울!”
띠링-!
[느림의 미학]
- 커브를 6개 이상 던지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5/6)
- 보상 - 커브 +2
아예 존으로 들어갔다면 모를까, 거의 정강이에 맞지 않나 싶을 정도로 깊은 커브를 때려서 라인 안쪽으로 넣을 수 있는 타자는 그리 많지 않다.
자…0-2까지는 잡았고.
김성수를 상대로 던진 공은 몸쪽에 높게 걸치는 커브, 몸쪽 깊게 떨어지는 커브. 그러면 마지막은…….
“여기도 한 번 가줘야지.”
이쯤 되면 한 번쯤 나와줘야지 않을까. 나, 그리고 규학이로 이루어진 우리 배터리의 시그니처.
“끄악!”
내가 볼을 던지면,
뻥!
규학이가 스트라이크처럼 잡아내서,
“하아아아아잌-!!”
삼진을 잡아내는 것.
띠링-!
[느림의 미학]
- 커브를 6개 이상 던지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6/6)
- 보상 - 커브 +2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89
커브 – 83+2=85
슬라 - 82
스플 - 83
체인 - 83
싱커 - 84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후우….”
한고비 넘겼구나, 싶은 마음에 한숨을 후우우 쉬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짝짝짝―
“어이, 나이스볼!”
“오늘 커브 진짜 좋네요!”
“한울이형, 짜란다짜란다!”
맞아주는 팀원들을 발견한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기에,
“아이, 찰칵!”
찰칵!
기분 좋게 세리머니도 한 번 해주시고.
간단한 세리머니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팀원들 사이,
“고생하셨습니다!”
유일하게 내 앞을 가로막는 후배 녀석 하나가 보였다.
“어떻디?”
“…멋있습니다.”
승진이는 뭔가에 홀린 것 같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한 박수를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