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기시감
인터뷰를 마친 김수찬 선배님께선 힘내라는 말씀과 기대하겠다는 말씀을 동시에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기대.
이 기대라는 단어는 과연 나에 대한 기대일까, 아니면 우리 팀에 대한 기대일까.
선배님께선 전자만을 말씀하셨겠지만, 나는 그 말씀을 일부러 확대해석했다.
29승 1무 15패.
5월까지 이런 엄청난 승률을 기록한 팀을 기대하지 않는 것도 너무 말이 안 되니까.
이런 무서운 팀을 상대할 팀은 잠실구장을 같이 쓰는 상수 타이거즈.
작년 원하에게 라이트 훅 한 대 얻어맞고 정규시즌을 2위로 마쳤던 설움을 아직도 진행중이다. 무려 원하보다 세 게임이나 뒤처진 2위에 등록되어 있었으니까.
“지랄.”
근데 그건 니네 생각이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더욱더 칼을 갈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우리 팀이다.
페넌트레이스를 1위로 마감해놓고도 한국시리즈에서 모든 게 뒤집혔을 때, 그땐 정말로 복장까지 뒤집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살벌하게 가자, 얘들아. 살벌하게.”
“가즈아아앗!”
나지막하게 읊조린 선전 포고문에 감동한 명진이는 미친놈처럼 소리치며 타석으로 향했다.
1번타자, 유격수 이명진.
우리가 원정이라서 그런가, 장내 아나운서는 대단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명진이의 등장을 알렸다.
그럼에도 명진이는 음…멀리서 등짝만 봐도 알겠다.
저 새끼, 웃고 있다.
“플레이!”
오늘 상수 타이거즈의 선발은 성상진.
올 시즌 극초반까지의 임무는 팀 내에서 2선발 정도였지만 실링이 조금 단단해지고, 또 원래 1선발 박동일의 상태가 썩 애매해지자 신분이 한 단계 상승했다.
성상진은 명진이를 맞아,
퍼엉-!
“샤아아잌-!”
과감하게 몸쪽 직구부터 찔러넣었다.
아주 좋은 공을 본 타자는 실실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까딱거렸다.
오케, 알았어, 오케, 오케.
명진이의 리액션은 대충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따악-!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2구째 만에 잘 맞은 타구를 만들어내긴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잘 맞은 건 타격감이 좋다는 것 정도로 설명을 끝낼 수 있고,
“아웃-.”
그게 야수 정면으로 가버리는 건 이 타석에 대한 설명을 더더욱 쉽게 끝낼 수 있다는 거다.
“까비까비!”
“은비까비!”
“미친새끼야!”
“에헤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명진이는 잠시 제쳐두고, 그다음 타자들의 공격을 쭈욱 지켜봤다.
“성현아, 가자가자!”
“뺏어내, 하나 더 뺏어내!”
이렇게나 열심히 응원을 했건만, 성현이는 유격수 직선타.
“남기남기!”
“남기면 안 돼요!”
“닥쳐 좀, 미친새끼야!”
기성이는 좋은 코스로 땅볼을 굴렸지만 신태범의 다이빙 스탑으로 아웃.
“…좀 꼬인다?”
“그러게.”
세 번 연속으로 좋은 과정이 있었지만 세 번 연속으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 점은 분명 악재였다.
그래도 괜찮아, 오늘 선발은 다른 누구도 아닌 원하 챌린저스의 1선발, 황제혁준!
따악-!
“…….”
“…….”
…그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좋은 과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악재와 같았지.
“쎄-하다.”
“플래그 꽂지 말라고.”
투런포를 먼저 때려놓고 베이스를 도는 박해진을 보며 한마디 하자 규진이형이 옆에서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감상평도 마음대로 못 늘어놓나, 처음엔 그런 생각도 들긴 했는데…….
따악-!
“잘 맞았다, 달려, 진형이 달려어!”
“야, 이거 쓰리 봐야…아.”
똑같은 흐름이 계속 이어지는 꼬라지를 보니 정말 입 좀 닥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둥이에 마가 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덕아웃 난간에 기대지 않고 그냥 차분하게 의자에 앉았다.
아니, 그냥 내 주둥이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에 마가 낀 걸까.
따악-!
“아….”
4회 말, 선두타자로 나선 박해진은 연타석 홈런을 치고 다시 한번 유유히 베이스를 돌았다.
이후 6회까지 혁준이가 더 허용한 실점은 없었지만 그동안 팀에서 만들어낸 점수 또한 없었다.
3 대 0.
우리는 좋은 과정을 거쳤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쟤네는 한 명 빼고 다 별론데 결과는 다 좋고.
“스읍….”
근데. 이거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거 같거든.
잘되면 내 덕, 안 되면 남 탓이라는 단어를 충분히 쓸 수 있는 언밸런스 중에서도 나는 기시감 비슷한 걸 느끼고 있었다.
띡!
정확하게는 예전에 본 것 같다 느끼는 상황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이거…!”
카운트 0-2에서 몸쪽으로 파고드는 직구를 커트하려는 생각이었는지, 명진이는 다소 엽기적인 자세로 공을 쳐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따르지 않던 운이 한 번에 터진 건지,
“페어!”
타구가 1루수와 우익수 사이 지점의 파울라인을 톡! 건드린 뒤 아주 깊은 파울 지역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뚫었다아악!”
“명진이 달려, 쓰리! 쓰리 봐!!”
아주 발이 빠른 타자주자와 아주 느릿하게 굴러가는 타구의 조합이라는 건 수비하는 팀 입장에선 아주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촤악―
“세잎!”
웬만하면 2루타로 끊을 수 있는 걸 한 베이스를 더 줘야되거든.
“명진이 겁나 빨라아아!”
“찰칵, 야! 찰칵!!”
마침 3루 베이스를 밟고 있던 터라 우리 덕아웃과 가까이에 있던 명진이는,
찰칵!
팀원들과 함께 오늘 경기 첫 안타를 자축했다.
그리고 이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 것이 바로,
2번타자, 우익수 강성현.
우리의 깡패.
성현이는 3루에 있는 명진이에겐 딱히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것보단 요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때문에 정상수비보다 훨씬 가까이에 자리잡은 내야수들을 쳐다봤다.
“나 같으면 그냥 정상수비할 거 같은데.”
한 점도 허용해선 안 될 것 같다, 한 점이라도 허용하면 뒤가 이상해질 것 같다, 뭐 그런 판단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판단이라는 게,
딱―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거든. 때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할 때도 분명 있는 것이다.
“오!”
“났다, 나이쓰으!”
살짝 깎여맞은 타구긴 했지만 워낙에 유격수가 앞까지 나와있던 터라 간단하게 적시타 하나가 생성되었다.
덕분에 성현이는 안전하게 1루를 밟았고 명진이는 더더욱 안전하게 홈을 밟았다.
“명진이 나이스런!”
“빤스런 많이 하시면 이렇게 저처럼 발이 빨라질 수 있….”
“아, 쌉소리 좀 그만해.”
미친놈에서 정말 미친놈으로 진화하려는 명진이를 얼른 불러들인 뒤, 3번타자의 대결을 지켜봤다.
1루엔 발이 살짝 빠른 편인 타자. 타석엔 발이 매우 느린 타자.
이렇게 되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 아니, 양 팀의 생각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상수는 병살을 잡자 생각할 거고, 원하는 병살만 치지 말자 생각할 거다.
양 팀의 생각이 몇 번 교차한 뒤 성상진이 셋 모션을 마쳤다.
“기성아 보여줘, 보여줘!”
“남기성 가자아악!”
오늘 경기의 분수령이 될 초구. 성상진은 성현이를 흘끔 쳐다본 뒤,
뻥-!
“샤아아잌-!”
변화구로 초구 카운트를 잡아냈다.
아까 명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던 게 뭐 있어 보였나, 기성이는 1회 초 공격 때 명진이처럼 고개를 까딱까딱거렸다.
오케, 알겠다.
그 동작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의미 또한 1회 초 명진이 때와 같았다. 심지어는,
따악-!
타구가 잘 맞은 것까지 같았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 하나가 있다.
“어…!”
“갔다아아!!”
아예 야수들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담장을 넘겨버렸다는 것.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타구를 응시하던 기성이는 찬찬히 1루를 향해 뛰어가며 왼손 검지로 우리를 가리켰다.
봤냐?
그 손가락으로 휘갈기는 메시지에 원하 챌린저스 선수단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진형이도, 승주도, 성훈이형도, 성문이도, 규학이도, 훈이도.
“가가, 계속 가, 한 번 더 가아!!”
6회까지 퍼펙트게임을 이어가던 성상진은 7회,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무려 6점을 허용했다.
3점차의 리드를 그대로 반전시키는 저력이라는 건 한순간에 흩어지지 않았다.
7회 말, 3점의 여유를 유지하기 위해 손석민 선배가 마운드에 올랐다.
영점 클리크가 살짝 어긋났는지 등판하자마자 하해진에게 볼넷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다음 세 타자를 모두 깔끔하게 처리하며 점수차를 유지했다.
8회 초, 다시 명진이부터 시작된 공격에선 비록 추가점을 내지는 못했지만 괜찮아.
“한울이, 올라가자.”
“예!”
내가 막아줄테니까. 괜찮아, 최소한 이 세 점은 유지될테니까.
마운드로 걸어가며 내가 상대할 상수 타이거즈의 타순을 살폈다. 민종현, 고동욱, 강대현의 912 타순.
만만한 타자 하나랑, 살짝 짜증나는 타자 하나랑, 호구 하나.
“오케.”
선수단들 사이에서 콜 사인으로 도는 관용어구를 흘리며 투구를 준비했다.
9번타자, 민!! 종!! 현!!
장내 아나운서의 우렁찬 소개글을 받은 민종현은 이곳저곳에서 최대한 출루에 초점을 맞췄다는 각오를 보였다.
평소보다 짧게 잡은 배트라든지, 평소보다 홈 플레이트 쪽에 붙어 선 스탠스라든지, 평소보다 독기가 서려있는 눈빛이라든지.
오케.
우리 타자들이 소리치고, 방금 전 내가 나에게 최면을 걸 때 썼던 문구는 민종현 또한 사용하고 있었다.
칠만해. 이젠 알겠다. 이젠 안 당한다.
최근 몇 번의 등판을 겪으며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볼이냐 스트라이크냐 애매한 투구로 카운트를 잡아내는 게 이젠 살짝 힘들어졌다는 점.
크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심판들은 조금 더 콜을 신중히 불렀고, 2스트라이크 이후 멀뚱히 지켜보던 타자들은 어떻게든 배트를 내보냈다.
근데 뭐.
퍼엉-!
“샤아아잌-!”
그거 뭐.
내가 밴 먹은 무기는 애매한 꼭짓점을 잡아주냐 아니냐일 뿐, 그것 말고도 내가 가진 무기는 아직도 많다.
초구부터 홈 플레이트에 붙은 타자의 몸쪽 높은 곳으로 때려 넣을 수 있는 깡다구라든지,
빵―
“샤아아잌-!”
그래놓고 바로 다음 공에 106km짜리 느린 커브볼을 욱여넣을 수 있는 담력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리고 니네가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말이야. 내가 밴 먹은 건 꼭짓점을 잡아주냐 안 잡아주냐지.
퍼엉-!
“샤아아아앜-!”
던질 수 있냐 못 던지냐는 아니야.
왕도로 회귀하여 첫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고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와 같다.
내야수들이 라운딩할 동안 마운드를 한 바퀴 빙글 돌다가 로진을 착착 충전하는 것.
그리곤 다시 공을 받아서 공에 이상한 점이 있나 없나 확인하곤,
1번타자, 고!! 동!! 욱!!
다음 타자를 맞는 것.
민종현이 다소 만만한 인상의 타자였다면 고동욱은 살짝 짜증을 유발하는 타자다.
아주 좋은 컨택에 나쁘지 않은 선구안, 그리고 발도 매우 빠른 편이고.
차라리 생각없이 붕붕 휘둘러주면 좋을텐데,
“읍!”
퍼엉-!
“보올-!”
그럴 리는 없을 것 같고.
버릇이라는 게 참 무섭지. 굳이 꽉 차는 공을 던질 생각은 없었지만 몸이 지 멋대로 몸 쪽 꽉 찬 직구를 던져버렸다.
볼을 준 건 상관없는데, 최소한 움찔거리면서 피하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는 게 상당히 거슬린다.
이런 타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냥 힘으로 눌러버리거나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도록 만들거나.
나는 이 두 가지 방법 중,
“끄윽!”
퍼엉-!
“샤아아잌-!”
전자를 선택했다.
컨택 좋은데 뭐. 선구안 좋은데 뭐.
“읍!”
딱-!
“파울, 파울!”
라인 안으로 밀어넣을 힘은 있고?
지금까지는 150km짜리 공 두 개만 봤는데,
“끄으윽!”
퍼엉-!
“스윙, 아웃!”
155km짜리 공을 맞출 자신은 있고?
하루가 다르게 개인 최고구속을 경신해나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지금 내 직구 스탯이 91. 내가 가진 시스템의 근원이 야구게임 ‘풀카운트’가 맞다면 통상적으로 152km를 던진다.
그럼에도 3km를 뻥튀기시킬 수 있는 이유?
“한울이 무리하진 말고.”
“아우, 가끔은 이런 것도 보여줘야죠.”
“볼 좋다, 마지막까지 가자.”
“예이.”
공 세 개 던질 체력을 압축시키면 그만큼의 전력투구 가능한 것 또한 풀카운트의 시스템이거든.
정말 조만간 꿈의 구속을 한 번 찍어보겠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날개를 달아주는 타자가 등장했다.
2번타자, 강!! 대!! 현!!
그리고 동시에,
띠링-!
[난 한 놈만 패]
- 절대적 우위를 가진 타자로부터 3구 3진을 뺏어내세요. (0/1)
- 보상 - 포심 +1
더욱 날개를 달아주는 퀘스트도 함께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