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미리보는
카메라는 훈련 장비를 마무리하고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을 비춘다.
“덥고 습한 날씨. 모두가 힘들지만, 선수들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그리고 무엇을 떠올리며 이렇게 땀을 흘릴까요. 당연히 한국시리즈가 아닐까, 한국시리즈 우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카메라는 각도를 살짝 내려 정장을 입은 채 마이크를 들고 있는 세 명의 남자로 시야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상수 타이거즈와 원하 챌린저스, 원하 챌린저스와 상수 타이거즈 간의 시즌 14차전을 펼칠 잠실구장에서 MBS 캐스터 권명훈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옆엔 김수찬 해설위원, 이영진 해설위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시즌 초반부터 두 팀이 신기할 정도로 성적을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는데요. 따라서 이번 시리즈를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라 평가하는 분들도 매우 많습니다.”
권명훈 캐스터는 먼저 이영진 해설위원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정말 신기할 정도죠. 원하 챌린저스가 도망가면 상수 타이거즈가 따라가고, 상수 타이거즈가 따라갔다 싶으면 원하 챌린저스가 도망가고. 시즌 내내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두 팀이 모두 압도적인 성적을 유지하며 리그 1위와 리그 2위를 나눠 먹는 듯한 모습인데요.”
“선의의 경쟁이라고 하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자극을 주다 보니까 두 팀이 이런 성적을 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 그런 와중 상수 타이거즈는 약간의 선발진 조정을 통해 1선발 성상진 선수를 내세웠는데 오늘 원하 챌린저스는 그대로 5선발인 고동균 선수를 선발로 내세웠어요. 어떤 의미일까요.”
이번엔 반대편에 있던 김수찬 해설위원에게 마이크가 돌아갔다.
“상수 타이거즈 입장에선 약간의 승부수가 아닐까 싶어요. 두 팀 간의 흐름이 비슷한 상황에서 아예 당사자를 잡으며 역전시켜버리겠다, 이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원하 챌린저스의 선발투수, 고동균 선수는 어떤 의미일까요.”
“상수가 오늘 1선발, 원하가 오늘 5선발이면 내일은 상수가 2선발, 원하가 1선발 아닙니까? 다음 날은 상수가 3선발, 원하가 2선발이구요.”
“맞습니다.”
“1선발이 2선발보다 무조건적으로 강하다는 건 아니지만, 이런 측면에서 우위를 조금이나마 가져가고 싶은 원하의 작전 아닌 작전도 있을 것 같구요.”
“예.”
“그리고 최근 원하 챌린저스 흐름이 워낙에 좋지 않습니까, 굳이 선발진을 조정해가면서까지 승부에 임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구요.”
김수찬 해설위원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이영진 해설위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봤는지,
“그렇다면 양 팀은 어떤 전략을 들고 올까요?”
권명훈 캐스터는 솜씨 좋게 이영진 해설위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상수 타이거즈는 아마 초반부터 점수를 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거구요, 원하 챌린저스는 반대로 초반만 한…3점. 많아도 4점 이내로만 버틴다면 어떻게든 후반에 뒤집을 수 있다 생각할 겁니다.”
“불펜 매치업에서 원하 챌린저스가 상대 우위에 있다 평가하시는군요.”
“상수 타이거즈도 강하긴 합니다만, 불펜진만을 비교했을 땐 아무래도 원하 챌린저스 쪽에 우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평가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올시즌의 원하 챌린저스 불펜은 정말 무적인 것 같습니다. 김한울 선수를 필두로 신경석, 최은구, 김지호, 이승진, 손석민 등등. 모두 한 명 한 명이 막강합니다.”
너무 한 팀에만 좋은 이야기가 편향되면 좋을 게 없기에, 또 너무 한 해설위원만 마이크를 잡으면 그림이 썩 좋지 않기에,
“그렇다면 상수 타이거즈는 원하 챌린저스보다 어떤 점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을까요.”
권명훈 캐스터는 이번엔 김수찬 해설위원에게 상수 타이거즈의 장점을 타진했다.
“일단 다른 점은 몰라도 타선 하나만큼은 아무래도 원하 챌린저스보다 약간 강하지 않나 싶네요.”
“타선이요.”
“예. 원하 타선이 약하다기보단 이 뭐랄까, 짜임새라고 하죠. 각 타순별로 본인이 어떤 임무를 맡았고, 왜 이 임무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도가 모두 뛰어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저희는 잠시 뒤, 상수 타이거즈의 1회 초 공격과 함께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잠실구장입니다.”
* * *
저어기, 해설진들도 슬슬 해설 부스로 들어가려는 걸 보니 곧 경기가 시작되려나보다.
과연 우리 선발투수님은 잘하고 계시려나.
펑-!
“어우, 좀만 더, 좀만 더!”
규학이는 살짝 옆으로 빠진 동균이의 공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더 힘을 낼 것을 주문했다.
“직구요!”
“헤이!”
펑-!
“좋지, 이거지!!”
아등바등거리며 세 게임차를 뒤집는데 필요한 시기가 약 한 달. 지금 상수 타이거즈랑 게임차가 두 게임. 아등바등까지 갈 필요도 없는 수치다.
이번 시리즈에서 아등바등 이상의 격차를 벌려둔다면 어떨까.
다섯 게임? 좋지, 근데 네 게임도 아등바등 이상이잖아.
원하 챌린저스가 이번 상수 시리즈에서 노리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5선발 동균이를 내세워서 이기면 좋고, 져도 후회는 없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같은 느낌.
“하나 더요!”
“에이이!”
퍼엉-!
동균이 본인도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
솔직히 기분 나쁠 수도 있거든. 다른 누구도 아니고 본인이 일종의 버림패로 작용한다는 게, 어느 누가 기분이 좋겠어.
“커브!”
“커브!”
빵!
“굿, 굿, 굿 볼이야아!”
하지만 동균이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개인이 아니라 팀을 위해서. 본인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오늘이 아닌 내일과 모레를 함께 도모하기로 했다.
혹시 알아? 동균이가 이길지?
“슬슬…올라가겠네.”
저기, 홈플레이트 주변에 서 있던 중계진이 중계부스로 향하는 모습을 보니 슬슬 경기가 시작되려는 것 같다.
원하- 챌린저스- 우리의- 승리를- 모두가- 바란다―
전광판 영상에 맞춰 오디오를 때리는 원하 챌린저스의 응원가,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떼창하는 원하 챌린저스의 팬들.
“슬슬 가자.”
“예!”
국민의례를 위해 불펜 바깥으로 향했다.
텅텅텅, 불펜 계단을 올라 불펜 앞에 서서 전광판 위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동균아.”
“예!”
마운드로 먼저 향하려는 동균이를 불러세웠다.
미약하게 굳은 얼굴.
안절부절하지 못 하는 시선.
까딱거리는 손가락.
“넌 5선발이고, 저기 성상진은 1선발이고. 그치?”
“…맞습니다.”
잔인한 현실이다. 팀 대 팀으로 붙자면 누가 이길지 정확히 예측이 어려운 상황에서 1선발과 5선발이라는 차이는 경기의 향방을 가장 강력하게 제어할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너 선발인 날에 헌희에, 병천이에, 기범이까지 스타팅이고.”
“맞습니다.”
하물며, 선발 수비진 중 세 명이 주전이 아닌 상태라면. 이를 이끌어야 하는 투수라면.
“그래서 뭐. 너 병천이랑 친하지? 고등학교 동기라며.”
“예.”
“병천이랑 싸울 거야?”
“아닙니다.”
“그럼 헌희랑 싸울 거야? 아니면 기범이랑 싸울 거야?
“아닙니다!”
“그것도 아니면. 저기 성상진이랑 싸울래?”
“아닙니다.”
“그럼 넌 누구랑 싸우는데.”
“…….”
동균이는 대답을 본인의 시선으로 대체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
명분이 담긴 시선.
꽉 쥐고 있는 주먹.
“갔다 와.”
“예!”
동균이를 마운드로 보내고 나도 덕아웃 앞에 줄 서 있는 팀원들 사이에 어찌어찌 낑겨 섰다.
전광판을 보다가,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을 보다가, 잠시 묵념을 하다가,
와아아악-!!
1번타자, 중견수 고동욱
정신을 차려보니 상수 타이거즈의 1번타자 고동욱이 타석에 들어선 상태였다.
덕아웃에선 별 해괴한 괴성들이 가득했다.
가자가자, 소리치는 규진이형.
묵묵하게 박수치며 응원하는 성훈이형.
우우올렁아야!! 하며 소리치는 명진이.
미친놈인가.
각양각색의 응원 속에 하나 통일된 점은 모두,
따악-!
“아…이거 병천이가….”
원하 챌린저스의 승리로 향한다는 점.
아웃!
“와아악!!”
“병천아아악!!”
2번타자, 2루수 강대현
비록 다음으로 등장한 타자는 수비진이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곳으로 타구를 보내버려도,
3번타자, 지명타자 이용호
그다음으로 등장한 타자에겐 삼진을,
4번타자, 1루수 박해진
그리고 그다음 타자에겐 다시 수비진들끼리의 합심으로 1회 초 이닝을 끝냈다.
멋들어지게 이닝을 끝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투수를 보면, 야수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이 친구들이랑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
이 친구들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란 생각?
이 친구들이라면 나를 이끌어줄 거란 생각?
“예에에에!!”
“야아아악!”
“병천이, 이어가자!!”
“예에!!”
전부 다.
1번타자, 박!! 병!! 천!!
당면한 문제에 나를 이끌어 해결해주고, 종국엔 이기는 그런 그림.
어떻게?
딱-!
“달려, 달려어!!”
“병천이 쓰리 보자, 쓰리!!”
촤악―
“세이이잎!”
이렇게.
인스턴트 1번타자로 등장해 시작부터 3루타를 때려낸 병천이는 상수 타이거즈의 덕아웃을 등지고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정확하게는,
2번타자, 강!! 성!! 현!!
본인을 홈으로 불러들여 줄 다음 타자를.
띡-!
“아웃!”
물론 믿었던, 가장 잘 해결해줄 거라 믿었던 타자가 1루수 플라이로 물러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3번타자, 박!! 헌!! 희!!
우리에겐 또 다른 팀원들이 있으며,
4번타자, 남!! 기!! 성!!
이들 또한 충분히 상황을 해결할 능력들이 있다.
5번타자, 윤!! 승!! 주!!
어떻게?
따악-!
“갔다, 승주 갔다아악!!”
“걸어와, 걸어와! 승주 뛰지 말고 걸어와!!”
“승주형 어제 소주 3병 처먹었대요!!”
이렇게.
1회부터 ‘롸’끈하게 네 점 주고 시작하는 경우야 이젠 어색하지만, 1회부터 화끈하게 네 점 뽑고 시작하는 경우가 이젠 어색하진 않다.
잘하거든. 우리 팀.
물론, 급격한 태세변환인 줄은 알지만,
따악―
“에고.”
무조건적으로 압도를 표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아무리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도 동균이도 사람이고, 원래의 깜냥이 있기에 안타를 맞고 볼넷을 허용하고 홈런을 맞는다.
하지만 이번 경기의 확실한 흐름 한 가지.
따악-!
“병천이 달려어!!”
“쓰리, 한 번 더 쓰리 봐아악!!”
이번 시즌 초반부터 이어온 상수와의 게임차처럼, 오늘 경기 또한 우리가 이기는 형태를 유지할 것.
* * *
광고가 끝난 후 카메라는 다시 잠실구장의 전경을 비췄다. 아직 해설진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가운데,
끄윽!
퍼엉-!
마운드에서 피칭 중인 김한울의 모습이 잡혔다.
“상수 타이거즈의 8회 초 공격입니다. 원하 챌린저스 마운드엔 언제나처럼 김한울이 올라와 있습니다.”
“공식이죠. 원하 챌린저스의 불펜 공식.”
권명훈 캐스터가 운을 띄우자 옆에 있던 이영진 해설위원이 한마디 거들고,
“몇 회엔 누구, 언제는 누구, 이런 틀이 어느 정도 짜여있긴 하지만 이게 무조건적으로 지켜지긴 힘들죠. 최은구 투수가 마무리를 할 때도 있고, 신경석 선수가 7회에 나올 때도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이 투수, 김한울 투수만큼은 무조건적으로 8회에 던집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서 조금 더 일찍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8회만큼은 김한울 선수의 시간이죠.”
남은 해설위원인 김수찬 해설위원은 아예 두 마디를 거든다.
“김한울 투수의 이번 시즌 성적입니다. 47경기 동안 54와 1/3이닝 나서서 현재까지 평균자책점 0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탈삼진은 76개, 볼넷은 7개. 피안타율이 아닌 시즌 피안타는 14개이며 시즌 WHIP는 0.386입니다.”
“잠깐만요, WHIP가 몇이라구요?”
“0.386입니다.”
“이영진 해설위원 전성기 때 최고 타율이 3할 8푼 3리 아니었어요?”
“그렇죠?”
“허허….”
엽기적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성적에 김수찬 해설위원은 허탈하게 웃었다.
“저도 나름 출신 팀 레전드잖아요.”
“원하 챌린저스 레전드가 아니라 KBO 레전드시죠.”
“아니, 근데….”
잠시, 김수찬 해설은 말을 잇지 못 하다가,
“…야, 이건 진짜. 뭐 이런 투수가 있지 싶기도 한데요?”
“저도 입장이 캐스터의 입장에 있지 않습니까? 해서 최대한 중립의 입장에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게 제 임무라 생각합니다만…제가 봐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 흐름은 잠시 중계진 세 명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그냥 잘한다, 진짜 잘한다. 언젠가 김한울 본인이 표현하기로 ‘이번 시즌 레전드 한 번 만들어보겠다’ 했던 말처럼 잘하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번 시즌은 정말 역대급 시즌이 될 것 같아요.”
김수찬 해설위원의 말은 중계화면을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