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전염성
그득그득하게 들어찬 베이스를 투수의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공포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니지, 그 이상은 될 수도 있겠다.
몸에 맞추거나 볼넷을 내주면 꽁짜로 점수 하나. 안타 맞으면 점수 두 개. 장타 맞으면 점수 세 개. 큰 거 한 방이면 점수 네 개.
근데 이닝은 안 끝났어, 또 던져야 돼. 이게 얼마나 무서워.
퍼엉-!
“스톼-잌!”
하지만 여기서 재밌는 것 한 가지. 난 보통의 투수가 아니라는 점.
구속이 보통이 아니다? 제구가 보통이 아니다? 변화구가 보통이 아니다?
아니, 그냥 생각 자체가 보통이 아니라는 점.
그렇잖아, 베이스가 가득 차있다는 건 바꿔말해 오히려 타자에게 더 큰 부담이거든.
베이스가 가득 차있는만큼 비교적 쉬워지는 수비.
만약 승부처에서 치지 못할 경우 따라올 결과.
아쉽게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와중 쏟아지는 야유.
게다가 상대해야 할 투수가 사실상 무적에 가까운 투수라면 타자의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읍!”
부웅―
“스윙, 스윙-!”
바깥쪽 직구로 카운트를 잡아낸 뒤 체인지업을 한번 던지고 싶었지만, 가장 최근인 올스타전 때 상대해본 바로 체인지업은 계속 읽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스읍, 읽힌다기보단 패턴의 문젠가?
때문에 과감하게 패턴을 바꿔내고 몸쪽으로 직구를 쿡 찔러서 헛스윙을 유도했다.
0-2의 카운트를 만들어둔 뒤 잠시 플레이트에서 발을 빼고 생각했다.
여기서 완벽하게 잡아야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인플레이를 만드는 것도 안 되고, 파울이 나서도 안 된다. 볼이 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뭘 던질까.
차라리 붕붕 휘둘러대는 타자라면 잡기 편한데, 톡톡 건드리는 유형의 타자에게 이런 제한을 걸어버리면 오히려 잡기가 힘들다.
다시 플레이트를 밟고 계속 고개를 젓는 와중,
“타임이요!”
“타임, 타임!”
김석호가 제 왼편으로 손바닥을 내들었다. 타석에서 빠지며 심판에게 보였던 손바닥을 내 쪽으로 한 번 더 보여주는데, 왜 니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괜찮다, 내가 더 미안하다, 그런 의미로 나도 손바닥을 한 번 보여주며 잠시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부웅- 부웅―
그 틈에 플레이트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김석호가 연습 스윙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몸통에서 살짝 떨어진 오른쪽 팔꿈치.
배트보다 먼저 훅 돌아버리는 왼쪽 발목.
때문에 평균보다 앞에서 형성되는 포인트.
김석호는 마른 몸으로 9번타자 자리에서 펼칠 수 있는 퍼포먼스를 전형적으로 내보이는 좌타자다.
원래 저런 스윙을 하는 타자가 아니고, 또 원래의 역할이라면 저런 스윙을 해서도 안 된다.
“…지금이네.”
그리고 저 행동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 분명한 호재로 작용한다.
“플레이!”
플레이트를 밟자마자 규학이가 뭐라 사인을 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대며 사인을 보냈다.
규학이는 타자를 흘끔 쳐다보더니 슬금슬금 바깥으로 움직여 미트를 내보였다.
그래, 거기.
“읏!”
중지와 약지에 걸려 깔끔한 스핀을 먹은 공은 정확히 규학이의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
본인이 생각했던 위치, 그리고 본인이 생각했던 회전이 날아오자 김석호 또한 빠르게 배트를 내밀었다.
조금 전 보였던 스윙 연습과 아주 완벽하게 일치하는 스윙.
덕분에,
부웅―
“스윙!”
배트가 지난 뒤 한참 후에야 규학이가 체인지업을 받아내며 이닝이 종료되었다.
띠링-!
[전달력]
- 3구 삼진을 뺏어내세요 (1/1)
- 보상 - 체인지업 +2, 특성 ‘전염’ 획득
제구 - 최상
구위 - 최상
체력 - 중
포심 - 100
커브 – 90
슬라 - 87
스플 - 88
체인 - 88+2=90
싱커 - 87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승부 - 이기고 싶을 때 포심이 +5 됩니다.
전염 - 본인의 감정이 전염됩니다.
평소 같았으면 위기 상황을 넘긴 뒤 마운드로 향할 때 예에에에!! 라든지, 쌰아아아!! 라든지, 그런 오도방정을 떨어대며 들어갔을 텐데.
아직 오늘 등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과 더불어 새로이 추가된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얌전히 덕아웃으로 걸어갔다.
“전염….”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전염된다는 특성.
다른 알기 어려운 특성들과는 다르게 이번엔 웬일로 바로 특성에 대한 이해가 완료됐다.
내 감정을 전염당하는 주체만 특정시키면 되거든.
짝짝짝!
“점수 더 내자, 내자! 훈이 날려버려어!!”
아직 감염의 주체가 내 팀원이라 특정되진 않았지만, 그렇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박수를 열심히 쳐야하고 어차피 목소릴 크게 내야하며 어차피 승리를 바라야 한다.
“훈이형 가자!!”
“유, 훈! 유, 훈!”
내 응원에 따라 팀원들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훈이는 이 상황의 주체인 나를 흘끔 보곤 피식 웃었다.
승주랑 친구라서 그런가, 훈이 쟤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약간 애가 오락가락하는 게 있거든.
미친놈처럼 놀다가도 타석에만 들어서면 입 싹 닫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슨 이중인격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래놓고 실투를 놓치거나 삼진당했을 때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또 좋은 결과를 냈을 때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걸 보면 다중인격인가 싶기도 하고.
근데,
띡!
“파울!”
어긋난 스윙으로 실투를 한 번 놓쳐버린 훈이는,
“형님, 훈이형 지금 웃고 있는데요?”
우리와 같이 놀 때처럼 해맑게 웃으며 타석에 임하고 있었다.
“타이밍 맞는다!”
“아, 까비까비!!”
“은비까비!!”
“미친 새끼야!”
덕아웃에서 뭐라고 지껄이든, 뭐라 소리치든.
따악-!
고척구장의 중앙펜스를 넘기고 베이스를 한 바퀴 도는 훈이는 예전처럼 과하게 기뻐하지 않았다.
“예에에에엑!!”
그저 미친놈처럼 소리치고, 손바닥을 마주하며 기뻐했다.
“후니후니이!!”
“야아아아악!!”
훈이가 그렇게 기뻐하면, 그 모습을 본 나도 미친놈처럼 환호하고. 내가 그렇게 기분이 상승하면,
따악-!
“갔다!!”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들의 기분 또한 상승하고.
4점.
분명한 선순환 속에서 8회 초, 원하 챌린저스 타선은 승부의 방향타를 확실하게 돌려버렸다.
“가자, 가자아아!!”
팀의 승리가 아닌 팀의 우승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언제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얻어낸 이 ‘전염’이라는 특성만큼 어울리는 특성이 또 있을까.
먼저 가지고 있던 특성들 모두 하나 같이 소중하고 중요할 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해주는 특성들이 맞다.
그리고 이 특성들을 이용해 내가 좋은 성적을 낸다면, 이 작은 보탬이 팀 우승의 밑거름이 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야구는 팀 게임이다.
“아이, 세컨!”
후웅-!
포수가 2루로 롱팩을 던지는 어깨에 힘을 조금 더 얹어주고,
촥!
“규학이 송구 좋다아!”
이닝 시작 전 볼을 이리저리 돌려대는 내야수들의 발놀림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행님행님, 편하게 가입시더!”
“그건 또 어디 사투리야.”
“잘 모르겠심더!”
라운딩의 끝을 마무리한 명진이가 송구가 아닌, 직접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공을 건네주었다.
띠링-!
[선순환]
- 야수들을 이용하여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변화구 +1
그런 명진이 머리 위에 떠있는 오늘 두 번째 퀘스트.
“플레이!”
일단 퀘스트고 자시고, 오늘 두 번째 이닝을 깔끔하게 막아낼 방법을 떠올리기로 했다.
이번 수비는 1번타자 최용환부터.
이닝의 시작부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요소들만 모아둔 타자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거지 같아진다.
근데 뭔가…….
“읍!”
퍼엉-!
“스트라이-크!”
아, 이번 이닝은 수비 도움 좀 받겠구나.
“끄윽!”
부웅-!
“스윙-!”
이번 이닝은 좀 편하게 가겠구나.
“윽!”
투닥―
“스윙, 스윙-!”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스플리터가 땅바닥에 낼름 처박히긴 했지만, 규학이의 멋진 블로킹 덕에 그 발 빠른 최용환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톡 태그 당해버렸다.
감염이라매. 내가 애들 감염시키는 거 아니었어? 내가 감염된 거 같은데?
아, 물론 때로는 이 과한 뽕 때문에 부작용이 생길 때도 있긴 하다.
따악―
수비를 너무 믿었든지, 아니면 어깨에 힘이 좀 과하게 들어갔든지.
“아이고.”
선두타자를 멋지게 잡아낸 뒤 2번타자 조희진에게 초구부터 좌익수 앞 안타를 얻어맞았다.
바깥쪽에 예쁘게 주차됐던 싱커였고, 타자의 타격폼 또한 크게 무너지지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노림수에 당한 것 같다.
안타깝긴 하지만 좌익수 훈이가 타구를 내야로 돌려보내는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타자가 잘 친 건데 어쩔 수 없지.
이 생각은 특성 ‘전염’ 덕분인지, 다시 마운드를 향해 다가온 명진이 또한 비슷한 감정을 내밀었다.
“이야, 타구음 좋네요.”
“뭐 임마?”
그 말뽄새가 좀 비틀려있어서 그렇지.
에헤헤헤! 하며 유격수 자리로 도망간 명진이를 흘겨보다가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포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왼쪽 어깨선과 맞춰둔 뒤 흘끔흘끔 바라보는 모양새.
그 자세에서 곁눈질로 1루주자를 확인하고,
“끅!”
뻥!
“스트라이-크!”
고명현의 몸쪽을 향해 슬라이더를 찔러넣었다.
지켜볼 생각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볼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초구를 가만히 지켜본 고명현은 오른손으로 배트를 휘적거리며 이미지를 재정립하는 듯했다.
이미지라, 과연 무엇에 관한 이미지일까. 나? 아니면 우리 팀?
아마 아주 높은 확률로 나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글쎄.
평소라면 그게 맞다. 야수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건 결국 2차적인 문제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과연 눈앞의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까에 대한 문제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 내가 던지는 공은 단순히 나 한 명이 던지는 공과는 다르다.
왜, 만화 같은 데서 나오잖아.
“흐읍!”
이 공은 우리 팀원들의 염원이 담긴 공이다아아!!
따악-!
몸쪽 슬라이더에 제대로 반응을 못 하길래 조금 더 깊게 찔러넣어봤더만, 고명현은 이번엔 당하지 않겠다는 듯 몸쪽 직구를 제대로 당겨 1-2루간으로 타구를 보냈다.
시야의 가탱이를 스쳐지나는 속도와 각도만 보고 아, 이건 안타구나 싶다가도,
“투, 투!”
“세컨, 바로 1루!”
흐뭇하게 성문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2루를 향해 톡 공을 던졌다.
타이밍 맞게 날아온 공을 잡아낸 명진이는 오른발로 2루 베이스를 스윽 긁어낸 후,
“끙!”
지 이미지에 아주 어울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빙글 돌려댔다.
그 결과가,
“아웃!”
포, 식스, 쓰리, DP!
“아웃!”
띠링-!
[선순환]
- 야수들을 이용하여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변화구 +1
제구 - 최상
구위 - 최상
체력 - 중
포심 - 100
커브 – 90+1=91
슬라 - 87+1=88
스플 - 88+1=89
체인 - 90+1=91
싱커 - 87+1=88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승부 - 이기고 싶을 때 포심이 +5 됩니다.
전염 - 본인의 감정이 전염됩니다.
어디 관람료라도 내야 할 것만 같은 4-6-3 더블 플레이.
“쌰아아아!”
“나이쓰 규학이!!”
“나이쓰 나이쓰으!!”
아마 지금 내 뒷주머니에 지갑이 있다면 조금 꺼내서 앞에 놔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합을 구경한 뒤 덕아웃으로 얼른 달려들어갔다.
“야야, 더 가자!”
어떻게, 내가 지금 당장에 줄 수 있는 건 없는데 대신 이 기운이라도 좀 받아가지 않으련?
따악-!
딱―
딱!
내가 이리저리 뿌려댔던 기운은 확실하게 영험했다.
9회, 이쯤 되면 슬슬 동성 호넷츠한테 미안하다는 감정이 들 생각이 정도가 돼서야 경기가 끝났으니까.
“형형.”
“왜.”
경기가 끝난 뒤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장 먼저 규진이형을 찾아나섰다. 퉁명스럽게 나를 올려다보는 형을 향해 일단 따봉 하나를 선사했다.
“…뭔데?”
“이제 나 플래그 많이 세워도 될 듯.”
“하지 말라니까.”
못 믿네.
“이제 제가 승리의 요정입니다.”
“미친놈인가.”
“이제 봐봐. 날 보면 막, 어? 막 이기고 싶고 잘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고, 막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아?”
“오늘 많이 힘들었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규진이형 얼굴 속에서도 아까와는 다르게 완전한 여유가 슬금슬금 삐져나오고 있었다.
“내가 관심법으로 봤거든. 이번 시즌 우리가 한국시리즈 우승함.”
“미친놈인가 봐, 진짜.”
두서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개소리에 규진이형도 어이가 없는지 실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