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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65화 (165/190)

165화.박은서

슥슥, 슥슥슥.

“감사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인다.

“다음 분이요.”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김지연이요!”

“김지연 씨요.”

슥슥, 슥, 스윽.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네네, 감사해요. 들어가세요.”

한 번 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여보인다.

일련의 사건, 혹은 사고로 인해 사인회 시간에 살짝 늦긴 했지만 그리 막 엄청 늦진 않았다.

기다려주는 입장에서 이 정도면 무슨 일이 있는갑지, 하고 넘겨줄 수 있을 정도.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장형민입니다!”

“장형민 씨….”

또 슥슥슥슥슥.

새롭게 등장한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 다음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생긴 잠깐 사이 옆자리에 앉은 진형이를 흘끔 쳐다봤다.

뭔가, 어물쩡거리는 게 영 하기 싫어하는 느낌.

근데 그런 걸 보고도 나중에 한 번 쥐잡듯이 잡아야겠다, 싶은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저기…이, 이름이….”

“이석무입니다.”

“잠시만요….”

제 앞에 선 팬의 이름을 슥슥 써내린 진형이는 뻘쭘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팬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와아, 박진형 선수 진짜 팬이예요!”

그리고 또 다시 나타난 팬의 얼굴을 보곤 똑같이 얼굴이 굳어간다.

아, 이런 걸 내가 왜 해야돼! 라기보단,

“가, 감사합니다….”

워낙에 낯을 좀 가리기도 하고 살짝 소극적인 감이 없지 않아 있는 녀석이다보니까. 꽤 친해졌거나 많이 익숙한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초면은 아무래도 어렵나보다.

그럼 놈이 타석에만 들어가면 무슨 야수로 변신한 것마냥 야성적인 타격을 해대는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사람 성격 훅훅 바뀌는 거에도 정도가 있지.

진형이 같은 선수를 볼 때면 그냥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하고, 야구를 잘해서 야구로 돈을 벌고 싶을 뿐인데 이런 것까지 시켜야 하나 싶을 때가 있긴 있다.

그냥 야구만 시키면 안 되나?

“진형아, 긴장 풀고. 얼마 안 남았으니까.”

“아, 네!”

응, 안 돼.

“성함이요?”

“최지나예요!”

“최지나 씨…네, 여기요.”

“감사합니다! 평균자책점 0점 응원할게요.”

“아이구, 감사해요.”

그렇게 야구가 좋아서 야구만 하고 싶다면 그냥 자기가 야구단 차리면 된다. 돈을 벌고 싶다면 사람 상대 안 하는 다른 일을 하면 된다.

프로니까. 프로야구선수니까. 프로야구선수는 팬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진형이 정도면 양반이지. 최소한 의무감을 느끼고 실행은 하잖아. 그렇다고 길가다가 들이대는 팬을 거절하는 것도 아닌데.

방금 전 진형이의 허리를 느슨하게 만들어준 말처럼, 줄 서있던 200명의 팬들 중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 10명 남짓.

살짝 뻐근해지려는 목을 살살 돌려주자마자,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유현이예요.”

“잠시만요….”

“그, 혹시 악수도 한 번 가능하실까요?”

“아우, 그럼요.”

또 다른 팬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사실 이번 미니 사인회에 대한 계획서를 받았을 땐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앞섰다.

내가 사인 별로 안 해주는 사람도 아닌데 그냥 아무때나 받지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인회를 열어야돼?

근데,

슥슥슥―

“여기요.”

“와, 감사합니다. 앞으로 직관오면 이거만 입을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감사합니다!”

내 등번호가 마킹된 새 유니폼을 보니까 팬들 입장도, 그리고 프런트 입장도 이해가 되긴 하더라.

니가 좋아하는 그 선수랑 아예 각 잡고 사인회를 열어줄게! 심지어 그 사인 받을 물품은 해당 선수 유니폼인데, 그것도 우리가 줄게! 그러니까 어떤 물건을 사고, 그 영수증으로 응모해!

그런 어른들의 사정에 따라 치러진 사인회는,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어머, 어떡해애….”

“어떡하긴요, 이제 야구보러 가야지.”

“아우, 감사합니다! 저기, 사진도 혹시….”

“아, 네네.”

찰칵-!

“감사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나름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사인을 받은 행운의 당첨자가 사라지자 이 구역에 남은 건 나, 진형이, 그리고 몇몇 협력업체 사람들과 영진씨, 그리고 은서 씨.

“아윽, 끝났다아…진형이도 고생했다.”

“형도 고생하셨어요….”

“할만하디?”

“아뇨….”

“익숙해져야지, 마. 앞길 창창한 새끼가 벌써부터 그렇게 어려워하면 되냐.”

“진짜 야구만 해와서 이런 성격인 걸 어떡해요.”

“그럼 난 야구만 안 해서 성격이 이러냐?”

“아니었어요?”

“미친놈인가.”

본인과 직접적으로 대화해야 할 사람들이 싹 사라지자 진형이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슬슬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볼게요.”

“고생했다.”

“네네. 얼른 오세요.”

“싫어, 천천히 갈 거야.”

“양아치네, 이 형.”

“정신이 나갔구나, 진형이가.”

일단 진형이가 먼저 자리를 벗어나고,

“은서야.”

“네, 팀장님.”

“일단 여기 업체 분들이랑 이야기 나누고 있을테니까. 너 필요한 장비만 마무리해. 나머지는 그냥 놔둬도 돼.”

“아, 네.”

“먼저 가볼게요, 한울 씨.”

“예예. 나중에 오실 때 커피 잊지 마시고.”

“법인 카드로 1L 아메리카노 사드릴게요.”

“양아치네, 영진 씨.”

“아직도 모르셨어요?”

“얼른 가요, 빨랑.”

그렇게 영진 씨까지 사라지고.

“…….”

“…….”

나름 넓은 회장에 덜렁 나와 은서 씨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에휴.”

은서 씨는 한숨을 푹 쉬더니 영진 씨의 지시에 따라 들고 있던 카메라를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좀 멋있더라.”

“뭐가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 마디 툭 던지니 아까의 감정이 좀 남아있나, 이쪽은 보지도 않고 카메라만 끼릭끼릭 만져대며 적당히 대꾸한다.

저 정수리 진짜 한 번 쿡 찌르고 싶네.

“아까.”

“아까 뭐.”

“아까 뭐랬더라, 악역은 내가 할테니까 한울 씨는 야구에만 신경 써요?”

“…….”

“여긴 드라마 아니라더니, 웬만한 드라마보다 대사 좋….”

“…….”

“…더라.”

크흠.

“하아…이거 잘못하면 말 나올 거 같단 말야.”

“무슨 말이 나와요?”

“아까 있던 일이 그냥 작은 일 같아요?”

“나름 큰일이긴 하지.”

“알면서 그렇게 들이대요?”

원하 챌린저스를 사랑하고, 또 그 때문에 원하 챌린저스에서 일하는 사람이 해당 팀 선수들이 떠내려가는 걸 바라만 볼 수 있겠나.

“근데 나도 내 위치가 있는데.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그 꼴을 보고만 있으면 더 뒷 얘기가 나올 거 같은데?”

나도 마찬가지로, 해당 팀 직원이 험한 꼴 당하는 걸 가만히 바라만 볼 수 있나.

딱히 내가 정의의 사도라 생각하진 않는다. 불의를 보고 못 참는 성격도 아니다.

그냥 딱 중간.

적당히 정의롭고 적당히 야비하며, 불의를 너무 잘참을 때도 있고 급발진하며 달려들 때도 있다.

나만 그러진 않을텐데. 사회생활하는 현대인이라면 대부분 이러지 않나?

“애초에 잘못은 그 사람이 했던 거고. 나, 은서 씨, 그 사람 셋만 있던 공간이면 또 모를까 거의 몇 백 명 앞에서 그 꼴이 났던 거니까. 오히려 좋은 얘기만 나오면 나왔지, 너무 걱정은 말고.”

“하아….”

내 얼굴만 보면 짜증이 나는 건지, 아니면 머리가 아픈 건지.

은서 씨는 다시 한 번 진하게 한숨을 뿜어내곤 고개를 슥 돌려버렸다.

“한울 씨는….”

“엉?”

“…아니에요.”

“뭔데.”

“…….”

“…은서 씨.”

“왜요.”

“음…사람이 사람을 빡치게 하는 유형이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거든.”

“그래서요?”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거고.”

“…….”

“…….”

“…….”

“…….”

“…야.”

“니가 방금 했던 게 이거야.”

“…….”

그 놈의 점점점.

“왜, 뭔데. 할 말 있으면 해요. 어차피 경기까지 시간도 있겠다, 둘 밖에 없겠다.”

“됐어요. 지금 한울 씨한테 얘기해도 의미없을 것 같아서.”

작게 고개를 저어낸 뒤 은서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그….”

하지만 이내 멈칫거리더니 나를 흘끔 쳐다본다.

“…고마웠어요. 아까.”

* * *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기엔 내가 당면한 상황은 꽤나 통쾌하게 흘러갔다.

며칠 전 트러블이 있던 팬이 개인 SNS에 나와 은서 씨에 대한 험담을 주르륵 늘어놓았단다.

김한울 그 새끼 팬들 위하는 거 다 위선이고 어쩌고 저쩌고, 결혼한다더니 다른 여자랑 어쩌고 저쩌고, 직원 걔는 싸가지가 어쩌고 저쩌고.

이런 가십거리 좋아하는 옐로우 페이퍼들이 이 내용을 놓칠 리가 당연히 없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얘기는 나름 화제가 됐다.

나 아직도 기억한다, 뭐? 김한울의 역겨운 가식? 그딴 걸 기사 타이틀로 붙여? 니, 기자 이름이랑 언론사 기억해놨다.

여튼, 이 얘기가 그냥 지 혼자 지껄였다가 묻혔으면 차라리 모르겠는데, 기사까지 나버리며 나름 화제가 되자 오히려 그 녀석에게 독이 되어버렸다.

“용서는 무슨.”

야구판에 귀추를 주목하는 야구팀은 당연히 이 사실을 접하게 되고 나와 은서 씨를 향해 사실조사가 들어왔다.

근데 사실 사실조사랄 것도 없었다. 내가 은서 씨에게 공언했듯, 워낙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많았기에 녀석의 게시글에 대한 반박글이 훨씬 더 많았거든.

덕분에 구단 운영진에게 해당 반박글 여럿을 찾아 보여주는 것만으로 우리의 일처리는 끝났고,

“합의금이라도 받지 그랬어요?”

구단의 일처리는 끝나지 않았다.

당연히 구단 차원에서의 명예훼손 고소가 들어갔고, 나한테 뭐 용서를 구한다 어쩐다 하는데,

“합의금은 같은 소리하네. 그 돈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아.”

어림도 없지.

“아니, 받아서 나 주라고. 나도 피해잔데.”

“…….”

은서 씨는 빨간불이 꺼진 카메라를 가방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으며 투덜댔다.

“왜 그렇게 사람이 눈치가 없어.”

“내가 뭔 눈치가 없어.”

“나 같았으면 어? 적당히 합의금 받고 대인배처럼 딱, 그 합의금 나한테 주고. 은서 씨 고생하셨습니다, 딱 하고.”

“합의금 받는 시점에서 대인배가 아닌데.”

“나한테는 대인배인데.”

“너한테 돈 줘서?”

“그럼.”

정신이 나갔구나.

“어쨌든 잘 해결됐으니까 진짜 다행이지. 다음부턴 진짜 그러지 마요.”

“뭘 그러지 마요. 그 상황에 안 그러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 다 이상한 사람 만드네. 진짜, 한울 씨 인성 못 됐다.”

은서 씨는 원래의 쪼물딱이로 돌아왔다.

까불까불거리고, 괜히 옆구리 툭툭 찌르고, 잔망스럽게 웃으며 사람 정신 박박 긁는 그런 모습.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최근 언젠가부터 이미지에 안 맞게 진중한 모습만 보이던 은서 씨는 영 딴 사람 같았다.

“합의금은 됐고. 그냥….”

“그냥 뭐.”

“…그냥, 나중에 밥이나 사줘요.”

이럴 때 보면 또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나중에 영진 씨랑 같이 해서 한 턱 낼게요.”

“아니, 거기에 팀장님을 왜 껴요.”

“영진 씨도 고생 많았을텐데 껴야지.”

“내가 제일 고생 많았으니까 나만 사줘야지.”

“안 돼.”

“왜!”

“그림 이상해지잖아요.”

“뭔 그림이 이상해져요?”

“…….”

그냥 지긋-이, 은서 씨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알았어요, 그럼.”

민영 씨의 이야기를 들이대야하나, 싶은 고민을 잠시 하다가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분위기만 더 요상해질까봐.

“요즘 상수가 많이 무섭네요. 오늘 좀 어렵겠어요. 저기는 1선발인데 우리는 대체선발이다보니까, 아무래도….”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런 애들 하나도 안 무서워.”

다행히 은서 씨도 눈치라는 게 있는지, 먼저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주었다.

“그런 것치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거 같은데.”

“그냥 무릎이 추워서 그런 거지.”

“지금 8월인데?”

“8월인데 꼭 더워야되나.”

“이마에서 식은땀 나는데?”

“오늘 처참히 털릴 상수를 위해 흘리는 눈물임.”

“정신 괜찮죠?”

에이씨.

“박해진 선수가 했던 얘기 기억하죠?”

“걔 또 뭐 이상한 소리 했어요?”

“아니이, 왜 그때. 그때, 올스타전 때 박해진 선수 인터뷰했었잖아요.”

“아아, 그거.”

이번 시즌 내 첫 실점을 만들어주겠다, 어쩐다 했던 그거.

“그건 왜요?”

“상수 쪽 미튜브 PD님이랑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얘길 얼핏 들은 게 있거든요. 박해진 선수가 진짜 이를 갈았다던데요?”

“걔가 이를 갈아봐야 뭐 얼마나 갈았겠어.”

가소로움을 가득 담아 코로 내뿜어주니 완벽한 비웃음이 완성되었다.

“상수한테 두 경기면 아직 위험한 걸 알죠?”

“알지알지, 잘알지.”

“잘 좀 해 봐요.”

“나만 잘한다고 되나.”

“한울 씨가 잘해야 다른 선수도 잘하지.”

응원을 하는 건지, 꼽을 주는 건지.

정확히 그 중간 지점에 선 은서 씨는 평소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래서 은서 씨는 어느 쪽을 바라는 건데요.”

“뭘 어느 쪽이요?”

“내가 무실점하기를 바라요, 아니면 박해진이 타점 올리길 바라요?”

“저요? 저야….”

따악-!

은서 씨는 내가 아닌, 그라운드에서 배팅 연습 중인 박해진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한울 씨가 무실점하길 바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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