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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41화 (141/190)

141화. 옛날 옛적에

상수 타이거즈와의 시리즈 마지막 날.

9회 초 공격에 두 점차. 주자를 2루와 3루까지 보낼 때까지 우리가 소비한 카운트는 0개.

최소 동점, 못 해도 역전까지는 가능하리라 생각했지만 삼진, 중견수 플라이, 2루 땅볼 테크트리로 고작 한 점 밖에 내지 못하며 경기 끝.

“까비.”

“아, 다 왔는데….”

게임차를 여섯 경기까지 벌려놓을 각오로 임했지만, 오히려 이전 두 경기에 모든 걸 쏟아부은 원하는 다소 무력하게 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뭐, 그래도 괜찮아.

짝짝짝―

“자자, 인사하러 가자.”

그래도 아직까지 네 경기. 시리즈 시작 전보다 게임차를 한 경기 늘렸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도 된다.

2승 1패, 위닝 시리즈잖아. 충분히 박수받아 마땅해.

“고생하셨습니다!”

“고씀다!”

옷 갈아입고 이제 퇴근해야지, 오늘 일요일이니까 시원하게 맥주나 한 잔 할까, 생각하며 차에 올라탔다.

맥주에 어울리는 안주는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엉?”

뜬금없이 매립된 네비게이션 화면에 뜬금없는 이름 하나가 등장했다.

“네, 윤성 씨. 무슨 일이예요?”

[한울 씨이, 퇴근했어요?]

“아뇨? 이제 퇴근하려고 했죠.”

[오늘 따로 약속 같은 거 있어요?]

“없죠.”

[그럼 잠깐 와줄 수 있어요?]

“어딜. 전력분석실?”

[네네.]

지금?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한울 씨가 좀 봐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어…뭐. 알았어요.”

[예예, 천천히 오십쇼오.]

“예예.”

전화를 끊고 방금 연료가 돌기 시작한 자동차의 시동을 꺼뜨렸다.

6월 초, 아직까지는 선선한 밤공기를 맞으며 방금 퇴근한 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전력분석실. 생각없이 문고리로 손을 뻗다가,

“아.”

손에서 허전함을 느끼고 살짝 옆에 있는 자판기로 향했다.

털컹- 털컹- 털컹―

캔 커피 세 개를 쥐고 나니 손에 꽉 차는 그립감이 마음에 들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아주 낮고 동굴 같이 울리는 목소리.

허가가 떨어지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갖 전문장비들과 다소 익숙하게 느껴지는 화면들이 가득한 공간.

“무슨 일이래요, 이 시간에. 일단 이거 받으시고.”

“아, 땡큐.”

윤성 씨의 후덕한 얼굴을 보자마자 캔 커피를 건넸다. 커피 꽤나 좋아하는 윤성 씨는 받자마자 칙, 소릴 내며 캔을 딴 후 원샷을 때려버린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한울 씨도 보면 좀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죠.”

“웬 동기부여?”

“지금 한울 씨 잘하는 거 알죠?”

“알…죠.”

21이닝에 37삼진. 볼넷은 0개에 평균자책점도 0. 피안타는 고작 다섯 개 밖에 되지 않으며 승계주자 실점도 0.

아직 전반기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조금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명 말 같지도 않은 리그 에이스임은 분명하다.

“요새 한울 씨 조금 무리하는 게 아닐까 걱정돼서 좀 찾아봤거든요.”

“딱히 무리하고 있진 않은데….”

“원래 지켜보는 사람이랑 당사자 생각은 달라요.”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나?

“한울 씨 많이 좋아졌잖아요.”

“그쵸.”

“언제부터 좋아졌고, 또 어느 부분이 좋아졌고, 그래서 어떻게 좋아졌는지를 알면 다음엔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언젠가 태웅이에게 해줬던 말과 같은 말을 윤성 씨가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갑자기 훅 안 좋아지면 어디가 안 좋아졌는지도 바로 알고?”

“그렇지.”

내 대답을 맘에 들어 한 윤성 씨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여기 한 번 봐봐요.”

윤성 씨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엔 두 개의 화면에서 열심히 공을 던지고 있는 ‘나’들이 보였다.

오른쪽은 꽤나 생생한 화면이고, 왼쪽은 살짝 화질이 떨어지는 걸 보니…….

“이건 언제 거예요?”

꽤 옛날 화면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윤성 씨는 바로 내 궁금증을 해결시켜주지 않았다.

“언제처럼 보여요?”

“모르죠.”

“에이, 실망이야.”

“…….”

에이, 그러지마.

“2016년 6월. 그러니까…4년 전 한울 씨네요.”

“아.”

궁금증 해결.

하지만 윤성 씨는 또 다른 궁금증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이쪽은 어제 한울 씨 피칭이고. 혹시 차이점 아시겠어요?”

“뭔 차이점이요?”

“그걸 맞춰보시죠.”

흐음…….

질문에 따라 가만히 두 화면을 분석했다.

홈을 정면으로 본 채 왼발이 뒤로 빠지고 양손이 머리 뒤로 넘어가고. 허리에 미세한 반동 이후 왼발이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다.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도 않고 너무 죽지도 않은 오른 다리는 중심이동을 위한 완벽한 각도를 유지하고 있고.

왼발이 땅에 닿는 순간 양쪽 팔꿈치가 어깨보다 살짝 올라가 있는 인버티드W 투구폼이 완성.

지면에서부터 올라온 힘은 왼발이 땅에 닿으며 강력한 브레이킹이 발생하고, 관성은 그대로 상체를 앞으로 쏠리도록 만든다.

골반이 강력하게 회전하고, 이 회전을 유지한 힘은 어깨, 팔꿈치, 손목, 손가락 구석구석을 타고 올라가 종국엔,

퍼엉-!

강력한 직구를 만들어낸다.

“…모르겠는데요?”

사실 5년이 지나긴 했지만 투구폼의 차이는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 그냥 똑같은 투구폼이다.

그저 차이점이라고 하면 구속, 그리고 포구음.

“그럼 이렇게 보면 어때요? 차이점이 좀 느껴져요?”

다음으로 윤성 씨가 보여준 화면은 2016년의 투구폼과 올해의 투구폼을 오버랩시킨 장면이었다.

똑같이 다리를 올리고, 똑같이 다리를 뻗고, 똑같이 공을 던…….

“아.”

그러다 발견한 한 가지.

“더 멀리 나가네?”

왼발의 위치.

“이렇게 보니까 바로 보이죠?”

“그러네….”

반 발 정도.

올해의 투구폼은 2016년의 투구폼보다 반 발 정도 스트라이드가 더 길었다.

“혹시 한울 씨 인바디 받으면 어때요? 최근 몇 년 동안 크게 달라졌다거나 하는 부분 있었어요?”

“아뇨? 근육이랑 체지방량이랑 다 평소처럼 유지하고 있죠.”

“그래서 궁금한 거예요. 스트라이드가 이렇게 점점 멀어지는데, 어떻게 그 폼이 유지가 되나.”

“아….”

스트라이드는 길면 길수록 좋다. 맞는 말이다. 절대불변의 진리에 가깝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논리에 맹점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스트라이드라는 게 그렇잖아요, 무조건 멀다고 좋은 게 아닌 거.”

“당연하죠. 자기 폼만 무너지지.”

자기 키의 대략 85%에서 105%. 이 범위가 이상적인 스트라이드에 해당한다.

이것보다 좁으면 상체의 비중이 필요 이상으로 과다하게 되고, 이것보다 넓으면 그냥 아예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지금 한울 씨 스트라이드가 몇 cm인지 알아요?”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요. 재봤어요?”

“우리도 줄자로 재본 건 아니라 정확하지는 않다만, 추정치로는 2m 정도. 오차는 위 아래로 2cm 정도.”

“…내가 수학이 약해서 그런데 그게 어느 정도예요?”

“106%? 근데 스파이크나 신발 같은 거, 아니면 플레이트 밟는 위치까지 계산하면 딱 105%로 봐도 되죠.”

이상적인 스트라이드의 마지노선.

“…오.”

“이전 같은 경우는 추정치로 185cm 정도. 그러니까…대략 15cm 정도 늘어났네요.”

“15cm면….”

내 손으로 15cm를 어림잡아봤다. 절대적인 수치로 봤을 때 절대 긴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데?”

고개가 홱 돌아가 버리고, 이를 악물고, 온몸의 중심이 한 방향으로 쏟아져 내리는 상황에서 15cm는 절대 작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말 같지도 않게 엄청난 수치다.

“누구보다 한울 씨 본인이 잘 느끼고 있겠지만, 여기서 파생되는 효과들이 엄청 많아요.”

“뭐…릴리스 포인트도 앞으로 나갔을테고. 그러니까 체감 구속도 더 높아졌을테고. 그러니까 타자 입장에선 변화구도 구분이 잘 안 갈 거고.”

“추가로 구속도 엄청 늘어났구요. 스트라이드야 그렇다 쳐도, 거기서 얻는 효과들이 진짜 말이 안 되는 정도거든요.”

약 5년에 걸쳐서 20km 이상의 구속이 올라갔다.

내가 20대 초반의 투수라면 쉽게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다. 거기서 5년이 지났다면 투구 요령과 신체능력이 동시에 정점을 찍었을 때니까.

하지만 내가 이런 상승효과를 보기 시작한 건 20대 후반부터.

투구 요령이라면 모를까, 신체능력은 정점을 찍은 뒤 슬슬 하향곡선을 그려가는 게 정상적이다.

그러나,

“근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게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죠.”

공의 회전수, 익스텐션, 유효 회전수, 디셉션, 허리 회전 속도 등등.

32살에 진입해서 이런 지표들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좋아지고 있다. 그게 윤성 씨는 참 신기한가보다.

“진짜로 한울 씨 무슨 약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죠?”

“아니 무슨 망언을….”

“말고는 설명이 안 되니까 그렇죠, 진짜.”

하긴, 이 시스템의 존재를 모르는 입장에선 당연히 신기할 수 밖에 없겠지.

“아까부터 얘기했던 거, 내가 걱정된다고 했던 게 이런 거예요. 막연하게 폼이 좋아졌다, 강해졌다 이런 거 말고.”

“왜?”

“그쵸. 왜, 왜 이렇게 좋아졌나. 이게 당장에는 좋을 수도 있죠. 아니지, 당장엔 물론 좋지. 지금 한울 씨 결과로 나오고 있잖아요.”

“흐음…윤성 씨도 의사 쌤이랑 똑같은 말 할 거 같은데.”

“그 의사분이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검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가리키며 이야기하는 윤성 씨의 얼굴은 꽤나 단호했다.

“당장 내일에라도 훅 갈 수 있는 거 알죠.”

“…….”

걱정 가득한 말.

멀뚱히 윤성 씨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어떡해요. 그렇다고 내가 야구 그만둘 것도 아닌데.”

“그건 맞지. 한울 씨 모레 또 등판해야지. 맘 같으면 한울 씨가 126경기 다 완투했으면 좋겠는데.”

“선 넘네.”

30대 초반 남자와 30대 중반 남자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윤성 씨가 말해놓고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건 알죠?”

“알죠. 지금 원하 잘나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아는데, 그냥 그런 거지. 내가 응원하는 팀이 제일 잘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거.”

알지. 모를 수가 없지.

이렇게 열성 가득한 팬에게 나도 해줄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었다.

“팀이 어쩌고, 다른 팀원이 어쩌고. 또 그래서 시즌 성적이 어쩌고, 거기서 소소하게는 내 성적이 또 어쩌고. 거기까지는 장담은 못 하겠지만요.”

낄낄거리며 웃던 얼굴은 아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얼굴로 이야기했다.

“나. 나는 일단 그래요. 지금 내가 던지는 구속, 변화구, 구위. 다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예요. 내가 느끼기로는 더 좋아질 여지가 분명히 있거든.”

팬에게 할 수 있는 아주 감동적인 말.

하지만 팬은 시큰둥하게 반론했다.

“제구는요?”

“아니, 이만큼 좋으면 됐지 뭘 더 바라고 그래요.”

“막, 25분할 제구하고 그 정도까지는 좋아져야지.”

“뇌절하시네, 이분.”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전력분석실은 다시 한번 두 남자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올해 목표 같은 거 있어요? 팀 말고, 한울 씨 개인 목표.”

“그냥 잘하자…정도 말고 없죠.”

“그럼 내가 하나 지어드릴까?”

“이상한 플래그 같은 거 세우지 마시고.”

“에이, 아냐. 지금 한울 씨 페이스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서 그러지.”

“…뭔데요?”

“올 시즌 평균자책점 0으로 한 번 마쳐봅시다.”

“0….”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다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일갈을 했을 부탁.

하지만 올해의 나라면 정말로 가능하지 않을까?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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