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34화 (134/190)

134화. 할만하지?

“성원아.”

“예, 선배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답답함에 나도 머리를 긁적이고만 있었다.

“하기 싫어?”

“아닙니다.”

“하기 싫다며.”

“아닙니다.”

“그럼 방금 내가 들은 건 뭐야.”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설명을 해보라니까?”

“아닙니다.”

하아…….

고등학교 시절, 나보다 한 기수 위의 선배들과 내 동기들이 정말 절대적으로 다짐을 했던 게 한 가지가 있다.

절대 부조리는 하지 말자.

과거 이용호에게 당해왔던 것들이 얼마나 X 같은 건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최소한 우리만큼은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다짐은 내가 프로에 입단하고, 또 프로 13년차에 다다른 지금에까지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후배들 귀찮게 하지 말자. 이건 팀 사기에 관한 문제다.

이 논리는 조금 더 발전하여 웬만하면 간섭이라는 것 자체도 하지 않는 쪽으로 향했다.

먼저 도움을 요청할 때는 당연하고,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을 상황이 아니라면 가만히 있자.

다만 이를 위한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성원아.”

“예.”

“너는 우리가 다들 노는 것처럼 보이냐?”

분위기의 중요성.

방임주의적인 환경‘만’ 놓게 되면 당연히 다들 놀게 된다. 팀 성적이 추락하든 개인 기록이 추락하든, 일단 연봉이 따박따박 나오긴 하잖아.

15년도였나, 그때부터 우리 팀에 부임하신 이한주 감독님은 내가 생각했던 논리에 더더욱 힘을 실어주셨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정말 노력하는 친구들을 우선적으로 선발 라인업에 꽂아 넣으며 성적 지상주의를 살짝 비껴났다.

때문에 그 당장의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긴 시간을 투자한 만큼 최근부터 원하 챌린저스는 좋은 결과를 목전에 두고 있다.

“아닙니다.”

“그러면?”

“…….”

선배들이 몸 바쳐 만들어준 이 좋은 분위기를 제대로 써먹지는 못할 망정, 완벽하게 엇나가는 이 애송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원아.”

“예.”

“물어봤잖아. 우리가 노는 것처럼 보이냐고.”

“아닙니다.”

“그러면?”

“…….”

X발, 진짜.

“너 저번에 선발 등판할 때, 그때. 왜 은서 씨랑 나랑 불펜에서 너 기다렸을 때 기억하지.”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화장실 갔다가 세션 시간 얼마 안 남기고 돌아왔잖아. 맞지.”

“맞습니다.”

“그날도 이랬냐?”

“아닙니다.”

“그럼 그날은 뭐했어?”

“그…날은 정말로 배가 아파서 화장실 다녀왔었습니다.”

“그럼 오늘은?”

“죄송합니다. 오늘 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잠깐 전화 좀 했습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적당히 이야기가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녀석은 넙죽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또 좋은 게 좋은 거란 주의를 가진 나기에 적당히 넘어가겠지만…….

“그럼 성원아, 오늘만이랬다는 거야?”

“예. 죄송합니다.”

“…….”

그러기엔 글쎄. 그렇다고 어제의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성원아.”

“예, 선배님.”

“내가 오늘 여기 이 화장실을 어떻게 찾아왔는지 알아?”

“예?”

“어제. 대충 이 시간쯤에.”

“무슨…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녀석은 애써 웃어보며 대충 넘어가 보려는 것 같은데…….

“어제도 그랬잖아.”

“…….”

“어제도 너 안 보여서 찾겠답시고 돌아다니다가, 내가 화장실 가고 싶어져서 여기 왔었거든. 그러다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오늘처럼 네가 전화하는 거 들었고.”

“아아, 아닙니다.”

“아니야? 정말로 아니야?”

부디 마지막에라도 진실을 이야기해준다면 내 맘이 참 여려질 텐데.

“예. 아닙니다.”

“…….”

고맙다. 덕분에 내 맘이 더 결연해졌다.

“아아, 아니구나. 그럼 미안한데 통화내역 한 번 보여줄 수 있어?”

“그….”

“안 돼?”

“그…개인 정보법…있지 않습니까.”

“아아, 개인 정보법?”

“맞습니다.”

“개인 정보법이 뭔데?”

“그…TV 같은 데 보면 나오지 않습니까. 영장인가 같은 거 없이 남의 정보 보면 안 되는 그런….”

애구나. 진짜 애구나.

피식 웃으며 다시 이야기했다.

“아, 그럼 그 영장 받아오면 네 통화내역 볼 수 있는 거야?”

“그….”

“혹시나 싶어서 이야기하지만, 영장 나오는 동안 네가 네 통화내역 지워도 전화국 가면 그대로 다 뜨는 건 알지, 그치?”

“…….”

그냥, 정말 솔직하게 뉘우치는 ‘척’이라도 했다면 내 최소한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텐데.

안 되겠네, 얘는.

성원이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고작 주장에 불과할 뿐인 내가 직접적으로 뭘 할 권리는 없기에, 감독님께 일러바치기로 했다. 그럼 감독님도 결국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형벌을 내리시겠지.

그렇게 마음먹고 화장실을 나가려고 할 때,

“…선배님.”

성원이가 무언가 대단한 걸 이야기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왜?”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훈련 같은 거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

“…….”

이건 또 뭔 소리야.

“팀 분위기가 그런 거 아닙니까. 자유롭게 훈련해서 좋은 성적 내면 되는 그런 분위기 아닙니까. 그리고 전 지금 좋은 성적들을 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지금 제가 어떤 식으로 훈련하든지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아아, 그러니까. 나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마라, 이거네?”

“아니…그런 건 아니고….”

“맞잖아. 뭐가 아닌데.”

하아…….

“야, 서성원.”

“예.”

“니가 말한 그 팀 분위기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는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새끼가 그렇게 니 X대로 지껄여?!”

“…….”

진정합시다, 진정합시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게 그거면, 네 맘대로 해.”

“예?”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하니, 막상 눈을 똥그랗게 뜬다.

“신경 쓰지 말라매?”

“그렇게까지는….”

“성원아. 네가 말한 거 맞아. 우리 팀 분위기는 그게 맞아. 대충 내 나이대 애들끼리 모여가지고 원했던 분위기가 바로 이거고, 또 이게 설득력이 생길 정도로 지금 성적도 나고 있고.”

이제서야 뭔가 잘못 굴러간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근데 성원아. 너가 하나 빠뜨린 게 있거든.”

“잠깐, 선배님….”

급하게 성원이가 태세변환을 시도해보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진작에 떠났다.

“대신에 네 행동, 네 말, 또 그에 따른 네 결과. 그 전부 책임지는 것 또한 너라는 거. 그거 알고는 있지?”

“선….”

“한 번 책임져봐.”

딱히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고, 또 대답 따위를 듣고 싶지도 않았기에 뒤에서 무슨 목소리가 들리든 전부 무시했다.

성원이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미팅 시간에 꽤 늦어버린 걸 알기에 살살 뛰어서 덕아웃쪽으로 향했다.

“뭐하다 왔냐?”

“아, 잠깐 일 좀.”

“해결은?”

“글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늦은 건지, 아니면 미팅이 생각보다 빠르게 끝난 건지.

내가 미팅에 합류한 시점은 미팅이 끝나고 아예 대부분의 인원이 해산한 상태였다.

그 자리에 잠깐 서 있던 규진이형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곤 곧장 감독님을 찾아갔다.

“감독님.”

“어. 너 뭐하다가 미팅에도 안 왔냐?”

“잠깐 이야기 좀 가능하시겠습니까?”

주장이라는 녀석이 다른 시간도 아니고 미팅에 불참하니 살짝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지만,

“…따라와.”

이내 내 얼굴에 붙은 심각함을 눈치채고는 나를 따로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 * *

바로 다음 날.

나보다도 노발대발하며 상욕을 터뜨리신 감독님께선 성원이를 곧장 2군으로 보내버리셨다.

일단 잘하던 신인 투수를 2군으로 급작스럽게 보내버리는 건 급발진인 감이 있기에, 보낸 이유를 최대한 함구한다 한들 이야기가 퍼지는 건 생각보다 빨랐다.

그리고 며칠 뒤, 성원이는 한성 위너스의 손석민과 1 대 1 맞트레이드 되면서 타팀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약간 급발진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 팀 수뇌부들 사이에서도 성원이는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고졸 1년차부터 확실하게 두각을 드러낸 신인 선발투수, 그리고 나이가 꽤 먹은 다소 평범한 언더핸드 불펜투수.

이 트레이드로 인해 원하 챌린저스 프런트는 진짜 뒤지게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

생각이 있는 거냐, 뭐 하는 짓이냐, 진짜 팀 운영 왜 그러냐, 제정신이냐.

고작 하루 만에 먹을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본 것 같다.

하지만 또 며칠 뒤,

“…미친.”

[한성 위너스 서성원, 음주운전으로 입건 예정]

성원이에 관한 뉴스 기사가 하나 등장했다.

기사 내용을 보니 경기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 지 혼자 전봇대를 들이 박았다는 것.

정말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고, 또 사고를 낸 성원이 본인도 경미한 찰과상 정도로 끝났다고 한다.

“와…너 봤냐?”

“…어.”

구장에 출근하고 만난 규진이형은 나에게 성원이의 소식을 이야기하며 첫인사를 건넸다.

“아니, 얘는, 진짜, 와….”

진짜 뭐 어떻게 말이 안 나오네.

덕분에 이 트레이드는 역대급 트레이드로 남게 될 전망이다. 원하 프론트의 선구안에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아, 선배. 안녕하세요.”

“어어…한울이 안녕.”

그리고 이 트레이드의 또 다른 당사자가 된 손석민. 그도 기사 내용을 봤는지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선배. 기사 보셨죠?”

“봤지. 이거 참….”

손석민도 참 난감하겠지. 본인 트레이드 상대가 그런 꼴이 났으니.

“일단 크게 신경 쓰지 마시구. 선배님은 이제 원하 사람이시잖아요. 같이 우승하시면 됩니다.”

“참 그러네.”

“유감이랄 게 있나요.”

“아니 얘는 솔직히 나랑 알 바 아니니까 상관없는데. 팀이 좀…신경 쓰이지 아무래도.”

“아….”

내가 긴 시간 동안 원하에 몸을 담가왔던 것처럼, 석민 선배도 그와 비슷한 시간을 한성에 몸 바쳐온 사람이다.

선수 트레이드라는 게 중고 거래와 같지는 않아서, 팀 옮겼다고 바로바로 바뀐 팀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건 아니다.

이건 당연히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부분.

“어쩌다 보니 타이밍이 진짜 이렇게 되네요.”

“얘 살짝 문제가 있었다면서?”

“음….”

새로 온 사람한테 떠난 사람의 뒷담을 바로 까는 게 옳은 일인가 싶긴 하지만…….

“문제랄 건 아니구요. 살짝 트러블이 있던 정도였죠. 그런 거 있잖아요, 팀 분위기랑 썩 어울리지 못하는 거.”

“그런 거면 어쩔 수 없긴 하지.”

해서 적당히 포장해서 설명했다. 다행히 석민 선배도 얼추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그, 팀에는 좀 적응하셨어요?”

“일단 여기 사람들한테는 다 적응한 거 같아. 다 좋아. 다 착하고, 다 열심히 하고. 와 이래서 1위 팀이구나 싶거든.”

“네네.”

“근데 좀 적응하기가 어려운 게….”

“네.”

“자율 훈련? 그게 좀 적응하기가 힘드네.”

“아, 그래요?”

“한성 있을 때는 다들 이것저것 다 같이 하고 그랬는데 여긴….”

구장의 전경을 살피는 석민 선배의 눈길을 따라 나도 그라운드의 상황을 살펴봤다.

양택균 타격 코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명진이.

승진이와 캐치볼을 하고 있는 은구 선배.

같이 포수 장비를 차고 마주 앉아있는 규학이와 주호.

석민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보니 뭐랄까…다 따로 노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런 게 전혀 없죠?”

“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라서.”

“저는 저희 팀의 전력이 여기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분위기?”

“네.”

명진이는 타격 코치님께 들은 이야기를 성훈이형과 공유하고 있었다.

은구 선배와 캐치볼 중인 승진이에게 규진이형이 다가가 그립을 살펴주고 있었다.

지나가던 준혁이가 캐칭 연습을 위해 모인 포수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혹자가 보면 중구난방이라 표현해도 할 말은 없지.

하지만…….

“선배도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드실걸요. 여기 분위기가 어지간히 좋아서 다시는 다른 팀 가기 싫어지실 거예요. 그래서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하게 되실 거고.”

따봉!

나는 석민 선배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