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56화 (156/190)

156화. 승리의 요정

1승 2패.

시즌의 반환점을 돌고 맞이한 첫 번째 시리즈에서 거둔 성적이다.

1승 2패? 에이,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팀이 시즌 내내 위닝 시리즈만 챙기겠어, 가끔씩 지는 날도 있는 거지.

따악-!

와아아악-!!

고명현! 고명현! 고명현!

…라고 생각하기엔 걸려있던 게 워낙에 커서 말이야.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 상수 타이거즈와의 게임차는 두 경기. 항상 이길 수는 없다 하더라도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항상 중시하던 흐름.

원래 계획이라면 1, 2, 3선발을 내세운 상수 시리즈에선 우선 ‘최소’ 2승 1패를 거둔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동성 시리즈에서 4, 5, 1선발을 내세워 마찬가지로 2승 1패 정도를 노린다.

“에이, 텄네.”

그러나 상수 시리즈는 1승 2패. 그리고 목요일 현재, 태웅이가 나름 잘 던졌지만, 타선이 불발나며 막 원하의 패배가 결정난 참이다.

“아, 죄송해요. 아까 하아, 그걸 왜 나갔지….”

“그럴 수도 있지. 너무 머리에 담아두진 말고.”

“죄송합니다….”

팀이 이겼다면 영웅이 있을 것이고 팀이 졌다면 역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팀에 영웅이 없는데 이겼다면 상대편에 그 영웅이 있을 것이다.

이 격언에 해당하는 오늘의 영웅은 다름 아닌 진형이.

1회 무사만루, 6회의 1사 2, 3루의 찬스를 두 번 연속으로 말아먹은 덕에 팀은 3 대 1로 아쉽게 졌다.

질 수는 있어. 그럼, 질 수도 있지.

사실 이번 시즌 원하 챌린저스의 돌풍은 이변에 가깝다. 잘나가는 것 자체야 예상이 가능했지만, 이 정도로 잘나갈 거라곤 나부터도 예상치 못했으니까.

한 번쯤 고꾸라질 때가 온 건가.

쭈우우욱 잘나갔다면 쭈우우욱 떨어지는 시기 또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아마 그게 지금 시기가 아닐까.

“…상수는 이겼네.”

공동 1위.

겉으로는 유지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한 단계 내려앉은 순위표를 착잡하게 접고 얼른 집으로 향했다.

* * *

짝짝짝!

“가자, 가자!!”

“빠따 화이티잉-!!”

금요일, 주간 성적 1승 3패를 기록하고 맞이하는 경기는 시작부터 화끈한 타격전이 시작됐다.

명진이가 게임 시작하자마자 3루타를 날려보내고, 성현이는 깔끔하게 희생 플라이 타점 하나.

기성이가 차분하게 볼넷을 골라 나간 뒤 나타난 진형이는 마치 어제의 삽질을 속죄하겠다는 듯이,

따악-!

“갔다아!!”

“진형아, 사랑한다아!!”

초구부터 대뜸 투런포를 날려버리며 팀의 3 대 0 리드를 단단하게 챙겨왔다.

짝짝짝―

“승주 치자치자!”

“승주형 날려버려!!”

이후 한 점을 더 뽑아내며 1회 초부터 넉넉하게 넉 점의 리드를 잡은 뒤, 팀의 5선발인 동균이가 설설 뛰어 마운드로 올라갔다.

아직 신인급인데, 게다가 5선발인데…라는 점을 감안하면 올시즌 충분히 ‘잘하고 있다, 아주 잘하고 있다’라는 극찬을 받을만한 우리 동균이.

4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은 동균이의 실링과 비교하자면 분명 좋은 성적인 건 맞다.

하지만, 동균이의 이번 시즌 경기당 평균 이닝은 5이닝 정도. 여기에 4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을 대입한다면 대략 7점 정도가 나온다.

즉,

따악-!

“아이고야.”

1회 초에 얻은 3점 따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야기.

1번타자에 우투우타 유격수, 명진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동성의 1번타자 최용환은 시작부터 3루타를 치고 나가며 첫 타석의 기록까지 정확하게 일치시켰다.

2번타자 조희진 또한 성현이와 마찬가지로 희생 플라이로 한 점을 따내고, 3번타자 고명현도, 4번타자 남동근도 모두 1회 초 공격과 기록이 똑같았다.

여기까지 4 대 3.

그래, 여기서부터라도 잘 막으면 되지, 싶었지만 싱크로나이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5번타자의 2루타, 6번타자의 번트, 7번타자의 희생플라이.

그렇게 4 대 4, 동점.

괜찮아, 이제 2아웃 잡았잖아. 싱크로나이즈가 진행되고 있다면, 8번타자 장동운은 분명 삼진으로 물러날…….

따악-!

“…….”

…줄 알았는데.

동성 호넷츠 타선에서 사실상 구멍에 가까운 장동운은 마치 각성한 직후 규학이의 스윙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 투수가 봐도 완벽한 스윙으로 고척구장의 좌측 담장을 넘겨낸 뒤 팀의 역전을 기뻐했다.

“야…이거.”

큰일인데, 라는 뒷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듣고 있던 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질까봐,

짝짝짝!

“역전 각 보인다, 계속 때려때려!”

위선을 얼굴에 깔고 계속 박수쳤다. 계속 소리쳤다.

그러나,

퍼엉-!

“스톼아아-잌!”

원하 챌린저스의 점수는 4점, 거기서 고착됐고,

딱-!

“오메.”

동성 호넷츠의 점수는 계속 성장했다.

“쎄- 한데.”

“그치, 그거지.”

엉?

묘한 감정에 고개를 돌리니 규진이형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뭐가.”

“플래그를 세우려면 그렇게 세워야지.”

“뭔 소리야.”

“잘 될 것 같다, 흐름 좋다, 뭐 이대로만 가자. 니가 그런 소리 하고 나서 잘 풀리는 거 본 적이 없어 아주 그냥.”

“…….”

설득력이 의외로 가득한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막, 어? 우리 팀 져라! 우리 팀 개똥쓰레기! 맨날 퍼질러져라! 이럴 순 없잖아.”

“아냐. 넌 차라리 그러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말넘심.

그래도 팀의 주장인데, 그리고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렇게 비관적인 생각을 할 수…….

펑-!

“스톼아아-잌!”

…도 있지.

“거봐, 새꺄.”

규진이형의 말처럼 생각한 덕분인지, 탓인지. 동균이는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4회 말 수비를 일단 마치고 돌아왔다.

이때까지 점수는 4 대 8.

4점의 점수 차가 물론 크고 아름다운 점수 차긴 하지만 괜찮아, 아직 4회밖에 안 끝났는데.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다.

퍼엉-!

“스톼아아-잌!”

…라고 생각하자마자 원하의 5회 초 공격은 삼진 세 개로 깔쌈하게 끝나버렸다.

“너 또 긍정적인 생각했지.”

“아니이이.”

이쯤되면 과학인가.

이번엔 규진이형의 말에 따라 5회 말 수비를 아주 비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 동균이 팔 각도를 좀 좁혀야 될 것 같은데.

“스톼아아-잌!”

아, 기성이 발놀림이 좀 굼뜬데.

“아웃!”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스톼아아-잌!”

음…….

“형.”

“왜.”

“우리 이번 시즌 꼴찌 할 거 같아.”

“그렇지, 그런 자세야.”

X발.

오늘따라 강력하게 흐르는 이 거지 같은 흐름은 우리가 공격할 때도, 수비할 때도 계속 이어졌다.

아, 성현이 팔꿈치가 좀 높은데.

따악!

아, 기성이 뒷발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거 같은데.

딱!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따악-!

“갔다아악!!”

“역저언, 역전 쓰리러언-!!”

“돌아, 진형이 돌아와아!!”

미친.

오늘만 홈런 두 방으로 5타점을 올린 진형이를 보며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이 거지 같은 기분을 유지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나도 막, 그런 거 하고 싶단 말야.”

“뭘.”

“승리의 요정, 타점 요정, 우승 청부사, X발, 그런 거 하고 싶단 말야. 어쩌다 내가 이런 꼴이 됐나….”

“사람 사 운명이라는 게 있는데. 받아들여.”

운명을 받아들이기엔 이미 운명과 벗어난 현상을 너무 많이 겪었다.

“한울이, 8회 나간다!”

“…예.”

한껏 날뛴 뒤, 코치님의 말에 착잡하게 글러브를 집어 들었다. 터덜터덜, 지하 불펜으로 내려가 흐느적거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선배.”

“어?”

“선배는 좋으시겠어요. 승리의 요정, 부러워요.”

“뭔 소리야, 갑자기.”

그러다가 옆에서 대기 중이던 경석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어요, 승리의 요정 같은 거.”

“충분히 승리의 요정인데?”

“아니….”

물론 성적상으론 이보다 더할 나위가 없는 승리의 요정이 맞지.

아직까지 평균자책점 0점과 승계주자 실점 0점을 기록하는 불펜 투수가 승리의 요정이 아니면 뭐겠어.

“그냥 감정적인 거죠.”

근데 이게 나와 맞지 않는 옷 같이 느껴진다 해야하나. 아니면 조금 더 큰 옷으로 교환하고 싶다 느껴진다 해야하나.

그냥 아주 단순한 논리다. 이기고 싶다, 생각하면 이기는 거. 이길 것 같다, 싶으면 이기는 거.

“감정이라…이미 넌 우리 팀에서 충분히 감정적인데.”

“예?”

“너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는데. 18시즌에 플레이오프 때. 아, 마침 그때도 상대팀 동성이었지, 그러네.”

“아…몇 차 전 때요?”

“4차전 때지. 너 마지막으로 던졌을 때.”

“아…아. 기억하죠.”

“난 아직도 기억나거든. 기억…난다기보다는 약간 ‘너’ 하면 그냥 각인이 된 거 같은데.”

야구 인생 통틀어서 절대 잊을 수가 없는 경기.

패전의 멍에를 안긴 했지만, 정말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낀 날이었다.

“너 그때 이닝 마치고 덕아웃 돌아오면서. 와…진짜 멋있다 생각했거든. 어우, 야, 그때만 생각하면 난 아직도 소름 돋아 막.”

“뭘 또 소름까지 돋고 그래요.”

“감정적인 거잖아. 좀 그런 게 있대니까. 막, 울컥하고 그런 거 있잖아.”

“음….”

모르겠는데.

“원래 본인은 그런 거 잘 몰라. 아는 놈이 이상한 걸 수도 있고.”

뚱-한 표정에 경석 선배는 껄껄껄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게 편해.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

“뭘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나 보고 멋있다 생각한대요?”

“멋있다…보단. 아, 저런 사람이랑 같은 팀인데 이기겠지…아니, 이겨야지, 같은 생각.”

“날 보고 그런 생각들을 한다구요? 다?”

“응.”

“…….”

1초 1초가 소중한 불펜 피칭 시간을 잠시 미뤄두고, 경석 선배의 말을 이리저리 곱씹어보았다.

“그러니까, 다치지만 마라. 난 너 혹시라도 다칠까봐 맨날 조마조마한….”

“한울이, 지금 나가자!”

“아, 네네.”

경석 선배의 말을 끊고 코치님이 다급하게 내려와서 등판 개시를 알렸다.

8회 초 공격이 좀 빠르게 끝나기라도 했나, 싶어서 나도 코치님을 따라 빠르게 지상으로 올라갔다.

근데…….

“뭐여.”

주자들은 각 베이스에 그득그득 들어차있고, 이닝 종료를 알릴 빨간 불은 하나 밖에 들어와있지 않다.

“아이고야.”

심지어 이닝은 아직도 7회.

“제가 8회도 막나요?”

“부탁할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코치님이 부탁했지만,

따봉!

“예예. 오래 쉬어서 괜찮아요.”

난 그 앞에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안심을 요구했다.

나에게 주어진 8개의 연습투구를 진행하며 생각보다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 버린 현 상황을 정립시켰다.

1사 만루에 한 점 차, 상대 타순은 8번 장동운부터. 그리고 이번 이닝을 어떻게든 막아내면 다음 이닝인 8회까지 막아야 한다.

“플레이!”

연습투구를 마친 뒤, 몸을 탈탈 털어댄 뒤 플레이트를 밟았다.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정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동점까진 만들어주는 ‘것’까지도 괜찮다.

두 점만 안 주면 돼.

배수의 진을 구장 저 멀리에 날려버리니 마음이 아주 편했다.

선두타자로 나선 장동운은 최근 내 위명을 익히 알고 있는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내 투구를 기다렸다.

에이, 그렇게 긴장하면 될 것도 안 될 텐데.

퍼엉-!

“스톼-잌!”

거봐.

바깥쪽 직구로 가볍게 카운트를 잡은 뒤, 거의 인터벌 없이 다음 공을 던졌다.

이런 타자한텐 시간 주는 게 아깝거든.

이번에 던진 공은 대각선을 이용한 몸쪽 높은 직구. 게다가, 구속 또한 조금 전보다 살짝 끌어올렸으니,

띡!

체감상으로 거의 10km나 차이가 날 공을 정타로 잇는 건 대단히 어렵다.

“쓰리, 쓰….”

“인필드 플라이 아웃!”

성훈이형이 슬금슬금 자리를 잡기도 전에 주심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며 인필드 플라이 아웃을 확인시켰다.

가볍게 첫 번째 카운트를 잡은 성훈이형은 이미지답게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며 다시 공을 돌려주었다.

공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플레이트를 밟기 전,

성문이?

명진이요!

아, 오케.

2루 견제에 대한 시그널을 맞추며 수비진들을 살피니 좋은 의미로 분위기가 느슨해지는 게 보였다.

1사 만루와 2사 만루. 정말 하늘과 땅 같이 큰 차이를 두고,

9번타자, 김!! 석!! 호!!

다음 타자가 등장했다.

최근 특성 ‘승부’가 꽝이 아니라는 걸 몸소 증명해주었던, 어떤 의미로 보면 참 고마운 타자.

띠링-!

[전달력]

-  3구 삼진을 뺏어내세요 (0/1)

-  보상 - 체인지업 +2, 특성 ‘전염’ 획득

그리고 이젠 나에게 새로운 특성을 하나 더 갖다 줄 타자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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