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악역
한동안 미친 듯이 비만 처 내리더니, 이젠 계속해서 더운 날만 계속되고 있다.
31도, 35도, 32도, 33도.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비 오는 날이랑 더운 날이랑 적당히 좀 섞여있으면 좋으련만,
“어으, 더워.”
어림도 없지.
그냥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땀이 후루룩 쏟아지고, 더위에 멘탈을 팔아먹은 뒤 입에서 흘리는 게 땀인지 침인지 정신머리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정말 그나마 야구는 플레이 타임대가 저녁에서 밤으로 맞춰졌으니까 다행이 아닐까.
“오늘 밤도 열대야랍니다.”
“…….”
에이씨.
어느새 앞머리를 뜨겁게 데우는 땀을 어떻게든 치워낸 뒤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모자를 흘끔 벗고 약속장소로 향하는 도중에 규진이형과 잠깐 마주쳤다.
“많이 덥냐?”
“아이스크림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정신 나간 게 확실하네.”
맞지. 나갔지, 멀리도 나갔지.
“오늘 사인회인데 이거, 아. 왜 하필 오늘이냐.”
“너 그래도 생긴 게 있는데 땀 좀 흘렀다고 달라지겠냐….”
규진이형…….
“어차피 못생겼는데.”
“…….”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그냥 생긴대로 살아.”
엄청 나쁜 사람이야, 진짜.
그 뒤는 뭐, 형은 날 3cm짜리 스파이크를 신어도 170cm가 안 된다느니, 거기에 모자의 꼭지 부분만 3cm로 늘리면 170cm는 맞춰지겠거니, 잠시 난타전을 벌인 뒤 덕아웃 밖으로 나섰다.
덕아웃 뒤를 빠져나와서, 로커룸을 지나서, 복도를 지나서, 게이트를 나와서, 아예 구장 밖까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뜨거운 햇빛 아래 혼자 멍하니 서있었다.
눈을 따갑게 쿡쿡 쑤시는 햇빛을 막아보고자 얼굴을 찌푸려보긴 했지만 큰 효과를 발휘하진 못 했다. 길다란 모자챙 앞에 손바닥을 붙여 햇빛 가리개를 연장시켜봐도 크게 효용성은 없고.
그렇게 더러운 인상으로 길바닥을 내려보고 있자니,
“…사람 많네.”
꽤나 많은 사람들이 구장 안팎을 오다닌다.
누가 봐도 고인물이다, 싶을 정도로 준비성 가득해보이는 아저씨 무리.
사이 좋게 팔짱끼고 다니는 커플.
부모님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어린아이.
잠실구장 하나만 놓고 봤을 때 관객이 대략 2만 5천명 정도. 거기에 양 팀 선수단과 중계팀들, 그 외 구장과 관련된 사람들까지 하면 이 작은 땅덩어리 안에 몇 명이 있는 건지.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새삼 묘하게 느껴졌다.
“어!”
“저기, 사인 좀요!”
“사진 좀 찍어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그거 잠깐 멍때렸다고 나와 같은 상의를 입은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나와 같은 상의?
“아.”
비교적 흔한 인상의 얼굴을 갖고 있는데도 날 어떻게 알아봤지, 싶다가도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원하 챌린저스의 홈 유니폼이란 걸 깨달았다.
구김살 하나 없는 하얀색의 길다란 바지.
‘Wonha’라는 빨간색 글자가 가슴팍에 박혀있는 하얀색 유니폼.
흰색 대문자로 ‘W’가 박혀있는 남색 모자.
나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은 해맑은 웃음으로 펜과 노트, 혹은 펜과 야구공 등을 들이밀었다.
“저기, 그….”
가야 되는데.
물론 평소 같았으면 달려드는 사람들 다 해줬을 거다.
5분이 걸리든, 10분이 걸리든, 한 시간이 걸리든.
하지만 지금은 어렵다. 지금 가야 할 약속 장소가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가는 곳도 아니고, 내 임의대로 약속 시간을 뒤로 미룰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이벤트잖아. 행사잖아. 팀 프런트에서 정해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내 팬, 혹은 원하 챌린저스 팬들도 중요하지만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팬들 또한 중요하다.
아니, 어떤 의미로 보면 여기보단 저기가 더 명분이 있지. 여긴 즉석이지만, 저긴 정식이거든.
“…….”
그래서 미안하다고, 가야 된다고, 다음에 해주겠다고, 그렇게 얘기해야 하는데.
“오래는 안 되고, 빠르게 해드릴게요.”
손은 이미 제일 앞에 있던 야구공과 매직 펜 하나를 뺏어든 뒤였다.
“가,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도 뒤에 줄 서요, 빨리. 나 시간 없어.”
“사인 열 장 해주세요!”
“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지 말고, 빨리 줄 서.”
“백 장이요!”
“너 나가!”
“와, 부조리 당했어!”
하하하!
즉석에서 차려진 미니 사인회장은 나름 성황이었다.
말은 나름 험악해도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 선수, 말대꾸는 겁나게 해대면서도 말 잘 듣는 팬들.
내 주위를 둘러싼, 혹은 내 앞에 주르륵 서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저마다 품에 사인 받을 물건들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야구공, 노트, 핸드폰, 글러브, 모자, 아대, 신발, 유니폼 등등.
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짬이다보니 아무래도 시간에 쫓기는 느낌을 받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몇 시예요?”
원하 챌린저스 원정 유니폼인 남색 유니폼에 하얀색 마커로 슥슥 사인하며 유니폼 주인에게 시간을 물어봤다.
대충 몇 시 몇 분이다, 라는 말을 듣고 나니 이젠 정말 가야할 것 같다.
손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면서 고개를 옆으로 스윽 빼서 사람이 얼마나 남았나 확인해보니,
“뭔데.”
아까보다 사람이 더 늘어났다.
오랜 기간 동안 팬 서비스 1위를 놓치지 않았던 경험으로 판단해보자면, 아마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거 다 해주면 한 시간 정도는 걸릴 게 확실하다.
지금 나한테 남아있는 여유는 대략 3분 정도. 한 세 명 정도 사인 해주고 미친 듯이 뛰어가면 약속 시간에 어찌 맞출 수는 있을 것 같다.
“죄송한데, 이쪽 분까지만 해드릴게요.”
…라는 생각을 한 건 나 뿐만이 아니었나보다.
“…은서 씨?”
언제 나타났는지, 예쁘장한 치마에 예쁘장한 반팔을 챙겨입은 은서 씨는 생긴 것처럼 꽤나 깜찍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저까지만 해주시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지금도 행사 시간에 많이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깜찍한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단호한 얼굴로 들러붙는 팬들을 쳐냈다.
때문에,
“그쪽이 뭔데 해준다 만다예요? 김한울 선수가 해주겠다잖아요?”
이런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충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땃땃하게 얼굴을 들이밀어도 은서 씨는 제 목에 걸려있는 명패 하나를 들이밀었다.
“원하 챌린저스 프런트 직원입니다. 지금 저쪽에 행사 담당인데, 김한울 선수가 왜 안 오나 찾아다녔더니 여기 있었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흘끔 올려다보는데 눈빛이 꽤나 살벌하다.
너 여기서 뭐하냐?
뭐 그런 눈빛.
이런 상황에서조차 각자의 입장이 있는 거고, 또 그 입장이 다르다보니 아무래도 마찰이라는 게 발생하지.
또 언제 이런 기회를 볼지 확신할 수 없는 팬.
“저까지만 해주시면 되잖아요. 저 하나 해주는데 얼마나 걸린다고요.”
본인의 할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 느끼는 직원.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미 많이 늦었습니다.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껴서 난감함을 느끼는 당사자.
선행이라는 게 꼭 좋은 형태로 되돌아오진 않지만, 그에 대한 각오 정도는 하면서 살기에 그 결과물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편이다.
단, 그 부작용이 온전히 나에게 되돌아온다면.
근데…….
툭―
“그럴 거면 아까부터 와서 해야지, 이제와서 그러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툭―
“지금 거기 사람들만 사람이에요? 우리 기다린 건 신경도 안 써요? 우리는 뭐 허수아비야?”
“죄송합니다.”
툭―
“아니, 죄송이란 말만 하지 말….”
탁!
이건 선 넘었지.
뭐라뭐라 하면서 은서 씨의 어깨를 툭툭 밀어대는 녀석의 손목을 탁 잡아챘다.
“뭐예요?”
“적당히 해요.”
“뭐가요?”
“뭘 뭐가야. 적당히 할 줄을 몰라, 왜.”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이런 상황에서 잡은 손에 힘 꽉 줘가지고 ‘읏, 으으!’ 뭐 이런 장면도 나오더만.
근데 여긴 현실이고, 그랬다간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져버린다.
대신 이 녀석의 손목을 적당히 놓은 뒤 은서 씨의 손목을 붙잡고,
“어엇!”
내 뒤로 휙 당겨버렸다.
“내가 웬만하면 사인 거부 안 하고 사진 거부도 안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해주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본인 같은 사람한테는 나도 해주기 싫어요.”
“아니, 사인해주고 팬 서비스하는 게 의무라면서요? 그거 누가 얘기한 건데요?”
“누가 얘기하긴, 내가 얘기했지.”
“근데 이래요 지금?”
“이러죠. 지금 내 눈엔 본인이 내 팬으로는 안 보이니까.”
“뭐….”
“주변에 봐요. 지금 사람들이 본인을 어떻게 보고 있나. 하다못해 본인 일행이 지금 본인을 어떻게 보고 있나.”
우두두두 쏘아진 내 말에 녀석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저거 뭐야? 왜 저런데?
아, 이러고 저러고 해서…….
와, 진짜 나쁜 놈이네!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과정 중 약간의 과장이 섞인 면이 있긴 하지만, 굳이 정정하려들지 않았다.
나쁜 놈한텐 확실하게 엄벌을 내려야지! 같은 생각보단 여기서 팍 꺾어둬야 허튼 짓을 못 하는 게 이런 사람이니까.
“지금 이래도 누가 잘못한 건지 모르겠어요?”
“…….”
결정타 한 마디에 녀석은 지 혼자 움찔움찔거리더니,
“아아, 알았어요. 됐어요.”
스윽 인파를 헤쳐나가려고 했다.
탁-!
“잠깐만.”
근데 어딜 가.
“아, 또 왜요?”
“사과는 하고 가야죠. 어딜 그냥 가려고 들어.”
“무슨 사과요? 사과는 내가 받아도 모자를 판에.”
“본인이 무슨 사과를 받아야 되는데요?”
“내가 사인 받겠다고 기다린 시간이 얼만데, 그건 아무 말도 없어요?”
뭐래.
“아까 여기 직원 분이 죄송하다고 3백번은 말했는데 못 들었어요?”
“언제요?”
“아까요. 본인이 여기 직원분 어깨 툭, 툭 밀어제낄 때마다 얘기했는데요?”
“내가 그랬다구요? 얼토당토 않은 꼬투리 잡지 말고요.”
“그거 본인 버릇이에요?”
“예?”
“버릇이라는 게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거든. 지금 본인도 모른다는 건 그게 본인 습관이라는 것 밖에 안 되는데.”
“아니, 그러니까 내가 언제 그랬는데요.”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볼까요?”
“…….”
다시 한 번, 녀석은 주위를 흘끔 둘러봤다.
진짜 왜 저래?
진짜 기억도 못 하는 거야?
진짜 습관인가봐.
처음 시작부터 모든 걸 지켜봤던 사람들은 이미 녀석에게 적대적인 눈빛을 쏘아보내고 있었다.
“아, 알았어요. 사과하면 되잖아요. 미안해요. 됐죠?”
“그걸 왜 나한테 사과를 해. 여기 당사자한테 해야지.”
“아니, 한울 씨….”
내 뒤에서 시종일관 불안감에 떠는 은서 씨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내 옆으로 스윽 밀었다.
“아, 미안해요. 미안하다고요. 됐어요?”
“됐어요, 한울 씨. 됐으니까….”
“됐다네. 가요.”
은서 씨의 오케이 사인이 나오자마자 손목이 자유로워진 녀석은 빠르게 인파 사이를 헤쳐 어딘가로 도망쳤다.
“가요.”
“…….”
“늦었다매.”
“…네.”
그냥 평범한 사람 둘이 길에서 싸워도 생난리인데, 싸우는 사람 중 한 명이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멀뚱히 서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몰려들텐데 거기에 무슨 일까지 터지면 좋다고 사람들이 몰려들겠지.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죄송합니다.”
때문에 나와 은서 씨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양해를 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
“왜. 왜 또 그렇게 보는데.”
빠르게 걸어가던 와중 옆에서 느껴지는 강한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은서 씨가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무슨 뒷감당이요.”
“한울 씨 프로잖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그렇게 이미지 강조하는 사람이 왜 그랬어요?”
“내가 잘못했나? 그 놈이 잘못한 거지.”
“아니, 그래도.”
“뭘 그래도야.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 그리고 잘못해도 내가 잘못한 거지, 은서 씨가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나는 당사자도 아니니까 빠져라, 뭐 이런 거예요?”
“뭘 그렇게까지 받아들여요, 또.”
“그럼 뭔데요?”
가던 길을 잠깐 멈추고 은서 씨의 화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항상 웃는 낯으로 있으면 나름 깜찍한 얼굴이고, 무표정으로 있자면 나름 성숙한 얼굴이 잔뜩 화가 나있으니 꽤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애초에 잘잘못 따지는 것도 웃기긴 한데, 원인 제공으로 따지자면 나 때문이잖아요. 근데 왜 은서 씨가 피해를 보는데.”
“내가 봐야죠.”
“그러니까 왜 은서 씨가 보냐니까?”
“…….”
나름 대화로 풀어보려 한들, 은서 씨의 표정은 영 풀어지지 않았다.
“…한울 씨 오래 봐와서 한울 씨 성격 잘 알아요. 자기 때문에 주변 사람 피해 보는 거 진짜 극도로 싫어하고, 민폐 끼치는 거에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는 사람 같단 말야, 가끔 보면.”
잘 아네.
“그래도 자기 위치는 생각해요. 여긴 드라마가 아니에요. 현실이에요. 생각없이 그랬다가, 진짜 폭행 사건이라도 터지면 어떡하려 그랬어요.”
“어쩌긴. 때리는 거 그냥 다 맞고 합의금이나 뜯어내는 거지.”
“뭐래, 한울 씨 말고 원하요. 팀에서 한울 씨 같은 불펜 빠지면 뒤에 후폭풍은 어쩔 거냐구요.”
에이, 진짜…….
나도 나름 빡이 돌아 앞뒤 분간 못 하고 들려든 건 맞지만, 그에 대한 대답이 이런 정도라니.
나도 괜시리 흥이 깨져선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옆에 있던 은서 씨가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악역 같은 건 내가 할테니까, 한울 씨는 야구만 신경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