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친정
한성 위너스, 전라도 광주를 연고로 삼는 팀으로 프로야구 원년 시즌부터 모기업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팀 중 하나.
프로야구 팀인 이상 한 가지 컨셉을 갖게 된다. 혹은 수식어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
한성도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아 여러가지 수식어를 갖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성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다.
꼴찌. 최약체. 밑바닥. 승점 자판기.
뭐 그런 단어들.
실제로 한성은 ‘최근 몇 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실례일 정도로 리그 꼴찌를 도맡아왔다.
어쩌다가 시즌 초부터 확 치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며 어, 올해는 좀 다른가? 싶다가도 귀신같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팀.
비슷한 방식으로 리그 1위를 고수하는 상수 타이거즈와는 완벽히 반전되는 팀이라 할 수 있는 팀이지.
그런 팀이 올해는 좀 많이 달라졌다.
6월 중순에 돌입한 현재, 한성 위너스의 팀 성적은 리그 5위.
물론 시즌 후반까지 돌입해봐야 모든 것이 결정이 나겠지만, 나름 시즌이 진행된 상황까지 한성이 이렇게 돌풍을 일으킬 거라 생각한 이는 거의 없다.
그냥 의리로 보는 팀. 그냥 정으로 응원하는 팀. 그냥 집 앞에 구장 있어서 보러 가는 팀.
딱 그 정도였던 팀, 막말로 한성 팬들조차도 별 기대한 적이 없건만.
따악-!
“어우….”
태웅이의 공을 담장 저 멀리까지 날려버리는 정성훈의 타격에서 확실히 달라진 한성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6회 말이 진행 중인 시점에서 6 대 0 스코어.
태웅이는 잘하고 있다. 구속도 잘 나와주고, 제구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타선도 잘 때리고 있다. 좋은 타구도 계속 나오고 볼넷도 꽤 골라 나간다.
하지만 점수는 계속 주면서 점수를 계속 뽑아내지 못한다.
“한성이 왜 이러지.”
‘한성 위너스’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를 좋은 의미로 무참하게 부숴버린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용호가 빠지니까 짜임새가 좋아졌다더라.”
이용호, 역시나 그 새끼가 문제였다.
“이용호가 또 왜요?”
“알게 모르게 좀 팀 분위기를 잡치는 게 있었지.”
“근데 이용호가 삽질을 할 게 있었나요? 좀 주전급으로 올라온 게 기껏해봐야 작년? 빨리 잡아도 재작년 말부터 잖아요?”
올 시즌 초반까지 한성 위너스 소속이었던 석민 선배는 경기 시작 전, 나름 친했던 한성의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얻어온 모양이다.
태웅이가 피칭하는 모습을 보며 불펜에서 두런두런, 이젠 한성에 없는 그 누군가를 추억했다.
“2군 가서도 지랄, 1군에 있어도 지랄이니까.”
“2군에선 또 뭔 지랄을 했길래….”
“용호가 그래도 나름 1차에 1지명이잖아.”
“그쵸?”
“그런 선수들이 잘 안 풀리면 두 부류로 나뉘거든. 아, 아직 나는 프로에 통할 바가 아니니까 더 노력해야겠다. 아니면….”
“X발,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그거지.”
물론 후자에 속하는 선수들은 극소수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용호가 미친놈이지 1차 1지명들이 정신 나간 건 아니니까.
“데뷔 초반엔 1군에 있든 2군에 있든 대접 좀 받았잖아, 얘가. 거기서부터 좀 꼬인 건가 싶기도 하고.”
“선배들이 오냐오냐해준 게 좀 꼬였나보네요.”
“그런 거 같아. 사실 나도 용호는 꽤 기대했거든.”
어쩜, 파도파도 괴담만 나오냐 너는.
“1군에 있으면 뒤에서 이간질하고, 또 어떻게 자기가 경기 나가서 삽질하면 남 탓하고.”
야수조가 아닌 투수조에 포함된 석민 선배가 이렇게까지 알고 있다면 실제는 이것보다 훨씬 더했을텐데…….
“근데 상수는 생각없이 이용호를 홀랑 집어갔네요.”
“재작년…말이었나? 그때부터 성격을 확 죽인 게 보이긴 했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많이 사렸지.”
재작년이면…그때 그 벤치 클리어링 이후인가.
“실제로 지금 상수에서도 성격면으로 많이 죽이고 있는 게 보이기도 하고.”
“흐음….”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절대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녀석의 어릴 적부터의 모습을 봐왔던 한 사람이니까. 사람 절대 고쳐 쓰는 거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까 너 용호랑 친했다며?”
“친해요?”
이 형이 막말하네.
“아니야?”
“제발, 어디 가서 그런 이상한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고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였다며.”
“그때부터 지랄이 시작됐으니까요.”
“아…옛날부터 그랬나 보네.”
“선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기 규진이형한테만큼은 진짜 그런 소리 하시면 안 돼요. 진짜 큰일나요.”
규진이형한테 가서 ‘이용호랑 친했다며?’ 이런 소리 하면 정말로 상욕 먹을지도 모른다.
짝짝짝!
아, 태웅이 고생했다!
태웅이 나이스 볼!
점수 내자, 따라가자, 따라가!
그 무렵, 꽤나 길었던 6회 말 수비가 끝났다. 덕분에 지긋지긋했던 이용호 얘기도 마무리가 된 것 같고.
오늘 하루를 크게 망친 태웅이가 지은 멋쩍은 웃음은 팀원들의 격려와 응원 속에 진심 어린 웃음이 되었다.
짝짝짝, 박수와 함께 7회 초 공격 스타트.
성훈이형부터 시작되는 공격을 지켜보며 살짝 주제가 다른 곳으로 비껴났다.
“그러고보니 선배, 트레이드되고 광주 오는 건 처음 아니에요?”
“그러게. 어쩌다보니 일정이 또 이렇게 잡히네.”
“어때요? 오랜만에 온 친정집인데.”
“뭐….”
석민 선배는 광주구장의 전경을 스윽 둘러보더니 아련함이 내포된 웃음을 지었다.
“묘하네.”
세 글자로 석민 선배의 마음이 얼추 이해가 된다.
“난 계속 한성이 남을 거라 생각했거든.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 팀을 옮길 때가 올 수도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씁쓸한 웃음 살짝.
“근데 그게 연차가 지나면서 많이 옅어졌으니까. 내가 이렇게나 오래 있었는데, 이런 연차가 됐는데 보내겠어, 설마 같은 거.”
“음….”
“너도 원하 꽤 오래 있지 않았어?”
“저요? 저 한…13년 됐죠.”
“오래됐네.”
“오래됐죠….”
따악-!
성훈이형의 타격에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잘 맞은 타구에 덕아웃이 잠시 들썩였지만,
“아이고.”
상대 좌익수의 호수비에 가로막혀 가진 것 없이 자리에 앉아야 했다.
“그래도 저런 거 보면 맘 좀 편해지지 않아요?”
“어떤 게?”
“그래도…선배 아직까지 한성에 대한 애정 같은 건 있는 거잖아요.”
“음…주장한테 할 소리가 아니긴 한데, 그치. 친정집이니까.”
“예전에 없던 저런 활발한 모습 보면 아, 그래도 잘 있구나. 이런 생각 같은 거.”
“무슨 헤어진 전 여친이냐? 헤어지고 아, 그래도 잘 지내는구나, 이런 것도 아니고.”
비유가 참…….
“…그런 생각 들기도 하지.”
…적절하네.
“근데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거든.”
“어떤 생각이요?”
“내가 없어서 잘나가나?”
데뷔 초반에는 잘나가는 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고 다시는 올라가지 못하던 팀. 또 시간이 지나 내가 나온 뒤 다시 잘나가려는 팀.
“과거잖아요. 지금 팀에서 잘나가면 됐지.”
그러나 옛날 팀이다. 이젠 적이다. 저 팀을 깔아뭉개야 내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
“그치. 그래서 더 독기 같은 게 들기도 해.”
“나 없이도 잘 되나 같은 거?”
“그치. 그거지.”
따악-!
독기.
프로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은 석민 선배는 2아웃 이후 솔로 홈런을 날린 규학이에게 박수를 보냈다.
“아, 규학이 나이스뱃!”
그 모습이 마치 난 잘 살고 있으니까 더 이상 너에게 미련 같은 걸 남기지 않겠다는 전남친처럼 보여,
짝짝짝!
“점수 더 내자, 내자!! 가자아악!!”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질렀다.
* * *
8 대 1.
결국, 어제 원하 챌린저스의 득점은 규학이의 솔로홈런이 유일했고, 태웅이의 강판 이후 실점 두 개를 추가했다.
또 같은 날 상수 타이거즈가 승리하며 2위와의 경기차는 세 경기차로 다시 좁혀졌고.
이대론 안 된다, 얼른 더 치고 나가야 한다, 원하 챌린저스의 모두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따악-!
“아이고.”
그리 쉽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동균이가 1회부터 쓰리런 한 방을 얻어맞은 것이다.
그래도 고작 1회인데. 고작 3점인데.
“진형이, 보여줘어!”
“가자가자!!”
따악―
2회 초, 선두타자로 나선 진형이를 필두로 원하 챌린저스도 조금씩 힘을 내기 시작했다.
때리고, 나가고, 뛰고, 또 때리고, 한 번 더 때리고.
“잘해. 확실히 원하가.”
“잘하죠. 그러니까 1등하죠.”
6회 초 공격이 끝났을 때 점수는 5 대 3.
이 두 점의 리드를 유지해야 할 선봉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라운드를 둘러봤다.
“선배, 막 오랜만이라고 울지 말고.”
“몇 살인데 울어.”
“우는데 나이 없잖아요.”
“얘 또 헛소리하네.”
“아…극찬.”
“명진이가 누구 보고 배워서 그러는지 알겠다, 야.”
“예?”
잘나가다가 갑자기 말씀이 심하시네.
내 정색에 석민 선배는 껄껄껄 웃으며 불펜을 벗어났다. 천천히 걸어나가다 3루측 파울라인을 넘자 살살살 뛰며 마운드에 도착.
와아아악-!!
손석민! 손석민! 손석민!
“참…사람들 참….”
분명 떠난 사람인데. 분명 이젠 적군인데.
한성 위너스의 팬들은 이젠 적군으로 만난 석민 선배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석민 선배도 마운드에 서서 모자를 벗고 1루측 응원석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팀의 레전드급이라 평가하긴 좀 부족한 언더핸드 불펜투수. 하지만 얼핏 봐도 저 사람이 저 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가 보였다.
또한, 선두타자로 나선 정성훈이 헬멧을 살짝 벗고 꾸벅 인사하는 모습마저도 저 사람이 저 팀에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보였다.
“…멋있다.”
순수하게 저 모습이 정말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팀에서 떠났는데도 해당 팀 팬들이 박수를 치고, 전 직장 동료들이 경의를 표하고.
내가 훨씬 나이를 더 먹어 더 이상 프로에서 통하지 않게 됐을 때가 아니면, 내 꼬장으로 인해 팀을 옮기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내가 다른 팀으로 갈 일은 없을 거다.
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난 이미 원하 챌린저스에서 정말 많은 부분을 관여하고 있거든.
13년차. 주장. FA. 리그의 절대 에이스. 그렇다고 엄청나게 과한 연봉도 아니고.
하지만 팀이 아니라 야구판이라는 세계를 떠날 때가 오긴 하겠지.
그때…….
“…승진아.”
“예, 선배님.”
“나중에. 진짜 나중이긴 한데.”
“예?”
“나도 은퇴할 거 아냐.”
“아…예.”
“나도 은퇴하고 원하 팬들한테 저렇게 박수받겠지.”
굳이 옆을 보지 않아도 나를 흘끔 쳐다보는 승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금방 그 시선이 거둬지는 것 또한 느껴졌다.
“챌린저스 팬분들뿐 아니라, 원하 선수들한테도 박수받으실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
석민 선배는 6회 말 수비를 깔끔하게 막아냈다.
정성훈을 유격수 땅볼로 잡아내고, 조태풍을 1루수 직선타로 잡아내고, 채지훈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고.
1이닝을 깔끔하게 막아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석민 선배를 맞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어때요?”
“재밌네. 팀 레전드라도 된 기분이야.”
레전드급에 못 미치는 성적이라고는 해도…….
“맞잖아요, 레전드.”
저렇게까지 팬들에게, 팀원들에게 사랑받는 이를 레전드라 칭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를 레전드라 칭해야할까.
“그런가.”
“맞죠.”
석민 선배는 내 말을 아부 같은 걸로 생각했는지 껄껄 웃으며 적당히 받아넘겼다. 그리고 아이싱을 위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레전드라….”
야구판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단어. 아니, 굳이 야구판이 아니라도 어느 분야든 꿈꿔보는 단어.
누적 스탯, 비율 스탯, 좋은 성적을 낸 근속 기간 모두 부족한 내가 팀의 레전드로 남을 수 있을까.
“한울이, 8회 올라간다.”
“아, 예.”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에 명예의 전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레전드를 표방하는 또 하나의 지표인 영구 결번이 그리 쉬운 것도 아니고.
하지만 단 하나. 하나만큼은 내가 자신할 수 있다.
퍼엉-!
“어우, 뽈 난리난다, 난리나아아!!”
이번 시즌만큼은 내가 진짜, 레전드 한 번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