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53화 (153/190)

153화. 추진력

어떤 일을 행하든지 간에, 추진력이라는 건 아주 근본적인 힘과 같다.

어느 곳으로 향할지에 대한 방향성?

어느 정도의 속도로 향할지에 대한 완급조절?

언제쯤 시작하면 될지에 대한 알람 설정?

다 필요 없어. 일단 추진하는 것, 시작하는 것 자체가 먼저다. 시작을 해야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언제 갈지를 정하지.

그렇다면 추진력을 얻기 위해 과연 무슨 짓까지 해야할까.

한 번 크게 좌절한 뒤 다시 일어서는 것?

모든 것을 내려둘까 고민하다 다시 집어드는 것?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 물어버리는 것?

뭘 골라, 당연히 전부 다지.

난 분명 크게 좌절한 적이 있다.

그만 두려 했지만 결국 다시 야구공을 집어들었다.

성공을 크게 맛 본 뒤 다시는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됐건,

“흡!”

내가 추진력을 얻어낼 장소는 많다. 따라서 내가 추진력을 잃을 일은 없다. 한 번 미끄러질지언정, 거기서 쭈욱 떠내려갈 일은 없다.

퍼엉-!

서부리그 3번타자로 나선 고명현.

“하잌-!”

초구부터 몸쪽 바짝 붙어오는 직구에 깜짝 놀라 몸을 틀었지만 어림없는 몸부림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로케이션에 대한 불만보다는, 그리 깊지도 않은데 구위에 눌려 피한 본인에 대한 불만이 커보인다.

허허,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거, 눈에 붙이는 하이패스트볼이라도 하나 던져드리면,

“끄윽!”

부웅-!

“스윙!”

참 유감이겠습니다?

허멀겋게 높은 직구에 저도 모르게 배트를 붕 돌려버린 고명현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뒤 헌철이를 향해 뭐라뭐라 이야기했다.

헌철이도 피식 웃더니 뭐라뭐라 대답을 해주긴 하는데, 포수 마스크에 가려 입 모양을 확인하긴 어려워보인다.

보자보자…아마, 내 공에 잔뜩 쫄았던 모습이 부끄러워 동질감을 한 번 만들어보려 한 게 아닐까. 넌 저런 공 받으면서 안 무섭냐, 그런 의미라든지.

에이, 아직 155km 밖에 안 나오는데 이걸로 무섭다 그러면 어떡해.

“끕!”

퍼엉-!

158km 짜리는 얼마나 무서우려고.

“하아아앜-!!”

다시 한 번 몸쪽으로 빠른 직구를 하나 꽂아버리며 간단하게 선두타자를 처리했다. 흐-뭇하게 헌철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은 뒤,

“봤냐?”

박해진을 향해 웃으며 자랑했다.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방금, 봤냐고.”

“팔각도를 좀 좁히셔야 될 것 같습니다.”

미친놈인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쌉소리를 내미는 녀석으로부터 공을 받은 뒤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다음 타자로 누가 나오려나 기다리고 있자니,

대타, 김!! 석!! 호!!

동성 호넷츠의 9번타자, 김석호가 등장했다.

4번 자리에 대타로 낼만한 타자는 아니지만 경기의 의미도 의미고, 또 그런 경기의 후반이다보니 구색을 맞추기 위한 의도가 커보인다.

“아…김석호.”

꽤나 빼빼 마른 체구로 유추할 수 있듯 전형적인 주루와 수비에 모든 것을 몰빵한 타자다. 덤으로 컨택도 어느 정도 된다면 좋을 정도.

하지만,

“에이씨.”

난 딱히 김석호에게 좋은 기억이 없다.

18년도 플레이오프였지, 김석호 한테 얻어맞았던 홈런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바깥쪽 커브로 카운트 잡고 바깥쪽 체인지업은 볼이 되고, 그리고 몸쪽 높은 직구를 던져서 홈런을 처맞고.

볼배합과 해당 구종의 구속들까지 하나하나 기억날 정도로 임팩트가 나름 컸던 사건이었지.

“추진력,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 임팩트를 애써 감추려들지 않았다.

분명 나에게 있어 좋지 않은 기억이고, 또 잊고 싶은 기억 중 하나지만 당당하게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당당하게.

“끅!”

빵-!

“하잌-!”

김석호가 그때 상황을 기억하고 있을런진 모르겠다만, 이번 승부는 그때와 한 번 똑같이 가져가볼까 싶었다.

그래서 이번 초구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바깥쪽 커브를 선택했고,

“읏!”

뻥!

다음 공도 그때의 기억처럼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볼-.”

근데 골라내네?

마치 그 날처럼, 김석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체인지업이 제 곁에서 멀어지는 꼴을 지켜봤다.

꼴? 꼴받네?

여기서 생긴 오기는 자연스럽게 다음 공을 몸쪽 직구로 선택하도록 유도했다.

“끄윽!”

정말 작정하고 칠 수 있으면 쳐봐라, 싶은 마음으로 손목을 내리눌렀다. 빡, 하고 손끝에서 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붕-!

“스윙-.”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된 동작 없이, 뒤에서 완전히 쪼당난 스윙으로 어떻게든 해보려는 꼴을 보자니 꼴 받았던 꼴이 좀 가셨다.

히히, 웃는 표정으로 헌철이에게 공을 받아들긴 했는데 막상 1-2 카운트가 되니 갑자기 다음이 막막했다.

그러고보니 다음 공은 뭘 던지지.

당시 김석호와의 승부는 공 세 개로 끝났기에, 또한 이번에는 공 세 개로 잡아낼 각오였기에.

“…직구로 가자.”

잠시 고민하다가 원론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뭐 투수는 결국 돌고 돌아 직구라느니, 투수의 기본은 직구라느니, 직구가 가장 위력적인 공이라느니, 그런 상투적인 이유에서 고른 건 당연히 아니다.

그저 추진력.

지금 내가 앓고 있는 이 추진력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종이 무엇일까, 그 고민의 답이 직구였을뿐이다.

그땐 니가 140km 따리 직구를 때렸겠지만,

“윽!”

어디, 150km 중후반 강화 직구는 때려낼 수 있겠니?

부웅-!

그 대답은,

“스윙!”

아니올시다, 였다.

“후우….”

실제 리그도 아니고, 더더욱이 포스트시즌도 아닌 단순 이벤트 경기지만 집중력만큼은 한국시리즈 때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자존심 같은 거지, 결국은.

타석에서 떠나는 김석호의 뒷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5번타자, 배!! 덕!! 현!!

그와 스쳐오는 배덕현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고오, 오셨네.”

나에 대해 뭐라고 하셨더라, 나 때문에 우리 원하 챌린저스라는 팀만 봐도 치가 떨린다 평가했던 강타자.

내 천적 클럽 중 한 명에 포함되어있는 배덕현은 본인이 했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듯, 불편함이 다소 함유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 표정의 발로가 내 특성 중 하나인 ‘불편’의 영향인지, 아니면 언젠가 나에 대해 내렸던 한줄평의 재현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 하나.

“읏!”

띡!

“파울, 파울!”

이유가 어찌됐던 배덕현은 내가 불편하다는 것이고, 나는 그 불편한 기운이 아주 편안하다는 것.

초구에 대뜸 던진 바깥쪽 체인지업을 억지로 건드리더니 기어코 카운트 하나를 만들어준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고마움을 느꼈다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해주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나에 대한 감정이 꽤나 묵어있을 배덕현을 위해, 이번엔 좀 쳐보라는 의미로 느린 커브를 하나 던져줬다.

“읏!”

다만 느리기만 할 뿐 회전은 평소보다 더 강하게 먹었고, 또 그 때문에 낙폭은 평소보다 더욱 커졌고,

딱-!

그로 인해 결국 존에서 빠져버렸다는 점은 살짝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파울-!”

왔구나! 싶어서 제대로 땡겼지만 박해진의 한참 옆을 지나가는 파울 타구에 배덕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다시 타격자세를 잡았다.

자자, 이번엔 진짜 치기 쉬운 공 드릴게요. 그냥 아무런 변화 없이 쭉 뻗는 공이거든요? 그냥 오는대로 퉁 갖다맞추기만 하면 돼요.

“끄읍!”

근데 그게 좀 빠른 공이라 맘에 걸리긴 하네요.

부웅-!

“스윙!”

띠링-!

[추진력]

- 추진력을 받아 1이닝 3삼진 퍼펙트를 기록하세요 (1/1)

- 보상 - 변화구 +2

제구 - 최상

구위 - 최상

체력 - 중

포심 - 100

커브 – 88+2=90

슬라 - 85+2=87

스플 - 86+2=88

체인 - 86+2=88

싱커 - 85+2=87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승부 - 이기고 싶을 때 포심이 +5 됩니다.

짝!

“예아!”

깔쌈하게 퀘스트를 완료한 뒤 흘러나온 기쁨에 나도 모르게 글러브 손등을 보기 좋게 한 대 때렸다.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와아아악-!!

즐거워하는, 혹은 기뻐하는 동부리그 팬들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준 뒤 천천히 걸어 덕아웃 안으로 들어갔다.

“어우, 나이쓰!”

“볼 좋으십니다!”

“굿 피처어!”

오늘 하루만 같은 편을 먹은 선수들이 너도 나도 달려들어선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여기저기 굳은 살 박혀있고 울퉁불퉁한 못생긴 손이지만,

짜악-!

“아, 나이쓰으!”

내 손도 그들과 별반 다를 바는 없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거든.

또 한 번 부여된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에 실실 웃으며 덕아웃 의자에 철푸덕 앉아선 옆에 앉은 타팀 투수들과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선배님, 혹시 포심 던지실 때 요령 있으십니까?”

“요령? 그냥 제대로 잡고 제대로 때리면 되는 거지.”

“그래도 하나만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떼는 말이야….”

음, 나만 떠들었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후배 투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대체 추진력을 얼마나 끌어다 쓰신 겁니까?”

박해진이 웬일로 서글서글하게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국대 최고의 타자. 국내 최고의 불펜투수.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담력은 없었는지, 어느 새 후배 투수 친구는 슬금슬금 이곳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이 꼬라지를 만든 녀석을 흘끔 쳐다보며 새로 생긴 주제를 받아쳤다.

“뭔 추진력.”

“150km 대 찍으셨단 얘기 들었을 때도 많이 놀랐고, 그걸 넘어서 155km, 또 거기서 발전해 158km까지 나왔을 땐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그 추진력의 대부분이 사실 너거든.

이런 말을 한다면 이 녀석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싶긴 하지만 굳이 이야기해주지는 않기로 했다.

“근데 거기서 또 뛰어 넘어서 이번엔 159km라니, 정말 놀랐습니다. 정말로 조만간 160km 던지시는 거 아닙니까?”

“뭣….”

근데 이 얘기가 나오면 좀 말이 다르지.

“방금 뭐라 그랬냐?”

“방금…조만간 160km 던지시….”

“아니, 아니 그 전에. 그 전에 뭐라 그랬어. 내가 몇 km 나왔다고?”

“159km 나왔다 말씀드렸습니다만.”

“…….”

159?

“…언제?”

“방금 전 등판 말입니다.”

“아니, 그…누구한테 몇 구에서 나왔는데?”

“김석호한테 던졌던 4구째, 삼진 잡았던 직구입니다만.”

“어….”

왜지?

“아니, 진짜로? 진짜 159km가 나왔다고?”

“예.”

직구 스탯 100을 찍은 내가 온갖 모든 걸 다 때려넣자면 이론상 158km까지 던질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누락된 단 한 가지, 특성 ‘승부’가 더해진다면 160km까지 가능은 하지.

근데 사실 여기서 160km가 중요한 건 아니다. 이론상 최고 수치인 158km를 뛰어넘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왜?

“선배님도 모를 정도로 정말 많은 추진력을 받으셨던 모양입니다. 저도 다음에 선배님과 만날 때면 어디, 배트에 로켓 추진체라도 달고 와야겠습니다.”

아까 점심을 밖에서 사먹고 온 듯, 옆에서 박해진이 정신 나간 소릴 지껄이고 떠났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왜지?”

분명 특성 ‘승부’가 발동된 게 맞다. 아니, 분명하다. 이 시스템이라는 게 참 웃겨서 수치보다 아래 방향으로는 내가 적당히 조절할 수 있지만 수치보다 위 방향으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변함이 없다.

즉, 고정된 수치 이상으로 내가 무엇을 더 뽑아낼 수는 없다는 이야기.

“그럼 꽝이 아니라는 건데.”

전혀 말 같지도 않을 정도로 개꿀이라 생각했던 특성은 전혀 발휘가 되지 않자 전혀 말 같지도 않을 정도로 폐급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번 등판으로 특성 ‘승부’는 단순한 장식도, 꽝도, 폐급도 아니란 걸 알았다. 분명하게 발동했고 분명하게 적용된다.

“김석호 4구째 직구….”

분명 특성 ‘승부’가 발동됐던 김석호와의 타석을 공 하나하나 복기했다.

초구, 2구, 3구, 4구.

투구 전과 후를 하나씩 재생시킨 뒤,

“…아?”

문득 떠오르는 가설 하나가 생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