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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72화 (172/190)

172화. 주례

“어…오케. 딱히 이상 없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서서 옷차림에 이상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본다.

상의, 오케이. 바지, 오케이. 신발도 오케이.

만족스럽게 차림새를 확인하곤 자신있게 문을 열어제꼈다.

“아오, 더워.”

시작부터 눈을 찔러오는 햇빛과 잠깐 눈싸움을 벌인 뒤 계단을 타고 빌라 1층으로 내려갔다.

각 호수마다 지정되어있는 주차 칸, 그 중 201호 표시가 된 차의 문을 열고 타면,

털썩―

“으!”

쪄죽을뻔한다.

“어우, 미친 거 아니야? 이제 9월인데 언제까지 더울려고 난리야 대체….”

생각없이 시트에 엉덩이를 붙였다가 혼자서 깜짝 놀라 바로 도망쳐나왔다.

차 안 온도를 좀 식혀주기 위해 운전석 문 손잡이를 잡고 몇 번 휘휘 저어주니,

“앗, 뜨거라….”

아직까지도 뜨거운 감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버틸만은 하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정말로 쪄 죽을 것 같으니 얼른 차 시동을 켜고 에어컨을 4단으로 월반시켜버렸다.

시동을 켜자마자 에어컨을 켜서 그런가, 바람의 온도가 시원찮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하다.

매립된 내비에 약속 장소를 찍어둔 뒤 유유히, 최대한 여유를 가지고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한…10분 일찍 도착하겠네.”

출발 시간은 딱 맞게 출발했는데 내비에 찍혀있는 도착 예정 시간은 1시 51분을 가리켰다.

오늘따라 길이 안 막히는가 보구나, 싶은 시원한 맘으로 대낮의 길거리를 천천히 이동했다.

집 앞에 있는 학교를 지나서, 적당하게 차가 밀리는 나들목을 지나서, 엘리트 시절 자주 방문하던 야구용품점을 지나면,

어이!

와아아악!!

따악-!

퍼엉-!

“…재밌게들 하네.”

오늘의 목적지가 나타난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 적당히 비어있는 주차 공간에 차를 들여놓고 내리자마자 뜨거운 햇빛과 다시 한 번 사투를 벌인다.

“와…진짜 내가, 엘리트를 어떻게 했지.”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줄줄 땀이 흘러내리는 날씨에 뛰고, 던지고, 뛰고, 또 뛰고를 반복해야 한다.

아무리 운동을 기반으로 잡은 선수라곤 하지만 사람이다. 그리 쉬이 볼만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선배, 나 왔수다.”

열심히 뛰어댕기는 애들을 슬쩍 눈에 담고선 가장 먼저 학교 내 불펜으로 향했다.

내 엘리트 시절, 3년 내내 붙잡고 공을 던지던 바로 그 마운…….

“오자마자 라떼 끓일 거면 그냥 가라.”

“에이, 좀.”

…드에 당도하자마자 한 소릴 듣고 얼굴을 구겼다.

“모처럼 기능재부 좀 하려고 왔더만.”

“기능재부는 뭐야, 재능기부겠지.”

아.

“감독님한테 인사나 드리고 와.”

“아아, 오케.”

괜히 엘리트 시절 선배였던 택이형한테 한 소리 듣고 불펜에서 쫓겨났다…라는 걸 어차피 감독님 뵈러 가려면 불펜을 지나쳐야 한다는 명분으로 넘겼다.

똑똑―

“예, 누구십니까.”

“감독님, 저 한울입니다.”

“어어, 들어와라.”

감독실 앞에 잠시 서서 정중하게 노크를 한 뒤, 감독님의 허락을 받자마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감독…님?”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머리를 쑥 들이밀고 작은 목소리로 감독님을 찾자,

“안 들어오고 뭐해.”

“아, 옙.”

인자하게 웃으시며 어서 들어오라 손짓하셨다. 낼름 들어가서 쭈뼛거리고 있으니,

“앉어. 뭘 그렇게 서 있어.”

“넵.”

인자하게 웃으시며 어서 앉으라 손짓하셨다. 낼름 소파에 앉아 또 뻘쭘하게 있자니,

“뭘 그렇게 불편해. 커피 하나 타줄까?”

“아, 그, 네.”

인자하게 웃으시며 내 앞에 믹스 커피 한 잔을 내려주셨다.

“모처럼 휴식일인데 괜찮냐?”

“그렇다고 시합 날 올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그건 그렇지. 말 잘하네.”

허허헛, 하고 웃으신 감독님은 어느새 빈 커피잔을 옆으로 치우셨다.

“이번에 결혼한다며.”

“아, 예.”

“준비는 잘 되고?”

“준비…네. 필요한 뭐, 식장이나 청첩장이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다행히 지인들 중에 그런 쪽에 일하는 분들이 계셔서 좀 부탁했습니다.”

“다행이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어….”

있지. 본 목적은 아니지만, 온 겸에 말씀드리고픈 게 하나 있…긴 한데.

“말해봐. 있는 거 같은 얼굴인데.”

“그….”

말해도 되나…….

“그럼…저 결혼할 때 혹시, 그…저기, 주례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주례?”

“예.”

“주례 봐주는 거야 어려울 거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울인데 내 그 정도는 해주지 당연히.”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독님.”

“근데 왜 나냐?”

“예?”

“내가 알기로…한울이 넌 꽤 잘 살아온 놈이란 말이야?”

“어….”

뜬금없는 사람 칭찬에 잠깐 눈을 깜빡거리며 말의 의도를 파악해보려 했다.

“성격 괜찮아. 애들도 잘 따라. 그리고 어른들한테도 잘했거든, 한울이 네가. 잘했어, 잘했어. 그래서 널 좋게 보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거지.”

“어…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주례 서달라고 하면 누구나가 좋다고 할텐데 말야. 아무것도 아닌 노인네 데려다가 쓰는 생각이 궁금한 거지.”

아무것도 아닌 노인네라뇨.

“그….”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감독님 말씀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나름. 의도가 모든 사람한테 사랑 받자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적만큼만 만들지 말자, 이거였지만….”

“에이, 그것도 어려운 거야. 요즘 세상에 적군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딨어.”

“그쵸. 저도 꽤 적 많아요.”

뭐…이용호도 있고. 알음알음으로 듣기로 타팀에도 나 겁나 싫어하는 선수 하나 있다 하고. 모 야구 전문가도 나 되게 싫어하고. 팬덤 쪽에서도 나 싫어하는 사람 많고.

“근데 살다보니까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구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욕을 먹어야 되는지.”

꽤나 잘나가는 야구선수인 지금도 그러한데 쩌리 시절엔 어느 정도였을지.

“막말로 내가 팀 먹여살리고 있는데, 진짜 막말로 나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팀이면서 왜 나한테 욕을 하는지.”

근데 웃기지.

꽤나 잘나가는 현재, 프로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던 프로 초창기 시절.

이 두 시절보다 더욱 얼큰하게 욕을 먹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엘리트 시절이었다.

전국구급. 탈유망주급. 초고교급. 프로 즉전감.

뭐 그런 소릴 들어가며 엘리트 집단을 이끌어가던 나한테 가장 많이 욕을 했던 집단은,

“…나 아니었으면 프로도 못 갔을 애들이, 나 아니었으면 1차전에서 사라졌을 애들이.”

다름 아닌 엘리트 시절 팀 동료였다.

왜?

감독님과 이 문제로 면담을 꽤 자주 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있었지.

“뭐라고 하셨더라…그, 너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 봐도 놔두라고. 놔두면 며칠 뒤에 알아서 강물에 떠내려갈 거고, 넌 그 시체를 구경하면 된다고.”

“잘 기억하네.”

“그땐 이해를 못 했다고 해야되나. 앞에선 그냥 네, 이해한 척만 했다고 해야하나.”

“그 나이 땐 잘 모르지. 그냥 내가 한 말도 지시나 명령인 줄 알고 그런 척 한 거지. 안 그러면 혼날까봐.”

“얼추 비슷한 거 같아요.”

이 과거의 일들이 여기, 이승재 감독님을 내 주례로 모시고 싶은 이유와 어떤 연관이 있느냐.

“근데 이젠 확실히 좀, 와닿는다고 해야되나요. 그때 하셨던 말씀들이.”

“이제는 이해가 되더냐?”

“예. 아마 감독님 말씀 아니었으면…지금 제가 이 자리까지, 아 제 입으로 이 자리라 표현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감독님 아니었으면 제가 이 자리에 있었을까요.”

지금의 내 멘탈의 출처가 이분이기 때문이다.

“감독님 말씀이 아니었으면 전 혼자 놀다 프로도 못 갔을 거고, 프로 못 갔으면 지금 이 자리도 없을 거고, 이 자리에 없으면 지금 결혼하려는 사람이랑 만나지도 못했겠죠.”

“곧 결혼한다더니, 쓸데없이 감상적이 되어선 말야.”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기분은 좋으신지 껄껄껄 웃으셨다.

“주례사에다가 그 내용도 써놔야겠다. 사실상 이번 결혼은 제가 성사시킨 겁니다, 여기 한울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고 말야.”

“에이, 굳이 그렇게까진….”

“날짜는? 확실히 잡았고?”

“아, 네. 12월 12일로 일단 양가 쪽에 얘기는 된 상황이구요.”

“12월 12일…잠깐만 있어봐라.”

감독님은 품에서 자기 핸드폰을 꺼내시더니,

“여기, 좀 써줘라.”

“…….”

나에게 내미셨다.

톡톡톡 건드려 12월 12일에 일정을 설정하고, 혹시나 싶어 일주일 전, 2주일 전에 알람이 미리 올 수 있도록 설정까지 해두었다.

“여기…일단 달력에 날짜 표시해두었구요, 2주일 전에 알람 한 번 울리고 일주일 전에도 한 번 더 울릴 거예요.”

“아아, 그래. 이런 게 필요한 거지.”

한창때는 나름 X세대 소리 듣던 분이셨는데…….

“일단 나가자고. 얘기하느라 시간 꽤나 잡아먹었네.”

“아, 네.”

다 먹은 종이컵을 정리하고 감독님의 뒤를 졸졸 따라나서자마자,

따악-!

“홈, 홈 바로 고!”

“노컷, 잡지마!”

그라운드에서 수비 연습 중인 선수들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타구를 잡은 좌익수가 온몸을 비틀어가며 홈으로 타구를 반사시키고, 정확한 송구를 잡은 포수는 홈 태그 모션을 취하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포수가 2루로 다시 강하게 송구하고.

“잘하네요.”

일련의 과정들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잘하지. 내가 가르치는 애들인데. 투수 쪽이나 보러가자고.”

타격이든, 수비든, ‘투수’ 입장에서 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꽤나 많다.

아무렴, 야구판에서 구른 게 몇 년이며 프로 씬에서 싸돌아댕긴 게 몇 년인데.

하지만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건 ‘타자’, 혹은 ‘야수’의 입장을 원하지 ‘투수’가 보는 타자나 야수의 모습은 원하지 않을 거다.

생각이 좀 더 앞서나간 선수라면 필요하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얘기해줘도 이해를 못 한다고 보는 게 맞겠지. 지금 배우는 걸 자기 걸로 만드는 데에만 아직 한참 멀었을테니까.

때문에 직접적으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조언을 해주는 게 아무래도 좋겠지.

퍼엉-!

“아, 좋아좋아아!”

퍼엉-!

“아이, 구웃, 구웃, 구웃!!”

아까 맨 처음 방문했던 불펜에 도착하니 투수들이 한창 피칭 중이다.

엘리트 선수 하나에 매달려서 투구폼을 전수하던 선배는 날 보더니 눈으로 인사를 했고 감독님에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른 엘리트 선수들은,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아!”

모자까지 벗어가며 극진한 인사를 보냈다.

“너 최근에 왔던 게 언제지?”

“그때가…재작년이었을 걸요? 그때 왜 기부하는 거 때문에.”

2년 전이면 당시 1학년이었을 선수가 지금은 3학년이 되었다는 이야기.

“와, 이렇게 얘기하니까 시간 진짜 빠르구나. 뭐 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 2년이 후딱 지나가버리네.”

“또 라떼 끓이냐?”

“뭔 라떼야 또.”

“애들 눈빛 안 보이냐? 벌써부터 질려한다, 야.”

“이게 질려하는 눈이야? 어? 봐봐라, 이, 이 얼마나 초롱초롱해. 어? 맞지?”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봐봐!”

새끼들, 잘못 가르쳤어.

옆에서 선배가 뭐라 중얼거리든 말든, 난 낄낄거리면서 오늘의 1일 코치 역할을 위해 마운드 뒷편에 자리했다.

“던져봐봐.”

“예!”

이내, 양안 고등학교 불펜 안엔 정말이지 듣기 편안한 소리들이 연속됐다.

퍼엉-!

“나이쓰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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