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레전드
KBO 통틀어, 흔히들 말하는 레전드급 시즌을 찍어본 선수들은 누가 있을까.
57홈런으로 역대 최다 홈런을 때린 박해진의 2016시즌.
현재 한성 위너스 김선곤 감독님 현역시절, 선발로 0점대 방어율을 찍은 1986시즌.
KP 스타즈의 정신적 리더인 김기윤이 전대미문의 40-40을 기록한 2015시즌.
다들 정말 어마어마한 레전드를 찍은 선수들이지만 이번 시즌의 나 또한 그 반열에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평균자책점 0, 볼넷 0, 승계주자 실점 0을 기록한 김한울의 2020시즌.
“…오케.”
8회 말, 터벅터벅 마운드로 걸어올라가며 생각했다.
내 비록, 이미 지나온 선수 생활의 2/3을 조져놓은 탓에 레전드급 선수는 아니더라도,
“레전드가 내가 된다.”
이번 2020시즌만큼은 레전드로 남을 것이라고.
띠링-!
[레전드]
-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0/3)
- 보상 - 슬라이더 +2 스플리터 +2
때마침 등장한 퀘스트는 규학이의 머리 위에 떠있었다.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텍스트가 사라지고, 규학이는 이 동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미트를 팡팡! 치더니 공 받을 준비를 한다.
오늘은 일단 가볍게 직구부터.
퍼엉-!
전광판으로 구속을 확인하니 151km. 구속은 잘 나와주고.
이후 가진 변화구들을 하나씩 던져보며 컨디션을 점검했다.
커브가 너무 일찍 떨어지진 않는지, 슬라이더가 밋밋하진 않은지, 스플리터가 손에서 잘 빠지는지, 체인지업이 너무 빠르지 않은지, 싱커가 너무 많이 꺾이진 않는지.
이러고 있자니 컨셉놀이하기 전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냥 맘 가는대로, 그냥 생각나는대로 던져대던 때의 모습.
“오늘 컨셉은….”
1번타자, 송!! 인!! 호!!
“무지성이다.”
화끈한 1이닝을 혼자서 약조한 채, 규학이의 사인을 받기보단 규학이에게 사인을 보냈다.
이번 공은 규학이도 살짝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만든 뒤 얼른 내 쪽으로 사인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이고 와인드업에 진입하자 규학이는 스트라이크존의 중앙, 낮은 곳에 미트를 대고 있었다.
그래, 거기. 거기를 노리고 던지다보면,
“읏!”
투닥-!
“스위잉-!”
스플리터가 땅바닥에 처박히게 되지.
규학이는 블로킹이 아닌 미트로 바운드된 공을 잡아낸 뒤 볼보이를 향해 휙 공을 던졌다. 또 동시에 구심이 새 공을 내 쪽으로 던져줬고.
모자를 벗어 살짝 인사한 뒤 송인호의 표정을 봤다.
이 새낀 뭐지?
아주 맘에 드는 표정을 하고 있다.
무지성이라 포장하긴 했지만, 오늘 피칭은 얼마 전 김수찬 선배님과 나눴던 이야기에서 한 가지 컨셉을 잡아왔다 할 수도 있다.
컨셉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나에 대한 틀을 깨는 것.
“웃!”
틀이라고 하는 게 어떤 의미의 틀이냐.
팟, 탁!
17시즌부터를 기준, 통산 스트라이크 비율 80%를 넘기는 그 ‘이미지’를 벗어넘기는 거지.
“스윙!”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헛스윙으로 카운트를 하나 더 잡아내고나자 다음 공에 대한 프로세스도 착착 진행됐다.
낮은 스플리터, 낮은 체인지업을 던졌다면,
“끅!”
부웅-!
눈에 붙여버리는 하이패스트볼이지.
띠링-!
[레전드]
-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1/3)
- 보상 - 슬라이더 +2 스플리터 +2
이닝에 대한 카운트가 아닌, 퀘스트에 대한 카운트 하나를 완성하고 공중에서 로진백을 휘적거렸다.
2번타자, 김!! 영!! 국!!
그리고 다음 타자 김영국.
타석에 들어서기 전 배트에 뿌릴 타르 스프레이가 없는지 덕아웃에서 얼른 스프레이를 공수해줬다.
칙칙, 배트에 뿌린 끈적이는 감이 마음에 드는지 그립에서 손을 뗄 때마다 배팅장갑이 아주 쩍쩍 달라붙는다.
타자가 저렇게 치트키를 쓴다면,
착! 착! 착!
나도 질 수 없지.
타자의 저런 모습을 보니 나도 로진의 감이 살짝 부족하게 느껴져 조금 더 만져준 후,
“읍!”
퍼엉-!
“볼-.”
바깥쪽에 냅다 직구를 꽂아버렸다.
확실히 좁아졌다고 느끼는 게, 웬만하면 잡아줄 수도 있을 법한데 심판을 볼을 내린다.
물론 세상사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는 거지. 줬다 뺏는 거 같잖아.
“윽!”
틱!
“파울-!”
이번엔 조금 전 직구보다 살짝 안으로 들어가는 직구, 처럼 보이는 싱커를 던졌다.
의도했던대로 배트 끝에 걸리며 심판의 왼쪽을 스쳐지나갔다. 김영국은 배트 윗손인 왼손이 엄청 아픈지 손을 훌훌 털어댔다.
“어으, 아프겠다.”
의도한 게 맞긴 한데, 좀 미안하긴 하네.
윗손이 아플 때 치기 힘든 공이 뭐가 있을까…….
왼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털어내기 위해 김영국이 손을 탈탈 털어내느라 생긴 몇 초의 시간 동안 계속 생각했다.
리드를 잡는 아랫손, 파워를 담당하는 윗손.
“직구네.”
그것도 빠른 직구.
안 그래도 파워가 부족하다 평가받는 김영국인데, 그나마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흑!”
몸쪽, 그것도 살짝 높은 직구가 제격이지.
띡!
살짝 깊게 들어간 직구가 스윗 스팟보다 안쪽에서 맞아버리며 심판의 뒤로 후웅 넘어가버렸다.
깔짝깔짝, 글러브를 접었다 폈다 하며 규학이가 새 공을 어디에 던져줄지 알려줬다.
착! 맛깔나게 공을 받은 뒤 로진을 충전해주고, 다음 공에 대해 생각했다.
위치는 바깥쪽, 바깥쪽, 몸쪽. 구종은 직구, 싱커, 직구. 카운트는 1-2.
그렇다면…….
“오늘 체인지업 좋더라.”
반대손 타자에게 위협이 될만한 공 중, 가장 왕도에 가까운 공을 던져보자.
“읍!”
아까 송인호가 그랬던 것처럼,
붕-!
또 하나의 카운트가 만들어질테니까.
“스윙-!”
띠링-!
[레전드]
-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2/3)
- 보상 - 슬라이더 +2 스플리터 +2
“후우….”
이번 퀘스트의 2/3을 완성한 뒤 구장을 한 번 슥 돌아봤다.
기성이가 던지는 라운딩을 받는 명진이, 명진이가 잘못 토스해 점프하며 공을 받은 성문이, 마지막으로 라운딩을 받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훈이형,
3번타자, 정!! 성!! 훈!!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다음 타자.
앞서 등장했던 타자들처럼 좌타석에 등장한 정성훈은 요즘 본인이 잘나간다는 걸 아는지 자신만만하게 나를 기다렸다.
몸쪽은 가능하면 중요한 순간에만 던지고, 웬만하면 바깥쪽에서 살살 꼬드기는 느낌으로.
“…오케.”
빠르게 이번 타석에 대한 컨셉을 정한 뒤,
“훅!”
퍼엉-!
“보올-.”
바깥쪽 높은 곳에 볼을 하나 던져봤다. 근데 그게 높아서 볼이 아닌, 밖으로 빠져서 볼이 되도록.
확실히 바깥쪽에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몸쪽에 붙였을 때 자신있게 나오던 스윙은 보이지 않고 애매하게 움찔거리며 볼을 골라냈다.
바깥쪽 공에 계속 그런 반응을 보이면 나도 계속 그쪽으로만 던지고 싶어지는데.
뻐엉-!
“볼!”
이번엔 낮은 구역에서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싱커를 던졌다. 타자의 반응을 확인하니 조금만 더 건드리면 뭐가 나올 것 같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꼬드겨보자.
빵!
앞서 송인호와 김영국 모두 한 번씩 당했던 바깥쪽에서 도망치는 체인지업.
“볼, 보올-!”
직전의 두 타자와는 다르게 확실한 카운트 우위를 선점한 덕에 정성훈은 배트를 쉽게 내지 않았다.
근데 배트를 내지 않았다는 건 표면적인 이야기고.
“스윙!”
규학이가 곧장 양손으로 3루심을 가리키자, 호명받은 3루심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만들어보였다.
우우우-!
금방 장내가 야유로 가득 찼지만 3루심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다음 판정을 대기했다.
“근질근질하지?”
세 공 연속 바깥쪽, 그나마도 시원하게 스윙 한 번 못 해 본 타자는 얼마나 답답할까.
힘 하나는 진퉁이라 힘껏 당기기만 하면 담장을 넘길 수 있는 타자가 말야.
“끄윽!”
부웅-!
이렇게 힘차게 휘두르고 싶었던 맘을 어떻게 참아왔을까.
“스윙-!”
세 개 연속으로 바깥쪽에서 놀았으니, 이번엔 몸쪽 높은 구역으로 헛스윙을 하나 더 유도했다.
그만큼 중요한 순간이라는 거지.
그리고 이 중요한 순간은 카운트 2-2가 된 지금 또한 유효하다.
몸쪽, 하지만 다시 한 번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는 공간. 오늘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공들 중 슬라이더를 던져보자.
“끄악!”
평상시 잡았던 그립보다 얕게 잡으며 내가 원하던 조건을 최대한 충족시켰다.
횡으로, 대신 짧게, 또한 최대한 빠르게.
이 세 가지 조건은 눈에 아주 불을 켜고 있는 정성훈에게 너무나도 잘 보이는 공일 거다.
팍!
“스윙, 스윙 스윙-!”
생각보다 깊게 공이 붙었는지, 정성훈의 허벅지에 공이 맞았지만 스윙으로 인정되며,
띠링-!
[레전드]
-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3/3)
- 보상 - 슬라이더 +2 스플리터 +2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93
커브 – 86
슬라 - 83+2=85
스플 - 84+2=86
체인 - 84
싱커 - 85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예에에에에!!”
“호오오오!”
또 한 번의 퀘스트 달성.
또 한 번의 무실점 이닝 달성.
또 한 번의 레전드 달성.
무려 세 가지의 거사를 완벽하게 수행하니 뒤따라오던 팀원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나를 따라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올스타전!
6월 중순에 돌입하며 슬슬 후보생들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에 들어서 새롭게 언급되는 이도 있고, 아니면 철밥통처럼 계속 제자리에 붙어있는 이도 있고.
전자에 해당되는 이라면 우리 원하를 기준으로 명진이. 후자에 해당되는 이를 우리 원하를 기준으로 삼자면 성현이.
그 중 나는 전자에 해당하는 걸까, 아니면 후자에 해당하는 걸까.
17시즌과 18시즌, 두 시즌 연속 불펜투수 팬 투표 1위로 선정된 경력이 있지만 19시즌은 시작부터 아주 대차게 말아먹으며 후보로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형님, 올해도 저희 세 명이서 같이 가겠네용.”
“아, 꺼져. 니네끼리 알아서 가.”
“에이, 형님 우리 사이에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미친놈이.”
역대급 시즌 성적을 찍어내며 다시금 불펜투수 팬 투표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올해도 가시게 되면 이번엔 제 차로 한 번에 가시겠습니까.”
“싫어.”
“아, 왜요오.”
언제였더라, 18시즌 올스타전이었지.
당시 원하에서 올스타로 선정된 나, 성현이, 명진이 셋은 내 차로 한 번에 문학구장으로 이동한 경력이 있다.
그땐…….
“…니네 두 놈이랑 한 공간에 있다면 그건 진짜 시간과 정신의 방이야.”
아, 이래서 운전자들이 빡쳐서 핸들을 돌려버리는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됐지.
“니네끼리 알아서 가.”
“형님, 절 버리시는 거예요?”
“미친놈아.”
아힝, 잇힝, 명진이는 뭐 그런 미친 소릴 내더니 대전구장의 3루측 덕아웃 안으로 휙 도망가버렸다.
아, 제발.
“…쟤는 원래 저러냐?”
“애는 착한 애야.”
그 모습을 본 우석이가 나타나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피식 웃더니 그대로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올시즌 좀 하더라?”
“해야지. 넌 할만하냐?”
“그냥 그래. 하던대로 하는 거지.”
막간의 대화를 나누며 나도 우석이 옆에 그냥 철퍽 주저앉으니 녀석이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 야.”
“왜.”
“나 여자친구 생겼다, 드디어.”
“올.”
이렇게 되면 남자들이 흔히 떠드는 주제가 나와줘야지.
“이쁘냐?”
“이쁘다.”
“저기 구현정 아나운서는 어떻게 되고.”
“뭐…사람 인생 다 그런 거 아니겠나.”
확인.
“너네 커플은 만난 지 꽤 됐지?”
“우리?”
얼마나 됐더라…….
“작년 8월에 만나기 시작했으니까…한 10개월 만났네.”
“썸 탄 건 더 길잖아.”
“거의…2년?”
“되게 오래 만난 거네.”
“썸 기간까지 포함하면 꽤 길게 만났지.”
“결혼은?”
“결혼?”
아무렇지도 않게 큰일을 언급하는 녀석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뭐 짓궂게 놀린다거나 농담을 하는 표정은 아니고 순수하게 궁금함이 묻어나는 표정.
“하고…는 싶은데.”
“너 그 분이랑 사귀기 시작할 때처럼 간보네 어쩌네 저쩌네, 지랄하지 말고. 그냥 확 잡아라. 빨리 잡아.”
“생각은 하고 있지.”
“언제?”
“가능하면 올해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 만나고 서로 안 기간이야 기니까.”
그러게. 슬슬 이쪽 준비도 해야겠네.
“올해 국수 먹을 수 있냐?”
옆에서 멍석도 깔아주겠다…….
실실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노력해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