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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51화 (151/190)

151화. 인터뷰

KP 스타즈와의 주중 시리즈는 성공적이었다. 동성 호넷츠와의 주말 시리즈 또한 성공적이었지.

그렇게 한 주를 끝내고 맞이한 월요일엔 곧장 상견례를 진행했다. 상견례도 아주 성공적으로 잘 마치고.

이렇게까지 굴레가 잘 돌아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아주 착착 들어맞고 있다.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소속팀.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레전드급 시즌 성적.

개인사로는 결혼도 잘 진행되고.

근데 단어 한 가지가 최근 일주일 동안 내 머리를 계속 아프게 하고 있다.

승부.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관장하는 한 가지 단어는 요즘 나에게 이상한 의미로 퇴색되어버렸다.

“이기고 싶다는 게 대체….”

이기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이기고 싶을 때 버프가 발생하는 특이한 특성.

아직 해당 특성을 지닌 채 투구한 이닝이 1이닝 밖에 되지 않아 표본이 부족할 확률이 크다.

막말로 그 날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버프가 발생했는지 어쨌는지 티가 안 나는 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시스템과 부대끼며 살아온 지 어언 4년 하고도 반.

“내가 진짜 이기고 싶을 때가 따로 있다는 건가?”

이 시스템이 말하는 게 단순한 승패의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착했다.

승리를 위한 내 갈망이 부족한가? 아니면 내 열정이 부족한가? 그것도 아니면 아직 실력이 모자란가?

“…아닌데.’

승리는 항상 갈구한다. 이기기 위해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실력은 이 정도면 충분히 입증되지 않나?

“오셨습니까아아아.”

“어, 일찍 왔네.”

“예. 감독님 추천이 아니라 팬 투표라니, 너무나도 감개무량한 나머지 사실 어젯밤 미리 도착해서 계속 공중제비를 돌고 있었습니다.”

“…….”

머리 아픈 생각은 구장에 도착하자마자 귀를 쿡쿡 찌르는 명진이의 쌉소리에 잠시 정지되었다.

“…돌아봐.”

“예?”

“공중제비 돌아보라고.”

“사실 공중제비는 너무 비장의 기술이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디 잡혀갈 수도 있습니다. 전 형님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제발.

얘도 이제 서른인데 어떤 의미로 보자면 참 대단한 녀석이다. 어쩜 이렇게 초심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걸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인싸들의 인사로 인사드립니다, 이명진입니다!

문득 명진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이런 놈이구나, 라는 걸 알고 멀리 했어야 했는데.

“사실 이 공중제비는 제가 14살 때부터 연마해왔던 기술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비밀 결사대들이 각자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로써….”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들어가자.”

“예!”

계속 여기 놔두다간 공중제비에 대한 논문이라도 써바칠까봐 얼른 녀석들 데리고 덕아웃을 향해 들어갔다.

“형님.”

“왜.”

“공중제비 어떻게 도는지 알려드릴까요? 되게 궁금해하시는 거 같으신데.”

명진아, 제발.

공중제비 학과 교수님에게 끌려다니는 대학원생이 되기 직전,

“웬 갑자기 공중제비야.”

“아, 왔냐.”

“너도 공중제비 같이 도실?”

성현이가 나타났다.

아 다행이다, 드디어 명진이의 폭주를 막아줄 사람이 등장했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도는데?”

“두 손 두 발 다 들면 그게 바로 공중제비라네, 제자여.”

“오, 스승님.”

근데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아, 얘네 친구였지.

구장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30살 듀오의 티키타카를 듣고 있자니 정말로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얼른, 얼른 다른 화제로 돌려야 한다.

“그, 뭐냐. 저거 있잖아, 저기 그.”

“뭐가?”

“아니, 은서 씨가 안 보인다 싶어서.”

“아, 그러게?”

“저기 계신 거 같습니다, 형님.”

다행이다, 넘어갔다.

유격수라 화각이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지, 그 와중에 명진이는 저기 멀리서 카메라를 들고 빨빨빨 돌아다니는 은서 씨를 발견했다.

“근데 저기서 뭐한다냐.”

은서 씨는 원하 챌린저스 공식 미튜브 계정의 PD다. 은서 씨가 올리는 동영상은 당연히 원하 챌린저스 팬들이 주 고객층이지.

따라서 주 고객층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은서 씨가 찍는 동영상은 원하 챌린저스의 선수들을 모티브로 하게 된다.

근데…….

“글쎄요?”

“뭐 다른 거 찍나보지.”

“굳이 다른 팀 선수들한테 가서?”

은서 씨의 카메라 렌즈는 우리 셋이 아닌 올스타전에 참가한 다른 팀 선수들을 향하고 있었다.

“몰라, 명진아 레이스 준비나 하러 가자.”

“아, 오케.”

“형은 뭐하고 있게?”

“인맥 놀이.”

“…그게 뭐야.”

뭔 소린지 이해 못 하는 성현이와는 다르게,

“나중에 저도 껴주십쇼, 형님.”

“빨리 와라.”

“옙!”

명진이는 바로 이해한 것 같다.

아, 안 돼. 이러면 나도 명진이 같잖아.

“후우….”

폭풍 같았던 30살 듀오가 사라지니 시끌벅적한 와중에 대단히 평화로운 기분이 느껴졌다.

평온해진 마음으로 구장을 다시 둘러보고 있자니,

“오셨습니까, 선배님.”

“그래, 오셨다.”

인맥 놀이의 첫 번째 상대가 다가왔다.

“불펜투수 부문 팬투표 1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음…현진아.”

“예, 선배님.”

“내가 전에 부탁한 적 있지 않았냐?”

“어떤 부탁 말씀이십니까?”

“제발, 제발 사람 많은 데서 그렇게 인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냐.”

“선배님을 향한 제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인사는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부끄럽다고.

“…그래. 고맙다.”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아, 제발.

얘만 만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랜만에 올스타전에 오셨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어떻긴. 좋지.”

“이번 올스타전 또한 선배님께서 참전하신 덕에 아주 멋진 올스타전이 될 겁니다.”

“현진아.”

“예, 선배님.”

“1절만 하자.”

“…예.”

그렇게 현진이를 데리고 구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본격적인 이벤트까지 남아있는 시간을 이용해 개방된 구장엔 참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보였다.

자유롭게 캐치볼을 하거나 좋아하는 선수에게 사인을 받는 팬들.

흔쾌히 사인을 해주거나 팬들이 캐치볼하는 모습을 보며 폼을 잡아주는 선수들.

또 좋다고 그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는 방송사나 구단 미튜브 PD분들.

“그러고보니까, 너네 구단도 그거 있지 않냐. 미튜브 그거.”

“맞습니다. 원하 챌린저스 구단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보신 적 있으십니까?”

“딱히 본 적은 없고. 우리 구단 꺼 보기도 바빠서.”

“아쉽습니다.”

왜 니가 아쉬워.

“말 나온 김에 한 번 인사해보시겠습니까?”

“뭔 인사.”

“저기, 저희 쪽 PD님이십니다.”

현진이가 가리킨 곳엔 풍채가 좋은 남자 한 명이 카메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찍고 있는 건 동성의 유격수인 최용환, 그리고 최용환과 직접 캐치볼을 하고 있는 한 팬.

와, 그림 좋다. 진짜 좋다. 나도 이따가 저런 거 찍어볼까.

“PD님.”

“아, 현진 씨. 오, 한울 씨도 있네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현진이가 부르자 동성 PD님은 내 쪽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셨다. 그러면서도 최용환을 찍고 있는 카메라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일단 인사를 대충 건네고 조금 떨어져서 촬영 현장을 구경했다.

캐치볼이 끝난 뒤 감격에 찬 눈으로 팬이 인사를 하고, 최용환은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 동성 PD님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좋네.

그쪽 지역의 촬영이 끝나자 동성 PD님과 최용환이 같이 다가왔다.

“아, 한울이 하이.”

“그림 좋다, 야.”

“내가 좀 잘생겼지.”

“정신 나갔나봐.”

“뭐래.”

나름의 친분이 있던 최용환은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준비하러 간다며 저쪽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동성 PD님은 껀수 하나 잡았다는 표정으로 카메라로 나를 찍기 시작했다.

“자, 김한울 선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게 뭐람.

“아마 동성 팬분들이나 원하 팬분들은 물론이고 KBO 팬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실 거예요. 김한울 선수랑 이현진 선수랑 꽤나 친분이 깊죠, 그죠.”

“아…그쵸. 고등학교 때부터 선후배 관계였으니까요.”

“그럼 거의 15년 정도 친분이네요?”

“어…15년 좀 안 되긴 했는데, 대충 그쯤이긴 하죠.”

“그렇게 오래 이현진 선수를 봐왔는데, 김한울 선수가 보는 이현진 선수는 어떤가요?”

“현진이요?”

뜬금없이 시작된 인터뷰에 현진이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꽤나 기대하는 표정이다.

“얘…현진이 다 아시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는 투수인 거.”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 또. 또 90도 인사.

“이건 좀 편집해주세요, 나 이미지 이상해질 거 같애.”

“괜찮아요, 이미 유명해서.”

“뭐가 유명해요.”

“저희 꺼 보신 적 없으시구나. 이현진 선수 인터뷰 같은 거 할 때 항상 김한울 선수 얘기가 나오거든요.”

“…….”

진짜, 진심으로 중증인데 이 정도면.

“이현진 선수가 그렇-게 애정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경외하는 김한울 선수가 보시기에, 이현진 선수에게 부족한 점이 있을까요?”

다시 한 번 현진이를 흘끔 보니 이번엔 꽤나 긴장하는 표정이다.

“…방금 같은 거만 없으면 참 완벽할텐데요.”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실망했다고 해야할지.

현진이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그리고 올 시즌에 원하 챌린저스가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데요. 한 말씀해주시면요?”

“다들 잘해주고 있어서요. 덕분에 편하게 있죠.”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고 원하가 2위 상수랑 시리즈,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3위 동성이랑 또 시리즈거든요.”

“아, 그렇네요.”

“다음 주 원하 챌린저스 성적은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6승이요.”

단호박처럼 대답이 흘러나왔다.

“자, 김한울 선수가 6승 이야기했는데요. 동성은 4위 성운이랑 시리즈, 그리고 주말엔 1위 원하랑 시리즈예요. 이현진 선수는 다음 주 성적 어떻게 예상하세요!”

“6승입니다.”

이 자식이.

“야, 그러니까 니가 발전이 없는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뭔, 야, 그럼 동성이 원하한테 스윕한다는 거잖아.”

“선배님 말씀이면 원하가 동성한테 스윕 시리즈 가져간다는 말씀 아닙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

“아닙니다, 동성이 시리즈 스윕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왜 모르십니까.”

이 새끼가.

“아, 인터뷰 감사합니다.”

뭐야.

“이대로 끝이예요?”

“네. 방금 두 분이서 투닥거리신 거에서 딱 끊으면 될 거 같아요.”

“그럼 내 이미지는 어떡하고.”

“글쎄요?”

남의 팀이라고 막 하시네.

“원래는 현진 씨 떼어놓고 한울 씨만 따로 인터뷰 따려고 했는데요, 현진 씨가 도저히 안 비킬 것 같아서요.”

“근데 그거 좀 표절아닙니까.”

“에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저기 원하 PD님한테도 얘기 드렸어요, 해도 된다고 말씀도 들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다 물어볼 것도 아니고 한울 씨만 물어본 거니까.”

웬 표절. 은서 씨 얘기는 또 왜 나와, 여기서.

“…야, 우리 PD님이 뭐 했는데 표절이야?”

“모르셨습니까? 아까…아, 얘기하지 말라달라고 해서…말씀드리기가 좀 어렵습니다.”

아니 뭔 소릴 했길래.

“내 얘기한 거지.”

“그건 맞습니다.”

“그러니까 뭐라 그랬었는데?”

“말씀드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

왜, 불안함은 나의 것인가.

“이 쪼물딱이 녀석, 또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다들 좋은 이야기만 나왔었습니다.”

“카메라 찍는데 설마 거기다 대고 욕하겠냐.”

현진이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며 시선을 다시 그라운드 쪽으로 돌렸다.

은서 씨는 여전히 빨빨빨 뛰어다니며 선수들, 코치진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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