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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55화 (155/190)

155화. 세계 3대 궁금함

승리를 위하여!

원하 챌린저스 일원들의 염원이 담긴 플래카드가 천장에 붙어있는 작은 회의실 안.

끼익―

“…….”

얼마 전 방문했던 회의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중앙에 책상 하나. 그 위에 노트북 하나. 그 옆에 카메라 하나. 그 뒤에 사람 하나.

“뭐. 왜 또, 뭔데 또.”

“오늘은 김한울 선수 특집입니다.”

“얼마 전에 했잖아요.”

“네. 근데 오늘은 좀 다른 컨텐츠예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확인한 핸드폰엔 은서 씨의 다급한 카톡 하나가 와있었다.

[한울 씨, 미안한데 오늘 한 시간만 좀 일찍 나와주면 안 될까요?]

“…이거 때문에 빨리 오라고 한 거예요?”

“네.”

“…….”

그 이유가…….

“오늘은 뭔데요.”

“아, 오늘 컨텐츠는요! 김한울 선수 혹시, 세계 3대 궁금함이라고 아세요?”

“그건 또 누가 만든 거야.”

“방금 온 문자, 눈 앞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이것들을 세계 3대 궁금함이라 하더라구요.”

“아니, 그러니까 누가 만든 거냐고.”

“해서 오늘은 그 세계 3대 궁금함 중 세 번째를 알아볼 거예요.”

“…….”

제발.

“…다른 건 모르겠고, 눈 앞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꼭 알고 싶네요.”

“김한울 선수 눈 앞에 노트북이 있죠? 해당 동영상 파일을 띄워두었으니까 한 번 확인해주시겠어요?”

“진짜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출연료 줘야 되는 거 아니예요?”

“자, 옆에 마우스 있는데요. 마우스 위쪽에 갈라진 부분 보이죠? 거기 왼쪽을 누르는 게 클릭….”

“알아!”

이게 뭐하는 짓인지.

일단은 은서 씨 말에 따라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우석이.

근데 배경을 보아하니…….

“아, 이거 올스타전 때, 그때 찍은 그거구나.”

“네!”

올스타전 본경기 때, 박해진과 추진력이 어쩌고 하며 헛소리를 나누기 전 녀석이 물어봤었다. 원하 미튜브 PD님이랑 인터뷰했는데 봤냐고.

뭐라 했는지 얘기해주지도 않고, 무슨 질문이었는지 얘기해주지도 않고, 심지어는 나에 대한 인터뷰냐는 근본적인 질문에도 입 싹 다물고.

“여기 박해진도 있어요?”

“글쎄요?”

거짓말 겁나게 못하는 은서 씨 표정을 보니 박해진도 여기 명단에 포함되어있는 것 같고.

“그럼…대충 몇 명이나 나와요?”

“열…두 분 정도? 나올 거예요.”

“기대하라더니, 고생하긴 했네.”

어쩐지, 계속 빨빨빨거리던 게 이거 때문이었구만.

말은 그렇게 해도 은서 씨가 꽤나 고생했다는 걸 알기에 한 번 봐주기로 하고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 한울이요? 그 새끼 아주 나쁜 새…

탁!

“…이거 맞아요?”

“어디 문제가 있나요?”

살짝 머리가 아파지려는 느낌을 받으며 동영상을 계속 진행시켰다.

- 한울이요? 그 새끼 아주 나쁜 새끼예요. 나만 보면 막 그러고 말야, 내가 도와준 게 얼만데. 너무한 거 아니예요?

“최우석 선수는 이렇게 평가했는데요. 김한울 선수는 어떻게 답변을 하실까요?”

“지가 못치는 거면서.”

피식.

우석이 정도는 비웃음 한 번으로 커버가 충분히 가능하다.

“다음은…아, 헌철이네.”

- 한울이형…좋죠. 개인적으로 성적이라든지, 투구를 잘한다든지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형 이미지에 가려서 잘 못 봐요.

- 이미지요?

- 좀 까불대고 좀 그런 이미지긴 한데, 그 형 진짜 중요한 게 리더십이거든요. 요즘 뭐 WAR 어쩌고 하는데 그 형이 성적으로 내는 WAR이 3이면, 리더십으로 내는 WAR이 2쯤 돼요.

“오…신헌철 선수는 되게 좋은 말 해줬네요.”

좋은 말인 건 알겠는데…….

“…리더십? 이거, 이거 한 마디로 끝이예요? 뒤에 더 부연설명 같은 건 없고?”

“네네. 다들 한 마디씩만 해주신 거라서요.”

“음…고맙네. 헌철이는 진짜 어릴 때부터 알던 애고…그리고 그때는 그게 있었지. 엘리트 때는 내가 워낙 잘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듣는 사람이 좀 더 그럴듯하게 듣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은 정말 좋았다.

다음으로 화면에 등장한 건 비스코 러너즈의 불펜투수 안치현.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화면에 나와선,

- 잘하죠. 야구 잘하고, 친해지니까 사람도 좋고. 아쉬운 거라고 하면 좀 빛을 늦게 본 거 정도. 한 5년만 일찍 빛을 봤으면 진짜 우리나라 야구 판도가 바뀌었을 걸요?

라는 극찬을 해주었다.

“치현이형도 사람 되게 좋아. 진짜 좋아. 사람이 막 서글서글해가지고, 나 프리미어12 처음 가서 긴장 엄청할 때 치현이형이 긴장 많이 풀어줬거든.”

“안치현 선수도 사람 좋기로 유명하죠, 그쵸.”

동성의 현진이, KP의 김기윤, 비스코의 배덕현, 가야의 배준호 등등.

앞서 나타났던 사람들처럼 타팀의 여러 선수들이 나타나 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나 또한 그들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어느 정도 립서비스인 감이 있는 건 분명 사실이다. 대놓고 카메라로 찍는데 그 새끼 개새끼예요, 하는 우석이가 미친 놈이지.

그러나 그걸 알고도 좋은 소리 듣는 게 절대 기분 나쁠 리가 없다. 그게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사람이고, 보통 사람도 아니고 우리나라 야구를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흐흐.

숨기려고는 하지만 영 숨겨지지 않는 표정으로 동영상의 마지막 주인공을 확인했다.

“아.”

드디어 나왔네.

- 박해진 선수, 안녕하세요!

- 아, 네.

- 원하 챌린저스 미튜브인데요, 한 가지 말씀 좀 듣고 싶어서요. 1분 정도만 시간 괜찮으세요?

- 네. 괜찮습니다.

멋진 새끼.

무표정에 미소 한 스푼 끼얹었을뿐인데 어떻게 저런 얼굴이 나오는 걸까.

시기와 질투로 인해 뚱-해진 얼굴로 화면을 쳐다봤다.

- 김한울 선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마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 김한울 선배님이요?

- 네네. 편하신대로 한 마디만 해주시면 괜찮아요!

- 아…

은서 씨의 말에 박해진은 생각보다 꽤 길게 고민을 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린다거나, 눈동자를 왼쪽 위로 올린다거나, 가만히 카메라를 쳐다본다거나.

- 올시즌에, 김한울 선배님 첫 실점은 제가 만들 겁니다.

묘한 미소로 도전장을 던진 뒤 동영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박해진 선수는 김한울 선수한테 꽤나 큰 말을 던졌네요.”

“얘는….”

참,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는지.

“그럼 난 이렇게 답해야지. 상수 타이거즈, 오랜만에 한국시리즈 준우승도 해야지, 그치?”

“오오, 김한울 선수도 세게 나오네요.”

“얘가 이렇게 세게 나오는데 나도 그래야죠. 기에서 밀리면 안 되잖어.”

“이거 상수 팬 분들이 들어도 괜찮겠어요? 전에도 이런 일 있었을 때 후폭풍 씨게 맞으셨었는데.”

“다 그러고 사는 거죠.”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한다, 흔한 클리셰에 따라 인터뷰 모음집은 박해진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나에 대해 이야기 해준 선수들에게 감사 한 마디, 이 영상을 봐 줄 팬들에게 감사 한 마디를 마치고 오늘의 촬영도 끝.

“어윽…난 또, 아침에 막 급하게 한 시간 일찍 나와줄 수 있냐, 어쩌냐 하길래 뭔 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요.”

“한울 씨 성격에 그렇게 얘기해두면 효과 직빵인 거 뻔히 아니까요.”

“스읍, 어른 놀리는 거 아니야.”

“누가 어른이야.”

“내가 어른이지.”

“그럼 난 애야?!”

미안. 부정해야되는데, 그러지 못 했어.

“야!”

한 대 치려는 듯 우두두 다가와선 막 팔을 이리저리 휘적이는데, 이 정도 쯤이야 머리 위에 손 한 번 얹어주면 자연스럽게 파훼가 가능하다.

190cm 언저리와 150cm 언저리.

극명한 리치 차이에 쪼물딱이는 씨익씨익거리면서 한 걸음 물러났다.

“…한울 씨, 그거 3년 얘기 기억하시죠.”

“아오, 그 3년 전 얘기는 언제까지 울궈먹으려고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 또한 한 걸음 물러나며 진중한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그거, 올해가 딱 마지막 해거든요.”

“그것도 알고.”

“…….”

“왜.”

까불까불거리거나 실실 처웃는 얼굴만 봤을 땐 몰랐는데, 저렇게 가만히 있는 은서 씨 얼굴을 보니 생각보다 성숙해보여 놀랍기도 했다.

“제가 거의…20년째 원하 팬이거든요.”

“되게 오래 됐네.”

“그리고, 저 공부도 되게 잘했거든요. 고등학교 때 맨날 전교 1등했고, 대학교도 진짜 좋은 데 나왔구요.”

“갑자기 웬 자기자랑.”

“자랑이 아니라. 아…자랑인가?”

“자랑이지.”

내 말에 은서 씨가 조동아리를 쭉 내민다.

“…내가 왜 원하에 들어왔는지 알아요?”

“좋은 대학교 나왔으면 뭐, 좋은 회사 들어가는 게 당연한 거지.”

“그것도 맞긴 한데, 왜 야구단에 들어왔는지 아냐구요.”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아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그것도 그렇긴 한데….”

어디, 내 말에 반박해봐라.

“…올해 결혼한다면서요.”

“아, 그치. 대충 12월쯤으로 날짜 잡았어요.”

“여자친구 분한테는 안 그러죠?”

“그랬다간 등짝 맞는데, 어떻게 이래요.”

“나도 등짝을 좀 때려야 한울 씨가 정신 차리려나.”

“아니, 니가 날 왜 때려.”

“때릴 수도 있지.”

하나 둘, 은서 씨는 촬영 장비들을 정리하면 투덜투덜거렸다.

장비들이 꽤나 무거워보이기도 하고, 가짓수가 꽤나 많기도 해 슬쩍 다가가 무거워보이는 몇 가지들을 들어주었다.

“아니, 괜찮은데.”

“괜찮긴. 가다가 엎어질 거면서.”

“엎어지긴 뭘 엎어져요.”

“헛소리 하지 말고, 어디로 가요.”

“…따라와요.”

덕분에 양손이 가벼워진 은서 씨는 빠르게 회의실을 나서 다른 쪽 사무실로 향했다. 그 뒤를 졸졸졸 따라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 사람들이 몇몇 보이기도 했다.

은서 씨가 가리킨 곳에 장비들을 얌전히 내려두자 사무실 안에 있던 냉장고에서 음료수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러고보니까, 여자친구 분도 원하 팬이라 하셨죠?”

“아버님이 여기 원하 임직원 분이시래요. 그래서 아버님 따라서 모태 원하 팬이었대.”

“아….”

살짝 TMI를 흘려주자 은서 씨는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럽네요, 여자친구 분.”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에이, 설마.

“뭐가 부러운데.”

“아뇨, 딱히.”

살짝 올라가는 오른쪽 입꼬리를 보자 괜히 더 깊게 파고들었다간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 같아 그냥 그만 두었다.

눈치 빠르다는 게 항상 좋지만은 않더라.

“일단 그…사실 작년이랑 흐름 자체는 비슷하긴 하지만, 결은 작년이랑 완전히 다르니까요.”

“어떤 게요?”

“뭐긴. 팀 시즌이지. 우승하네, 마네 그 얘기.”

해서, 빠르게 다른 주제로 넘겨버린다.

“흐름이 비슷한데 결이 다른 건 뭐예요?”

“좋은 흐름 타고 있는 건 비슷하잖아요. 작년에도 1위 싸움 계속하다 결국엔 1위했고, 올해는 작년보다 더 좋은 흐름으로 1위 유지하고 있고.”

“결이 다른 건요.”

“내실이 다르다는 거지, 내실이.”

“내실?”

뜬금없는 단어 선정에 은서 씨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모습에 나는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내가 다르잖어, 내가.”

“와, 진짜 오글거린다. 아저씨 같애.”

뭐 몇 살 차이 난다고 아저씨야, 자꾸.

“올해 1등 못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못 하면?”

“그래, 못 하면.”

“못 하면…그것 참 유감이지.”

“…….”

쪼물딱이는 다시 제 컨디션을 되찾고 나를 노려봤다.

“그것도 그거고. 한울 씨도 올해 좀 잘하고.”

“잘하고 있는데 뭘 더 잘해요.”

“아니, 계속 잘하고.”

“오, 웬일로 덕담을 한대. 맨날 츤츤대더니.”

“뭔 소릴 하는 거야, 또. 내가 뭘 또 츤츤댔대.”

으! 하는 소릴 한 번 낸 은서 씨는 이내 다른 컨텐츠를 찍기 위해 다른 곳으로 향하려 했다.

“아, 한울 씨.”

“왜요.”

그러다가도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또 내 발걸음도 잠시 멈춰세웠다.

호기롭게 사람 멈춰세운 것까진 좋은데 막상 그 다음 작업 내용은 생각에 없었나보다. 그냥 가만히 날 쳐다보기를 잠시.

“왜?”

“아니…그냥 오늘 힘 내라고.”

답지 않게, 웬일로 깜찍한 소릴 낸다.

나 또한 적당히 받아줘야겠지.

“그래요, 은서 씨도 힘내고.”

“네. 이따 봐요.”

손 한 번 흔들어주며 건네준 인사에 은서 씨는 웬일로 보기 좋게 웃으며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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