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69화 (169/190)

169화. 뭐요?

져도 돼.

단 세 글자짜리 단어가 가지는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

왜?

왜긴. 이기는 게 일인 프로한테 져도 된다니. 돈 받고 일하는 회사원한테 일 안 해도 된다는 얘기랑 똑같은 거잖아.

어…그럼 좋은 건가?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져도 돼. 내일 이길 확신이 있다면.

이걸 회사원 버전으로 바꿔 말한다면, 오늘 일 안 해도 되는데 내일은 이틀 치 해야 돼, 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한다면 듣는 회사원 입장에선 어떨까.

그렇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이 통용되는 하루가 바로 그저께였다.

상수 타이거즈는 1선발 성상진을 내세우고, 우리 원하 챌린저스는 5선발 동균이를 선발로 내세우고.

솔직히, 1선발이랑 2선발 싸움이면 엎치락뒤치락할 순 있어. 근데 1선발이랑 5선발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체급 차이라는 게 나잖아.

그런 의미에서 ‘져도 돼’는 우리 선수단도 그렇고 팬들도 그렇고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할 수 있는 세 글자 단어였다.

근데 이겼네?

“동균이가 잘했지.”

“아닙니다, 타선이 많이 도와줘서 덕분에 이겼죠. 어우, 전 실점도 많이 해가지고….”

져도 돼, 이 말과 비슷한 말은 또 있다.

못 쳐도 돼.

안타 맞아도 돼.

못 잡아도 돼.

대신 이런 말들 또한 ‘져도 돼’와 같은 전제조건이 존재한다.

못 쳐도 돼, 다음에 칠 거니까.

안타 맞아도 돼, 막으면 되니까.

못 잡아도 돼, 수비하기 편해졌으니까.

그저께 삼진당한 규학이, 그저께 안타 맞았던 은구 선배, 그저께 알 깠던 성문이.

모두 전제조건을 잘 지키며 어제 경기 또한 승리로 이끌어주었다.

3타수 2안타 1홈런에 볼넷도 하나 기록한 규학이.

공 12개로 삼진 세 개로 이닝을 마무리한 은구 선배.

타석에선 활약이 없었지만 호수비 네 개로 게임 자체를 지배한 성문이.

자, 져도 되는 경기에서 이겼겠다. 그리고 살짝 널널하게 느꼈던 경기에서도 이겼겠다.

보통 이렇게 일찍 목표를 달성하면 목적성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아니, 오히려 더 명확해진다고 봐야하나.

2승 1패를 노리고 돌입한 시리즈에서 두 경기만에 2승을 만들었다면, 세 번째 경기는 좀 느슨하게 해도 되지 않을까? 오늘 져도 목표는 달성하는데?

따악-!

응, 아니야.

“성문이 나이쓰으!”

“성훈이형 뛰어, 들어와악!!”

촤아악―

세잎!

“예에에에!!”

“성문이 나이쓰뱃!!”

“성훈이형 나이쓰런이요!!”

시리즈 세 번째 경기는 어제 경기와 그저께 경기의 양상을 반반 섞어놓은 모양과 비슷했다.

반반?

우리팀 점수는 그저께와 비슷한데, 상수 타이거즈의 점수는 어제와 비슷하다, 이게 반반이지 뭐야.

4회 말, 원하 챌린저스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6점째를 뽑아내며 시작부터 보는 사람 맘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반면,

퍼엉-!

“하아아앜-!”

5회 초 수비, 상수 타이거즈의 세 타자가 모두 공격 기회를 소진했음에도 그들이 만들어낸 점수는 단 한 점.

비록 원하 챌린저스가 점수를 더 뽑아내지 못 하고, 7회 등판한 승진이가 투런 홈런을 맞아냈다한들 그리 큰일은 되지 못 한다.

퍼엉-!

“하아아앜-!”

띠링-!

[창조 경제]

- 8구 이내 투구하여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스플리터 +3

제구 - 최상

구위 - 최상

체력 - 중

포심 - 100

커브 – 95

슬라 - 94

스플 - 93+3=96

체인 - 95

싱커 - 94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승부 - 이기고 싶을 때 포심이 +5 됩니다.

전염 - 본인의 감정이 전염됩니다.

다음은 내가 막으면 되니까.

“후우!”

상수 타이거즈의 5, 6, 7번 타순을 상대하며 나타난 퀘스트.

보상에 비해 퀘스트 내용 자체는 역대급으로 어려운 퀘스트가 아니었나 싶다.

내 체력 뺀다고 혈안이 된 타자들 배트 살살 구슬리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고생했다.”

“어이, 넌 꿀 빨았네?”

“인정.”

“나쁜 새끼.”

“요즘 나 같은 나쁜 남자가 인기가 많지.”

“정신이 나갔구나.”

덕아웃으로 돌아와 승주와 아름다운 대화를 나눈 뒤 덕아웃에 앉아 우리 팀의 8회 말 공격을 여유롭게 관람했다.

세 점짜리 리드가 네 점이 되고, 네 점짜리 리드가 여섯 점이 되고.

“…우리 타선이 이런데 경석 선배가 벌써 30세이브 찍었다는 게 신기하네.”

덕분에 잠시 직장을 잃어버린 경석 선배는 지호가 9회 초 수비를 깔끔하게 막아내는 걸 구경했다.

* * *

“아으…으흐으, 으아아악!!”

기지개를 켜며 지른 비명, 혹은 괴성이 덕아웃 안을 꽉꽉 채웠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다리가 달달달달달 떨릴 정도로 화끈하게 기지개를 켜고 나니 온몸이 개운하다.

“…심심하네.”

내가 기지개를 켤 때 동작이 좀 큰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미친놈처럼 비명까지 질러대진 않는다. 주변에서 미친놈처럼 볼까봐.

“미친놈인가.”

이거봐.

규진이형의 목소리가 들려 표정을 확인하니 어딘가 극혐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아이, 뭐가.”

“뭔 일 난 줄 알았더만. 기지개 켠 거였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만.”

“방금 들어왔지.”

“아….”

아직 덜 풀린 감이 드는 목을 이리저리 꺾어주면서 규진이형이 다음으로 꺼낼 말을 기다렸다.

“…왜?”

없는갑다.

“아냐.”

그럼 어디 놀러나 가야지.

“어디 가냐?”

“그냥 실내연습장.”

“넌 또 거길 왜 가.”

“심심하니까.”

끄덕.

“미친놈인가.”

“그것이 미친놈이니까.”

끄덕.

“…….”

“그것이 대답없음이니까.”

끄덕.

“…뇌절 그만하고 가, 빨랑.”

“그것이 뇌절이니….”

짜악―

“악!”

“가, 가라고!”

아씨.

괜히 규진이형한테 등짝을 한 대 얻어맞은 뒤 툴툴툴툴거리며 실내연습장으로 향했다.

아마 내가 알기로…2군에서 갓 올라온 신인급 야수들이 타격 연습 중인 걸로 아는데.

야수들인데 내가 가도 되나?

“…주장인데. 가야지.”

…싶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자기합리화에 고개를 끄덕이며 덕아웃을 나섰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어어, 안녕안녕, 헬로헬로.”

그러다 가는 길에 신인급 투수들을 만나기도 하고,

“아이고, 코치님 고생 많으십니다.”

“아이고, 한울이. 한울이도 고생 많다.”

“아이고, 코치님이 더 고생 많으시죠.”

“아이고, 한울이가 이리 얘기해주니 난 여한이 없네.”

“아이고, 아직 한창이신데 뭘 여한을 말씀하십니까.”

“아이고, 40 넘어가니까 감정적이 되네.”

“아이고, 그 말씀 감독님이 들으시면 혼납니다요.”

양택균 타격코치님과 만나 괜히 한 번 껴안기도 하고,

“어디 가냐?”

“아, 저 실내연습장 한 번 가보려고 합니다.”

“거긴 왜.”

“그…신인급 친구들 있지 않습니까?”

“있지.”

“얼굴이나 한 번 볼 겸, 뭐 조언이나 해줄 겸 해서 가보려고 합니다.”

“가지마.”

“예?”

“가서 뭔 부조리를 하려고.”

“…….”

“이제 20살 애들이다. 처신 잘해.”

“…예.”

괜히 감독님에게 한 번 혼나기도 했다.

…진짜 부조리 한 번 해볼까. 지금까지 실행한 적은 없다만 워낙 배운 게 많아서 진짜 잘할 자신 있는데.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 있는데.

“에이.”

괜히 고개를 훅훅 털어내고 가던 길을 유지했다.

저기서…오른쪽으로 꺾어서 지하로 내려가면 실내연습장인데…….

“아,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왔다.

멀끔한 정장.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 한 손에는 수첩. 한 손에는 펜. 목에는 명패.

“혹시 잠깐 말씀 좀 가능한가요?”

누가 봐도 기자다.

“예…짧게 정도면 괜찮죠.”

“아, 감사합니다.”

갑작스럽게 인터뷰 하나를 따내자 기쁜지, 기자는 환하게 웃으며 수첩을 촤라라락 넘기며 메모할 준비를 마쳤다.

“바로 어제 상수 타이거즈에게 승리하면서 시리즈 스윕을 가져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네.”

“시리즈 전까지 두 경기라는 다소, 이번 시즌 흐름을 생각하면 조금의 불안은 있었던 상태였을텐데 무려 다섯 경기까지 게임차를 벌렸단 말이죠.”

“네.”

“혹시 이번 시리즈 스윕과 관련해서 원하 챌린저스 측에서 준비했던 작전 같은 게 있으셨나요?”

“작전이요?”

작전이라…딱히 없는데.

“어….”

억지로 만들어내자면 굳이 선발진 조정 안 하고 시리즈 첫 경기에 동균이를 선발로 내보냈던 거?

근데 그걸 작전이라고 볼 수가 있나.

“…아뇨. 딱히 작전이랄 건 없었구요. 그냥 하던대로 하자, 하던대로 하면 이길 거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임했죠.”

“아…네.”

내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더니 제 수첩에 뭐라 휘적휘적 메모를 시작한다.

메모가 끝나길 기다리자,

“그럼 혹시 원하 챌린저스 이번 시즌 남은 경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

가능하면 크게 의미부여 안 하려고 한다.

물론 이기면 좋지. 당연히 좋지.

하지만 이미 무려 다섯 경기차로 리그 1위다. 아직 시즌 초반은 무슨, 이제 시즌 후반에 다다르며 순위는 점점 고착화되어간다.

굳이 이 경기는 이렇네, 저 경기는 이렇게 하며 깊게 생각하다 오히려 다칠 가능성만 크다.

“딱히 크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괜히 힘 들어갔다가 다치면 손해잖아요.”

내 말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더니 또 한 번 제 수첩에 뭐라 휘적휘적 메모를 시작한다.

인터뷰 내용이 꽤나 맘에 드는지 그는 이내 다시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갑작스러운 인터뷰 감사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 * *

경기가 끝난 후,

[민영 씨 - 한울 씨 한울 씨]

[민영 씨 - 이게 뭐예요?]

[민영 씨 -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 ‘상수 타이거즈는 작전도 필…]

[민영 씨 -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 ‘남은 시즌에 대해 그리 중요…]

핸드폰을 확인하니 민영 씨로부터 문자가 와있었다.

근데 그 내용들이…….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 ‘상수 타이거즈는 작전도 필요없는 팀.’]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 ‘남은 시즌에 대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뭐요?”

하나 같이 모두 거지 같다.

아니,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거지 같은 게 아니다. 그냥 거지다.

민영 씨가 보내줬던 첫 번째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김한울은 상수 타이거즈에 대해 ‘작전이랄 건 없었다. 하던대로 하면 이긴다.’ 라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사도 확인했다.

…남은 시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딱히 생각하지 않는다. 괜히 다치면 손해다.’ 라 대답했다.

“…….”

기사 댓글창은 당연히 난리난리 생난리가 나있었다.

니가 뭔데 우리 상수를 그따구로 생각하냐, 다치는 게 싫으면 야구선수를 관둬라, 말을 뭐 그렇게 하냐, 등등.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당연하다고 해야할지, 댓글 중엔 기레기의 농간에 놀아나지 말자 중재를 시도하는 댓글들도 보이긴 했다…만.

ㅋㅋㅋㅋㅋ 상수가 그렇게 만만해서 작년에 코시 역전 당했냐? ㅋㅋㅋㅋㅋ

ㄴ어그로 기사잖아

ㄴ어그로? 어디가 어그로지?

ㄴ김한울이 한 말 그대로 갖다 썼다는데?

ㄴ너넨 언제까지 도전함? ㅋㅋㅋㅋ

…그리 큰 힘을 내진 못했다.

“음….”

사람이 정말로 화가 나거나 정말로 어이가 없으면,

“…허.”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던데 진짜다.

“…진짜 정신이 나갔구나.”

사람 잘못 건드렸다, 이 기러기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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