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상대성 이론
몸쪽 직구, 바깥쪽 슬라이더, 바운드 스플리터. 어제 강대현으로부터 삼구삼진을 뺏어낼 때 던졌던 구종들.
지금 이런 상황이니까 이 공을 던져야지, 지금 이걸 던지고 다음엔 이걸 던져야지, 사실 이런 계산을 하고 던진 공들은 아니다.
그냥 마음 가는대로. 그냥 던지고 싶은대로.
대충 그렇게 던져도,
“읍!”
빵!
“스트라이잌-!”
흐름에 잡아먹힌 타자는 제대로 힘 한 번 못 써보고 가라앉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그 생각은 지금, 초구로 가운데에 떨어지는 커브를 멀뚱히 지켜보는 강대현의 모습을 본 뒤 조금 더 연장되었다.
애초에 천적이라는 게 그렇거든. 깨고 싶은데, 벗어나고 싶은데 그게 맘대로 안 되는 상대.
저 선수가 어지간히 대단한 선수든, 아니면 평범한 랜덤가이에 지나지 않든,
“끅!”
부웅-!
“스윙!”
한 번 생겨버린 먹이사슬이라는 건 그리 쉽게 깨지지 않는다.
지금의 강대현은 내가 진짜 어처구니없는 공을 던져도 헛스윙으로 삼진 먹고 떠날 걸?
“끄윽!”
투닥―
“스윙, 아웃!”
바로 이렇게.
어제와 똑같은 결정구에 똑같은 결과를 낸 강대현은 고개를 몇 번 덜어낸 뒤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기서 등장하는…….
3번타자, 이!! 용!! 호!!
개새끼 하나.
이용호는 장내 아나운서의 버프를 받은 뒤 타석에 나타나 이리저리 배트를 휘적거렸다.
제 딴에는 멋있어 보이는 줄 알고 저러는 것 같은데,
풉―
내가 보기엔 잡아먹히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꼬라지 같아서 작게 웃고 말았다.
잡아먹다, 혹은 잡아먹히다.
이용호는 어느 순간부터 규진이형의 하드 카운터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전체적인 타격 실력이 성장한 것도 있지만, 그냥 규진이형 공이 잘 보이는 느낌.
근데 그거 아세요, 이용호 씨?
뻥-!
“스윙-!”
니 하드 카운터는 전데요.
초구부터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저 자신만만한 헛스윙의 의미는 뭘까.
니 공은 다 보인다는 자신감?
여기서 하나 쳐서 영웅이 되겠다는 설레발?
카운트 하나를 기회비용삼아 타이밍을 맞춰보겠다는 계산?
다 아니고,
“애쓴다, 애써.”
너 따위에게 잡아먹히지 않겠다는 발악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등장했을 때 생지랄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지.
슬라이더로 첫 카운트를 잡아낸 뒤, 2구째는 내 쪽에서 움직여 사인을 보냈다.
직구, 그것도 아주 높게 던지겠다 예고한 뒤,
“끄윽!”
퍼엉-!
거의 브러시볼 마냥 이용호와 딱 붙어 직구가 도착했다.
규학이가 포구한 곳은 당연히 볼이고, 이용호 또한 뒤로 빠지느라 스윙이 나오지도 않았다.
어찌보면 공 하나 버린 셈이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용호 상대로 볼 하나는 그냥 줘도 되거든. 어쩌다 맞으면 더 좋고.
이 공의 본질을 빠르게 눈치챈 이용호는 표정을 아주 보기 좋게 만들었다.
“아이고, 빡치시나봐요.”
내가 빡치냐? 니가 빡치지.
규학이의 사인을 보는 척, 글러브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이후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다시 한번 사인을 내보냈다. 사인을 접수한 규학이가 자리한 곳은 바깥쪽.
와인드업에 들어가며 글러브 안에서는 그립이 이리저리 교체되었다. 검지 손가락만 꼿꼿하게 편 뒤 내가 던지려고 하는 곳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저기!
부웅―
“스윙, 스윙-!”
바깥쪽이긴 한데 높낮이로 따지면 공 두 개 정도는 낮은 곳.
그곳으로 낙하하는 112km짜리 커브에 이용호는 아주 멋드러진 갈라쇼를 보여주었다.
그래놓고 자기가 자기 분에 못 이긴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박자 맞추는 왼발의 움직임이 격해졌다.
귀 옆에서 흔들거리던 배트의 살랑거림이 화끈해졌다.
어지간히 빡쳤는지 얼굴이 이젠 아예 시뻘게졌다.
그런 편린들을 모아놓고 보니 드는 생각은 아, 더 X 같이 만들어주고 싶다.
바깥쪽 슬라이더 헛스윙, 몸쪽 높은 직구 볼, 바깥쪽 낮은 커브 헛스윙.
이다음으로 프론트도어 슬라이더 던져주면 아주 그냥 좋아 죽지 않을까.
“읏!”
몸에 맞을 것 같이 날아오는 공에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뒤로 피하지만,
뻥-!
“스트라이잌, 아웃!”
횡으로 크게 꺾여 앞문을 열고 들어가는 슬라이더에 루킹 삼진.
“크으, 이거지.”
이용호는 바로 덕아웃으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홈 플레이트를 바라보고, 또 나를 노려본 뒤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런 이용호와 스쳐 지나가는 다음 타자,
4번타자, 박!! 해!! 진!!
“오랜만이네, 아주.”
얼마만이더라, 작년 한국시리즈 이후 처음 만나는 거 같으니 대략 7개월 만에 만나게 됐네.
박해진을 바라보는 내 의도는 앞서 상대했던 강대현, 이용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적. 근데 내가 위에 있는 관계의 천적.
맨날 홈런만 처맞다가 그게 2루타로 하향 조정되고,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아웃.
그러다 한국시리즈 때 안타를 맞긴 했지만 그땐 어차피 점수로 연결되지 않았잖아. 내가 이긴 거야.
낙관적인 성격은 생각을 그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으윽!”
이번에도 똑같겠지, 이번에도 아웃을 당하겠지, 이번에도 내가 이기겠지.
따악-!
높은 공은 홈런 맞기 쉽다, 맞는 말이다. 반만.
반대로 말해 높은 공이 무조건적으로 홈런이 되진 않는다.
“파울-!”
오히려 무리수를 가장함으로써 허를 찌르는 그림이 되는 것이다.
흐뭇하게 규학이가 되돌려주는 공을 받아들고 마운드로 돌아갔다. 서벅서벅, 마사토가 밟히는 느낌이 꽤나 산뜻했다.
이 산뜻한 기분, 너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
CF에서나 나올 법한 멘트를 생각으로 중얼거리며 규학이의 손가락들을 치워냈다.
치워내고 치워내고 또 치워내고 맞이한 사인은 바깥쪽 커브.
가장 빨리 반응해야 하는 구간과 가장 기다렸다 쳐야하는 구간을 연이어 던진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거다.
설령 상대가 박해진이라고 하더라도.
“읍!”
빵!
바깥쪽, 이 정도면 잡아줄 법하지 않나? 싶었던 위치.
“…볼!”
X발.
하지만 심판은 심사숙고 끝에 공이 낮았다고 판단했다. 규학이가 공을 잡고 몇 초간 자세를 유지하며 어필했지만 번복되지 않았다.
괜찮다고, 다음 거 던지면 된다는 뜻으로 글러브를 까딱거리자 규학이도 눈치껏 공을 돌려주었다.
규학이도 분명 느끼고 있었다. 다른 투수들은 모르겠지만 유독 나한테만 판정이 엄격해진 걸.
때문에 너무 꽉 차지 않으면서도 타자의 배트가 쉽게 나오지 않아야 하며 만약 배트가 나오더라도 범타가 될 공을 찾아야 한다.
무슨 도서관 역사 코너에서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을 찾는 역사학자 마냥, 규학이는 과거의 기록들을 주르륵 훑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도서관은 엄연히 시간제한이 존재한다. 일정 시간마다 대출 카드를 찍어야 한다는 거지.
시간도 끌면서 반응도 지켜볼 겸, 볼을 하나 던지자. 여기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고, 볼이 되어도 상관없다.
몸쪽 직구를 가장한 체인지업.
직전에 던진 두 개의 구종과 비교했을 때 나쁘지 않은 타임라인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최대한 늦게 꺾여야 한다든지, 각을 더욱 크게 만든다든지, 그런 거창한 수식어는 모두 제거했다.
그저,
“끅!”
체인지업답게. 체인지업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면,
따악-!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니까.
“파울-!”
몸쪽 높은 직구, 바깥쪽 낮은 커브. 시간차를 이용한 투구 이후 다시 몸쪽 승부라고 생각한 듯 박해진이 빠르게 배트를 냈지만 그게 3루측 파울이 되었다.
몸쪽 체인지업에 매우 빠른 타이밍이 잡혀있었으니 이번엔 오히려 역으로 몸쪽을 한 번 더 가볼까.
“…오케.”
빠르게 생각을 마치고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글러브를 툭 건드렸다.
규학이도 체크. 3루에서 깔짝거리는 주자도 체크. 타석에서 나를 지켜보는 박해진도 체크.
“끄악!”
몸쪽이긴 하나 애매하게 걸쳤다가 필요없는 볼을 받느니, 차라리 의미 있는 ‘볼’을 던지고자 했다.
아예 볼이 되는 몸쪽 깊은 곳.
퍼엉-!
“볼-.”
이번 공을 판정한 심판은 단호하게 허리를 폈고, 규학이도 아무런 반향없이 미트를 회수했다.
그러나 단 한 명.
“어렵지?”
박해진만큼은 움찔거렸던 자세를 어렵게 풀어내고 타석에서 벗어났다.
녀석답지 않게 붕- 붕- 연습 스윙까지 몇 번 하고 난 뒤 다시 타석에 들어서긴 했지만 표정에 확실성이라는 요소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2-2.
너한테 삼진이라는 걸 뺏어낼 때가 오긴 할까.
“후우….”
몰라. 오든 말든. 삼진은 모르겠고, 그냥 이 이닝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좀,
“끄으!!”
뒤져라 좀!
딱-!
“캐챠!!”
“백! 빼액!!”
몸쪽 높은 직구는 박해진이 내민 배트의 모가지 부분을 맞고 위로 부웅 떠올랐다.
이건 규학이다, 규학이가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나와 내야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내비쳤다.
이 상황에 대해 그 누구보다 규학이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규학이는 아무 말 없이, 마스크를 내팽겨치고 심판 뒤로 내달렸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다섯 발. 그리고 점프.
“흐으!”
턱!
약 25m 거리, 들릴 수가 없는 미약한 포구음이 분명히 들렸다. 혹시 못 들은 사람이 있을까 봐 규학이는 공이 든 미트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아우웃!!”
규학이가 미트로 꼭 붙들고 있는 야구공을 확인한 심판이 호쾌하게 아웃 콜을 선언했다.
띠링-!
[천적]
- 승계주자 실점없이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전구종 +1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92+1=93
커브 – 85+1=86
슬라 - 82+1=83
스플 - 83+1=84
체인 - 83+1=84
싱커 - 84+1=85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옛쌰아아!!”
무사 만루 위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한울이형 나이쓰으!!”
“나이스 피칭!!”
“나이쓰 피쳐어어!!”
내가 던진다면.
하지만 이번 이닝에 대한 논공행상은 확실히 하는 게 맞겠지.
“야, 규학이 규학이!! 얼른 와!”
“와아아악! 찰칵이요, 찰칵!”
이번 이닝의 주연은 누가 뭐래도 나지만, 이번 이닝의 씬 스틸러는 누가 뭐래도 규학이다.
아마 규학이가 없었다면 이번 영화는 흥행 실패나 다름 없었겠지.
규학이는 흥행 대박을 자축하며 출연진들과 함께 서서 셀카 세리머니를 즐겼다.
찰칵!
다섯 점. 두 번의 공격 기회로도 어찌하기 힘든 격차를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메꾸는 건 더더욱 어렵다.
상수 타이거즈는 겸허히, 9회 초를 신인급 투수에게 맡기며 패배의 한 페이지를 인정했다.
상수 타이거즈는 겸허히, 9회 말을 백업급 타자들에게 맡기며 패배의 한 권을 집필했다.
짝짝짝-!
“나가자, 나가자!”
“야아아악!”
“형님, 날 가져요!”
“꺼져, 미친새끼야!”
나가자, 싸우자, 승리의 챌린저스! 원하의 승리를 위하여어!!
3루측 파울라인에 열을 맞춰 서 응원해주신 팬분들께 꾸벅 인사하며 오늘 경기의 승리를 자축했다.
다섯 경기.
오늘 경기의 점수차와 같은 경기 차이로 벌려두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부디, 내일은 여섯 점차로 경기를 이겨서 게임차를 여섯 경기차로 벌릴 수 있기를.
“고생하셨습니다!”
“고씀다!”
“고생요들!”
흐뭇하게 잠실구장의 불이 꺼지는 모습을 본 뒤 덕아웃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