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최상
9회 초 등판해 내가 맞은 KP 스타즈의 타순은,
3번타자, 2루수 김기윤
바로 제일 빠방하다는 클린업 트리오.
프리미어12 대회 때 꽤 친해지고, 지금은 가끔씩 연락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해진 김기윤은 무표정하게 타석에 들어섰다.
한울이, 한울이. 동생, 동생.
날 보면 항상 웃으며 등을 토닥여주던 사람은 마치 내게 큰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아 애써 김기윤의 얼굴을, 표정을, 모습 자체를 시야에서 지워냈다.
팀원들간의 의리를 앞세우는 사람. 사람 좋기로 소문 난 사람.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던 사람.
정말 멋진 사람인 줄은 알지만,
퍼엉-!
“스윙!”
저도 제 갈 길 가야죠, 형님.
초구는 몸쪽 높은 곳에 기본적인 직구를 던져 헛스윙 하나를 따냈다.
전광판을 슬쩍 둘러보니 구속은 154km. 생각보다 괜찮게 나온 구속에 고개를 끄덕인 뒤 다음 사인을 기다렸다.
바깥쪽 슬라이더 그거 말고. 몸쪽 싱커 그거 말고.
두 번 고개를 저은 뒤 고른 곳은 바깥쪽의 낮은 직구. 클래식함이 돋보일 로케이션 배합이 아닐까.
“끄윽!”
딱-!
“파울, 파울!”
이번에 던진 직구는 153km짜리.
심판의 머리를 넘어가는 타구를 보며 얼추 타이밍이 맞아간다는 걸 느꼈다.
김기윤은 심판에게 잠시 타임을 부탁하고 타석을 벗어났다. 붕, 붕, 배트를 몇 번 휘둘러본 뒤 다시 타석으로 돌아와 나를 노려본다.
김기윤이라는 사람이 나에게 많이 당해왔고, 또 그 때문에 나에 대해 꽤 알고 있다면 내가 다음으로 뭘 던질지 이미 정해놨을 거다.
“…직구.”
굳이 퀘스트와 연동된 상황 탓이 아니더라도 그래, 아마 똑같은 상황이라면 난 직구를 던졌겠지.
근데,
“끄악!”
부웅-!
“스윙, 아웃!”
그게 똑같은 직구는 아닐 걸요.
띠링-!
[구위]
- 포심 패스트볼만 던져서 1이닝 3삼진을 잡아내세요 (1/3)
- 보상 - 구위 +1
공이 손에서 떠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손가락 끝의 끝까지 공을 밀어넣으며 던진 공은 무려,
“오늘 좀 뻗네.”
157km.
마의 구속 근처까지 구속을 찍어놓고도 무심하게 마운드를 한 바퀴 돌았다. 로진을 한 번 만지작거리고, 퉤- 땅바닥에 뱉어내고.
4번타자, 지명타자 김성수
김기윤과 똑같은 타석에 들어서 타격 준비를 마친 김성수가 잘생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154km, 153km, 157km.
여러 사인 중 직구 세 개만을 고집한 나에 대해 규학이는 어떤 사인을 낼 것이며, 직구 세 개로 앞선 타자를 잡아낸 날 보며 김성수는 어떤 대비를 할 것인가.
우선 규학이가 선택한 첫 번째 사인은 몸쪽 직구. 엄지 손가락 하나를 편 규학이의 눈빛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형, 오늘 컨셉은 직구인가봐요?
“흡!”
그치, 직구지. 직구로만 삼진 세 개 잡는 게 오늘 컨셉이지.
부웅-!
“스윙-!”
김성수는 정말 던지는 투수의 간담이 더욱 서늘해지는 스윙으로 초구를 맞았다.
“어우….”
사실 투수 입장에선 이런 타자가 제일 무섭다.
뭐 하나 얻어걸려라 휘두르는 타자? 얻어걸리지 않게 낚으면 된다.
흔들릴 때 번트 와이핑하며 신경 건드리는 타자? 배트 모가지 잡고 있는 손가락이 깨지도록 세게 꽂으면 된다.
볼 잘 보면서 잘 골라내는 타자? 보통 그런 타자들은 선구안 대신 컨택이나 파워에서 마이너스를 가진 타자들이다.
“윽!”
부웅-!
잡아먹힌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내가 잡아먹겠다고 그립을 꽉 쥐는 타자.
“스윙-!”
그런 타자가 제일 무섭더라.
‘기’에서 눌린다고 하지, 그런 느낌을 받자 바로 와인드업에 들어가지 않고 살짝 인터벌을 두며 투기를 파훼했다.
“후!”
이쯤이면 되었다 싶을 때 툭툭, 손 위를 둥둥 떠다니는 로진백을 휙 내던졌다. 다시 한 번 엄지 손가락을 펴는 규학이에게 고개를 끄덕거려주고,
“끄악!”
한 번 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공 끝을 강하게 눌러내린다.
그러면,
부웅-!
“스윙, 아웃!”
분명 잡아낼 거야.
띠링-!
[구위]
- 포심 패스트볼만 던져서 1이닝 3삼진을 잡아내세요 (2/3)
- 보상 - 구위 +1
와아아악-!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안 그래도 시끄러웠던 응원석이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오늘은 보지 못 할 거라 생각했던 슈퍼스타가 나타난 것도 좋은데, 나타나서 믿을 수가 없는 대활약을 펼친다는 것.
다음 타자가 들어설 때까지 마운드 위에서 1루측 관중석을 주욱 훑어보았다.
“…오케.”
또 한 번, 다시 한 번 힘을 얻고 미련 없이 다음 타자를 맞이했다.
5번타자, 포수 황하균.
“후우….”
이닝의 세 번째 타자를 맞아 처음으로 규학이가 요구한 공은 역시나 직구.
등판해 던진 공 여섯 개가 모두 직구라는 점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한울이형이라면 생각이 있어서 직구만 던지겠지, 한울이형이라면 직구만으로 잡아낼 수 있겠지.
규학이 또한 그걸 믿고, 엄지 손가락 하나를 다시 펴냈다.
“끅!”
그럼 보답해줘야지.
퍼엉-!
“스챠-이크!”
초구부터 몸쪽 깊게 붙인 직구가 주심의 손가락질과 함께 카운트를 인정받았다.
이후 규학이가 요구한 공은 바깥쪽 슬라이더.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잘 읽고 있는 규학이라면 지금 이 사인은 일종의 더미 사인이다.
너무 고개만 끄덕거린다거나, 너무 내 쪽에서만 사인을 내면 심심하니까 가끔씩은 고개도 저어줘야 타자가 헷갈려하지.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 번 바깥쪽에 직구 사인이 나왔다.
다시 한 번, 혹은 계속해서 직구 사인을 내고 직구를 받아내는 규학이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따가 덕아웃 들어가자마자 대뜸 형, 직구만 던지면 안 무서워요? 이런 소릴 할 거 같은데.
“끄윽-!”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무섭지.
아무리 좋은 직구라도, 직구만 던지다가 안타 하나쯤은 처맞지 않을까. 혹시, 혹시라도 맞지는 않을까, 당연히 무섭지.
딱-!
그래도 어떡해, 지금 이게 가장 강력한 무기인 건 변함없는 사실인데.
“에헤이.”
바깥쪽에서 가운데쪽으로 살짝 말려들어간 공은 황하균의 배트 끝에 맞고 성문이의 키를 살짝 넘어가는 안타가 되었다.
데굴데굴, 성현이가 본인한테 굴러오는 타구를 잡아다가 성문이에게 툭 던져주었다. 중계를 받아 성문이는 다시 내 쪽으로 던져주었고.
“형, 볼 좋다! 계속 가요!”
공을 받아들고 마운드를 밟자 규학이가 오른손으로 제 미트를 툭툭툭 치며 격려했다.
따봉!
다음 타자가 들어오기 직전의 짧은 순간, 엄지 손가락 하나를 내밀며 난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괜찮아. 안타 하나 두 개 정도는 괜찮아. 잡아내면 돼, 어쩌다 얻어걸린 안타에 신경쓰지 말고 다음 타자 잡아내면 돼.
“오케, 오케이.”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6번타자, 우익수 이창현
다음 타자의 등장을 지켜봤다. 좌타석에 자리잡은 이창현은 1루 주자를 흘끔 보고선 제 왼쪽 귀 옆에 배트 그립을 옮겼다.
그에 따라 나도 1루 베이스를 밟고 있는 황하균을 흘끔 본 뒤 셋 포지션에 돌입했다. 아주 오랜만에 잡아보는 셋 포지션.
왼발을 뒤로 빼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화려하게 움직이는 투구폼이 아닌 정갈하게 서서 거사를 대비하는 투구 자세.
“후우….”
살짝 굽어진 오른다리, 살짝 앞으로 나와있는 왼발, 살짝 수그려진 허리,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글러브.
하나, 둘, 타이밍을 세면서도 특성 ‘집중’ 덕분에 황하균이 얼마나 움직이고 있는지, 어디까지 움직였는지 모두 느껴졌다.
타이밍이 넷에 도착했을 때, 빠르게 오른다리가 더욱 굽어지고 빠르게 왼발이 더욱 앞으로 뛰쳐나갔다.
“끕!”
출발은 빠르게, 하지만 딜리버리는 천천히.
퍼엉-!
셋 포지션과 관련된 격언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강한 공을 내가 원하는대로 던질 수가 있다.
“스챠-이크!”
157km.
활동적인 느낌보단 어딘가 제한되고 잠겨있다는 느낌 때문에 셋 포지션에선 강한 공을 던질 수 없다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전혀.
셋 포지션이 잠겨있다고? 제한됐다고? 아니, 그건 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의 변명일 뿐이다.
와인드업을 축소시킨 게 셋 포지션이 아니라, 셋 포지션은 와인드업과 아예 별개의 자세로 보는 게 정답이니까.
출발지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접근 방식도 달리해야 한다.
셋 포지션과 와인드업,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그저 강하게 다리를 굽히고, 강하게 허리를 돌리고, 강하게 팔을 내뻗는 것 뿐.
“끄윽!”
퍼엉-!
“스챠-이크!”
그래, 그게 투구의 본질이라는 거다.
내가 가진 모든 힘, 그리고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모든 힘 모두를 동원해서 어떻게든, 어떻게든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면 되는 거다.
“웁!”
바로, 지금처럼.
부웅-!
“스윙, 아웃!”
띠링-!
[구위]
- 포심 패스트볼만 던져서 1이닝 3삼진을 잡아내세요 (3/3)
- 보상 - 구위 +1
제구 - 최상
구위 - 상+1=최상
체력 - 중
포심 - 100
커브 – 88
슬라 - 85
스플 - 86
체인 - 86
싱커 - 85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피안타 하나를 허용했다곤 하지만, 나름 화끈하게 삼진 세 개를 곁들여 이닝과 경기를 모두 종료시켰다.
“후우!”
자동적으로 큰 숨이 내뿜어지고 얼굴엔 미소가 폈다.
직구 100을 찍은 것도 기쁜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 구위까지 최상을 찍어버리다니.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발전할 부분이 더더욱 남아있다니.
“형님, 굿 볼이요!”
“네이쓰, 네이쓰으!”
나가자, 싸우자, 승리의 챌린저스! 원하의 승리를 위하여!
응원가를 떼창하는 팬들 앞에 서서 원하 챌린저스 선수들 모두가 허리를 숙였다.
또 승리, 팀 성적에 새로이 추가된 1승 중 나름의 지분을 가진 입장에서 당연히 즐거운 미소를 겸비하게 된다.
얼굴로 아이좋다, 싶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자니 규학이가 마스크를 옆구리에 끼고 다가왔다.
“어우, 형 뭐예요. 진짜 무슨 약 하는 거 아니죠?”
“또 뭔 개소리야, 뜬금없이.”
“오늘 볼 말도 안 되게 좋던데요?”
“그만큼 내가 작살냈다는 거지.”
“아니, 작살을 적당히 내야지. 무슨 158이 나와요?”
“157이 아니라?”
“마지막 공 158 나왔어요.”
“158?”
와우.
“진짜로 조만간 160km 찍으시는 거 아니예요?”
“160은…글쎄다.”
글쎄. 160km 찍으면 물론 좋기야 하겠다만…직구 스탯을 이미 100을 찍어버려 이 부분에선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실제 ‘풀카운트’ 게임 내에선 여기다가 로진을 쓰면 포심이 +5, 글러브나 신발 같은 특수 장비를 차면 포심이 몇 더해지는 시스템이 있긴 하지만…….
“…진짜 목숨 걸고 한 번 던지면 나오려나.”
현실에서까지 그런 장면을 기대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지.
“아니 무슨 그런데다가 또 목숨을 걸어요.”
“야, 그래도 투수로 태어났는데 그런 구속 한 번 찍어보면 좋잖아.”
“160 한 번 찍고 은퇴하시게요?”
그건 아니고.
“그래도 다음 등판 때부터 기대해도 좋단다, 동생아.”
“왜요, 또 뭔데요.”
그래도, 어떤 의미로 구속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얻었다.
구위 최상!
구위가 중에서 상으로 올라갔을 때도 엄청났는데, 과연 최상으로 올라간 지금은 어떤 공을 던지게 될까.
“160은 못 찍을지언정, 다음부턴 170km처럼 느껴지는 공을 던져주마.”
따봉!
규학이에게 엄지 손가락 하나를 선사하는 내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