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66화 (166/190)

166화. 영웅

8월 하순.

시즌 종료까지 약 한 달 좀 넘게 남은 이 시기를 과연 선수들은 어떻게 체감하고 있을까.

“와…벌써 한 달 밖에 안 남았나.”

규진이형은 이렇게.

“한 달이면 엄청 많이 남은 거지.”

성현이는 이렇게.

시즌 종료까지 대략 30경기 정도 남아있는 이 시기가 되면 슬슬 각 팀은 남은 시즌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생각한다.

하위권 팀들은 본인의 위치를 알고 시즌 마무리를 일찌감치 준비한다.

중위권 팀들은 혹시라도 4위권에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혹시라도 4위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긴장을 유지한다.

상위권 팀들은 이제 슬슬 정규시즌보단 포스트시즌에 시선을 맞추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현재 리그 1위를 달리는 원하 챌린저스는 당연히 세 번째에 속하면서도,

“스읍….”

일정부분이 두 번째 카테고리에 겹쳤다.

아, 당연히 우리가 ‘4위’ 밑으로 떨어질 거란 걱정 같은 건 아니고.

5위 한성 위너스가 46승 1무 49패. 1위 원하 챌린저스가 58승 39패.

한 달 꼬박 투자해 3경기차를 뒤집을 수 있냐 없냐로 싸우는 현대 야구에서 열 경기는 사실상 확정에 가까운 수치니까.

우리가 두 번째 분류와 비슷한 마음가짐을 갖는 이유는 뭐, 뻔하게도 상수 타이거즈 때문이다. 시즌 성적 56승 41패.

좀 떨어뜨렸나, 싶으면 금방 따라붙고. 좀 너무 붙는데, 싶으면 또 지들 알아서 떨어지고.

이젠 아주 그냥, 그냥 아주 지긋지긋해.

“경기 수로 따지면 대충 30경기 남은 건가.”

“오늘 경기 포함해서 29게임.”

“흐음….”

“왜?”

딱히 뭐가 있는 건 아닌데…….

“생각보다 많이 남았네, 싶어서.”

“많이 남긴 했지.”

아직 한참 남았다, 성현이가 했던 말과 맥락이 비슷해 보이지만 속에 내포된 의미는 전혀 다르다.

단 한 경기, 단 한 타석, 공 하나하나 허투루 보낼 수 없는데 무려 30경기나 남았다고? 젠장, 더욱 열심히 해야겠는 걸!

“아, 그냥 지금 시즌 끝났다 해주면 안 되나.”

나한테 그런 이상한 거 바라지 마라.

“뭘 벌써부터 끝내.”

“지금 끝나면 리그 1위잖아.”

표현은 성현이와 비슷하나 본질은 규진이형과 더욱 가깝다.

몇 게임차로 이기고 있든 그런 거 다 필요없고, 그냥 오늘 경기로 시즌이 끝난다면 원하 챌린저스가 리그 1위 확정인 거잖아.

하지만 이상은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네.”

현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넋 놓고 지껄인 말에 성현이가 극혐하는 표정으로 한 걸음 멀어졌다.

아니, 뭔 생각인지는 알겠는데 그렇게까지 막 대놓고 피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헌희야.”

“예, 선배님!”

“저 형이랑 같이 놀지마. 너도 이상한 물든다.”

“예?”

이상한 물이라니.

“야,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 이상한 짓 하는 거 같잖아.”

“아니야?”

“…….”

말이 너무 심하네.

“우린 프리배팅이나 치러 가자.”

“아, 예. 선배님 혹시 타격할 때 오른쪽 팔꿈치가….”

누가 91 라인 아니랄까봐,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쌉소리를 흘려놓곤 성현이는 헌희와 함께 덕아웃을 빠져나갔다.

“행님.”

“…왜요, 이상한 아저씨.”

거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91 라인.

“사랑합니다.”

“…….”

명진이는 대뜸 나타나선 두 손으로 두 개의 하트를 만들어보였다.

“미친놈인가.”

그래, 나도 사랑한다 이 새끼야.

“형님.”

“왜.”

“생각이랑 말씀이랑 바뀐 게 아닌지 한 번 재고해보심이 어떠실까요.”

“음….”

입 밖으론 미친놈인가, 라 했고. 생각으론 나도 사랑한다, 라 했고.

“제대로 말했네.”

적당한 문장 나열이라 생각한다.

“에이, 형님 실망이야.”

“그럼 난 바늘망.”

“…….”

“…야.”

“예.”

“맨날 니가 하던 거잖아.”

“전 그런 저급한 개그 같은 건 취급하지 않습니다.”

저급…….

“X발.”

기껏 맞춰줬더만, 이미 역적이 된 명진이는 지 혼자 낄낄거리면서 옆 자리에 철푸덕 앉았다.

“…몸 안 푸냐?”

“저 오늘 선발 아닙니다.”

“왜.”

“감독님이 쉬라고 하시던데요?”

“어디 아프냐?”

“아뇨?”

그러고보니 오늘 성훈이형도 좀 널널하게 움직이는 거 보니…….

“오늘 헌희랑 기범이 같이 들어가냐?”

“예. 헌희가 쓰리 들어가고 기범이형이 숏 들어간대요. 또…훈이형 대신에 병천이 들어가구요.”

오늘은 스타팅에 꽤나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왜…굳이 그러지.”

좀 잔인하게 들릴 순 있지만, 백업 멤버의 역할은 단순명료하다.

“글쎄요? 체력 안배 같은 거 아닐까요?”

주전 멤버들의 체력 안배를 위한 스페어 역할.

그렇다면 백업 멤버들이 무조건적으로 스페어 역할만을 자초해야 하느냐?

그건 당연히 아니지.

때로는 주전보다 더 강력한 창이 되어 적군을 찌를 수도 있고, 때로는 주전을 위협하는 슈퍼 백업이 되어 뒤를 든든히 받쳐줄 수도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래봐야 백업이다.

그 선수들을 비하하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실력차라는 게 존재하는 건 엄연한 사실이잖아.

“굳이 지금?”

무슨 게임처럼 넌 파워 몇, 주력 몇, 송구는 몇, 이렇게 선수의 스펙을 딱딱 정할 순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라는 건 확실히 존재한다.

이유가 어찌됐건 전투력 100짜리 선수가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라인업에서 빠졌을 때, 그 자리를 메꾸는 건 전투력 80짜리, 잘쳐줘야 전투력 90짜리 선수가 참석하게 된다.

겨우 20? 겨우 10?

아니, 무려 20이나 10.

“그건 좀…저도 잘 모르겠네요. 다른 게임도 아니고 상수랑 만나는 시리즈인데요.”

특히 오늘 같이 상수 타이거즈와 맞상대 해야하는 경기라면 10은 무슨, 전투력 차이 ‘1’도 후반에 가선 어마어마한 눈덩이가 되어 우리 몸을 눌러올 거다.

“아니면…제가 더 이상 원하 챌린저스에서 쓸모가 없는 걸까요….”

물론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긴 하다.

주전 선수와 백업 선수 간 전투력 차이가 거의 나지 않을 때. 혹은 주전 선수의 전투력이 100인데 백업 선수의 전투력이 102 정도일 때.

만약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전투력 100짜리 선수는 백업 멤버로 격하될 거고, 전투력 102짜리 선수는 주전 멤버도 격상될 거다.

실력에 따라 제 위치를 찾아가는 건 프로라면 아주 당연한 이치니까.

하지만 원하 챌린저스라는 이 특이한 팀에서 그런 현상은 아직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대주자의 입지를 단단히 다진 빠른 발과 내야 전 포지션에서 평균 이상의 수비력을 갖춘 기범이?

과감한 스윙과 더불어 라인 드라이브 타구로 리그 최고 수준의 갭 파워를 갖춘 헌희?

미안한데,

“아냐. 그건 아냐.”

그래봐야 명진이는 명진이다.

어깨가 살짝 약한 편이긴 하지만 겁나게 넓은 유격수 수비 범위.

일전 도루왕까지 섭렵한 전적이 있을 정도로 빠른 발.

똘끼 충만한 사고 방식으로 상대방의 볼배합을 뒤틀어버리는 센스까지.

두 사람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과거처럼 명진이가 전력에서 이탈해버렸거나 각자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메우지 못한 상태라면, 절대 명진이에게 비빌 수조차 없다.

그럼 왜?

“흠….”

일개 선수 따위가 감독님의 생각을 어찌 읽어내겠냐만 굳이, 굳이 이해를 해보자면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는 포인트가 있긴 하다.

미리보는 한국시리즈로 불리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주전 멤버 외 나머지 자리를 누구로 메꿀지 고민하는 건 아닐까?

페넌트레이스보다 훨씬 자세하고 다양한 작전들이 오갈 한국시리즈는 그만큼 선수들의 자리 이동 또한 다수 발견될 여지가 크니까 말야.

미리보는 한국시리즈?

“흑흑….”

대단히 건방져보이는 단어 선택일 순 있지만, 이거 내가 말한 거 아니다.

무려 프로야구 중계진들이랑 여기저기 퍼져있는 기자들이 쓴 단어를 난 그대로 옮겨왔을 뿐이야.

“어헝헝….”

아니면 명진이가 한 말마따나, 정말로 체력 안배를 위한 일일 수도 있다.

곧 9월이긴 하지만 여전히 더운 이 날씨에 지쳐 밸런스를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로 인해 크게 다치거나.

실제로 명진이 같은 경우는 작년에 복사근을 다쳐 무려 열흘이나 전력에서 이탈했던 경험도 있고 하니 더더욱 신경쓰이겠지.

빠지고 나서 울면서 후회하는 것보단, 그래도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로테이션을 돌려가며 체력을 안배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

“으흑흑….”

“아, 좀 닥쳐봐.”

“아이고 형님, 이 아우를 버리십니까.”

진짜 버리고 싶다. 정말로 갖다 버리고 싶다.

“형님, 실망입니다.”

“…….”

뭐라 리액션을 못 하겠다. 또 이상한 쌉소리 나올까봐.

“실망이고 나발이고…그냥 이참에 좀 쉬어.”

“근데 이게 참, 마음 불편한 거 있잖아요.”

“뭐가 불편해.”

“흠…그래도 FA 1년차인데, 내가 벌써부터 팀에 도움이 안 되나 같은 생각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고 있네.

“왜 도움이 안 돼.”

“그, 알거든요. 오히려 팀이 나를 배려해주는구나, 중요하니까 아껴주는구나. 아주 잘 느껴져요.”

“근데.”

“그냥 개인적인 불만족이죠. 솔직히 예전 같았으면 제가 아무리 못 미더워도 그냥 1번에 유격수 쿡 박아놓고 썼을텐데…요즘은 아니잖아요?”

상시 미친놈으로 변모할 수 있는 그 얼굴은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명진이는 잔뜩 굳어진 제 얼굴과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기범이형도 그렇고, 또 헌희도 그렇고. 두 사람 실력이 올라온 것도 맞구요. 제가 떨어지는 부분은 분명 저 두 사람이 갖고 있거든요.”

“음….”

명진이, 기범이, 헌희.

팀의 주장이고 나발이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그 결과물이 뒷담화라는 방향으로 향할 수가 있기에 그냥 가만히 명진이의 말을 들어주었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건 알아요. 그리고 감독님도 다른 때면 모르겠다만, 오늘만큼은 저 두 사람이 저보다 승률이 높다고 판단했으니까 내보내셨겠죠.”

따악―

딱-!

배팅 케이지에서 배트의 온도를 달구는 헌희.

딱―

“투투!”

딱―

“볼 쓰리!”

유격수 자리에서 그라운드의 온도를 식히는 기범이.

“그냥 아쉬운 거예요.”

“뭐가.”

“…요즘의 난 영웅과 거리가 멀어진 건가, 그런 아쉬움이요.”

평소 같이 미친놈 같은 행세로 이야기했다면 나도 그에 걸맞게 잘 받아줬을텐데,

“영웅이라고 맨날 일하냐. 가끔 쉬는 날도 있어야지.”

눈에 가득 덧칠된 독기를 보니 나 또한 그 분위기에 맞춰줄 필요성을 느꼈다.

“역시, 형님도 영웅이 되실 자격이 있으셨군요.”

아, 제발.

모처럼 진중한 모습을 보이니 분위기 깨지 않도록 좋은 말을 해줬건만,

“야야, 그거 아냐.”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영웅이라고 맨날 일하는 건 아니거든. 가끔은 쉬는 날도 있어야 돼.”

“아…예.”

“멋있지 않니? 누가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어?”

“예, 멋진 말씀인 것 같습니다. 누가 한 말입니까?”

“저기, 저기 김한울 영웅님께서 하신 말씀이란다.”

명진이는 금방 본인의 컨디션을 되찾고 덕아웃 안을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2회 초 공격에서 한 점을 내고, 4회 초 공격에서도 한 점을 내고, 5회 말 수비 때 두 점을 허용하고,

“감독님.”

“어, 왜?”

“전 영웅입니다.”

“뭐?”

“하지만 가끔씩은 쉬는 영웅이 되겠습니다.”

“…….”

그 직후 맞이한 클리닝 타임 때마저 명진이는 본인을 선발 라인업에서 뺀 감독님에게 다가가 본인의 멘탈을 열심히 어필했다.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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