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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62화 (162/190)

162화. 땅바닥

새 이닝 시작과 동시에 한 점을 추가한 승주는 글자 ‘ㅎ’이 떠오르는 웃음과 함께 유유히 베이스를 돌았다.

“올…멋있는데.”

우수수 쏟아지는 빗물을 향해 오른손을 쳐들고 기뻐하는 모습이 꽤나 멋있다.

곧 덕아웃으로 돌아올 녀석을 환대하기 위해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덕아웃 입구까지 승주를 마중했다.

예에에이!

죽여, 그냥 죽여!

승주형, 제 마음이에요!

빗물을 맞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온 승주는 각 팀원들의 성격에서 추출된 가지각색의 환대를 받았다.

그냥 평소 본인처럼 두 손을 들고 좋아하는 명진이.

배트 노브로 헬멧을 콕콕 찌르는 훈이.

승주의 엉덩이를 발로 떵떵 때려대는 혁준이.

음, 혁준이의 마음 잘 알겠다.

그리고 마무리는 역시,

“에에에이, 찰칵!”

찰칵!

셀카 세리머니.

온갖 역경과 고난을 지나 내 앞까지 당도한 승주는 여전히 글자 ‘ㅎ’이 떠오르는 미소로,

따봉!

엄지를 들이댔다.

“봤냐?”

“뭐요, 아저씨.”

“아, 새끼. 벌써 까먹었냐? 이 형님이 딱, 어? 이론을 실전에서 써먹는 거 보여준다고 했잖냐.”

그리고 그 엄지 손가락이 땅바닥을 쳐다봄과 동시에 TMI 시작.

야, 봐봐. 오른쪽 발, 어? 발이 여기에 닿을 때 쭈욱 미끌리는 게 느껴지더라고. 그래가지고 내가 어떻게 했느냐, 원래는 내가 이렇게 스트라이드를 갔단 말야? 근데 이번엔…….

“됐구요, 선생님.”

“아, 노잼.”

뭘 자꾸 노잼을 찾아.

“아이, 아저씨요. 들어두면 너도 좋은 거라니까?”

“그러니까 뭐가요.”

“내가 투수는 아니니까 비 올 때 뭐 어떻게 던져라 말은 못 하겠는데 타자는 말이야.”

“예, 선생님. 말씀하십쇼.”

찾을 만 하셨군요.

“사실 투수만큼 땅바닥 상황에 예민하지는 않아.”

“그야…그렇지?”

타자가 제대로 맞춰내지 못하도록 최대한 강하고 정확하게 던져야 하는 투수.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어떻게 휘두르든 나가기만 하면 되는 타자.

모든 움직임의 근본이 되는 하체, 그리고 그 하체가 붙어있는 땅이 흐느적거린다면 더 큰 피해를 입는 건 당연히 투수다.

“근데 시야만큼은 오히려 타자한테 더 중요한 거거든.”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오는 물체를 선별하고, 또 그걸 어떻게든 쳐내야만 하는 타자.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어떻게 던지든 카운트만 뺏어내면 되는 투수.

움직임이고 나발이고, ‘비’라는 특수한 환경이 만든 여러 카테고리 중 시야에서 더 큰 제약을 입는 건 당연히 타자다.

“근데 또 어떻게 맞춰내기만 한다면 타자가 훨씬 유리하기도 해. 왜냐면 시야가 중요한 건 수비도 마찬가지거든.”

타자처럼 시야를 방해받고, 또 투수처럼 흐느적거리는 땅바닥을 영위해야 하는 야수.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일단 땅바닥에 공을 보내기만 하면 승률이 대폭 상승하는 타자.

“니가 말한대로면 뭐…난 답이 없는 거 아니냐.”

“왜?”

“애초에 타자가 유리한 게임이라매. 근데 니 논리면 이런 상황조차 투수가 불리한 거 아니냔 거지.”

애초에 타자가 유리한 게임이라던 말에 투수와 타자, 각각 두 가지와 한 가지씩 디버프를 받게 된다면 더더욱이 투수가 불리하게 된다.

아니 뭐 게임 들어가기도 전에 한 번 엿맥이려는 건가, 싶을 때 승주 녀석이 내 왼쪽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얌마, 내가 왜 이런 소릴 하겠냐.”

“얌마, 내가 알면 물어보겠냐.”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너한테 해주는 거냐면, 다른 투수랑은 많이 다르잖아.”

“다른…가?”

“다르지. 사인도 니가 내고, 또 너 생각한대로 던질 수도 있는 몇 안 되는 투수고.”

“음…그래서?”

“볼배합 짤 때 딱 한 가지만 기억하라고. 시야. 이 시야만 니가 제대로 이용한다면 삼진 세 개로 깔쌈하게 이닝 끝날 거야.”

시야를 이용한 볼배합?

승주가 해준 얘기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우천시 등판했을 때의 게임 플랜을 천천히 짜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렇게? 이건 어떻게?

그렇게 멍청-하게 그라운드를 노려보고 있길 잠시,

“한울이 준비하자.”

“아, 예.”

날 부르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간에 걸려있던 글러브를 집어 들고 불펜으로 향하는 동안 그라운드를 맹-하니 쳐다봤다.

“비….”

진행이 불가능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강하게 내리꽂히는 빗물들.

“시야….”

장대비는 분명하게 플레이 중인 선수들의 눈앞을 방해하고 있었다.

“스읍….”

여기가 고척이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신식 구장의 지하 불펜을 그리워하며 잠실구장의 불펜 문을 열었다.

덕아웃을 나서자마자 얻어맞기 시작한 빗물에 모자며, 유니폼이며, 신발이며, 심지어는 글러브마저 더욱 진한 색감을 내기 시작했다.

서벅서벅, 수분기를 과도하게 함유한 흙을 밟고 피처 플레이트 뒤에 섰다.

허리 돌려주고, 무릎 풀어주고, 햄스트링 풀어주고, 어깨 풀어주고, 목도 풀어주기 위해 고개를 위로 드는 순간,

투두두둑-!

“아잇, 진짜.”

면상에 궁극기를 강하게 때려박는 하늘이 참으로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이게 그, 물의 신인가 그거냐.

‘비’라는 차가운 액체가 꾸준하게 몸에 틀어박히는 탓에 영 오를 생각을 않는 체온을 억지로, 또 억지로 끌어올리며 피칭을 준비했다.

괜히 불펜 안을 뛰어댕기기도 하고, 벽 붙잡고 으헉으헉 소릴 내며 스트레칭을 해보기도 하고.

“건영아아아아.”

“예!”

내 몸에 달라붙은 수분기 중 빗물보다 땀의 분포도가 높아졌다 판단했을 때 건영이를 바로 불렀다.

빗물이 꼬장꼬장하게 묻어있는 포수 마스크를 얼굴에 쓰며 나타난 건영이는 내가 굳이 다음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홈 플레이트 뒤에 섰다.

모자챙에 튕겨 나온 물방울이 눈을 쿡 찌르자,

“아오.”

괜히 승질도 한 번 부려보고.

“일단 직구.”

“직구!”

한창 더울 땐 과열된 체온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런 날은 반대로 체온이 빠르게 식는 것 때문에 고생한다.

빗물에 개어진 로진 가루가 누런색으로 변모한 야구공에 스며들자마자,

풍-!

지체없이 피칭을 시작하며 워밍업을 개시했다.

내 몸, 내 유니폼, 내 글러브, 내 멘탈과 마찬가지로 건영이의 미트 또한 빗물에 푹 절었는지 포구음이 예사롭지가 않다.

오늘도 꽤나 힘든 등판이 되겠구나, 싶으면서도 건영이가 다시 던져주는 공을 받으면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진다.

오늘은 어떻게 던져야 할까, 오늘 컨셉은 뭘로 잡을까, 오늘은 누굴 상대할까.

“시야….”

다른 건 모르겠지만, 컨셉 하나만큼은 이미 정해졌기에 이 부분은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어떻게?”

다만 대단히 난해한 키워드를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 더 머리가 아프다.

투수 플레이트 뒤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건영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그 옆에 가상의 타자 하나를 세워두기로 했다.

가만히, 가만히 서서 가상의 타자를 노려본 지 얼마나 됐을까.

투두두둑―

빗방울이 모자챙을 때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뚝뚝뚝, 모자챙이 차마 수용하지 못한 수분기가 방울져 얼굴 앞에서 자유낙하 하는 모습을 보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올렸다.

그리곤,

톡!

“윽!”

눈알에 다이렉트로 물방울을 처맞곤 크게 움찔거렸다.

“아오…오?”

덕분에 다시 한번 달아오른 승질을 내보이다가도 그 위를 덮은 생각 한 장에 무심코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톡!

“아이….”

한 대 더 얻어맞았다.

“형, 뭐해요?”

멍청히 하늘 올려다보다가 혼자 아파하고, 멍청히 하늘 올려다보다가 혼자 욕하고.

임시 배터리를 짜고 있는 투수가 정신이 나갔는지 걱정이 된 건영이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냐.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직구 던진다.”

“예예, 직구!”

시야를 이용하는 것.

눈두덩으로 받아낸 빗방울로 인해 순간 두 가지 플랜이 빠릿하게 세워졌다.

푸엉-!

하나는 직접적으로 타자의 눈을 공격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타자의 눈을 공격하는 방법.

아, 물론 야구공을 면상에 던진다는 무서운 소리는 아니고.

“커브!”

“에이, 커브!”

촵!

평소 잡던 그립보다 훨씬 가탱이 쪽을 그러쥔 채 던진 커브는 그만큼 더욱 느리게, 하지만 더욱 커다란 각도로 꺾였다.

타자가 이 공을 제대로 보려면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야 할 정도로.

“직구!”

“헤이!”

커브를 던져본 뒤 다음으로 던지려고 마음먹은 공은 직구. 이번에 노린 로케이션은 높은 의미에서 존에 들어갈까 말까 싶은 정도의 구역.

이 정도로 강한 비가 내리는 와중이라면 타자는 최대한 빗물에 눈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수그린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균보다 아래를 향하는 시선은 낮은 구역에 대해 더욱 가깝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직구, 직구.”

“에이이!”

푸엉-!

높은 높이의 공에 대해선 변별력이 떨어지게 된다.

결국 오늘 피칭의 메인 테마는 높낮이가 될 예정이다. 필터링을 한 번 더 거치자면 높은 제구라는 단어가 남겠지.

“그러면 어…슬라이더! 아래로!”

“종슬!”

야구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땐 직구, 패스트볼 밖에 없었다. 그러다 커브가 발명되고 슬라이더가 발명되고, 또 뭐가 발명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이 기본적인 구종들로부터 파생된 구종들이 하나씩 발견되거나 발명되기 시작했지.

커터, 너클볼, 벌컨 체인지업, 원심 패스트볼, 슬러브, 직체, 이퓨스볼 등등.

각 잡고 연습해본 적은 없지만 약간의 시간만 준다면 실전에서 곧잘 써먹을 자신이 있다. 손 감각이 좋으니까.

하지만 딱히 관심없다. 지금 있는 구종들만 해도 무려 6구종, 충분하다 못해 넘치니까.

“커브 간다.”

“커브!”

퐙!

오늘은 과감하게 거기서 절반을 덜어내기로 했다. 바로 싱커, 체인지업, 스플리터.

오롯하게 높낮이에만 집중한 세팅이다.

직구는 심플하게 가장 빠르고, 또 가장 높은 구역을 노릴 수 있는 구종이다.

커브는 현존하는 모든 구종들 중 볼에서 시작에 볼로 끝날 수 있는 유일한 구종으로 오늘 작전에서 빠질 수가 없다.

슬라이더는 오늘 철저하게 낮은 ‘볼’만을 고집하며 헛스윙을 유도해낼 예정이다.

헛스윙을 유도하는 낮은 ‘볼’?

땅볼이 반쯤 자살행위인 지금 상황에서 싱커는 둘째치고, 단순하게 낮게 떨어지는 공을 생각한다면 체인지업이나 스플리터가 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이밍이 아닌 코스로 상대를 해야하는 입장에서 체인지업은 속도감이 너무 떨어진다.

또 단순 속도감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스플리터도 좋은 선택지임은 부정할 순 없지만,

“어…스플리터 한 번.”

“에이!”

팍! 투르르…….

“…에이씨.”

하릴없이 빗물을 잔뜩 머금은 공과 손가락은 필요 이상의 마찰력을 내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분리되지를 않는다.

스플리터라는 게 너무 일찍 빠지면 실투가 되거나 그냥 어이없는 볼이 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너무 늦게 빠지면 말 같지도 않은 공이 될 뿐이거든.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슬라이더는,

“슬라이더 간다.”

“예이!”

오히려 물기 때문에 손에 착 달라붙으며 평소보다 더 강한 회전력을 낳게 해주었다.

뭐, 실제로 이 물기가 공의 회전을 더 좋게 해주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건 그런 거지.

펑!

“어우, 좋다. 이거 좋다, 진짜 좋다!”

플라시보 효과 비스무리한 그런 거.

거의 땅바닥에 닿을 듯 말듯한 곳에서 슬라이더를 건져낸 건영이는 감탄의 강도가 꽤나 강한지 한동안 반구하지 못 하고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다.

“한울이, 슬슬 가자.”

“옙.”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는 건영이에 맞춰 나 또한 고개만 끄덕거리자니 코치님이 다가오셨다.

이런 지랄맞은 장대비 속에서 고생해준 건영이에게,

따봉!

엄지 하나를 선사한 뒤 차박차박거리는 잔디를 밟고 마운드로 향했다.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며 모자를 잠깐 벗은 뒤 어느새 살짝 자란 앞머리를 아예 뒤로 스윽 넘겨버린 뒤 그 상태 그대로 모자를 푹 눌러써버렸다.

덕분에 머리카락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을 것 같고,

“아으…진짜 마운드 개 같이 쓰네.”

대신 마운드 상태로 인해 스트레스받을 일만 남은 것 같다.

자그마한 웅덩이 하나가 생긴 꼴을 보고 있자니 내 앞에서 던진 투수들에게 경외심 같은 게 생길 지경이다.

아니, 진짜 이딴 마운드에서 어떻게 던졌지?

우선 그나마 좀 멀쩡하게 남아있는 진흙을 끌어다가 내 왼발이 닿을만한 구석을 메웠다. 적당히 차오르자 스파이크로 콱콱 밟아대며 땅을 다져주기도 하고.

“일단….”

어느 정도 된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고 나서야 제대로 된 연습 투구가 시작됐다.

푹!

하고 들어가는 발에 좀 불안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진 않다.

“오케.”

연습투구가 끝날 무렵,

9번타자, 포수 강용

이닝의 선두타자가 헬멧 챙에 매달린 빗방울들을 툭툭 쳐내며 타석에 등장했다.

강한 빗물이 영 신경쓰이는지 계속 고개를 훅훅 털어내보기도 하고, 눈을 몇 번 감았다 떠보기도 하고.

빗물 따위에게 지지 않겠다고 인상까지 팍 찌푸리긴 하는데 글쎄, 크게 효과는 없어보인다.

“플레이!”

강용이 불편해하든 말든, 심판은 제 검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시합의 진행을 재촉했다.

아마 심판도 지금 꽤나 심기가 불편하겠지.

협회는 그냥 콜드나 때릴 것이지, 뭐하러 이런 게임을 계속 진행하는 걸까. 그냥 적당히 빨리 끝내고 집에나 가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이나 하지 않을까.

그리고,

띠링-!

[눈 가리고 아웅]

- 1이닝 3삼진을 기록하며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변화구 +2

그 생각은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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