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플러스 마이너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스윽 훔쳐낸 뒤,
“아으 더워.”
“시원하지 않아요?”
간단하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었다.
“덥지 않아?”
“서늘한데요?”
한 곳 한 시에 있는 이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인가 싶으면서도,
쏴아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자면 말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8월, 분명 덥다고 느끼면서도 싸늘하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면 시원하니까.
하지만 이게 야구선수들한테 그리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취소, 취소!”
에이씨.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무려 이틀 연속으로 강우로 인해 게임이 뒤로 밀려나버렸다.
아니, 밀리는 것 자체는 사실 상관없어. 대신 ‘오늘’을 이대로 버리게 되는 것 같아 아까워서 그렇지.
“야, 기범이가 밥 먹자는데.”
“콜.”
승주의 제안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장을 나섰다.
게임을 못 뛰었다는 아쉬움.
오늘따라 좋지 않았던 컨디션을 감출 수 있었다는 안도.
준비한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분함.
구장을 나서며 만난 선수들은 각자 저마다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구장을 나서는 순간,
“뭐 먹을래?”
“삼겹살이나 먹자.”
“비오는데 뭔 삼겹살이야. 파전에 막걸리 해야지.”
“아, 누가 술쟁이 아니랄까 봐. 얌마, 비오니까 삼겹살이지.”
“파전 어디다 두고.”
“그런 거 왜 먹어.”
“지금 파전 비하하는 거냐?”
그 날의 감정은 그 날의 구장에 두고 가라.
모 대선배님의 조언에 따라 모두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온다.
그 원래의 정신이라는 게 제정신이 아닌 게 참 아쉽긴 하지만,
“지금 삼겹살 비하하시는 겁니까?”
나도 마찬가지라 딱히 할 말은 없다.
“맞지. 고기는 못 참지.”
“나쁜 놈들.”
다수결의 위대함이여.
승주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셋을 따라 구장 근처 삼겹살집에 들어와야했다.
치이익―
지글지글 끓는 불판하며, 선홍빛을 자랑하는 고기하며, 고기를 더욱 빛내줄 조연들 하며.
영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막 떨리고 감격에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잘 달궈진 불판 위에 한 줄, 두 줄, 세 줄, 알차게 네 줄까지 딱 올린 뒤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접시와 집게를 내려두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건히, 경건한 마음으로 마이야르를 기다리는 것.
“찬양하십쇼.”
“마멘.”
“마멘….”
“미친 새끼들.”
승주만 빼고, 나머지 두 놈은 내 쌉소리를 잘만 받아줬다.
“넌 처먹지마, 새끼야.”
“가서 파전이나 사와라.”
훈이와 기범이는 이미 내 편이다.
그러나,
“X벌, 요즘 팀 잘나가는 거 기념해서 내가 한턱내려고 했더만.”
“맞아, 나쁜 새끼야. 왜 삼겹살 먹자고 했어.”
“가서 파전이나 사와라.”
단 한 마디에 형세가 역전되었다.
“니넨, 새삼스럽지만 니넨 정말 나쁜 새끼들이야.”
정신 나갈 것 같네, 진짜.
“그나저나 요즘 비 너무 많이 오는데.”
“내일 또 온다던데?”
“또?”
8월에 진입하고도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휴식일인 월요일을 제한다면 실질적으로 우리가 진행했어야 할 경기는 6경기.
“어떡하냐, 우리 이번 주에 세 게임밖에 못 했는데.”
그러나 화요일과 토요일, 그리고 오늘 일요일까지 임시 휴업을 선언해버리며 무려 세 경기가 뒤로 밀려나 버렸다.
“어떡하긴. 시즌 후반 가서 월요일 경기 뛰고, 그걸로도 모자를 게 뻔하니까 더블 헤더 막 끼워 넣고. X발, 지랄났네 아주.”
만약 승주가 시원하게 욕 한 사바리 하지 않았다면 내가 뱉었을지도 모르겠다.
좀 강한 정도의 빗줄기라면 그냥 맞아가면서 강행하겠는데, 경기 자체가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비.
경기 시작도 하기 전에 그냥 취소 때려, 3회까지 진행했는데 노 게임 때려.
그런 비가 내리는 날이 이번 시즌은 유독 많다.
“컨디션 조절들은 잘 하고 있냐?”
덕분에 선수들 컨디션은 아주 개박살이 나고 있다.
하루, 혹은 일주일 단위를 꼬박꼬박 채워 루틴을 채워나가는 프로선수들 입장에선 원치 않게 하루를 나가고 못 나가고가 나중에 가선 정말 엄청 큰 차이거든.
포지션이 불펜투수다 보니 애초에 그런 생활이 익숙한 나는 그렇다 치고…….
“몰라. 망했어.”
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X 됐지, 뭘 물어봐.”
이번 시즌 종료 후 FA가 예정되어 있는 승주는 한 번 더 시원하게 욕을 싸질렀으며,
“음…할 말이 많긴 한데, 좀 위험한 얘기라.”
기범이는 유일하게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난 저 미소의 의미를 알지.
빠른 발,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빠른 주루센스. 덧붙여 내야 어느 포지션을 갖다놔도 평균 이상은 하는 수비.
덕분에 기범이는 트레이드 마감 시한 직전까지 원하 챌린저스 프런트를 아주 머리 아프게 만든 존재 중 하나였다.
누구 드릴게요, 김기범 선수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김기범 선수랑 누구 트레이드하시죠!
그…누구랑 누구랑 누구 드릴 테니까, 김기범 선수에 누구 한 명만 얹어주시죠.
사실 이렇게 원하가 기범이의 유출을 막는 게 기범이 본인 입장에선 썩 달갑진 않을 수도 있다.
왜?
야구선수는 야구 뛰라고 있는 존재지, 한 팀에서 이렇게 관상용 마냥 모시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
때문에 프런트는 기범이에게 매년 고액의 연봉을 약속하며 그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는 셈이다.
“근데 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
“왜? 그래도 경기 많이 나가는 거 자체는 좋잖아.”
그런 기범이가 최근, 꽤나 많은 경기에 출전했다.
최근 6경기를 따지자면 이 중 무려 3경기를 선발 출전했고, 나머지 비선발 경기 중 두 경기에서 각각 대주자와 대수비로 출전했다.
나가는 경기 수에 비해 많은 연봉을 받네, 귀한 대접을 받네, 아무리 그래도 야구선수는 그라운드에 나가야 한다.
근데 기범이는 그런 작금의 상황이 썩 불편하다고 이야기했다.
“난 백업이지, 선발감은 아닌 거 내가 잘 아니까.”
이런 이유에서.
“야씨, 그런 게 어딨냐. 그냥 잘하면 다 선발 뛰는 거고 그러는 거지.”
“맞아, 우리 김한울이도 봐봐. 그렇-게 오질나게 못 했는데도 철밥통처럼 불펜에 붙어있었잖아.”
“미친 새끼야.”
“그것보다 넌 명분이 있대니까? 그러니까 자신감 가져, 새끼야.”
바로 옆자리에서 욕설이 날아와도 승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맞은 편의 기범이를 다독였다.
“그것도 맞는 얘기긴 해.”
이 새끼가?
“근데 지금은 상황이 아무래도 좀 다르니까.”
“다르긴 뭐가.”
“그땐 뭐…지금에서야 뭐, 까놓고 얘기하는 건데. 그땐 솔직히 다들 성적 그렇게까지 신경 쓰진 않았잖아.”
만년 하위권.
그게 몇 년 전까지 원하 챌린저스의 분류였다. 만년 꼴찌는 아니고 만년 하위권.
핑계인 줄은 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의욕들을 잃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싸리 그냥 맨바닥이라고 하면 아, 바닥 한 번 찍었으니 이제 올라가 볼까? 하는 생각이라도 하겠는데 말야.
거의 매년 6위, 좀 안 좋으면 7위고 잘 나가면 5위.
플러스/마이너스 1짜리 변동은 오히려 사람 지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17시즌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더더욱 크게 다가온 것도 있었고.
“근데 지금은 달라. 매년 포스트시즌 진출은 이제 당연한 거고, 이젠 그걸 뛰어넘어서 한국시리즈 진출이야.”
“아니지, 한국시리즈 진출이 아니라 우승이지.”
“아, 그렇지.”
훈이가 짤막하게 기범이의 말을 정정했다.
“얘 말처럼 이젠 한국시리즈 진출만 가지곤 안 돼. 우리도 그렇고, 보는 사람들도 그렇고 눈이 너무 높아졌어. 높은 데를 보고 가는 게 맞긴 한데….”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니가 껴있어도 되나, 이런 생각 든다는 거 아냐.”
“비슷해.”
내가 옆에서 툭 한 마디 던지자 기범이가 씁쓸하게 주억거렸다.
이해는 한다.
내가 팀에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프런트맨으로 나서기엔 오히려 팀에 마이너스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
“나도 솔직히 그런 생각은 했지. 나도 사람인데 그런 생각 하지. 왜, 왜 나는 선발이 아니지. 이럴 거면 차라리 다른 팀 보내주지.”
“할만하지.”
“근데.”
탁!
기범이는 어느새 추가된 소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내려놨어, 그런 건.”
“뭘 내려놔.”
“내가 무조건적인 선발이어야 된다는 생각.”
“그러면?”
꼴꼴꼴꼴―
아무런 말이 없던 녀석은 빈 잔이 가득 채워지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우승하는 거.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우리 우승하는 길이라면 그러려니 하는 거.
멋진 새끼라고 해야할지, 미련한 새끼라고 해야할지.
두 단어 중 한창 고민하던 중,
“미친 새끼.”
승주는 어디에도 없던 적나라한 단어를 선택했다.
“그런 게 어딨어, 새끼야. 그냥 잘하면 선발 뛰는 거고, 못하면 못 나가는 거지.”
탁!
답답한 새끼.
기범이처럼 빈 잔을 호쾌하게 테이블에 올린 승주는 새로운 단어를 하나 추가한 뒤 친구의 심경을 위로했다.
“그리고 지금 니가 제일 잘하니까 니가 제일 많이 나가는 거고.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앉았냐.”
“그건 맞어. 너 그렇다고 훈련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럴 건 아니잖아.”
거기에 훈이도 한 마디를 끼얹고.
나도 질 수는 없기에 과거의 기억까지 불러오며 한마디 거들었다.
“언제였지, 작년에 왜 그. 그, 명진이 다쳤을 때.”
“아.”
“그때 너랑 헌희랑 둘이 잠깐이나마 경쟁했잖아.”
“그랬지.”
“사실 그 이전엔 너가 참 재미없게 야구한다고 생각했거든.”
“재미없게?”
“그 왜, 영진 씨 있지. 프런트에.”
“알지.”
“영진 씨가 전에 나한테 그랬거든. 예전에는 그냥 돈 벌러 마운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고.”
“그게 왜?”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재밌어하는 게 보이더래. 이기려고 하고, 뭔가 해보려고 하고. 아닌데, 난 변한 거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거든.”
탁!
이번엔 나도 테이블 위에 빈 소주잔을 내려두었다.
“근데 헌희랑 경쟁할 때 너 생각하니까 영진 씨가 왜 그런 말 했는지 알 것 같다, 야.”
말로만 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해야 팀에 보탬이 된다는 계산. 이기주의나 개인주의가 아닌, 오히려 단체를 생각하기에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렇게 내가 성장하고, 또 팀 내에서 내 지분이 커져갈 때 느꼈던 희열은 분명 기범이도 느낀 적이 있을 거다.
비록 그때의 희열이 너무 미약해 제대로 감미하기도 전에 명진이가 복귀하긴 했지만,
“그리고 임마, 니가 그런 생각 한다고 하면 명진이가 아이고 행님, 겁나게 감사합니다, 하면서 참으로 좋아하겠다.”
그렇게 복귀한 명진이 또한, 본인이 뒤처진 만큼 다시 따라잡기 위해 쏟아낸 토악질이 얼만큼인지 웬만한 사람들은 모를 거다.
“그러니까, 하던 거 해. 괜히 난 팀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어요, 뭐 X발,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지 말고.”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기범이는 묘한 미소와 함께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오케, 짠!”
본인을 위로해주는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
동갑내기 동기 때문에 마음 졸였을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이 친구들에게 지금껏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
“짠!”
기범이는 소주 한 잔에 모든 감정을 황금비율로 말아선,
탁!
“아으…이명진 딱 대!”
호쾌한 원샷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