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35화 (135/190)

135화. 방향성

평범한 회사원 A씨가 갑작스레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면, 당사자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하물며 그 이직이 내가 원해서 하게 된 이직이 아니라면.

회사가 나를 버렸네 어쩌네, 그런 감정적인 면도 중요하겠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한 현대인에게 있어선 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먼저 들지 않을까.

분위기?

원하 챌린저스의 분위기는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후리함. 프리함도 아닌 후리함.

발음에서 유추가 가능하듯, 우리 팀은 참 내가 봐도 편한 분위기를 지향하고 있다.

주축이 되는 선수들의 나이대가 얼추 비슷해서 그런가, 수직보다는 수평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다 보니 생긴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엄연히 조직 문화이고, 또 그 안에서 선배와 후배가 나뉘기 때문에 최소한의 위계질서는 존재한다.

“형, 나 물 하나만 던져줘!”

“니가 가져다 먹으면 되지.”

“와, 역시 부조리!”

…위계질서는 당연히 존재한다.

“어쩌어엄, 동생한테 물 한 병도 못 주고오오, 심지어 자기 것도 아니고 구단 건데에에에-.”

이 썩을 것들이.

“꺼져.”

기성이에게 생수 하나를 휙 던져주며 주둥이를 막아버렸다.

그래, 이건 역부조리가 아니라 선배, 혹은 형으로 베푸는 아량이고 자비다.

“역시 우리의 주장!”

“꺼져!”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

“원하는 분위기가 참 신기하네.”

팀에 새롭게 합류한 석민 선배는 차츰차츰 이런 팀 분위기에 적응해나갔다.

후배들이 거리낌 없이 선배들에게 장난을 치고, 선배들은 거리낌 없이 코칭 스태프들 품에 앵기고.

사실 새로운 환경에 던져졌을 때 가장 먼저 익숙해지는 건 의외로 먼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다.

익숙해진다는 게 꼭 친해진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분이 얼마나 착한 분인지, 저 새끼가 얼마나 X 같은지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쉽잖아.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어려운 건 그 사람들이 만든 분위기다.

분위기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기는 한다만, 이 분위기 속엔,

“좋잖아요. 이런 거.”

“좋지. 좋기야 한데…애들이 말 들어?”

“잘 듣죠. 쟤들도 알거든요. 선배들이 어렵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걸. 그러니까 더 잘하려고 드는 거 같아요.”

그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만든 질서, 서명하지 않고 이행되는 계약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여기서 말하는 암묵적인 질서라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자율적인 분위기를 뜻하고, 서명하지 않고 이행되는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이 내는 성적을 뜻한다.

“신기하네….”

“한성은 어땠어요?”

“한성…은….”

이전 소속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석민 선배가 쓰게 웃었다.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팀인지.”

한성 위너스는 최근 몇 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민망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리그 1위를 고수했다. 물론 뒤에서.

“근데 한성도 훈련 같은 거 되게 열심히 하지 않아요?”

“엄청 열심히 하지. 근데 결과가 안 나와서 그렇지.”

“으음….”

“너도 알겠지만, 옛날엔 무조건 훈련이었잖아. 무조건.”

“그거 말곤 뭐 없으니까요.”

“근데 요즘은 또 아니고.”

“그쵸? 휴식도 휴식이고, 훈련의 질도 중요하니까.”

“한성 선수들도 알아. 코치님들, 감독님도 알고 프런트도 알아. 다 아는데….”

단순무식하게 훈련만이 전부고 훈련이 최고인 훈련 지상주의는 끝났다. 단순히 훈련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지금 이 훈련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야구계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인들조차도 알고 있는 그런 부분을 프로팀이 모를까.

한성 위너스도 꽤나 많은 고심을 거쳤다는 부분은 여러 군데에서 보였다.

팀의 로고를 바꿔본다거나, 팀 유니폼을 바꿔본다거나, 팀의 감독을 바꿔버린다거나, 팜 시스템을 아예 바꿔버린다거나, FA 선수를 잔뜩 때려 박는다거나.

그런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팀 내적인 부분들도 여러 개혁을 거쳤다.

메이저리그의 인스트럭터를 초빙한다든지, 한성 위너스의 자체적인 연봉 체계를 도입하다든지, 훈련 사이클 자체를 바꿔버린다든지.

그런데도…….

“그냥 안 되더라.”

안 된다.

하위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게 아니라, 꼴찌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뭐…그래도 한성 옛날엔 되게 강팀이었잖아요. 싸이클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요.”

“한성 강팀이었을 때가 언제적 얘기냐?”

“한…10년 전?”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긴 하네.

“그냥 뭔가 그런 거 있잖아. 아, 올해는 됐다 싶다가도 이상하게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거. 한성이 딱 그래.”

이거 거의 전 팀에 대한 뒷담 아닌가 싶었지만,

“상관없어. 거기 애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프런트 직원까지 그렇게 생각하더라.”

라는 석민 선배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의미로 보면 원하는 앞으로 꽤나 길게 상위권 유지하지 않을까.”

“선배는 그런 거 믿나 보네요. 약간 장기 집권이라고 해야 하나. 한 번 분위기 타면 쭉 가는 거.”

“틀린 말은 아니잖아?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니고선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는 일도 거의 없고, 아래에서 위로 수직상승하는 일도 보기 힘들잖아.”

맞는 말.

개인이든 단체든, 관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강력한 힘이라서 그리 쉽게 엇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가끔씩 그럴 때가 있어. 와, 이렇게 해도 1위를 할 수가 있구나, 이런 거.”

“확실히 그런 면에선 좀 적응하기 힘들겠네요.”

“당연하지. 지는 게 당연한 팀에 있다가 이기는 게 당연한 팀으로 옮긴다는 게 겉으로 볼 땐 좋아 보여도, 당사자는 되게 부담이거든.”

“그래도 우승은 하고 싶으시잖아요.”

“우승하기 싫어하는 야구선수가 어디 있겠어. 막말로 그런 말 있잖아, 내 몸 하나 불살라서라도 팀이 우승하길 바란다, 그런 거.”

석민 선배의 답변을 듣고 나니 내가 얼마나 무식한 질문을 했는지 느껴졌다.

“음…선배는요 그러면, 그 왜 흔한 질문 있잖아요?”

“뭐?”

“팀 성적이랑 개인 성적이랑 뭐가 더 좋아요?”

“그야 당연히….”

이 또한 다소 어리석게 느껴질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석민 선배는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팀 우승 아니겠냐.”

“흐음….”

“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선배, 저한테 똑같은 질문 해보실래요?”

“그래 뭐…그럼 넌 팀이랑 개인 중에 뭐가 더 중요한데?”

똑같은 질문. 하지만 이에 달리는 답변은 완벽하게 달랐다.

아니,

“둘 다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답변일 거다.

* * *

개인과 팀 중 하나를 고르라면 팀을 고르겠다.

좋은 출사표다.

해당 팀의 팬들이 봐도, 팀의 감독이 봐도, 팀의 다른 후배들이 봐도 기립박수를 칠만한 출사표다.

그리고 웬만하다면 그 팀의 주장이라는 사람 또한 다른 사람들 옆에 가서 함께 기립박수를 치고 있겠지.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했다.

왜 굳이 하나만 고르냐?

“선배 빠이띠이잉-!”

“석민이형 가자가자!”

팀 성적과 개인 성적, 둘 다 가지면 되지 않나?

“플레이!”

모두 최고의 기량으로 임한다면 최고의 팀이 되지 않을까?

빵!

“스트라이-크!”

착각하거나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하자.

최고의 기량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면 당연히 최고의 팀이 된다는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뻥―

“스트라이-크, 투!”

그런 이상론 따위보다 훨씬 당연하고 아주 단순하다.

부웅―

뻥!

“스트라이-크, 아웃!”

모두가 열심히 매달리면 그에 알맞은 보상을 받게 된다는, 아주 지극히 보편타당한 논리다.

짝짝짝-!

“선배 볼 좋아요, 계속 가자!”

“나이쓰 보올!”

하지만 이 논리는 애석하게도 타팀들을 비하하는 말과 같다.

그럼 우승하지 못한 팀들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거네?

그리고 이 화살은 돌고 돌아 우리, 원하 챌린저스에게도 향한다. 심지어 정규시즌은 1위로 마무리했던 작년의 우리 팀도 피할 수 없다.

“확실히 팀이 많이 가벼워졌어요.”

“가벼워? 난 오히려 무겁다고 느끼는데.”

“무거운 게 아니라 가벼운 거죠. 다들 부담 한결 덜어내고 움직이니까 봐봐, 얼마나 경쾌해요.”

“아니지, 저 한 걸음 한 걸음이 되게 진중하잖아.”

“뭐…선배 말이 맞든 제 말이 맞든.”

인정한다. 아니, 일부분은 인정한다.

어느 팀이든, 어느 선수든 노력한다. 노력하지 않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이 우승을 가리느냐.

“이제 다들 확실히 아는 거죠. 어떻게 해야 이기는지.”

방향성.

어떤 방향으로 가야 이길 수 있고,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되면 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방향성의 문제가 아닐까.

“그치. 그거 하나만큼은 맞는 말이지.”

경석 선배는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

“떴다, 떴어!”

“콜! 누구야, 콜!”

“마, 마이!!”

가야 퍼펙터스의 7번타자, 양진우가 위로 부웅 떠오르는 석민 선배의 커브를 툭 건드려 내야로 띄워 올려버렸다.

위로 떠 올랐다가 지면으로 처박히기 직전까지의 그 짧은 순간, 원하의 내야수들을 누가 공을 잡을지에 대해 알아서 회의하고,

탁!

“아웃!”

또 알아서 잡아냈다.

성문이가 글러브에서 공을 빼낸 뒤 해맑게 웃으며 성훈이형 쪽으로 휙 공을 던졌다.

2루에서 3루, 3루에서 1루, 1루에서 유격, 유격에서 다시 2루.

“투! 투아웃이요!”

공을 다시 돌려받은 성문이는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펴고 현재 2아웃에 당도했음을 여기저기에 알렸다.

성문이의 홍보 문구를 확인한 석민 선배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린 뒤 다시 공을 받고 플레이트에 섰다.

그리고 등장하는 8번타자 박세훈. 우투좌타의 2루수를 맞아 석민 선배는 초구부터,

빵-!

“스트라이-크!”

과감하게 몸쪽으로 파고 들어가 버렸다.

과감하게…….

“한울이 8회 올라가자.”

“예엡.”

혼자서 과감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자니 출격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평소의 알림보다 살짝 늦은 감이 있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읏, 차아….”

“저 형 플레이 스타일이 꽤 바뀐 거 같아.”

“그래요?”

“저렇게 때려 넣던 형이 아니거든. 타자들 살살 꼬셔 먹는 걸로 유명한 형인데.”

석민 선배를 지켜보며 속성으로 스트레칭을 진행하고 있자니 옆에 있던 경석 선배가 이야기했다.

“근데 원하 와서 되게 편하게 던진다. 부담없이.”

“음….”

딱―

“파울, 파울!”

이번에는 과감하게 존의 위쪽을 파고드는 커브로 파울을 유도해냈다.

과감하게…….

석민 선배가 이번 시즌 기록한 최고 구속은 131km. 아주 극단적인 언더핸드임을 감안하더라도 아주 느리다.

직구가 나풀나풀거린다는 느낌있잖아, 딱 그거야.

석민 선배는 그런 가소롭게 보일 수 있는 직구를,

딱!

정말 과감하게 꽂아 넣는다. 두려움 하나 가지지 않고.

박세훈은 모처럼 잘 맞은 타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성현이가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다가,

“아웃-.”

글러브만 한 번 까딱거리며 가야 퍼펙터스의 7회 말 공격을 종료시켰다.

“에에에이!”

“선배 볼 좋네요!”

“다들 수비 좋아좋아!”

두 점 차 홀드를 챙긴 석민 선배는 환하게 웃으며 불펜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불펜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이야기했다.

“한울이 8회 나가?”

“아, 네.”

“이야, 나 다음이면 타자들 적응하기 힘들겠는데.”

“원하 이기고 있을 때 거진 8회면 제가 나갈 거 알고 있을 텐데요.”

“그래도 알고 있는 거랑 눈앞에 닥친 거랑은 다르잖아?”

그건 그렇지.

“근데 선배. 좀…그런 말이긴 한데요. 무섭지 않아요?”

“뭐가?”

“맞을까 봐…라고 해야 하나.”

“안 무서울 리가 있나. 나도 사람인데.”

석민 선배가 빙긋 웃었다.

“한성에 있을 땐 진짜 무서웠거든. 웬만하면 안타고 실책이고 그러니까. 근데 원하에 오니까 그런 게 싹 사라져버리네.”

“하긴. 그게 영향이 있긴 하죠.”

“그치. 하물며 한울이 넌 나보다 제구도 좋고 구위도 더 좋잖아. 가끔은 생각 없이 그냥 다 때려 넣어봐.”

과감하게 말야.

“흐음.”

그럼 아이싱 좀 하고 올게, 그 말을 남겨두고 석민 선배는 덕아웃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석민 선배의 등짝을 보며 잠시 생각한 뒤,

“건영아, 직구 간다.”

“에이!”

“아니, 거기 말고. 가운데 대봐.”

“예?”

“가운데.”

“아…에이,직구!”

이내 불펜 피칭이 시작됐다.

건영이는 좌우의 가운데와 상하의 가운데가 겹치는 곳에 미트를 보였다.

가운데.

“읍!”

퍼엉-!

“어우, 좋다좋다!”

완벽하게 정가운데에서 살짝 틀어지긴 했지만, 존의 한가운데라는 뜻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충분히 실투라 인정받을 구역이었다.

“흐흐.”

오늘은 이거다.

불펜 피칭의 모든 공 하나하나가 통상적인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모두 존의 한가운데에서 놀았다.

워낙 제구가 좋은 나다 보니까 주변에서는 알아서 영점을 맞추고 있겠거니, 생각이 있겠거니 하며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한울이, 슬슬 올라가자.”

“아, 네.”

어느 정도 나도 감을 잡았을 때 불펜의 문이 열렸다.

재밌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운드에 올라 전광판을 쳐다봤다.

띠링-!

[과감성]

- 스트라이크만 던져 1이닝 무실점하세요. (단, 파울과 타격은 스트라이크로 인정) (0/1)

- 보상 - 포심 +2

마침 이번 등판의 컨셉과 아주 정확하게 일치하는 퀘스트가 떠올랐거든.

간단하게 마운드 세션을 마친 뒤 플레이트를 밟았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웃음기를 지우는 게 꽤나 힘들었다.

“플레이!”

그 웃음기를 자신감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채, 아예 내 쪽에서 규학이에게 사인을 보냈다.

내가 보낸 사인을 확인한 규학이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그래도 내가 막상 미친 짓 시작할 때보다야 많이 익숙해진 것처럼 보인다.

“읍!”

퍼엉-!

“스트라이-크!”

존의 한가운데에 꽂히는 직구를 잡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있는 걸 보면 말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