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그 투수
올스타전.
단순히 리그에서 제일 인기있는 선수, 혹은 리그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들 모아두면 그걸로 그냥 끝인가?
아니.
올스타전의 본질이 무엇이던가. 인기있는, 가장 잘하는 선수들에게 쉬이 볼 수 없었던 면면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던가.
왼손잡이 우익수가 3루수를 본다면?
엔트리가 꼬여 타석에 들어서야만 하는 투수?
고등학교 시절 초고교급 투수였던 타자가 마운드에 등판하는 모습은?
실제 리그 경기에선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을 ‘올스타전’이라는 명분 아래 모두 하하호호 웃으며 관람할 수 있는 날이다.
더불어 이런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홈런타자에게 아예 치라고 던져주면 얼마나 칠까?
그 제구 좋은 투수는 어디까지 제구가 가능할까?
그 번트 잘대는 타자는 얼마나 정교하게 공을 굴릴까?
바로 홈런 레이스, 퍼펙트 피처, 미스터 번트왕 같은 이벤트에 대한 이야기다.
“괜히 삽질하지 말고.”
“너나.”
“선생님, 홈런 레이스의 저주 그런 거 모르시나보네요.”
“뒤질래?”
“그러니까 적당히 준우승만 하셈.”
성현이와 명진이가 까불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성현이는 홈런 레이스. 명진이는 미스터 번트왕.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성현이는 명진이 말처럼 준우승을 차지했고, 명진이는 당일에 바로 미스터 번트왕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여어, 명진이.”
“이게 다 형님 덕입니다.”
“쌉소리 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
“힝.”
즐겁게 전야제가 마무리 된 건 좋은데…….
“많이 바쁜가봐요?”
“네? 아, 네. 오늘 좀 바쁘네요. 인터뷰 딸 곳이 좀 많아서요.”
“뭔 인터뷰.”
“컨텐츠죠.”
“또 이상한 거 하려고….”
“이상한 거라니.”
은서 씨는 허리춤에 손을 척! 얹더니 화가 잔뜩 난 표정을 지었지만,
“나 아직 기억하고 있다. 뭐? 놀릴 때 가장 타격감이 좋아?”
“…….”
내 말 한 마디에 양손을 제 얼굴 앞에 모으고 싸바싸바 하기 시작했다.
“아이, 왜 그래요. 막상 한울 씨 본인도 재밌어하잖아요.”
“이상한 거 시키면 진짜 혼나요.”
“이상한 거라뇨. 기대하셔도 좋다니까요?”
따봉!
은서 씨는 자신만만하게 엄지 손가락을 보였다.
* * *
올스타전에 선정된 선수들의 기분은 어떨까.
명진이는 이렇게 답했다.
“앗…아아….”
미친놈인가.
성현이는 이렇게 답했다.
“감사하지. 오늘도 제대로 보여드려야지.”
미친놈이네.
KP의 김기윤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좋지. 아, 우리가 서부고 캐서 막 니랑 함 붙어야 되는데 그게 아쉽다.”
아이고 형님.
상수의 헌철이는 또 이렇게 이야기했다.
“좋긴 한데, 이래도 되나 싶네. 올해 규학이가 워낙 좋아가지고 인기빨로 온 거 같아서.”
양심은 있구나.
올스타전에 대한 생각은 각자의 사정과 입장처럼 모두 달랐다.
누군가는 감탄을, 누군가는 각오를, 누군가는 아쉬움을, 누군가는 미안함을.
그리고…….
“선배님, 인터뷰한 건 보셨습니까?”
박해진처럼 뜬금없는 소릴 꺼내는 녀석도 있었다.
“뭔 인터뷰?”
“원하 미튜브 PD님이 인터뷰 따갔습니다만.”
인터뷰 얘기는 아마 어제 빨빨빨 돌아다니던 은서 씨에 대한 이야기 같다만,
“아니, 아직 못 봤는데.”
아직 떡밥이 회수되지 않았다. 조만간 또 불러다가 이상한 거 시킬 거 같긴 한데…….
“그렇습니까, 아쉽네요.”
“무슨 인터뷰였는데?”
“비밀입니다.”
“아니, 무슨 인터뷰인지를 알아야 내가 뭐 대답을 할 거 아냐.”
“그런 거 미리 말씀드리면 스포일러 아닙니까.”
“나 스포일러 좋아해. 괜찮으니까 먼저 툭 던져줘봐.”
“전 스포일러를 싫어해서.”
박해진은 묘한 미소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상한 소리 한 건 아니지?”
“설마 그랬겠습니까.”
“아니, 애초에 인터뷰 질문이 뭐였는데?”
“그것도 스포일러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
나쁜 새끼.
“그냥 PD님이 선배님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즐겁긴, 개뿔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런 데다가 기대 같은 단어 써붙이는 거 아니야.”
“아, 죄송합니다. 기대는 제가 하고 있습니다.”
“이 쉑….”
내 반응이 꽤 마음에 드는 듯, 박해진은 실실 웃으며 타격 장비를 하나둘 차기 시작했다.
“아, 그거 아십니까.”
“뭘.”
“저 최근 타격 슬럼프인 것 같습니다.”
“음….”
최근 한 달 타율 3할 극후반에, 홈런 7개에, 타점도 18개 치는 놈이 타격 슬럼프라고 말하다니.
“그래, 너 요즘 겁나 못하더라, 이 4할도 못 치는 쓰레기 새끼야.”
얘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야.
“근데 그 시기가 재밌게도, 선배님만 만나고 나면 꼭 이렇게 됩니다.”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
“선배님.”
“아, 왜.”
“작년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 때 저희 잠깐 나눴던 대화 기억하십니까.”
“그때…뭐랬지?”
“제가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맞지. 그것 때문에 너도 참 제정신 아니구나 생각했지, 맞지.
“…그게 왜.”
따봉!
대화하면서 타격 장비를 모두 차고, 마지막으로 남은 헬멧을 제 머리 위에 푹 얹은 녀석은 갑작스레 따봉을 선사했다.
“그 추진력을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
그러더니 휙- 넥스트 써클로 가버렸다.
“야.”
“왜?”
“쟤 원래 저러냐?”
“누구.”
“박해진, 쟤.”
박해진과 같은 팀에서 부대끼면서 사는 헌철이라면 좀 더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헌철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니? 나 쟤 저러는 건 또 처음 보네.”
“쟤 나한테는 왜 저러는데.”
“글…쎄? 형이 마음에 든 거 아냐?”
“소름 돋는 소리 하지 말고.”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당연히 투수 대 타자로 얘기하는 거지.”
“아.”
쏘리.
“언제였더라, 한 번 해진이가 그런 소릴 한 적이 있거든. 이게 막 그렇게 오래 된 얘기는 아니고 재작년 말? 작년 말? 그때 얘긴데, 자기 말론 요즘 재미가 없댔거든.”
“뭔 재미.”
“야구지. 자기도 야구 좋아하고, 또 그러니까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고. 그런 흔한 얘기 있잖아. 쟤도 그랬대.”
“최고 맞잖아.”
“그러니까 재미가 없어진 거지. 권태감 같은 거 있잖아.”
“음….”
데뷔 하자마자 곧장 웬만한 타이틀들은 혼자서 다 독식. 또 동시에 팀은 계속해서 통합 우승.
계속 맛있는 것만 집어먹는 것도 분명히 좋기야 하지. 하지만 매번 같은 것만 먹다보면 질릴 수도 있지.
“그랬는데 그 얘길 바로 이어서 하더라고. 요즘 재밌는 투수가 있대.”
“그게 나냐?”
“누구라고 정확하게 찝은 건 아닌데…형이랑 얘기하다 보니까 형이 맞는 것 같은데.”
“뭐랬는데?”
“…맨 입으로?”
“…….”
나쁜 새끼.
소고기 진하게 사 준다는 얘길 듣고 나서야 놈은 입을 열었다.
“성적은 안 좋아도 어떻게든 버티던 투수가 있는데, 참 존경스럽더래. 자기 같았으면 진작에 포기했을텐데, 그게 참 존경스럽더래.”
내 얘기 맞는 거 같은데.
“거기다가, 자기랑 만나면 맨날 홈런 맞으면서도 아득바득 덤비더래. 그게 참 재밌더래.”
맞네, 내 얘기.
“근데 어쩌다가 홈런을 못 쳤대. 자기도 모르게 홈런 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한 투수인데도. 심지어는 그 다음부터 계속 안타도 못 치더래.”
“음….”
“그래서 오기 같은 게 생기더래. 다음에 또 그 투수를 만나면 그땐 잠실구장 장외 홈런을 쳐내버리겠다고.”
따악-!
와아아악-!!
박해진! 박해진! 박해진!
“다음에 또 그 투수를 만나면, 자기도 그 투수처럼 아득바득 버텨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KBO에서 가장 잘치는 타자가 작정하고 쳐내면 이런 타격이 되지 않을까, 하는 모습이 당장 눈 앞에서 펼쳐졌다.
보기 드물게 자세가 완전히 무너질 정도로 잡아당긴 박해진의 타구는 쭉쭉, 아주 쭉쭉 뻗어나가 내야, 외야, 펜스, 응원석, 그리고 그 위 구장 자체를 넘겨버렸다.
“…와우.”
다른 구장도 아니고, 잠실구장에서 장외 홈런을 때려낸 박해진은 언제나처럼 덤덤하게 베이스를 한 바퀴 돌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팀원들의 축하를 받고, 언제나처럼 구단 마스코트 인형을 관중석에 내던지고, 언제나처럼 타격 장비를 벗어내고.
그냥 맨날 쳐오던 홈런과 별 다를 바가 없을텐데, 녀석은 뭐가 그리 기쁜지 실실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보셨습니까?”
“뭘.”
“방금 홈런, 보셨습니까.”
“봤는데.”
“이게 제 추진력입니다.”
얘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라니까.
“브레이크 끝나고 바로 다음 시리즈가 원하랑 만나는 시리즈 아닙니까.”
“맞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뭐를. 니 추진력을?”
“맞습니다.”
어이가 없어 허허 웃고 있자니,
“한울이, 8회 올라갈 수 있니?”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옙.”
한성 위너스의 김선곤 감독님께서 8회 등판을 부탁하셨다. 그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선배님 올라가십니까?”
“어어, 8회.”
“오오, 보여줘, 보여줘!”
“뭘 보여줘.”
“제대로 보여줘!”
“아, 여기 다들 제정신 아니야, 진짜.”
“와아 요리킹 조리킹 부조리킹께서 극찬을 해주셨다!!”
“와아아아!!”
아, 제발.
동부리그 불펜에서 벌어지는 쌉소리 파티에서 한 걸음 물러난 채 8회 초 등판에 대한 스트레칭을 거행했다.
어깨 풀어주고, 고관절 특히나 많이 풀어주고, 발목도 좀 풀어주고.
괜찮아졌다는 판단이 들자 글러브를 끼고 처음 보는 불펜포수분과 합을 맞춰 캐치볼을 진행했다. 가볍게 툭- 툭- 던져도 공이 꽤나 뻗는 게 아주 보기 좋다.
“선배님, 저 나중에 체인지업 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소고기 사주면.”
“네, 사드리겠습니다.”
“필요없어!”
“예?”
후배 녀석의 부탁을 예약하기도 하고,
퍼엉-!
“쌰아아악!!”
“어우, 내가 던지고도 좋아 죽네 그냐앙!”
오늘 처음 보는 불펜포수 분과 맞춘 합에 내가 더 감탄하기도 하고,
“한울아, 방금 그거 뭐냐?”
“방금이요?”
“그거 슬라이더야?”
“아, 네.”
“어떻게 던졌냐?”
“이거 이렇게 여기 잡아서 이렇게….”
내가 던진 슬라이더에 감탄한 김선곤 감독님께 속성 강의를 해드리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시끌벅적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몸을 풀어대니 생각보다 열이 아주 금방 올라오는 것 같다.
털털털, 잠시 페이스 조절을 위해 제자리에서 몇 번 뛴 후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한울아, 두 개…아니, 라스트만 던지고 올라가자.”
“아, 네.”
마지막 공 하나…….
“직구요!”
“헤이!”
당연히 직구지.
퍼엉-!
“쌰아아아!!”
어우, 귀가 그냥 찢어지도록 괴성을 질러대는 불펜포수라니.
“고마워요, 덕분에 잘 풀었어요!”
“고생하십쇼!”
너무 좋잖아.
“올라가자.”
“예!”
홈 구장에서, 그것도 홈 덕아웃에서.
게다가,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항상 듣던 내 등장곡까지.
와아아아-!!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기시감과 괴리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가운데 오늘은 좀 천천히 나서고 싶었다. 빠른 걸음이 아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마운드를 향하며 구장 전경을 둘러봤다.
I don't know if you'll hold me, Or leave me here feelin’ lonely―
등장곡이 모두 끝날 때가 돼서야 마운드에 도착했다. 느긋하게 로진백을 충전하고, 이젠 제 3의 포수가 아닌가 싶은 헌철이를 돌아봤다.
씨익 웃으며 글러브로 헌철이를 한 번 가리킨 뒤,
퍼엉-!
연습투구가 진행되었다.
이 분위기를 아는 건지, 헌철이 녀석의 포구에도 장난기가 가득하다.
퍼엉-!
“쎄컨!”
연습투구를 모두 마치고, 헌철이가 2루로 롱팩을 던지고. 그렇게 내야진들이 라운딩을 돌릴 동안 나는 잠시 마운드 뒤로 비켜나 로진을 충전하고 있었다.
탈탈탈, 로진을 만져대도 끈기가 부족하게 느껴지자 로진백을 아예 쥐어짜다시피 충전하고 나서야 마음에 드는 감촉이 제조됐다.
그리고…이제 공을 받아야 되는데.
내야수들 중 누구한테 공이 가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배님!”
오른편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운딩의 종점이 박해진이었는지, 오른손을 제 귀 옆에 두고 나한테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도 공을 받기 위해 별 생각 없이 글러브를 들어보였다.
근데,
띠링-!
[추진력]
- 추진력을 받아 1이닝 3삼진 퍼펙트를 기록하세요 (0/1)
- 보상 - 변화구 +2
여기서 이런 퀘스트가 뜨다니.
“야.”
공을 던지고 1루 쪽으로 돌아가려는 박해진을 돌려세웠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은 표정에 대고 웃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잘 봐라, 이게 내 추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