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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44화 (144/190)

144화. 질러

광주에서 한성 위너스 시리즈를 2승 1패로 마친 뒤, 대전으로 올라와 성운 호크스와 또 한 번 2승 1패.

같은 기간 상수 타이거즈는 한 주 동안 5승 1패의 성적을 올리며 게임차는 다시 세 게임차로 줄어들었다.

뭐, 그래도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그리고 맞이한 월요일.

“이따가 방탈출 카페 한 번 갈까요?”

평소 같았으면 내가 먹고 싶다는 걸 먹으러 갔을텐데, 오늘따라 강력하게 돈가스가 먹고 싶다는 민영 씨는 따라 칼질을 하고 있었다.

“방탈출 카페요? 좋….”

아.

“…긴 한데요. 그, 저번처럼 무서운 데만 안…가면 안 될까요?”

“에이, 그게 재밌는 건데요!”

제발.

얼마 전 민영 씨와 방탈출 카페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재밌었지. 신기했지. 짜릿했지.

“…….”

와아아악!!

으흐으억!

미, 민영 씨이이!!

무서운 것만 아니었다면.

키 188cm, 몸무게 110kg에 달하는 거구는 어두운 방 안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여성에게 매미처럼 매달렸다.

아니, 진짜 무서운 걸 어떡해.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건데, 자꾸 깜짝깜짝 놀래키는 걸 어떡해.

근데 그렇게 민영 씨에게 매달릴 때마다 민영 씨는 꺄르륵 웃으며 즐거워했다. 언제 한 번은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지.

…비록 소품이라지만, 덜렁거리는 사람 손목을 들고 해맑게 웃는 민영 씨는 꽤…대단해보였지.

“이번에 제가 봐둔 데가 여기거든요.”

“…방탈출 카페요?”

“네! 한 번 보세요.”

“…….”

불신, 의심, 불안, 뭐 그런 키워드를 잔뜩 눈알에 써붙인 뒤 민영 씨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좀비공장에서 탈출하라!]

└좀비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눈을 뜬 당신.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

아찔함이 느껴져 읽다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때요? 어때요, 재밌겠죠?”

“무, 무섭….”

“에이, 귀신 나오는 것도 아닌데요. 제가 한울 씨를 위해 특별-히 고르고 고른 건데….”

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안 돼요?”

“…….”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 좀 반칙이라는 생각 안 드세요, 민영 씨?

“가…죠.”

“네에!”

민영 씨는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와아아악-!!

야구장에서 내가 좋은 성적을 낼 때마다 듣던 그 소리, 그 외침은 한 시간 동안 내 입에서 쉬지 않고 뛰쳐나왔다.

* * *

지옥과 같았던 한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지옥과 같았던 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민영 씨도 악질이야. 분명히 40분만에 나올 수 있었는데, 나 비명 지르는 거 보려고 분명 천천히 한 거야. 내가 봤어, 진짜 봤어.

“하이고….”

아직까지 부들거리는 팔뚝으로 탈출 기념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라며 잠시 자리를 비운 민영 씨에 대한 기다림.

매실 맛 음료수를 마시며 기운을 보충하고 있을 때, 방탈출 카페 알바분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혹시 그….”

“네?”

“그, 김한울 선수…맞으시죠?”

“네, 맞아요.”

“저기 혹시,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네, 네.”

A4용지에 슥슥, 내 사인을 그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방탈출 카페에서 비명 지르던 아저씨에서 프로선수 김한울로 돌아온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혹시 좀 걸어놔도 될까요?”

“예, 그럼요. 여기 홍보용으로 걸어두시게요?”

“네!”

“개인용 필요하시면 하나 더 해드리구요.”

“아,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사장님은 뒤에서 원하 챌린저스 모자와 매직 펜을 얼른 들고 오셨다.

슥슥, 다시 한 번 사인을 해주자 사장님은 감사하다며 음료수를 하나 더 주셨다.

새 음료수 캔을 받고 있자니,

“…어디 갔지?”

문득 민영 씨가 오질 않는다.

음료수 캔 하나를 원샷 때린 것도 아니고, 홀짝홀짝거리며 마신 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질 않는다.

화장 고치는 시간이라기에도 이미 타임 오버. 전화라도 하면 받을까 싶어 전화를 걸어봐도,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테이블에 있던 민영 씨 파우치에서 나와 똑같은 벨소리가 들릴 뿐.

“저기, 혹시 저랑 같이 왔던 분 다시 오시면 저 1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아, 네네.”

“네, 안녕히 계세요.”

“네, 또 오세요!”

호옥시라도 모르니 사장님께 부탁 한 번 한 뒤 방탈출 카페를 나섰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건물이라 그런지 어디 갈라진 곳 하나 없이 깔끔한 내벽이 먼저 보였다.

나가서 왼쪽엔 엘리베이터, 오른쪽엔 위아래로 향하는 계단들. 그리고 저기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아뇨, 괜찮아요.”

“에이, 그러지 마시구요.”

“괜찮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민영 씨 목소리.

“…뭔데?”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들리긴 하는데 민영 씨 목소리에서 썩 달가운 기분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극혐하는 감정만 가득했지.

무슨 일 난 것 같다 싶어 빠르게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번호만 주시는 건 상관없잖아요?”

“남자친구 있다니까 왜 이러세요, 자꾸?”

“번호만요. 진짜 마음에 드셔서 그래요.”

…세상 잘 돌아가네.

간단한 몇 마디 회화로 돌아가는 상황이 빠르게 이해됐다.

“민영 씨, 무슨 일이예요?”

“한울 씨! 아, 좀 놔요!”

민영 씨는 본인의 팔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힘껏 뿌리친 뒤 도도도 나에게 뛰어와 팔짱을 꼈다.

얼굴을 보니 꽤나 많이 화가 난 것 같은데…….

“여기요, 남자친구요. 적당히 좀 하세요, 진짜!”

와, 민영 씨 이렇게 빡친 거 처음 본다.

이럴 때 괜히 쓸데없는 말 한 마디 하는 것보단 지긋-이 상대방 눈을 쳐다보는 게 더 효과가 좋지 않을까.

“아이씨….”

역시나, 상대방은 쭈뼛거리다가 혼자 뭐라뭐라 중얼거린 뒤 빠르게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예요?”

“자꾸 맘에 든다 어쩐다 하면서 번호 달라 그러잖아요! 남자친구 있다고 몇 번을 얘길 해도 들어먹질 않으니까 화나죠!”

씨익씨익―

어지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민영 씨는 남자가 떠난 곳을 바라보면서 여분으로 남아있던 분노를 뱉어냈다.

스윽스윽―

“아으…진짜….”

그에 진정하라는 의미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자 집사 좋아하는 고양이처럼 고로롱대며 내 팔뚝에 얼굴을 부볐다.

그러더니,

“봤죠?”

“네?”

훅! 얼굴을 들고는 또 금세 밝게 웃는다.

“봤죠, 봤죠? 제가 이 정도거든요!”

“아….”

여자어를 해석해보자. 여기서 정답은 무엇일까.

“…아! 그, 민영 씨가 진짜 너무 이뻐서 그런 거예요. 어우, 민영 씨 어디 맘 편하게 돌아댕기면 나도 맘이 아주 불안하다니까요?”

“그쵸!”

이거였네.

틀리면 지옥, 맞추면 천국이라는 이지선다 앞에서 다행히 정답을 고른 것 같다. 보이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쉰 뒤 민영 씨와 함께 건물을 빠져나왔다.

하하호호 웃으며 길거리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오락실을 잠깐 들렀다가 노래방도 잠깐 들러주고.

재미지게 놀다보니 어느새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어떤 의미로 봤을 때 일주일 중 가장 슬픈 시간.

그래도 다음이 있기에,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미련없이…….

“아, 출근하기 싫어어어어….”

미, 미련없이…….

“그냥 내일도 연차 쓸까요?”

“…….”

…생각보다 많은 미련을 남기고 차에 탈 수 있었다.

“아쉬워서 그렇죠. 어렵게 일주일 기다려서 한울 씨랑 만났는데….”

“저도 아쉽죠.”

“그거 알아요? 다른 직장인들은 일요일이 막 무섭다, 좀 그렇다 그러잖아요. 근데 전 반대거든요. 엄청 기대돼요!”

“왜요?”

그 이유야 뻔히 보이지만,

“다음 날이 한울 씨랑 만나는 날이니까요!”

굳이 듣고 싶었다.

“제가 요즘에 일을 진짜 열심히 하거든요.”

“빨리 승진하려구요?”

“아뇨? 아니, 그런 걸 노린 건 아닌데 그…그런 건 그냥 열심히 하다보니까 따라오는 거 같구요.”

“그럼요?”

“그 날에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면, 그 날 한울 씨 볼 수 있는 확률이 늘어나잖아요.”

이런 귀여운 사람 같으니라고.

“한울 씨 경기 일찍 끝나면 10시고, 마무리하고 퇴근하면 11시고. 제가 그때까지 일하는 건 아니지만 그 날 하루 빨리 땡겨두면요, 우리가 늦게 헤어지고 늦게 자도 다음 날이 편하잖아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두다다다 쏟아내고 있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묵직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그만큼 한울 씨가 많이 보고 싶으니까.”

아, 이 사람이 나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구나, 라는 감정.

별 다른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운전을 지속했다. 재잘재잘 떠드는 민영 씨의 목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다.

요즘 사는 얘기, 내일은 무슨 일 할지에 대한 얘기, 며칠 전에 있던 진상 얘기, 오늘 있었던 얘기.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30분은 너무 짧게 느껴진다. 규정 속도에서 10km씩 에누리한 덕에 생기는 시간 여유를 포함해도 짧다.

그만큼 즐겁다는 거지.

신호에 걸린 틈에 흘끔 민영 씨 얼굴을 쳐다봤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는지 차 안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양새가 상당히 귀엽다.

“…민영 씨.”

“네?”

원래는 7월쯤에 얘기하려 했는데.

“음…아까 우리 출발하면서 했던 얘기들이요.”

“출발하면서…아, 연차 어쩌고 했던 거요?”

“그 얘기도 포함해서.”

포함해서?

혼자 중얼거리더니 이전의 대화 내역을 꺼내오느라 타임 렉이 발생한 얼굴을 했다.

“아, 네네.”

그리곤 스크립트를 잘 찾아왔다.

“그거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하거든요.”

“어떻게요?”

어떻게 얘기하는 게 좋을까.

아직 완벽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지만, 구상은 어느 정도 마친 상태다.

대충 어떤 곳을 빌려서 어떻게 한 다음 어떤 걸 주고 어떤 이야기를 하자.

머리는 그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라 명령했지만 가슴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반항하고 있었다.

“…한울 씨?”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이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끊은 동안 항상 민영 씨를 내려주던 곳에 도착했다.

덕분에 안전하게 민영 씨의 얼굴을 쳐다보고 이야기할 여건이 마련됐다.

“우리 같이 살…면. 같이 살면 맨날 보고, 맨날 기대하고, 맨날 같이 있잖아요. 맨날 같은 밥 먹고 같이 밥 먹고.”

“아…그….”

“아, 미안해요. 원래는 7월 쯤에 제대로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멋대가리 없는 프로포즈 같아서 정말 미안해요. 근데 그….”

벙 쪄있는 민영 씨의 얼굴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게 가장 좋다, 지금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은 결과를 낼 것 같다, 이런 게 아니라.

“미안해요, 지금 얘기하고 싶어서요.”

지금 얘기해야한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그….”

두서와 멋대가리가 동시에 사라진 고백에 실망한 걸까. 아니, 실망했겠지.

민영 씨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가는 소릴 내며 눈동자를 흔들었다.

“좀…갑작스럽긴 하네요.”

“그쵸. 저도 질러놓고 지금 되게 무서워요. 혹시라도 민영 씨가 안 받아주면 어떡하나, 혹시라도…이거 때문에 잘못되면 어떡하나.”

“앞뒤없이 지르신 거네요.”

“그렇게 되네요.”

하하, 멋쩍게 웃었다.

“거의 3년 됐죠, 저희 만난 지.”

“사귄 기간은 1년 좀 안 되긴 한데…전에 만났던 걸 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죠. 3년 살짝 안 되네요.”

“그 동안 한울 씨는 저를 잘 알아오셨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단호하게 대답했다.

3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만나며 민영 씨의 많은 부분을 안다 자신할 수 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며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하지만 3년,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내에 한 사람을 ‘잘 안다’라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더 알아가고 싶어요. 아직 민영 씨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부분이 많으니까요.”

“그럼…굳이 결혼이 아니라 더 만나도 알아갈 수는 있지 않나요?”

“알아갈 수야 있죠. 있는데. 있는데….”

저도 민영 씨 좋아해요,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민영 씨가 어떤 표정이었더라. 최소한 지금처럼 무감정, 무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것보단, 저에 대해서 더 많이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요.”

“한울 씨를요?”

“민영 씨 말대로, 그냥 지금처럼 계속 만나도 민영 씨가 저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겠죠. 근데,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살고 같이 청소하고. 같이…매 같이 붙어있는 게 저에 대해 저 많이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

“내가 어떤 식으로 자는지, 내가 어떤 식으로 집에서 사는지, 내가 집에선 뭘 하고 사는지, 내가 뭘 생각하면서 사는지. 그런 걸 전부 다.”

후.

멋대가리 없는 프로포즈를 마친 대가로 민영 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그냥 자동차의 앞 유리를 쳐다봤다.

그 행동을 민영 씨가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라 핑계삼고 가만히 기다렸다.

“한울 씨.”

“네.”

두근거리던 소리 때문에 놓칠 뻔한 민영 씨의 목소리에 어렵게 대답했다.

“언제가 될지를 모르겠지만요.”

“…네.”

“우리 결혼하구 나서. 오늘 일은 아마 두고두고 뭐라 할 거예요.”

“예?”

결혼이라는 단어 선택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친구들한테 프로포즈 받았다고, 조만간 결혼할 거라고 자랑할 건데 분명 어떻게 받았냐고 물어볼 거란 말이예요.”

“아….”

확답이 아닌 몇 바퀴를 에둘러 나온 표현에 잠시 민영 씨를 쳐다보자,

“올해 안에 결혼해요, 우리.”

“…….”

민영 씨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대답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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