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근원
두두두두―
“…파전에 막걸리 마시고 싶다.”
멍청-하게 덕아웃에 앉아 내리는 비를 쳐다보고 있자니 승주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게 그때 막걸리 먹자니까.”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올해는 유난히 장마가 심한 것 같다. 그 빈도도 좀 심하고. 최근 일주일 동안 화창한 날씨를 본 게 언제인지 이젠 기억도 안 나네.
작년도 비는 많이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컨디션 조절에 그리 애먹지 않았던 건 최대한 경기를 진행했던 이유가 크다.
프리미어12 대회 일정에 맞춘답시고 이 정도면 취소 때릴만 하지 않나, 싶어도 강행했던 경기가 많았거든.
근데 올해는 그런 것도 없겠다, 그런 게 있다 해도 강행하기엔 너무 심하게 비가 내려 어쩔 수 없이 순연되는 경기가 많다.
인정해. 인정은 한다고.
“아…또 중지네.”
근데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비가 철철 흐르는 하늘을 향해 중지를 들이밀고 싶었지만 차마 카메라에 찍힐까봐 그러진 못 했다.
그냥 잔뜩 찡그린 얼굴로 빗물을 퉤퉤퉤 뱉어내는 하늘을 노려봤다.
아, 거지 같은 거.
“일단 태웅이는 여기까지 던지자. 괜히 또 올라갔다가 다치겠다.”
“아…알겠습니다.”
덕아웃 저쪽 구석에서 들리는 말을 해석하니 중지된 지금을 기점으로 태웅이는 아마 강판될 예정인 듯 싶다.
5이닝 2실점.
퀄리티 스타트까지 1이닝만 남겨놓고 내려와야만 하는 투수 맘이 얼마나 아플까.
근데 그 강판 사유가 본인이 어찌 컨트롤할 수 없는 이유에서 비롯된 거란 얼마나 맘이 아플까.
“에휴….”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싱하러 들어가는 태웅이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다시 그라운드 상황을 살폈다.
두두두두두두두―
전투적으로 내리는 빗물 속에서 잠실구장 3루 쪽 덕아웃이나 1루 쪽 덕아웃이나 취하는 행동 양상은 매우 비슷했다.
그냥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쳐다보는 것.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1루측 진영은 차라리 이대로 경기가 끝나길 바란다는 거고 반대편은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 부디 게임이 재개되길 바란다는 정도.
원하 챌린저스는 이 두 방향의 덕아웃 중 아주 다행스럽게도 1루측 덕아웃을 이용하고 있다.
덕분에 상대 덕아웃보다는,
“오늘이야말로 막걸리 땡길래?”
“안 돼.”
“왜.”
“비 오는 날 나한테 술 먹자고 하는 건, 넌 비 오는 날을 소중히 하지 않았지, 이 지랄 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근데 맞는 말이잖아.”
“뭐가.”
“평소에 소중히 한 날 없잖아.”
“아니, 또 뭔 개소릴 하려고.”
“비 오는 날을 소중히 했으면 야, 당연히 파전에 막걸리 땡겨주는 게 소중히 하는 거지, 마.”
“이 술쟁이 새끼.”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가볍기만 한 건 아니었다.
우천 상황에서의 수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헌희와 기범이.
비 때문에 제한되는 시야 속에서 어떻게 투수의 공을 쫓아갈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성현이와 기성이.
잔뜩 질어진 마운드를 어떻게 운용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승진이와 은구 선배.
팀원들은 리그 1위라는 성적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도 알뜰하게 써먹고 있었다.
“비 오는데 파전이랑 막걸리를 안 마신다? 그건 예의가 아니라니까.”
얘만 빼고.
승주는 머리에 얹은 타격 헬멧을 덜그럭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근데 내가 아무리 파전에 막걸리를 가장 좋아하는 술 조합이라곤 하지만…올해는 너무 많이 와서 미칠 것 같네.”
“선생님이 안 좋아하는 술 조합이 있긴 합니까?”
“없는데.”
“미친놈인가.”
승주의 쌉소리 중 대부분은 걸러내고,
“근데 비가 너무 많이 오긴 해.”
“그렇지….”
올해는 비가 너무 온다는 부분 하나는 나름 내실이 꽉 찬 대사였다.
“넌 비오는 거 준비 안 하냐?”
“준비할 게 있겠냐.”
“왜 없어. 타격하는데 비 때문에 공 안 보이고, 비 때문에 땅 개판 났는데.”
“그냥 공 보고 공 치는 거지, 그런 게 어딨어.”
알고 보면 이놈도 나름 재능충이야.
야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왼쪽 손목 부상,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손목을 가지고도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는 녀석이다.
누군가 이런 핸디캡을 안고도 계속 좋은 성적을 내는 비결이 무엇이냐 묻자 승주는 그냥 날아오는 거 보고 친다고 대답했다.
공 보고 공 치기.
타자들의 로망이자 상상 속의 동물 기린 같은 존재가 바로 여기 있었다.
“야, 생각해봐라.”
“뭘.”
“봐봐, 내가 타석에 딱, 이렇게 있잖아. 지금 타석 나가면 땅이 아주 개판이 나있을 거란 말야.”
승주는 앉아있던 자세에서 벌떡 일어나 타격 시범까지 보이며 제 논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원래 배트를 어깨에 얹은 채 대기하는 것처럼 양손을 왼쪽 어깨에 올리고.
원래 왼쪽 다리에 체중을 좀 더 넣은 채 대기하는 것처럼 왼쪽 다리를 좀 굽히고.
원래 체중이동 하면서 특유의 살짝 붕 떴다가 가라앉는 것처럼 머리가 한 번 들썩이고.
딱 한 가지, 체중이동을 상징하는 오른발이 땅에 닿는 순간 살짝 미끄러지는 연출을 한 번 보이는 건 원래와 달랐다.
“땅이 저러면 여기가 이 지랄 나서 싫단 말야.”
“쭈우우욱 미끄러지니까.”
“그치. 이러면 어떻게 되겠냐, 포인트가 뒤에서 만들어진단 말이지.”
뭐? 그럼 생각했던 것보다 스트라이드가 더 길어지는 거네? 라는 것 때문에 얼핏 듣기론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근데 전혀, 승주가 했던 말처럼 원치 않던 스트라이드의 증가는 타격 포인트를 역으로 뒤에서 생성시키는 요인이 된다.
상체는 원래의 폼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다리‘만’ 더 내보낸다? 한 번 가만히 서서 머리를 가만히 놔둔 채 한쪽 발만 최대한 멀리 보내보자.
그래, 이거랑 똑같은 짓이다. 절대 이득이 아니다.
“거지 같잖아.”
“그렇겠지. 나도 솔직히 저 상태에선 마운드 올라가기 싫어. 언제였지,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그때 한 번 미끄러져가지고 다칠 뻔했잖아.”
딱!
“그치, 그거지.”
실제 경험담을 토로하자 승주는 갑자기 손가락을 튕겨대며 눈을 빛냈다.
“뭐가?”
“어차피 조건은 똑같단 거지. 내가 X 같은 상황이면 투수도 X 같다는 거야.”
승주의 이야기를 반대로 해보자면, 투수인 내가 거지 같다고 느끼면 같은 곳에서 상대하는 타자 또한 거지 같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걸 이용하는 거지. 이게 다 통용되는 건 아닌데, 비 올 땐 유독 투수들이 좀 사려.”
“사리…지. 그치.”
“일단 앞발 닿는 곳 상태가 거지 같으니까. 우리야 그냥 못 치면 그걸로 땡이지만 투수는 다르지 않냐?”
“다르지. 앞발 흔들렸다가 맞추기라도 하면 머리 아프니까.”
“그치. 애초에 타자가 훨씬 유리한 게임인데, 여기서 추가적으로 이득 챙겨가면서 싸우면 당연히 승률은 올라가지.”
아무리 잘 치는 타자라고 해봐야 3할. 아무리 잘나가는 타자라고 해봐야 4할.
경험과 데이터로 빗대어 봤을 때 많은 이들이 반대할만한 내용을 승주는 항상 자신있게 강조하며 다녔다.
승주를 오랫동안 알아 오며 느낀 점이지만, 이는 승주가 가지고 있는 자신감의 표현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승주가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내비칠 수 있는 근원에 가깝지.
“들을 때마다 적응 안 되네. 그 타자가 유리 어쩌고 하는 거.”
“아, 새끼. 맞대니까.”
야구는 타자가 유리한 게임이다.
승주가 이렇게 주장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생각보다 심오하다.
“말했잖어, 우리는 못 치면 그냥 그뿐이라고.”
“근데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그냥 점수 주면 그냥 그뿐인데?”
“니넨 점수 주면 게임이 지잖아.”
“야, 니네가 점수 못 따고 게임 지는 건 똑같애.”
“아니지. 지지는 않지.”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타선이 점수를 못 냈을 때,
“비기는 거지.”
극단적인 스코어는 0 대 0이 된다.
“그리고 타자가 지는 경우는 아웃당하는 거 하나밖에 없어. 근데 투수가 지는 경우는 안타, 볼넷, 데드볼, 실책 등등. 가짓수가 훨씬 많잖아.”
어쩜, 논리가 이렇게까지 지멋대로일 수가 있는 건지.
“그렇다고 막, 어?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거 강요하진 않잖아.”
“지금 하고 계신데요.”
“아, 새끼. 그냥 너니까 하는 소리고.”
미친놈인가.
강요하지는 않는다 해놓고, 승주는 계속해서 본인의 이론을 열심히 피력했다.
누군가는 듣고 나서 오 그런가? 싶을 수도 있고, 혹자는 듣고 나서 저건 궤변이다! 손가락질할 수도 있고.
웬만하면 타인의 입장을 존중해주는 내 성격상 승주와 나름의 토론을 벌이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단순 헛소리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진심으로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승주도 나름 연구를 많이 했던 녀석이고 사고실험을 많이 거친 녀석이거든.
무엇보다,
“너도 그런 생각은 했을 거 아냐. 아 X바, 내가 이러니가 X나 잘하지, 이런 생각.”
자신감의 표출이 아닌 자신감의 근원이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그 무엇보다 큰 메리트로 느껴졌다.
그 근원이 어디서부터 발로된 건지는 차치하고, 실제로 그 자신감을 경위하며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게 팩트니까.
“그런 거 있긴 하지.”
“그런 거야, 새꺄.”
결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결국 나도 비슷한 맥락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제구력.
나를 평가할 때 여러 측면에서 엘리트급 잣대를 들이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근본은 여전히 제구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구위가 강력하네, 수싸움에서 앞서나가네, 변화구가 많네, 다 중요해. 중요하지. 근데 이걸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근본은 누가 뭐래도 제구에 있다.
“이런 생각 하나만 있어도 나가면 생각이 확 달라진다니까. 아 X바, 내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뒤지진 않는구나.”
승주가 한 말처럼, 과연 내가 무작정 시스템을 만나서 무작정 구속과 구위를 올리기만 했다면 지금의 성적을 낼 수 있었을까?
“너도 얘기했었잖아, 제구 안 되는 투수만큼 필요없는 투수가 없다고.”
답은 ‘아니오’다.
“그러니까, 잘 봐라. 이 형님이 이 이론을 실전에서 써먹는 걸 보여줄 테니까.”
따봉!
녀석은 엄지 손가락을 한 번 내보인 뒤 턱턱 덕아웃의 계단을 타고 올랐다.
와아아아-!!
심판들이 다시 나오고, 방수포가 걷히고, 상대팀 수비 진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5번타자, 윤!! 승!! 주!!
다시 재개된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 좌타석에 들어선 승주는 운동선수치곤 꽤 왜소한 몸으로 상대 투수를 노려보았다.
5회 말, 한참을 중단했다가 다시 마운드를 밟은 상대 투수는 사소한 곳에서 시간을 끌어보려는 듯 계속해서 사인을 거부했다.
아직 비가 완전히 그치지 않은 상황에서 타자 또한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해봐.
승주의 옆모습은 특유의 기분 나쁘지 않은 썩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 승주의 논리대로라면, 어차피 시간 끌어봐야 불리한 건 투수라고 생각할테니까.
여기서 승주는,
“타임이요.”
“타임-!”
제 왼편에 있는 심판을 향해 가볍게 왼손을 들어보이며 일부러 시간을 끄는 투수를 응징했다.
응징?
본인 나름대로 흐름을 가져가려고 계속해서 시간을 끌던 투수에게 오히려 필요 이상의 시간을 주는 건 응징과 같다. 생각이 과해지거든.
모처럼 얻어낸 타임이겠다, 승주는 아예 타석 밖으로 나서서 배트를 몇 번 휘둘러보고 나서야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그 타이밍 동안 투수도 준비를 마쳤는지 이번엔 빠르게 사인이 정해졌다.
비 때문에 투수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타석과 덕아웃 방향 때문에 승주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그런 와중에 투수의 오른다리가 들어 올려지고, 오른발이 땅에 닿고, 왼손이 앞을 향해 뻗어 나오는 순간 1초 뒤의 사건이 보이는 듯했다.
“…갔네.”
따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