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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33화 (133/190)

133화. 후배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며 생업과 관련된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가게 된다. 또한, 시간이 지나며 본인의 전철을 밟을 사람들과도 만나게 되지.

이는 야구를 업으로 삼는 야구선수도 마찬가지.

이 절차라는 게 무엇인고, 이에 대해 설명하자면 간단하다.

누구나 선배들만을 둔 뉴비로 시작해 시간이 지나며 선배와 후배가 공존하게 되고, 또 거기서 시간이 더 지나 후배들이 가득한 세상이 오는 거지.

그런 경로로 봤을 때 난 좀 특이한 편에 속한다. 최고참은 아니지만, 원하 챌린저스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인지 후배들이 가득한 세상과 좀 빨리 만나게 됐으니까.

“혁준아, 나 물 좀.”

“아이, 우리 요리킹 조리킹 부조리킹 한울이형, 여기 황혁준이가 물 한 잔 대령했사옵니다.”

“…….”

물론 그 후배들이라는 놈들이 하나 같이 정상적이지가 않다는 게 참 가슴 아프긴 하지만, 여튼 나는 이 후배들을 이끌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단순히 이 녀석들의 선배라는 점만 봐도 그렇지만, 그다음으로 나에게 걸리는 타이틀이 있잖아.

바로 주장.

단순히 팀의 얼굴마담 노릇 좀 하라고 씌워준 감투가 아니다.

주장이라는 이름에서 따라오는 역할, 그리고 그에 따른 의무를 기대하며 나에게 이런 감투를 씌운 것이다.

“넌 진짜, 진짜 넌 나쁜 새끼야.”

“아이…우리 요리킹 조리킹 부조리킹 한울이형이 해주시는 말씀이라면 전 어떤 말씀이라도 좋습니다요.”

미친놈인가 봐.

혁준이가 직접 뚜껑까지 따 준 생수병과 함께 날아온 쌉소리로 인해 아픈 머리를 꾹꾹 누르며 의자에 앉았다.

슬슬 더워지는 시기와 맞물리며 몸을 화끈하게 움직이는 야구선수들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점점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아, 더워.

“아으.”

차가운 500ml 짜리 생수병 하나를 통채로 비워버린 뒤 구장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폈다.

명진이와 수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기범이.

배팅 케이지 안에서 타격 연습 중인 병천이.

그런 병천이의 타격 연습을 지켜보는 성현이.

일단 야수조는 성현이가 잘 관리하고 있다.

성현이가 뿜뿜 장비하고 있는 야구에 대한 지식이라든지, 아니면 성현이가 야구에 대해 갖고 있는 자세라든지.

단순히 개인 성적이라는 요소가 아닌, 정확하게 수치화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만으로 성현이는 말 안 듣는 선수를 꾹 누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팀의 절반인 투수조.

1kg 짜리 아령을 들고 열심히 로테이트 커프를 돌리는 은구선배.

캐치볼을 하며 커브를 연습하는 지호.

그런 지호와 캐치볼을 하며 커브에 대한 팁을 주는 규진이형.

근데…….

“…승진이랑 성원이는 어디 갔냐?”

“네?”

우리 어린 친구들은 어디 있나.

내 말에 혁준이는 고개를 휙휙 돌리며 신인 투수들에 대한 소재 파악을 도와주었다.

“승진이 저기요.”

그중 혁준이는 저 멀리, 좌익수 폴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보이는 건 열심히 러닝을 뛰고 있는 승진이.

“승진이 진짜 열심히 한다니까요. 저번엔 저한테 슬라이더 물어봤거든요?”

“슬라이더 어떻게 던지냐고?”

“네. 자기도 던지고 싶은데 뭐 팁 같은 거 있냐 그러더라구요.”

고작 얼마 전에 나한테 커브 알려달라 해놓고, 금세 마음 바꿔서 혁준이한테 달라붙어? 이 새끼는 정말,

“진짜 열심히 하네.”

“그쵸.”

오늘 끝나면 소고기 좀 사줘야겠다.

“근데 좀 미안한 말이기는 한데, 솔직히 좀…재능은 없어요.”

“뭔 재능? 직구가 저렇게 좋은데.”

“아뇨, 직구 말고. 슬라이더요.”

“아.”

“그…진짜, 진짜 제가 가진 모든 걸 다 알려준 기분이거든요. 진짜 1부터 10까지 하나하나, 죄다. 근데….”

“근데.”

“…못 던져요. 슬라이더에 대한 감각이 아예 없어요.”

그것참 유감인 소리.

“근데 그거 있잖아요. 형이 맨날 얘기하는 거.”

“내가 얘기하는 게 한둘이어야지.”

“자기 귀찮게 하는 후배가 제일 좋은 후배라고 했던 거.”

폐급인 녀석이 삽질해서 귀찮게 한다는 뜻이 아닌, 항상 가르침을 갈구하고 발전에 목말라 있는 후배들을 가리키는 이야기다.

“아, 어. 기억하지.”

“승진이가 그런 애거든요.”

“그 정도야?”

“네. 솔직히 저도 사람인데…안 되는 거 계속 가르쳐주다 보면 저도 좀 지치잖아요. 안타깝기도 하고.”

“그치.”

열성적으로 가르쳐주고자 하는 선배의 마음도 저렇게 안타까운데, 막상 그 가르침을 받는 당사자의 마음은 어떨까.

아쉬워하고 절망하고, 또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자, 대충 그런 식으로 얼버무렸는데 얘가 그러는 거예요. 다음에 언제 또 가르쳐줄 수 있냐고.”

근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승진이는 그쪽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뭐라 그랬는데?”

“…조만간 또 알려주겠다 뭐…대충….”

“허허. 다음 슬라이더 강연회 때는 나도 한 번 끼워 보아라.”

“예, 뭐. 저야 좋죠.”

팀 내뿐 아니라 팬덤 사이에서도 승진이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데 진짜 노력까지 오지게 열심히 하는 신인. 지금 당장에도 잘하고 있지만 5년 후, 10년 후가 더더욱이 기대되는 투수.

승진이는 지금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다. 고졸 신인 1년차임을 감안한다면 분명 엄청난 호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직구만 던져서 1이닝 동안 세 개의 삼진을 뽑아낼 정도의 재능을 가진 아이에게 기대하는 성적은 아니다.

다행인 점은 본인이 본인의 약점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완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다는 것.

내가 현진이 순한 맛 어쩌고 했던 게 틀린 말이 아니라니까.

승진이는 딱히 크게 걱정이 되지 않는다. 저런 애가 딱 그런 애거든. 냅둬도 알아서 잘 크는 전형적인 신인.

근데 이 녀석과 동기인 또 한 명의 투구는 음…….

“근데 성원이는 어디 가고?”

“글…쎄요? 또 화장실 간 거 아닐까요?”

좀 쎄한데.

얼마 전 손가락 물집 문제 때문에 등판을 하루 쉬게 된 준혁이 대신 등판한 성원이는 아주 좋은 기록을 남겼다.

그래, 그날. 정확하게는 성원이가 등판하기 직전 은서 씨와 함께 성원이의 불펜 세션을 참관하기 위해 불펜에 방문했을 때.

그땐 그렇게 생각했지. 아, 얘가 긴장을 좀 잘 타는 애구나. 긴장하면 배가 자주 아픈가보구나.

근데 이게…….

“흐음….”

너무 자주 그래. 농담이 아니라, 맨날.

맨날?

성원이는 차후 팀에서 선발진 중 한 명으로 낙점을 해놓은 상태다. 해서 지금은 동균이와 함께 1+1 선발이나 팀의 6선발 느낌으로 데리고 다니는 느낌이고.

즉,

“에이,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이렇게까지 맨날 긴장을 하고, 또 그로 인해 맨날 배가 아플 이유는 없다는 거지.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혁준이의 말처럼 부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길 바랄 뿐이긴 한데. 그렇다고 하기엔…주변에서 알음알음으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꽤 심상치 않다.

“아니겠지.”

“그쵸.”

“일단은 한 번 찾아보고 올게.”

“네? 아, 네.”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아니, 그 이유가 사실이 아니라면 오히려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신인들 멘탈 관리하는 것도 주장의 역할 중 하나니까.

곧장 덕아웃을 떠나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돌아다닐 때마다 만나는 팀 사람에게 성원이의 행방을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원이 봤어? 성원이 혹시 어디 있는지 보셨습니까? 성원이 어딨냐? 성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태웅이, 투수코치님, 준혁이, 경석선배 순으로 물어봤지만, 성원이의 행방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진짜로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이쯤 되면 진짜로 괜한 걱정이 들기까지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집합까지 늦은 적은 없으니까 어련히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수색 작업을 종료했다.

성원이도 성원이지만 어느새 가까워진 미팅 시간 때문에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아, 그 전에 화장실 좀.

아까 급하게 물을 빨아들여서 그런가, 그에 대한 급성 부작용으로 인해 화장실에 대한 방문 욕구가 확 끌어 올랐다.

턱턱턱!

화장실에 가까워질수록 강해지는 요기에 발걸음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자 화장실의 팻말을 발견하고선 주변을 살피지 않고 곧장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

“…랬던 거지. 생각해봐라, 그게 말이 되냐? X발, 여기 개꿀이라니까? 터치 안 해. 아니, 편한데? 그건 나도 모르지.”

…어 갔는데…….

일단 먼저 급했던 용무를 해결하면서 유일하게 닫혀있는 변기 칸을 쳐다봤다.

아무리 우리 팀이 자유와 방목을 중시한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아?

“흐음….”

웬만하면 화를 내고 싶지도 않고, 또 지금까지 살아오며 화라는 것 자체를 거의 낸 적이 없던 사람은 그리 급발진을 하고 싶지 않았다.

먼저 화장실을 나선 뒤 덕아웃에 도착해 시합 전 미팅을 준비했다. 일단 모인 인원과 도착하지 않은 인원을 구별하고 있을 때쯤,

“어디 갔다 왔냐?”

“화장실.”

“또 배 아파?”

“어, 좀?”

성원이가 낼름 달려와 승진이의 옆자리에 섰다.

딱 한 번만. 정말 딱 한 번만 더.

“…….”

가능하다면 조용하게 일을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을 당장은 증거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살짝 넘겼다.

그럼에도,

“성원아.”

“예, 선배님!”

“…열심히 하자. 알지?”

“옙, 알겠습니다!”

잘생긴 얼굴로 방긋 웃는 성원이의 얼굴을 보는 내 얼굴은 썩 그리 곱지 못했다.

* * *

대충 어제, 승진이를 주제로 혁준이와 이야기를 나눴던 때로부터 24시간 정도가 흘렀다.

일단 그라운드의 상황은 어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 열심히, 본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라…….

“왜 그러냐? 어디 아파?”

“아니. 그건 아니고.”

“뭔 일 있어?”

“아니….”

만약 사실이라면 이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점을 계속 생각해왔던 만큼 내 면상도 어지간히 일그러져 있었나 보다.

내 표정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규진이형이 다가와 등을 툭툭 치며 이야기를 걸어왔다.

일단 말로는 아무것도 아니라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겠지.

“…그래, 알았다.”

내가 딱히 주제를 꺼내지 않자 애써 캐물을 사항은 아니라고 판단한 듯, 규진이형은 이번엔 어깨를 툭툭 쳐준 뒤 자리를 피해주었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그래.”

덕분에 얼추 시간이 어제와 같아졌다.

“흐음….”

불편한 심기를 뿜뿜 뿜어냈던 탓인지,

“한울이 형!”

“왜?”

“아…아뇨.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나에게 할 말이 있던 듯 보이던 사람들은 모두 내 앞길에서 비켜나 주었다.

느릿느릿하게, 어제의 그 화장실로 향했다.

터억, 터억, 터억―

어제 이 화장실을 방문했을 때 내 발걸음의 박자가 매우 빠른 박자였다면 지금의 박자는 매우 느린 박자에 해당한다.

여러 가지 핑계로 이 박자를 해명할 수는 있지만, 나는 그중 내 존재감을 가능한 한 숨겨야 한다는 핑계를 채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어제의 그 화장실.

열려있는 그 화장실 문 너머로 유일하게 닫혀있는 변기칸 하나가 보인다. 마침, 어제 유일하게 닫혀있던 칸과 같은 칸.

입술을 삐쭉 내밀고 화장실 안으로 진입했다.

“…어어, 그래서….”

닫혀있는 변기칸과 가까워질수록, 해당 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크기 또한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랬다니깐! 아니 X발, 그게 사람이냐? 어어, 어. 어어어어, 맞어,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냐면….”

어쩜 내 기대, 혹은 내 실망이라는 세 글자를 이렇게까지 충족시킬 수가 있나.

화장실 세면대 쪽에 기댄 채 가만히 닫혀있는 변기칸의 문을 노려봤다.

툭…툭…툭…….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왼팔의 팔뚝을 메트로놈 삼아 가만히, 가만히 기다렸다.

언제 나올까, 그에 대한 대기와 기대는 숨소리, 침을 삼키는 소리, 헛기침이 나오는 소리 등, 내 쪽에서 출발하는 모든 소리를 무의식적으로 음소거 시키고 있었다.

툭…툭…툭…….

그렇게 내 팔뚝을 몇 번을 더 쳐댔는지 모르겠다.

“아, 나 나가봐야겠다. 이제 집합시간이야. 어어. 어어, 내일 전화할게.”

저 안쪽에서 다급하게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보다 더 필수적으로 들려야 할 소리들이 들리진 않았다.

무언가를 닦는 소리, 변기 커버를 내리는 소리, 하다못해 변기 레버로 물을 주와아악 내리는 소리마저.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끽, 탁!

칸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천천히 문이 열린 뒤 능글맞은 표정으로 칸에서 빠져나오는 성원이가 보였다.

턱, 턱, 턱…….

그러더니 애써 소변기 쪽으로 가서는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거 다 그러려니 할 테니까, 그냥 조용히 볼일만 본다면 참 좋을 텐데,

“어으, X발, X 같네. 지금도 잘하는데 뭔 자꾸 훈련이야….”

추임새라는 게 참 고급지다. 고급져서 도저히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으, 으!”

볼일을 마친 성원이는 목을 이리저리 꺾은 뒤, 화장실에서 나가기 위해 화장실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

근데 어쩌나, 거긴 내가 있는데.

“서,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시원하게 상욕이 튀어 나간다거나, 좀 급발진을 한다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앞장을 선다거나.

아니?

오히려 차가워진 머릿속은 조용하게, 또 나지막한 목소리로 성원이에게 말을 걸도록 지시했다.

“전화는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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