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천적
팀 대 팀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투수와 타자, 개인 대 개인이라는 특성을 가진 야구.
때문에 투수와 타자들 사이에서 천적 관계는 아주 흔한 것이다.
이 흔한 게 참 재밌지.
2군을 전전하던 타자가 리그를 호령하는 대투수만 만나면 홈런을 때려낼 수도 있다.
추격조도 감지덕지인 투수가 리그를 선도하는 타자에게 삼진만 뺏어낼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야구선수로 살아가는 나 또한 몇 명인가의 천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내가 쉽게 잡아먹는 선수들이라면 비스코의 4번타자 배덕현, KBO의 1번타자 우석이, 그리고 지금 눈앞의 강대현.
모두 어디 가서 한끗발 좀 하는 선수들이지만,
퍼엉-!
“샤아아잌-!”
나만 만나면 그대로 얼어붙는다. 가만히 서서 본인 앞을 스쳐 지나가는 공을 구경하기만 한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싶어 가끔씩 배트를 휘둘러보기는 하지만,
부웅―
“스위잉-.”
한 번 정착된 천적 관계라는 것은 정말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개인의 힘으론 그리 쉽게 떨쳐낼 수 없다.
그럼 뭐,
투닥-!
“스윙, 스윙-!”
이렇게 나가리 되는 거지.
띠링-!
[난 한 놈만 패]
- 절대적 우위를 가진 타자로부터 3구 3진을 뺏어내세요. (1/1)
- 보상 - 포심 +1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91+1=92
커브 – 85
슬라 - 82
스플 - 83
체인 - 83
싱커 - 84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쉽게 강대현을 삼진으로 물리쳐낸 뒤 얼른 덕아웃으로 돌아가서 9회 초 공격을 관람할 준비를 마쳤다.
타자들이 열심히 두들겨서 두 점을 더 뺏어내고, 9회 말은 승진이가 나서서 한 점을 허용하긴 했지만 어찌됐든 막아내며 그대로 경기 종료.
짝짝짝―
“다들 고생요!”
“고생하셨습니다아!”
깔끔하게 하루를 또 마친 뒤 퇴근하는 하루. 이 얼마나 아름답게 끝나는 하루던가.
* * *
상수 타이거즈와의 경기 차를 꾸역꾸역 네 게임까지 벌려두고나니 이토록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3게임차 줄이는 데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하지?
6월 초에 돌입한 지금, 이 계산에 따르면 우리 원하는 7월 초에 먼저 진입한 셈이고 상수는 아직도 5월 말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여유, 여유.
게다가 오늘 선발이 누구던가, 혁준이에 이어 승기를 확실하게 잡아낼 규진이형이 아니던가.
원하는 상수와의 게임차를 아예 6경기까지 벌려둘 생각으로 선발진을 약간씩 조정했다.
상수도 이렇게 분위기를 내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약간씩 선발진을 조정했다.
그 결과가 저기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있는 상수 타이거즈의 2선발 박동일.
원래는 상수 타이거즈의 1선발이었지만 이번 시즌은 초반부터 묘하게 삐걱거리며 원래 2선발이었던 성상진과 자리를 바꿨다.
“동일이가 아예 칼을 갈았는데….”
팀을 대표해서 나온 선발로써 질 수 없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2선발로 격하된 분풀이가 더 짙은 색채로 보였다.
내 자리를 찾아가겠어, 내 자리로 돌아가겠어.
박동일은 정말 이를 악물고 명진이를 상대하고 성현이를 상대하고 기성이를 상대했다.
근데 야구계에 그 유명한 말 있잖아.
따악-!
“어우, 기성이 진짜 살벌하네.”
힘 빼라고. 힘 들어가면 더 못한다고.
기성이와 박동일은 각각 야구계 격언 희망편과 절망편을 보여주었다.
“예에에엑!!”
“남기남기이!!”
“기성이 살살해라, 무섭다 야.”
이틀 연속으로 잠실구장 펜스를 넘긴 기성이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본인이 더 호들갑을 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했다.
좋댄다.
보는 입장에서도 즐겁기는 하다만, 의미를 알 수 없는 춤을 명진이와 같이 추는 걸 보니 91년생들이 이상한 건가 잠시 생각했다.
기성이의 쓰리런 홈런에 승주의 투런까지 얹어 시작부터 5점을 뽑아낸 원하 챌린저스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1회 말 수비에 임했다.
가벼운 마음?
부디 이 단어가 오늘 선발투수에게도 적용되길 바랐다.
“형, 힘 빼고.”
“알아.”
유독 상수만 만나면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이는 규진이형은 짤막하게 나눴던 대화 내용대로 편안한 투구를 이어갔다.
1번타자 고동욱 삼진, 2번타자 강대현은 투수 앞 땅볼, 3번타자 이용호에게 2루타를 얻어맞긴 했지만 박해진으로부터 한 번 더 삼진을 잡아내고 이닝 종료.
“아, X발 진짜!”
나름 깔끔하게 첫 이닝을 마쳤는데도 규진이형은 불펜으로 돌아오자마자 욕설을 크게 내질렀다.
이유야 뭐…….
“저 새끼 뭐지?”
이용호 때문이지.
“실투였어?”
“아니, 바깥쪽 제대로 들어갔는데 그걸 잡아당기네.”
천적.
나도 인정하기 싫고, 누구보다 규진이형 본인이 인정하기 싫지만 규진이형과 이용호 사이에서 한 가지 관계가 정립된 것 같다.
부디 내 추측이 틀리길 바랐건만,
따악-!
“…미친.”
4회 말, 선두타자로 나선 이용호는 초구부터 공을 요령껏 밀어쳐 잠실구장의 우측 펜스를 넘겨버렸다.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규진이형은 가만히 공이 사라진 구역을 노려봤다.
형, 인정해야겠다.
때마침 우리 덕아웃 앞을 뛰어가는 이용호가 규진이형의 모습을 가렸다.
규진이형이고 자시고, 일단 홈런을 쳤으니까 생긴 좋은 기분과 기운을 담아 이용호는 박해진과 하이파이브를 쳤다.
5 대 0에서 5 대 1로 붙었으니까, 리그에서 제일 잘 치는 박해진이 하나 더 넘겨서 세 점 차까지만 일단 따라가자, 그런 마음이겠지.
근데 천적 관계라는 게 꼭 내가 잡아먹히는, 혹은 잡아먹는 경우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
퍼엉-!
“스트라이잌-!”
이용호가 규진이형의 천적이라면,
뻥-!
“스트라이잌-!”
규진이형은 박해진의 천적이다.
퍼엉-!
“스트라이잌, 아웃!”
구심이 호쾌한 라이트 훅을 날리건 말건, 규진이형은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저 1회 말 수비 때처럼,
“X발….”
덕아웃에 돌아와 나지막하게 욕설 한 스푼을 끼얹었다.
“너무 신경쓰지마, 형. 다 그렇게 물고 물리는 거지.”
“X 같잖아.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왜 하필 이용호냐고, X발.”
진짜 기분 거지 같은가봐.
속사포처럼 불만을 토로하는 규진이형의 목소리에선 분노나 짜증보다는 절박함이 더 강하게 깔려있었다.
어지간히도 나를 X 같이 만든 놈에게 X 같은 경험을 보여주고 싶은데 내가 더 X 같을 때.
“X 같은 새끼니까 그런 거지, 뭐.”
진짜 얼마나 X 같을까.
반쯤은 욕설로 점철된 대화였지만, 그렇기에 규진이형의 마음은 조금씩 풀려갔다.
5회 말을 삼자범퇴로 막아내고 6회 말 이용호를 한 번 더 만났을 땐 시원하게 펀치 아웃까지 경험시켜줬으니까.
짝짝짝!
“형 잘했어, 잘했어.”
“규진이 나이쓰 피칭!”
“고생했어요!”
결과적으로 7이닝 2피안타 1실점.
그 2피안타가, 그 1실점이 모두 이용호 하나가 만들어냈다는 것만 덜어내면 더없이 완벽한 경기 내용.
“하아….”
하지만 규진이형은 그 유일한 오점을 덜어내지 못했다. 호성적을 내놓고 기뻐해야 할 사람은 시무룩한 얼굴로 덕아웃 뒤쪽을 향해 휭 사라져갔다.
“기분 어지간히 안 좋은갑네….”
따라가서 위로라도 한마디 더 해줄까, 고민하다가 그냥 놔뒀다.
그래도 경기 내용은 좋았다느니, 다음엔 잡을 거라느니, 눈치 없이 그런 소리 해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
그런 것보단,
“아, 승진이 가자!”
“점수 많잖아, 편하게 던져!”
8회 말 수비를 막아줄 승진이를 응원하는 게 더 이득이다. 나도, 규진이형도, 우리 팀도.
선배들의 응원을 듬뿍 받은 승진이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마운드를 밟았다.
8회 초, 우리 타선이 새롭게 두 점을 더 뽑아내며 승진이가 등에 업은 점수는 무려 여섯 점.
게다가 승진이가 누구던가, 강력한 볼빨을 바탕으로 일단 때려넣을 줄 아는 강심장이 아니던가.
8회에 여섯 점이면 지고 있는 팀에서도 슬슬 오늘 경기보다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무브를 취한다.
퍼엉-!
“볼, 볼 포!”
이런 식으로 우리가 떠먹여주는 게 아니라면.
“쟤 왜 저러지?”
“뭔가 밸런스가 안 맞는 거 같은데….”
“아까 불펜에선 잘던지더만.”
“아직 어리니까 어쩔 수 없지.”
일단 7번타자 신태범을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내보낸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8번타자 박명기에게 또 볼넷을 허용했지만 이제부터 잡아가면 된다 모두가 소리쳤다.
하지만 단 한 명,
“한울아.”
“예?”
“일단 준비해라.”
“아, 예.”
우리 투수코치님만큼은 분위기가 묘해지는 걸 느끼고 나를 빠르게 불렀다.
원래의 성격이라면 나도 그냥 알아서 잘하겠지,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넘길테지만 지금은 좀 위험해보였다.
승진이도, 팀도, 리그 순위도.
코치님은 내게 지시를 내린 뒤 타임을 부르고 마운드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아마 내가 몸을 풀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겠지.
나도 그 성의를 봐서 스트레칭과 캐치볼을 병행하며 빠르게 몸의 온도를 높혔다.
잠시 후 코치님이 돌아왔지만 그쪽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빠르게 불펜피칭 쪽으로 넘어갔다.
퍼엉―
“형, 승진 씨가 일단 천천히 던질테니까 우리도 시간 부족하지는 않아요.”
“어어, 알고 있어.”
빨리 풀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밸런스가 더 중요하다. 아마 못해도 민종현까지는 승진이가 볼테니까.
근데 그 본다는 게,
따악―
“아이고야.”
민종현의 안타를 본다는 건진 몰랐지.
“퍼스트 컷!!”
내야 안쪽에서 성현이의 송구를 끊은 기성이는 3루주자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다시 타임을 불렀다.
“지금 올라가나요?”
“아냐, 안타는 괜찮으니까. 점수도 좀 있고. 다음까지는 보자.”
확실하게 끊을 요량이라면 그냥 지금 내가 올라가는 게 맞다고 봤지만, 코치님은 한 번만 더 승진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실제로 민종현을 상대할 땐 볼이 아예 없었으니까. 안타 맞은 공도 실투는 아니었고.
안타를 맞았지만 한 번 더 지켜보자.
이 문구에서 우리는 뒷 내용에 집중했지만 승진이는 저도 모르게 앞 내용을 신경 쓴 것 같다.
뻐엉-!
“볼-!”
우리가 믿었던 강심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승진이는 밀어내기 볼넷까지 허용한 뒤,
“한울이, 지금 올라가자.”
“네에.”
나와 교체되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뭘 죄송해, 고생했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승진이를 간단하게 위로해주고 마운드에 섰다. 주변을 스윽 둘러보니 모든 베이스에 주자들이 꽉꽉 들어차있었다.
게다가 전광판에 들어와 있는 불은 하나도 없는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형, 하던대로 해요!”
하지만 막상 이 상황을 풀어나가야하는 규학이는 그다지 위기로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무사 만루 뭐. 다섯 점 차에 투수가 김한울인데. 막으면 되지.
사실 나 또한 지금 규학이가 하는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사 만루 뭐. 다섯 점이나 있는데. 막으면 되지.
“플레이!”
연습투구까지 마친 뒤 구심이 중지되었던 경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하는 수 없이 타석으로 들어서는 타자는 강대현.
어이구, 이게 누구야.
띠링-!
[천적]
- 승계주자 실점없이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전구종 +1
무사 만루 위기라고는 하지만 다섯 점차에 상대는 내 천적 아래에 있는 타자.
이런 8회 말이라니, 꽤나 할만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