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59화 (159/190)

159화. 본질

일요일 경기가 끝나고 삼겹살집에서 주호와 나누었던 볼배합 이야기. 좀 말이 길기도 했고 많기도 했는데 주호는 과연 어느 정도 이해를 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확인은 생각보다 빠르게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월요일 푹- 쉰 뒤 화요일, 부산으로 내려와 KP 스타즈와의 경기. 아무래도 상대팀도 상대팀이고, 그에 맞서는 우리 투수도 투수인지라…….

따악-!

“어우. 주호 살벌하네.”

게임 중반부터 온갖 대수비와 대타의 향연이 펼쳐졌고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주호가 7회 초 공격부터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 이 용병술은 아직까지 성공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7회 초 한 점 차, 2사 만루에서 역전 만루 홈런이라니.

근데 수비는?

투닥―

“쓰리, 쓰리!!”

“아냐 스톱!!”

KP 스타즈 특유의 화끈한 몰아치기에 투수도 투수지만, 주호부터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나름 분석하고 공부하고 낸 결론인데 그냥 그걸 피지컬로 압살당하는 느낌.

지금 주호가 느끼는 그 감정은 이곳저곳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닌데, 싶을 정도로 흔들리는 캐칭.

생각이 깊어지는 듯 타의적인 이유로 길어지는 투수의 인터벌.

본인의 생각에 의심이 드는지 계속해서 움찔거리는 오른손.

“한울이, 일단 8회 준비하자.”

“아…네.”

“혹시라도 7회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만 해라.”

“옙.”

7회 말, 한 점을 허용한 뒤 2사 1, 2루 상황까지 확인한 후 불펜으로 향했다.

급하면 1.1이닝을 막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빠르게, 배제시켜도 상관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배제시켜도 상관없는 부분이라는 건 멍청히 경기를 관람한다거나 주변 인물들과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빠르게, 빠르게.

서둘러 이리저리 움직여대기 시작한 지…체감상으로는 한 5분 정도.

“형, 천천히 해도 되겠다.”

“어?”

“수비 끝났어. 그냥 천천히 하고 나가면 돼요.”

건영이의 말에 따라 그라운드를 보니 우리 팀 선수들이 덕아웃으로 돌아오고, KP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오고 있다.

“일단 어찌어찌 막았나보네.”

“좀 불안하긴 했는데 명진이형이 잘 막았어요.”

다행이네.

덕분에 한껏 여유를 만끽하며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커브도 던져보고, 싱커도 던져보고, 직구로 손장난도 좀 쳐보고.

“한울이, 지금 나가면 되겠다.”

“네.”

코치님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운드로 향했다. 먼저 나와있었는지 주호는 벌써부터 홈플레이트 뒤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주호가 과연 어떻게 하려나….”

아마 주호 본인도 이렇게 바로 숙제 검사 받을 거라고 생각은 못 했나보다. 눈가에 긴장이 아주 그득그득한 게, 아주 볼만해.

먼저 내가 던지는 공들을 하나씩 던져주며 잡는 감을 만들어주었다.

어때, 잡을만 하니?

아니요.

안 그래도 정신없는 상황에, 선생님은 내가 앞에서 개판 쳐놓은 거 다 봤고, 근데 그 선생님한테 숙제 검사까지 받아야 하고.

주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안 됐다 한들 뭐라 할 생각도 없었고.

지금은 그저 주호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내가 어느 정도 중심을 잡을 순 있지만,

“그래도 포수잖아.”

수비진의 안정을 꾀하는 건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감독조차도 포수만큼 큰 영향력을 끼치는 걸 불가능하다.

“주호야!”

“예!”

“한가운데!”

“아….”

한가운데.

삼겹살집에서 짤막한 강의를 듣던 날, 경기 직전 티저 영상 개념으로 들려주었던 한 마디 정도면 정신차리도록 하는데 충분하지 않을까.

덕분에 볼집에서 벗어나 틱틱거리던 포구음은 퍼엉! 퍼엉! 하며 우렁찬 소릴 내기 시작했다.

띠링-!

[숙제 검사]

- 투수의 리드대로 투구하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변화구 +2

그리고 동시에 퀘스트도 나타났다.

“이름 참….”

이쯤되면 퀘스트 이름도 참 날로 먹는 게 아닌가 싶을 때 KP 스타즈의 1번타자, 안병국이 꽤나 푸짐한 체구와 함께 우타석에 들어섰다.

푸짐한 체구의 1번타자?

푸짐한 체구인데 홈런도 한 시즌에 10개가 채 안 되고, 그렇다고 발이 빠른 것도 아닌데 왜 이런 타자를 1번타자로 내세울까.

마이너스만 가득한 특징들 아래, 타격 1위팀 KP 스타즈가 안병국을 1번타자로 박아두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애초에 타자의 본질이 뭔데, 출루잖아.

안병국은 타석에서 본인이 임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에 따라 적절히 행동할 줄 아는 타자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은퇴한 홍석진과 비슷한 유형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홍석진이 수동적인 타자라면 안병국은 능동적인 타자라는 점이 다르다.

다만 ‘능동적인’이라는 부분이 어떻게든 버티고, 보고, 볼인 거 뻔히 알면서도 괜히 툭 건드려서 하나 더 던지게 하는 등 투수를 빡치게 하는 점이 거지 같을뿐.

“플레이!”

이런 안병국을 첫 타자로 맞아 주호가 선택한 초구는 높은 직구. 걸치거나 들어가지 않고, 아예 초구부터 높이 빼버리는 직구.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걸까…….

“읍!”

퍼엉-!

“볼!”

…라는 생각이 타자의 얼굴에서 느껴졌다.

김한울도 아무렴 사람인데, 실투인가? 라고 생각하기엔 주호의 어정쩡한 자세는 분명 노림수처럼 보이거든.

안병국이 본인을 바라보든 말든, 주호는 개의치 않고 다음 사인을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낸 사인은 방금 전 던졌던 직구와 똑같은 사인.

“끅!”

퍼엉-!

“볼!”

또?

안병국은 얼굴에 한 글자짜리 의문을 써 붙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볼배합 가져가는 김한울인 건 알겠는데, 대체 볼 두 개를 먼저 가져가서 무슨 이득이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

이득? 분명히 있지.

빵-!

“스트라이크으-!”

나, 그리고 주호가 알고 있는 한 안병국은 최대한 투수의 투구 수를 이끌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타자다.

한 마디로 그거지, 스트라이크 없이 2볼이면 칠만도 한데 굳이 하나 더 던지도록 멀뚱히 지켜보는 타입.

볼 두 개를 먼저 내주긴 했지만, 그 덕에 스트라이크 하나를 비교적 안전하게 챙겨낸 주호는 어떡하면 또 스트라이크를 뺏을까, 다시 생각에 잠겼다.

2-1. 높은 직구 두 개와 바깥쪽 커브로 만들어낸 카운트를 이을 구종은,

“읏!”

부웅―

“스위잉-.”

무려 40km 넘게 차이나는 빠른 직구. 그것도 몸쪽에다가 냅다 꽂아버리니 반응이 늦어도 한참 늦은 스윙으로 카운트를 새롭게 뽑아냈다.

직전에 커브를 던져서 상대적으로 늦든, 아니면 그냥 157km 짜리에 늦든.

나라면 여기서 좌우는 놔두고 높이만 좀 더 올려서 헛스윙을 끌어내 볼 텐데 주호는 생각이 달랐다.

싱커.

방금 던졌던 직구와 같은 코스로 던진다면 스윽- 하고 볼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 나와 안병국의 매치업이라면 배트가 나올 거라는 계산이겠지.

아니,

딱―

그것보다 조금 더 본질적인 계산.

“쓰리!”

“써드 대시!”

애초의 투수, 그리고 수비의 본질이 무엇이던가. 어떻게든 출루하려는 타자, 그리고 공격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것 아니던가.

“아웃!”

결정구를 던질 카운트에서 높은 직구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라는 점의 역을 노린 거라면 참 칭찬하고 싶다.

짝짝짝!

“주호 잘하네!”

바로 이렇게.

글러브 손등에 대고 로진색으로 물든 손가락을 몇 번 쳐주자 주호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댔다.

분명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퀘스트를 수행한 적이 있을 거다.

그때랑 완전히 같아. 투수는 나, 포수는 주호, 내용도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젓지 말라.

그땐 엄청난 집중, 그리고 당시의 과거보다 훨씬 성장한 그 갭으로 압살했었지.

한 마디로, 전적으로 ‘나’에 의해 성공한 퀘스트였다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나 혼자 2인분, 2.5인분을 하지 않아도 된다.

딱-!

“숏! 숏!”

“어케에에엑!!”

초구, 그리고 몸쪽.

류승훈이 좋아하는 두 가지를 미묘하게 섞고, 또 그걸 틀어버린 결과를 보아하니 그래도 될 것 같거든.

멀끔하게 2아웃을 잡아낸 뒤 3번타자 김기윤이 등장하자 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막 공중에 휘적휘적거렸다.

교포들이 쓰는 한국어 같은 블록 사인을 살짝 해석해보자면 3루수는 뒤로 살짝 빼고 2루수는 살짝 오른쪽으로.

오…….

내야수 둘의 위치를 살짝 옮긴 것으로 주호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이 세워졌다.

그러나 하나 같이 과연 주호가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

한 번 지켜보자, 싶은 마음으로 처음으로 나온 사인을 확인했다. 옆으로 멀어지는 슬라이더.

“윽!”

공의 오른쪽 면을 강하게 때리며 던지자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을 향해 날아가던 공이 어느 순간,

뻥!

무언가에 튕겨나가는 것처럼 휘어졌다.

“볼!”

김기윤의 배트가 같이 끌려나오지 않은 것은 충분히 아쉬워할 수 있지만, 주호는 실망하지 않고 그대로 1루심을 가리켰다.

와아아아-!!

부산 홈 팬들이 환호하는 1루심의 동작에도 주호는 꿋꿋하게 다음 사인을 이었다.

존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체크 스윙에 걸리지도 않았음에도 전혀 실망하지 않았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공 보고 공 치는 타자라기보단 최소한의 수 싸움을 가지고 들어가는 김기윤이기에, 바깥쪽 공에 반응했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어서겠지.

물론 이다음을 읽어내는 것 또한 포수의 몫이다.

이번에는 바깥쪽을 봤지만, 다음에도 바깥쪽을 볼까? 아니면 다음엔 타겟을 돌려서 몸쪽을 볼까?

주호는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후자를 선택했나 보다.

“끗!”

검지와 중지, 손가락의 길이를 주욱 따라 느껴지는 실밥을 강하게 때리자 몸쪽으로 향하는 직구가 완성되었다.

띡!

“파울, 파울!”

근데 이제 테일링을 곁들인.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볼배합이라는 건 여러 갈래가 존재한다.

아예 배트에 맞춰주는 것조차 허용이 안 되는 상황.

때에 따라서 아예 일부러 내보내는 게 이득인 상황.

칠 수 있으면 쳐보라고 던져줘도 되는 상황.

주호는 지금 상황을 세 번째 상황이라 판단한 것 같다.

배트를 끌어내려 했던 초구 슬라이더도 그렇고, 방금 던진 몸쪽의 싱커도 그렇고. 그리고 직전 수비수들을 옮겼던 이유들도 그렇고.

칠 수 있으면 쳐보라.

주호는 대선배 타자를 앞에 두고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흣!”

퍼엉-!

“스트라이크으-!”

옛날보다 훨씬 좋아진 캐칭으로 몸쪽 낮은 직구를 휙 낚아채며 또 하나의 카운트를 만들어내는 주호. 이 녀석이 지금 타자 눈엔 얼마나 얄밉게 보일까.

주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결정구를 위한 생각을 거치고, 또 결정구를 위한 사인을 내보냈다.

똑같은 코스에서 떨어지는 체인지업.

허, 같은 손 타자한테 몸쪽 체인지업이라니, 누가 가르쳤는지는 몰라도 참,

“읏!”

잘 가르쳤네.

투닥―

“스윙, 스윙!”

직구 그립에서 돌려잡아 던진 체인지업은 평소보다 살짝 큰 낙폭으로 떨어졌지만 주호가 재빠르게 왼쪽으로 몸을 옮기며 제 앞에 공을 떨궈놨다.

얼른 집어다가 이제서야 막 뛰어나가려는 김기윤을 태그하며 그대로 쓰리아웃.

띠링-!

[숙제 검사]

- 투수의 리드대로 투구하며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변화구 +2

제구 - 최상

구위 - 최상

체력 - 중

포심 - 100

커브 – 91+2=93

슬라 - 88+2=90

스플 - 89+2=91

체인 - 91+2=93

싱커 - 88+2=90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승부 - 이기고 싶을 때 포심이 +5 됩니다.

전염 - 본인의 감정이 전염됩니다.

평소처럼 난리난리 생난리를 치며 덕아웃으로 돌아가기보단, 묵묵하게 손가락으로 이번 이닝 MVP를 가리키며 조용히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호오오오!”

왜냐면 이 난리난리 생난리는 주호가 해야 할 일이거든.

그럼에도 팀원들의 온갖 환호, 그리고 팬들의 경외는 모두 나에게만 향한다. 내가 한 건 그냥 던져달란대로 공 던진 것밖에 없는데.

미안한 마음에 바로 덕아웃에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서 주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마스크를 벗어 허리춤에 걸어놓고, 포수 헬멧을 앞으로 돌려쓰고, 절그럭절그럭 포수 장비를 이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온 주호를 향해,

“주호야, 뭐하냐!”

“예?”

“찰칵, 새꺄, 찰칵!”

“아, 찰칵!”

찰칵!

내가 더 크게 환호하고, 내가 더 크게 지랄하고, 내가 더 크게 경외한다.

그제서야,

“쌰아아아!”

“나이스으!”

팀원들도, 팬들도 내가 아닌 주호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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