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죽일 놈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선 한 가지 선행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프로야구 팬들 사이에서 ‘김한울’이라는 선수에 대해 어떤 이미지가 형성되어있을까.
키워드로 꼽아볼까? 야구 내적으로 보자면 2020시즌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불펜 에이스겠지.
평균자책점 0점. 리그 최고 수준의 제구. 리그 최고 수준의 구위. 리그 최고 수준의 변화구.
때문에 타팀 커뮤니티 등지에선 이런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원하 챌린저스랑 게임할 때 김한울이 올라오는 8회는 그냥 중계를 꺼버린다.
왜?
어차피 세 타자로 그냥 아웃, 아웃, 아웃, 이 꼴인데 그거 봐서 뭐해. 차라리 9회를 노리고 말지.
실력적인 부분에 있어선 그 누구도 깔래야 깔 수가 없는, 정말 대체가 불가능한 완전체 불펜 투수.
그게 2020시즌의 김한울이다.
그렇다면, 야구 외적으론 어떨까.
야구선수한테 야구 외적인 부분을 따지고 들어가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별 수 있나. 프로잖아. 주식은 팬들의 사랑이요, 부식이 팬들의 관심인데.
일단 지역 단위, 혹은 팀 단위에서만 유명한 선수가 아닌 리그, 혹은 국가 단위로 유명한 선수다보니 나로 인해 파생된 밈이나 썰 같은 것도 꽤 많은 편이다.
가장 유명한 건 19시즌, 주장 감투를 쓰면서 뱉어낸 ‘그’ 취임사. 이로 인해 자타가 공인하는 부조리 전도사가 되었지.
그리고 이건 이해를 못 하겠는데, 츤데레 이미지가 있단다. 해주세요! 하면 싫어! 하면서도 다 해준다나.
하지만 오늘 논지에서 이런 것들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중점적으로 알아봐야 할 것은 내가 가진 이미지 중 약소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밉상’ 부분.
밉상이라는 단어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비호감’으로 연결되는 밉상은 아니다.
그런 거지, 점마가 전교 1등이야. 해서 좀 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친해질 꺼리가 없네? 해서 괜히 꼬투리 잡으면서 말 붙이는 거 있잖아.
아 님, 전교 1등인데 이런 것도 모름?
그런 의미의 밉상이기에 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가 키운 부분도 있다.
아니, 모를 수도 있지! 어! 마! 니는 이런 게 밥 먹여주나! 어! 먹여줘?! 쏘리.
이런 흐름에 따라 내 ‘적’, 혹은 내 ‘예비 팬’들을 확실한 내 팬으로 끌고 들어오는 게 가능했다 생각한다.
한 마디로 호감형 인간이라는 거지. 내 입으로 나를 이렇게 평가한다는 게 참 웃기긴 한데…….
“한울 씨는 호감 가는 사람인 거 맞아요. 아니 그, 내가 여자친구라 하는 말은 아니구, 그…사람 대 사람으루요.”
“…음.”
주변에서 그렇게 평가를 해주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근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하겠어. 하물며 나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해주길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인정한다. 인정한다고.
근데…….
“근데 이건 대놓고 한울 씨 저격하는 거잖아요.”
“그쵸?”
이건 선 넘었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존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 번 싫어하게 된 사람은 그냥 뭘 하든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 맘이라는 건 나도 잘 아니까.
나한테 나쁜 짓 했던 사람이 와서 무릎꿇고 사과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희대의 나쁜 새끼가 10억 기부를 한다고 고깝게 볼 수 있을까?
정말 싫어하는 놈이 아무리 노력했다 한들 전교 1등 자릴 거머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박수쳐줄 수 있을까?
글쎄. 다른 성인(聖人)분들이라면 모르겠다만, 난 아니거든.
“진짜 너무한 거 같아요. 자기들 먹고 살겠다고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건가요, 진짜?”
민영 씨는 참아라,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그냥 지나갈 일이다, 기레기의 흔한 짓 중 하나 아니냐, 그런 소리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런 미친놈들이 있나요, 진짜!
오히려 나보다 더 거세게 화를 냈지.
아, 순간 욱해서 격한 말투 쓰고 자기 혼자 움찔거렸던 건 비밀이다.
“…어?”
가만히 기사의 내용을 주욱 훑어보다가 문득 기자의 이름과 신문사의 이름이 익숙한 걸 느꼈다.
해서 해당 기자의 이전 기사들을 주욱주욱 넘겨가며 찾아보다보니…….
“…….”
얼마 전, 미니 사인회 때 팬 같지도 않던 녀석과 생겼던 그 일.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한 이상한 소릴 했던 기자와 동일인물이다.
그때 기사 타이틀 뭐라고 썼더라, 김한울의 역겨운 가식?
“왜 그러세요?”
“…그 왜. 얼마 전에 저 왜 명예훼손 어쩌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아, 네. 그때 팬…? 이랑 일 있었잖아요?”
“그때 저에 대해 이상한 기사 썼던 놈인데요, 얘.”
“와….”
아주 악질이네.
“어이가 없네, 진짜.”
혹시나, 싶어 해당 기자의 다른 기사들도 찾아보니,
[동성 호넷츠 명승주, ‘박해진은 내 아래 타자.’]
[비스코 러너즈 안치현, ‘과거 타자들 수준이 너무 낮다.’]
[한성 위너스 정성훈, ‘김한울 공 너무 느려.’]
피해자가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동성의 명승주? 꽤나 친분이 있는데, 항상 겸손하다 못해 그냥 소심한 사람이다.
비스코의 치현이형? 최근 만났을 때 타자들 수준이 너무 높아졌다며 먹고 살기 힘들다 토로했던 사람이다.
한성의 정성훈? 150km대 직구를 보다 110km대 커브를 보면 당연히 느려 보인다.
즉,
“하는 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문장에서 단어 몇 개 빼는 걸로 이런 꼴이 되는 거죠.”
거짓말‘은’ 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많은 어그로를 끌어당기는 수법.
꽤나 많은 효과를 보고 있는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댓글 꼬라지를 보면 정상이 아니다.
건드릴 타자가 따로 있지 박해진을 건드려?
아무리 건드릴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선배들을 건드리냐?
공 느리다면서 상대 타율 1할도 안 되죠?
“진짜 왜 이럴까요.”
“왜긴요. 돈이 되니까죠.”
“이렇게까지 하면서 돈을 벌고 싶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기자라는 사람이….”
“기자라는 타이틀을 돈주고 샀든가…아니면 당장 대출 갚기가 버겁든가. 둘 중 하나겠죠.”
유명인이니까 이런 어그로 쯤은 가볍게 넘길 줄도 알아야지! 라는 생각은 너무 생각없는 강요가 아닐까.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할 텐데….”
어떡한다?
* * *
거짓말은 나쁜 행위다. 각자 생각에 따라 이 범주에 착한 거짓말도 나쁜 거냐, 뭐 그런 걸로 논쟁을 벌일 순 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일단 넘기고.
하지만 이것보다 더 나쁜 행동이 또 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 거.
예전 은서 씨와 관련했던 때, ‘김한울의 역겨운 가식?’ 같은 게 기사 타이틀로 난 적이 있다.
제목만 보면 정말 말 같지도 않지만 사실 기사 내용에 거짓말은 없었다.
이러이러하다더라, 이렇다는 말이 나왔다더라, 이럴지도 모른다더라.
하지만 국민의 알 권리라는 얄팍한 상술을 앞세우며 우린 착한 기자다, 너네가 알고 싶은 걸 알려줄게! 라고 소리치는 꼴은 당연히 잘못된 행위다.
때마침 잠실구장엔 비스코 러너즈가 원정을 와있다. 그리고 이 팀엔,
“형, 이거 봤어요?”
“아…얘. 나도 당한 적 있거든.”
“저도 봤어요. 타자들 수준 뭐 어쩌고 그거.”
“이 새끼, 진짜 제정신 아니라니까?”
나와 같은 피해자가 한 명 더 있지.
“아니 어떻게, 야. 생각을 해봐라. 과거보다 당연히 타격 이론도 발전했잖아. 그럼 당연히 과거보다 타격 스킬들도 좋아졌으니까 우리 입장에선 잡기 힘들어진 거잖아.”
항상 웃는 상에 서글서글한 얼굴을 갖고 있던 치현이형은 보기 드물게 진심으로 빡친 표정으로 열변을 토했다.
“그쵸. 투수들도 발전하는만큼 타자들도 발전하니까.”
“그니까! 타자들도 과거에 비해서 성장했다, 이 말이 어떻게 과거 선배들 수준을 논하는 말로 바뀌냐고!”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 크게 당했구만.
“그래서 나도 이번에 좀 가만 안 두려고 하거든.”
“…어떻게 하려고?”
치현이형의 목소리엔 체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갑은 기자니까. 선수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대국민 담화를 하는 게 아닌 이상 필연적으로 기자들의 펜을 통해 전달되니까.
“어쩌긴요.”
단순하다. 우리의 말이 기자의 펜을 통해 변질된다면, 그 펜을 뺏어버리면 된다.
“못 들어오게 하면 되지.”
“누굴?”
“그 기자. 그리고 그 신문사도.”
“무슨 명분으로?”
“당한 사람이 한 둘도 아닌데. 나도 당했고 형도 당했고. 성훈이도 당했고 승주형도 당했고. 말고도 여럿 많잖아요.”
“많지.”
“그리고 그 기자 말고. 진짜 기자 역할 잘 해주시는 기자 분들도 있는 건 형도 인정하잖아요.”
“그야…그치?”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자들 중, 정말로 존경스러운 기자 분들도 몇몇 있다.
“우리도 힘을 합쳐야지. 합쳐서, 얘네 못 들어오게 하면 되지.”
“언론탄압이네 뭐네, 그딴 소리 나오면 어쩌게?”
“그땐 다른 기자 분들 통해서 제대로 된 목소릴 내는 거지.”
사실 그렇게 어려울 일은 아니다. 그 기자들한테 ‘쪽’만 주면 되거든.
근데 그 청사진이 영 확립되지 않는지, 치현이형은 아직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럼 형. 내가 일단 사람들 좀 모아볼게요.”
“누굴 모으게?”
“누구긴. 피해자들이지. 쫌만 기다려봐요.”
* * *
나 나름대로의 친화력이라는 게 이럴 땐 아주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경기 전, 해당 언론사의 피해자와 내 연락처에 있는 선수들에 대한 교집합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모두 채팅방에 모았다.
그리고 피해자면서 내가 연락처가 없다면 알음알음으로 연락처를 구해 참여시켰다.
그렇게 모인 인원이 무려 13명. 정말 가지가지 해드셨구나,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턴 영진 씨가 좀 도와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저도 이거 봤거든요.”
“그럼 말이 빠르겠네.”
나름대로의 증거자료를 모아 프런트에서 한자리하는 영진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짜 머리 아파요, 이것들 때문에. 한 두 번이 아니니까.”
“전적이 화려하드만요.”
“음…그럼 난 뭘 해주면 돼요?”
“그런 거 가능할진 모르겠는데, 여기 신문사 출입금지 같은 거 돼요?”
“출입금지?”
“아싸리 못 들어오게 해버리면 자기네도 심각성은 알겠지.”
“근데 명분이 좀 애매할 거 같은데…말장난한 거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잡아떼면 우리도 할 말이 없거든.”
“명분은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어떻게?”
“어떻게 보면 기자보다 더 대단한 분이 계시니까요. 우리들 입장을 더 적나라하게 써줄 수 있는 분이에요”
“음…?”
영진 씨에게 들이밀었던 증거자료들은 영진 씨만 본 게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이쪽 분야에서 ‘기자’들보다 더 믿음직스럽고 항상 우리 편에 서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얘랑 얘네는 이제 공식적인 쓰레기가 될 참이니까.”
“뭐라고 했는데요?”
“딱히 별말은 아니고. 요즘 이런이런 기자들이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되지 않냐. 이거 한 마디로 끝났죠, 뭐.”
“그 분은…뭐라고 하세요?”
“으아니! 요즘 세상에 이런 기자 같지도 않은 기자가 있단 말인가! 내 선수 출신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
“아니…약간 극화된 건 맞는데.”
그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잖아.
“여튼 이러이러할 계획이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있냐. 그렇게 말하니까 알겠다던데요.”
“혹시 뭐…대가 이런 건 없죠?”
“없죠. 오히려 그쪽이 좋아하던데요.”
“왜? 기사 쓸 거리 줬다고?”
“응. 겁나 좋아하던데. 대충…말씀 나눈 바로는 내일쯤? 자기가 한 마디 올리겠다 하시더라구요.”
“내일?”
“그분도 글 쓸 시간은 필요하니까요.”
“흠….”
“영진 씨는 그거 보시고 적절히 대처만 해주시면 돼요.”
“그거야 어렵진 않죠.”
내일이 기대되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